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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아픔까지 어루만지는 게 작가의 몫"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7. 5. 23.

▲ 자택에서 책 <사할린>을 소개하고 있는 이규정 선생.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간 뒤 일본 패망 이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국적 없이 떠돌게 된 동포들의 기구한 운명을 현재로 끌어낸 소설. 당시로선 드물게 사할린 동포 문제를 다뤄 시선을 모았지만 발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사가 어려워지면서 절판돼버린 비운의 소설. 부산의 대표적인 원로 작가 흰샘 이규정(80) 선생이 1996년 3권짜리 소설로 발간한 <먼 땅 가까운 하늘>이다.
 
책이 절판된 지 21년 만에 다시 세상 빛(본보 1월 4일 자 24면 보도)을 봤다.

 

 

 

이규정 '먼 땅 가까운 하늘' 
절판 후 '사할린' 으로 재발간 

 

남편 위해 징용된 최숙경 
아내 숙경 찾는 이문근 중심

사할린 동포 비극적 운명 담아

 

 

3권으로 이뤄진 <사할린>(사진·산지니)이다

 

선생이 재발간을 결심한 것은 책 절판을 안타까워한 동료 문인들의 권유 덕분이다. 여기에 지역 출판사의 흔쾌한 수락에 책 발간은 급물살을 타는 듯했다. 하지만 곧 난관에 봉착했다. 발간됐던 책 외에 남아있는 원고 파일이 아무 데도 없었던 것. 책을 포기하려던 찰나 구원투수가 나섰다. 선생이 천주교 부산교구에서 주최한 독후감 대회 심사위원장을 맡았을 당시 뛰어난 글솜씨가 돋보이는 당선작을 낸 이인경 씨였다. "소설을 써보라"는 선생의 권유를 인연으로 교류해왔던 그가 작업을 자청했고, 한 달간 도맡은 결과 새 워드 파일을 완성해냈다. 흰샘 선생은 "출판사로부터 워드 파일이 없으면 출판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하려고 했다. 생전에 책이 영영 나오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새로 발간된 책에는 21년 전과 달리 소설 속 등장인물이 요약돼 있고, 사할린의 일본어 지명과 러시아어 지명을 함께 담은 지도를 게재해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있다.

 

열녀포창문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남편을 구하기 위해 대신 사할린으로 징용돼 떠난 최숙경과 보도연맹 사건 후 기적적으로 살아난 뒤 아내 숙경을 찾아 사할린으로 가는 이문근을 중심으로 가와카미 탄광 조선인 감독 박판도, 귀갓길 트럭에 실려 그길로 사할린으로 징용된 김형개, 아버지의 횡령죄를 무마하는 대가로 사할린 위안부로 끌려간 14세 박소분 등의 이야기가 빈틈없이 펼쳐진다. 흰샘 선생의 삶이 투영된 이철환에게도 눈길이 머문다. 실제로 선생 역시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된 친척 때문에 교수 임용이 늦춰지기도 했다. 등장인물 중 허투루 다뤄지는 이가 하나도 없을 만큼 소설의 인물과 사건, 배경은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여있다. 1991년 러시아(구 소련)와 국교도 없던 당시 우여곡절 끝에 직접 사할린으로 떠나 만든 취재 기록들은 소설을 더욱 현실감 있게 만든다. 1940년대 사할린 곳곳의 탄광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고 굶주리며 인간 이하의 삶을 버텨내야 했던 조선인들의 모습은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하다.

 

흰샘 선생은 지난해 10월 급성심근경색으로 입원한 이후 세 차례나 입퇴원을 반복했다. 한 달 전에도 보름간 입원을 했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다. 한 번에 30분 이상을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고 평소에도 숨이 가쁠 만큼 건강이 악화됐지만 창작열은 더욱 뜨거워졌다. 부산소설가협회에서 발행 중인 계간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재일동포를 다룬 새 장편 소설을 꾸준히 집필 중이다. 흰샘 선생은 "5년 만에 작품이 한 번 더 출판될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 정말 감개무량하다"며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많다. 그것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것, 역사의 파수꾼인 작가의 몫"이라고 말했다.

 

 

2017-05-22 | 부산일보 | 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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