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주간, 저는 아침마다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여러 번 지각을 할 뻔하기도 하고, 하루를 제대로 시작하지 못해 종일 찜찜한 기분이기도 했어요.
매일 아침 '오늘은 도대체 뭘 입지?'의 고민과 함께 저를 괴롭힌 이 질문은 바로 -
'오늘 아침엔 도대체 뭘 읽지?!'
출판편집자에게 읽을거리야 언제나 넘쳐납니다만 (교정지님 안녕;_;), '통근시간만큼은 읽고 싶은 것을 읽겠다!!!'는 마음으로 저는 아침마다 소설이나 시를 읽습니다. 어쩌다보니 주로 한국문학을 읽고 있고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얼마 전 신경숙 소설가의 표절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어서 한국문학 내 권력체계에 대한 비판이 일었습니다. 독자로서, 저는 놀라기도 했고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이런 사건을 맞아 발현되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최근에는 한국문학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출근길에 단편소설에 빠져 시간 지나는 줄 모르던 저에게, 한국문학계의 위기(?)가 매일 아침의 위기로 나타난 것이죠.
그러던 중, 한국의 작가 10인과의 대화를 담은 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불가능한 대화들 2』.
이 책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부터 저는 이 비관적이면서도 고집스러운 제목이 좋았습니다.
소통이 아니라 '불통'의 나라와 시대라고 하지만, 그 수많은 어긋남들 속에서도 실제로 우리는 어떻게든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하길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저는 '그럼 이거라도 읽자'는 심정으로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오늘날 한국문학이라는 너른 마당 속에서 뚜렷이 목소리를 내고 있는
열 명의 소설가와 시인을 젊은 비평가들이 만났습니다.
정유정, 김유진, 고은규, 김성중, 최진영,
이승우, 서효인, 김경인, 조혜은, 이안.
저에게 '그래도, 그러니까 한국문학'이란 생각을 들게 한 글귀 몇 구절을 옮겨 적습니다.
◆
정유정
저는 소설을 ‘이야기의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전환점과 결말의 상황(극화)을 통해 이야기를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주고 싶고, 그것을 통해 ‘나는 인간을, 삶을, 세계를 이렇게 바라본다’라고 제시하는 것이 미학적 요소를 구현하는 제 나름의 방식이고요. 저절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가 하나쯤 있다 해서 한국문단이 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별화된 소설이란 그런 의미입니다. (22~23쪽)
김유진
소설은, 서사가 간소화되어 있지만, 서사를 부정하진 않았습니다. 인물의 감정을 절제하는 것과 배제하는 것은 다른 의미인것 같고요.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하지는 않았어요. 모든 묘사와 풍경, 방향, 인물들의 행동은 저의 머리를 통해, 제가 드러내고자 하는 정서와 분위기, 감정의 결을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한 폭의 그림처럼 읽히고자 했으나, 그림으로 보이고자 하진 않았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것은 소설이니까요. (63쪽)
고은규
저를 자주 흔들어놓는 감정은 연민입니다. 연민이 저를 움직이게 하고 글쓰기를 재촉합니다. (…) 아프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고, 자신의 프레임에 넣어 엉터리로 사건을 재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사회는 나쁜 곳으로 굴러 떨어지겠지요. 문학이 낭떠러지를 지키며 미력하나마 울타리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87~88쪽)
김성중
보이지 않는 손’에 맞서는 ‘보이는 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 손은 당연하게도 우리의 팔에서 뻗어 나온 두 손, 나의 두 손이겠지요. 약하고 무디고 쉽게 다쳐 잘 아물지도 않지만 바로 이 손이야말로 유일한 손입니다. (…) 그 손을 치켜들게 만드는 다른 상상들, 꿈과 질문들이 새로운 서사를 이뤄나갈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102~103쪽)
최진영
이 세계와 내가 너무나 닮았다는 것. 이 세계의 무자비함과 폭력성이 바로 나의 속성라는 것. 저는 이제 겨우 그만큼 압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실, 아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도 힘에 부쳐요. 그러니 저는 주장하기보다 보여주고 싶고, 말하기보다 듣고 싶어요. 각자의 탈출구, 각자의 희망, 서로 같을 수 없고, 같아서도 안 되는 무수한 욕망과 그것을 담은 삶, 고독하게 메아리치는 저마다의 질문을. (138~139쪽)
이승우
나는 인간이 좀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우리가 가진 그물, 법과 이성으로 다 덮을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리의 이해의 그물 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근거이고,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의 방법입니다. (…) 세계는 없다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계만 있는 건 아니다, 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163쪽)
서효인
시는 학대받는 언어를 그러모으는 작업이 아닐까요. 이것은 서정시에 대한 옹호가 아닙니다. 습관적인 언술과, 비슷비슷한 이미지로 무한히 반복하는 여러 시들은 SNS의 안부인사와, 유튜브의 엽기 영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언어’가 아닌 ‘예술’에 있다고 봅니다. 생채기 난 언어를 모아 생채기를 부각시키는 일 혹은 망가진 언어를 모아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것. (183쪽)
김경인
저는 언어는 근본적으로 투명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나조차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데요. 그래서 시인은 잘 받아 적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듣는 사람」에서 저는 타인의 슬픔을 위무하는 것은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치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트레이싱 페이퍼처럼요. 그것이 설령 타인의 인생에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타인을 내 안에 깃들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12쪽)
조혜은
제 시에서는 소통하고 싶어 하는 화자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것들이 잘 전해지지 못했을 때, 자폐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 것 같습니다만 제 시의 화자들은 자폐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순간에도 누구보다 소통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청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화자와 청자는 다른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소통에 서투르고, 관계 맺기에 서투르기 때문에 어긋나고 있을 뿐, 서로를 향해 분명히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236쪽)
이안
시, 또는 세계가 호락호락, 단순하게 구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면(裏面)이나 전면(全面)을 포함하지 못하는 단편적 현상 제시는 세계 인식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보고요. 앞으로 시를 써나가면서 경계하려고 하는 대목입니다.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서 언어의 끈을 결코 느슨하게 풀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며, 어느 한쪽에 맥없이 투항해버리지도 않으리라 다짐하고는 합니다. (266~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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