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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일기

『치우』의 이규정 선생님을 만나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1. 10.

 

『치우』의 이규정 선생님을 만나다

 

산지니 출판사 인턴을 하면서 평소에 가보지 못한 곳을 많이 가보는 것 같아요. 출판사가 있는 거제역, 법원 근처도 처음이었거든요. 이번에 가는 곳은 치우의 작가, 이규정 선생님의 자택이 있는 망미역입니다. 평생 1, 2호선만 탔는데 요즘 따라 3호선만 타는 것 같아요.       

                                                  

사진출처                                         사진출처

 

인터뷰 장소는 바로바로 선생님의 집. 고심해서 산 녹차 롤 케이크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드폰지도를 부여잡고 찾아간 선생님의 집은 덕문여고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다가 대학교수로 정년퇴임을 하신 선생님은 학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일까요?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해봅니다. 처음 뵙는 분과 처음 해보는 인터뷰라니. 너무 떨렸어요. 실수를 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혼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올라갔는데, 선생님의 인자한 미소를 보자 마자 그런 생각은 저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선생님의 아늑한 작업실에서 따스한 오전의 햇살을 받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손때 묻은 질문지와 함께 시작된 인터뷰.

 

 

Q.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후유증이 심하셨다고 들었는데,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A. 지금도 흉터가 있어. 교통사고가 나고 엉뚱하게도 몸 전체 면연력이 떨어지고 감기가 잘 걸린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후유증 때문에 지금도 고생하고 있지. 지금은 체력이 떨어지니까 소화가 안 돼서 좀 고생을 하고 있지.

(빨리 건강을 되찾으셨으면 좋겠네요.ㅠㅠ)

Q. 선생님께서 글을 쓰신지 올해로 38년이 되셨어요.

A. 내가 1977년에 나왔으니 38년이 되었지. 나이는 마흔한 살 때 늦깎이로 나왔는데, 등단한 다음에는 글을 많이 쓴 셈이야.

Q.처음 글을 쓰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A. 고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쓸 계획이 있었는데, 그때 집안이 어려워서 서울까지 갈 수도 없었어. 우리 집이 경남 마산이었는데 마산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에서 제일 싸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알아봤더니 경북 사범대학이더라고. 거기에 입학하면 등록금도 영 싸고, 또 졸업하면 바로 취직도 되고 해서 입학을 했지. 내가 영 어리고 무식해서 그때만 해도 문학을 하려면 국어국문학과가 아니면 문학이 안 되는 줄 알았어. 그런데 가서 보니까 우리 국어과에는 문학하는 교수가 아무도 없는 거야. 전부 어학 같은 분야만 하고. 그래서 혼자 공부했지. 마침 2학년 때 김춘수 교수님이 오셔서 그분 강의를 늘 가서 듣고는 했지. 오시자 마자 내가 항상 소설을 써서 보이고 지도를 받곤 했어. 3학년 2학기 때 김춘수 교수님이 황순원 선생님께 소개와 추천으로 편지와 함께 내 습작품을 보내셨는데 소식이 없더라고.(웃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그때의 문예지 추천이 사람을 먼저 보고 그 인성을 확인한 뒤에 작품을 보는 건데, 김춘수 교수님께서 그런 지도를 안 해주셨지. 작품 한 편 보내놓고 추천되어 나올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지. 그 뒤에도 자꾸 자꾸 보내고 해야 했는데 나도 바빠서 못했지.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고등학교 교사로 서면서 늘 진학반을 맡아가지고 고생을 하고 그러니 이렇게 늦어버렸어. 그래도 각 신문사 신춘문예에 늘 투고를 했지만 잘 안 되더라고. 운수가 없어서도 그렇지만 실력도 모자랐고. 어쨌든 잘 안 되서 애를 먹었지. 그러다가 부산에서 남부문학이라는 책이 나와서 그 남부문학이라는 책의 동인에 소설을 써내고 그 책을 전국에 다 보내고는 했어. 그때 작품 제목이 부처님의 멀미였는데, 시문학이라는 잡지사에서 이 부처님의 멀미를 시문학에 한 번 더 실어도 되겠냐고 연락이 와서 좋다고 했지. 해서 그것을 명색이 데뷔작, 등단작으로 삼아서 활동을 하고 있어. 그때가 1977년도였지.

Q. 요즘 젊은 사람들은 조총련’, ‘민단이나 보도연맹같은 단체와 당시의 상황, 분위기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책을 읽다가 따로 찾아보곤 했어요. 치우속 임상태가 허동식에게 돈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허동식은 국가의 감시와 조사를 받으며 고생을 했는데요, 이렇게 조총련에 관해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일화나 사건이 있나요?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A.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있었고,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었지. 큰 피해는 아니지만 나도 일종의 피해를 본 사람이고, 아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 내 뒤를 늘 형사가 따라다니는 형편이었으니까.

형사가 선생님의 뒤를 계속 따라다녔다고요?

형사가 따라다닌다는 것이 뭐냐면, 자주 와서 내 근황을 살피고 묻고 그러는 거야. 아주 기분이 안 좋았지.

 Q.치우가 선생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고 작품 속 임상태라는 친구도 실존인물이라고 들었어요.

A. 표제작 치우를 포함해서, 치우라고 하는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이 대개 내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거기에 픽션을 많이 가미 했지. 단편 치우의 임상태라는 사람은 실제 내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일본에 살고 있어. 책에서는 죽은 걸로 했는데 잘살고 있지.

선생님의 작품을 보시고 친구 분의 반응이 어떠셨나요?

읽고 나서 나한테 전화를 했는데, 느낌이 어땠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어. 최근에 해가 바뀌었으니까 한 번 전화를 해서 내가 니를 죽은 걸로 했는데 기분이 어땠냐고 물어봐야지.(웃음)

Q. 작품 속에 종교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A. 내가 천주교신자이다 보니까, 여기도 모시고 있고 (선생님은 책장 위에 올려져 있는 마리아상을 가리키셨다.). 부산 천주교 평신도 대표를 했고 지금도 천주교에 열심히 나가고 관심도 많아서 작품에 그런 것이 조금씩 조금씩 많이 묻어나오지.

Q. 신앙을 가지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A. 그게 80년이니까 내가 마흔네, 다섯 살 때쯤 되어서였지.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유언이 전부다 성당에 나가라하셨거든. 그래서 할머니 유언에 따라서 아버지께서 제일 먼저 입교 하셨고 가족이 다 입교하면서 나는 제일 늦게 입교했지.

  Q. 작은 촛불 하나에서 준호는 힘겨운 현실을 종교의 힘으로 버텨나갑니다. 선생님께서도 신앙심으로 힘든 순간을 이겨내신 적이 있나요?

A. 가정살이를 해보다 보면 여러 가지 남이 모르는 고민, 걱정거리가 항상 생길 수가 있어. 오늘도 화장실 수도꼭지가 고장 나서 고치고 있지(실제로 나를 맨 처음 맞아준 사람은 수도꼭지를 고치러 오신 아저씨였다).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일이 많은데 대부분 경우에 스스로 참기도 하지만, 참기 힘든 일은 하느님에 의지해서 극복해 나가고는 하지.

Q. 희망의 땅에서 필곤이 형을 찾아 떠난 나라는 캄보디아였습니다. 상황묘사와 설정이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 글을 읽고 있으니 캄보디아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요. 실제로 선생님께서 캄보디아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A. 캄보디아에 가서 한 일주일 봉사활동을 하고 왔어. 의사가 몇 분가서 의료봉사를 하는 팀에 끼어서 따라갔지. 나는 의사도 아니니까 의료봉사는 못하고 다만 어려운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어린이 에이즈 환자 병원에 가서 놀이기구도 고쳐주고 페인트칠도 하는 봉사를 했지. 한 일주일 가까이 했는데, 소설가는 항상 어딜 가든지 소설 쓸 욕심으로 여러 가지 취재를 하거든. 거기서 나도 다른 사람 모르게 취재도 많이 하고 자료도 많이 구해 와서 집에 와 분석을 하고 쓴 거야.

학살박물관도 직접 가보신 건가요?

, 가봤지. 안 가보면 안 되지. 또 바탐방이라는 먼 곳에도 가서 피가레도 주교님도 만나보고, 한국 원불교에서 파견된 원불교 교단에도 가보고 다 만나보고 했지. 그래서 앙코르와트라고 하는 관광지에는 전혀 못 가봤지.

 

 

-햇살을 받으시며 사진 한 컷.

 

Q. 치우라는 소설집에서는 유독 죽음을 다루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저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 친구의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에게 죽음은 언제나 무겁기만 한 주제인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A. 지금 내 나이가 일흔여덟 살인데, 나도 나이가 더 들기 전에는 죽음을 대단히 두려워했고 또 죽음을 어찌됐든 피해야 된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까 이제 죽음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죽음을 긍정하고, 죽음을 인정하고,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두려워할 거 없다고 생각을 고쳐먹었어. 그야말로 지금은 어떻게 죽나 하는 준비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지.(웃음)

 Q. 저는 아들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아버지의 이야기인 작은 촛불 하나와 사별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부부의 마음이 잘 드러난 풀꽂 화분처럼 가족의 끈끈한 정이 느껴지는 작품들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A. 풀꽃 화분은 거의 실제 이야기야. 실제로 아내가 아파서 입원을 했는데, 내가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고생을 했지. 사람 하나 놓치기 쉽다 하는 염려 때문에 고생을 했어.

ㅠㅠ지금은 괜찮으신 건가요?

이제 그 병은 완전히 치유가 됐는데, 지금은 무릎 때문에 고생하고 있지.

 Q. 선생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작품은 어떤 것인지, 또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흔히 작가와 작품을 두고 볼 때, 작품은 자식들, 작가는 부모라고 비유를 많이 하지. 모든 자녀들은 부모에게는 다 귀한 자녀이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처럼 다 아끼고 애착 가는 작품이니까, 나도 치우에 실린 일곱 편의 작품을 다 아끼지. 그래도 표제작으로 내세운 치우가 조금 더 애착이 간다고 할 수 있어. 왜냐면 치우라는 소설집 전체가 우수 문학 도서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그전에 그 작품이 다른 곳에서 우수 문학 작품으로 선정돼서 돈을 좀 받았거든. 그래서 잘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

저도 치우를 제일 많이 읽어본 것 같아요.(웃음)

Q.치우를 보기 전까지 저는 옛날의 허동식과 생각이 비슷했습니다. 만약 제게 허동식과 같은 상황이 온다면 임상태를 뜯어 말렸을 겁니다. 그런데 치우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죽음만 겨우 면할 수 있는 극도의 가난 앞에서 사상을 논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습니다. 더군다나 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닌 가족 전체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사상을 지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같았어요. 아마 저 같이 생각이 바뀐 독자가 많을 것 같아요.

A. 그때는 고등학교 교사로서 나이가 서른이 되기도 전이고 반공교육이 철저히 머리에 박혀가지고 살 때니까 친구를 말렸지. 나이가 들고 생각의 폭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그야말로 이데올로기의 문제, , 우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살아가는 문제지, 좌익이다 우익이다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지. 그 소설처럼 나이가 더 들면서, 그때 굶다가 굶다가 더는 못 굶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일본으로 도망치다시피 가는 친구를 내가 이해를 못하고 끝까지 말리려고 했던 것을, 실제로 말렸고, 많이 후회하고 뉘우쳤지. 사실은 지금도 걸핏하면 사람들이 정부에 대해서 비판만 하면 종북, 친북 이렇게 몰아붙이는데 사실 정부를 비판한다고 해서 우리가 전부다 북한을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종북, 친북 이런 식으로 말하면 기분이 나쁘지.

Q.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치우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작품인가요?

A. 우선 이번 소설집이 가장 품위 있게, 맵시 있게 책이 나왔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고, 그래서 출판사 쪽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또 다들 책 표지도 잘 되었다고 무게 있게 잘했다고 해서 출판사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 적도 있지. 이런 저런 의미에서 치우는 의미 있고 뜻 깊은 책이고 더군다나 이제 우수 문학 도서에 선정되어서 그런 혜택도 받으니까 마음이 좋지.

 

<인터뷰를 마치고>

준비했던 질문이 다 끝나자 선생님은 인삼차를 끓여 오시겠다며 나가셨어요. 혼자 선생님 작업실에 있으면서 구경을 많이 했습니다. 눈에 띄는 건 단연 수많은 책들이었습니다.


 마셔요.

감사합니다. (하트)

설탕 말고 꿀을 좀 넣었어.

정말 맛있어요!


손수 끓여주신 인삼차는 달달하니 정말 맛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바로 홀짝인 거 있죠.(눈물) 따뜻한 인삼차에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약간의 긴장감이 풀어지는 듯 했습니다.


책이 굉장히 많네요.

그래, 책이 많지. 여기가 내 작업실이거든. 책 한번 구경해요.


 

그러고 나가셔서 저는 구경하실 시간을 주시는 건가, 하고 혼자 작업실의 책을 구경했죠. 그런데 선생님이 나와 보라고 하시더군요. 쫄래쫄래 나가보니 웬걸, 집 전체 여기저기에 책이 있었습니다. 거실을 비롯해서 어떤 방에는 벽이 안 보일 정도로 사방이 책이었어요. 게다가 이중으로 꽂혀 있어 그 수를 짐작하기 더 어려웠지요.


 우와. 그럼 책이 다 몇 권정도 인가요?

만 권정도 되려나. 평생을 모아온 책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지금 이 책을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이야. 요즘 대학 도서관에서 이런 책을 별로 반가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깝고, 문학관을 지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야.

요즘에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요즘은 늘 바쁘지. 매일 글을 쓰고 있어. 어제 저녁에도 서울 문예지에서 소설을 써달라는 연락이 왔고, 지금 다른 문예지에도 글 써야 할게 있고, 늘 글을 쓰고 있지.

장편도 준비하시고 있다고 들었어요.

장편도 금년에는 책을 내야 하는데 어디서 내야 하느냐 고민이야. 워낙 요새 책이 안 팔리고 책을 내줄 출판사도 쉽지 않고 고민하고 있지.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수고했어요.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인터뷰 해주셨으니까 글 정말 잘 써볼게요!

그래, 잘 써 봐요.(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가려는데 너무 아쉬웠어요. 질문 좀 더 준비해갈걸. 말을 좀 더 잘 해볼걸.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해주신 선생님과 악수를 마지막으로 내려왔는데, 노트북을 놔두고 왔지 뭐예요. 다시 허겁지겁 올라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노트북을 가지고 나왔어요. 웃으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기억납니다. 한참 어리고 서투른 저에게 귀한 시간 내주시고, 손녀처럼, 제자처럼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 같아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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