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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니 책/인문

사라져가는 '부채의 운치'

by 산지니북 2009. 7. 14.

선물받은 부채

부산대 한문학과 선생님 두 분이 사무실에 오셨다. 올 가을 학기에 맞춰 나올 한자책 교정을 보기 위해서다. 계절학기 강의를 마치고, 더운 날씨에 약속 시간에 맞추느라 부랴부랴 오신 것이다. 시원한 냉수를 대접한 후 한 분이 들고 계신 부채가 눈에 띄어 "여름엔 부채만한 게 없죠. 한문학과 샘이라 다르시네요. 저도 올 여름 나려면 하나 장만해야겠어요" 하며 탐을 냈더니 선뜻 "그럼, 드릴까요?" 하시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하고 넙죽 받았다. 괜히 예의상 거절했다간 도로 뺏길까봐 푼수짓을 좀 했다. 대나무 살에 한지를 발라 만든 넓적한 부채가 정말 시원해 보였기 때문이다.

2007년 출간된 <부채의 운치>란 책이 있다. 중국인과 밀접한 3가지 소재(차, 요리, 부채)를 통해 중국인의 삶과 문화를 들여다보는 중국생활문화 시리즈 중 하나이다. 처음 <부채의 운치>가 나왔을 때 중앙 일간지에 기사가 많이 나 기뻐했는데, 신문기사와 책판매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곤 실망했다. 시리즈 중 <차의 향기>  <요리의 향연>은 제법 판매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나가는데, 우려했던 대로 <부채의 운치>는 판매 속도가 더뎠다. 가뭄에 콩나듯이 한 권씩 나간다.

중국인의 예술과 삶에 깃든 '부채의 운치' - 연합뉴스
중국 문화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부채 - 한겨레
부채가 일종의 문화적 언어로 쓰인 점을 재미있게 탐색 - 문화일보
풍성한 화보로 들여다보는 부채 문화사 - 경향신문
중국 정부로부터 번역료 일부를 지원받기도 한 책 - 부산일보
부채, 문화언어로 진화하다 - 서울신문


부채의 원래 기능은 더위를 물리치고, 햇빛을 가리며, 불을 지피는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이었지만 중국에서는 문학작품이나 연극, 예술과 어우러져 일종의 문화적 언어를 만들어냈다.

메이란팡의 부채 연기

경극(京劇)의 거장 메이란팡(梅蘭方)은 연극 공연에서 아름다운 부채기술을 선보였는데 경극 《귀비취주(貴妃醉酒)》에서 부채를 빌어 양귀비의 취한 모습과 복잡한 내면세계를 정교하게 형상화했다. 만일 곱고 화려한 부채가 없었다면 작품 중 인물이 형상화하고 연기하는 모습이 그 빛을 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학 작품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제갈량은 항상 깃털 부채를 들고 나타난다. 깃털 부채를 들고, 푸른 윤건(輪巾)을 두르고 소탈함과 자유를 표방하며 군사를 지휘하고 멋스러운 풍격을 나타낸다. 우선(羽扇), 윤건, 학창의, 4륜수례 4세트는 공명의 상징이 되어 공명이 죽은 다음에도 힘을 발휘한다.

《서유기(西遊記)》에서는 손오공이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가다가 800미터의 화염산(火焰山)에 가로막히자 철선공주한테서 세 번이나 파초선을 빌려 49번 부채질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게 해서 불씨를 완전히 끄고, 세찬 비를 내리게 해 무사히 화염산을 건너가는 것이다.

조설근이 ‘열 번 다시 읽어 보고 다섯 번 첨삭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 《홍루몽(紅樓夢)》에서는 청문이 부채를 찢으며 ‘쫙’, ‘쫙’ 소리를 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청문의 강렬한 성격을 형상화한 것이다.

소설 《금병매》에서 서문경의 가솔들은 금박사천부채 등 진귀한 부채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서문경의 극에 달한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 무협소설에서 부채는 무기가 되는데 부채 축에 용수철을 달아 누르기만 하면 자동으로 튀어 나가고, 부챗살 끝을 사람 얼굴에 조준해 독즙을 뿌려 눈과 귀를 멀게 할 수도 있는 필살기가 된다. 천칭윈(陳靑雲)의 《용음사후(龍吟獅吼)》에서 유협 구진천은 몸에 장삼을 걸치고 선비의 복장을 갖춰 입고는 한 손에 1척이 조금 넘는 기다란 접선을 들고, 쓸쓸히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신비한 자태가 유유자적해 보인다. 천천히 걸으며 손가는 대로 부채를 펼치면, 갑자기 부채면에서 얇은 금액(金液)이 쏟아져 나와 안개처럼 빛을 발한다.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부채 위에 나타난 살아있는 듯한 오조금룡(五爪金龍)은 희미하나마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접선은 유협 구진천과 함께 10여 년간 무림에서 종횡무진 활약을 벌인다.

부채를 이용해 운동하는 중국인들

홍콩, 마카오 지역에는 부채 동작만으로 뜻을 전달하는 ‘부채언어’가 아직 존재한다고 한다. 부채를 펴서 얼굴의 아래 부분을 가리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이고, 부채 손잡이로 입술을 두드리면 ‘키스해 주세요’, 부채를 열었다 닫았다 하면 ‘나는 당신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부채의운치』본문 중에서




중국뿐 아니라 우리의 고전문학이나 판소리에서도 부채는 없어서는 안될 소품 중 하나였다.


판소리 '춘향전' 중 방자가 춘향을 부르러 가는 대목에서 이도령이 그네 타는 춘향이 쪽을 가리키며 방자에게 "저 건너 화림중에 울긋불긋 오락가락 언뜻번뜻한 게 저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방자는 "도련님은 무얼 보시고 그러신지 소인눈에는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라고 두리번거린다. 그러자 이도령은 "내 부채발로 보아라. 저 건너 말이야"라며 속을 태운다. 물론 사랑가 "사랑사랑 내 사랑이야 어허둥둥 내사랑이지야"를 진양조로 부를 때도 부채가 빠지면 분위기는 감초 빠진 한약꼴이 되고 만다.
- 연합뉴스 <기획탐구> 부채의 재발견 ②예술로 보는 부채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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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과거에는 부채가 여름 나기 필수품이었는데 요즘은  선풍기와 에어컨에 자리를 내주고 흔적을 감춘 것 같다. 어쩌다 보이는 거라곤 기업체에서 홍보용으로 뿌리는 공짜 플라스틱 부채 정도다. 종이와 플라스틱 부채는 바람의 질이 다르다. 팔을 아무리 휘저어도 플라스틱은 별로 안시원하지만 종이 부채는 몇 번만 저어주면 시원한 바람이 확 온다.  요즘 OO마트의 에어컨 광고를 재밌게 보고 있는데, 차태현이 힘겹게 부채질하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보통 부채보다 3배나 큰 부채를 특수제작했다고 한다. 그정도 크기면 에어컨 바람보다 훨 시원할텐데 어쨌든 부채질에 지친 과속3대는 에어컨을 사러 OO마트로 향한다.

에어컨은 편리하고 시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서 나오는 열기는 거리와 지구를 뎁힌다. 거리가 더워지니 사람들은 에어컨을 더 세게 틀고 지구는 더 더워지고. 악순환의 연속이다. 전력 소모가 많은 여름만 되면 절전 캠페인 공익 광고가 약방에 감초처럼 여러 매체에 등장하는데, 올여름엔 선물받은 부채로 '에어컨 실내온도 1도낮추기' 실천해 봐야겠다.


부채의 운치 - 10점
저우위치 지음, 박승미 옮김/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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