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 시인의 열 번째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







파멸과 비명 속에도 어둠을 직면하며 

생성과 환희를 놓치지 않는 삶의 우둔성


산지니에서 지역의 경계 없이 자유롭게 시인을 만나기 위해 ‘산지니시인선’을 시작한다. 실험적이고 난해한 시보다 시의 서정성에 다시금 집중하고 일상과 거리두기보다 현실을 응시하는 힘으로 시의 변모를 꿈꾸며, 다양한 지역의 시인들을 만나볼 예정이다.


‘산지니시인선’의 우선 최영철 시인의 『금정산을 보냈다』로 문을 열었다. 시인은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된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 시집과 산문집, 청소년 소설 등을 통해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의 평등한 가치와 존엄을 그려왔다. 시인이 그리는 대상들은 대부분 배려와 소통으로 화해롭게 조우하지만 최근 작품은 상처받고 버려진 타자들의 갈등에 주목하고 있다. 이번 시집은 『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 2010년) 다음으로 4년 만에 내놓은 열 번째 시집으로 총 68편이 수록되어 있다. 강인한 생명력과 자연의 진정성을 발굴한 전작과 달리, 생성과 파멸, 환희와 비명이 교차하는 시편들로 다시 한 번 시적 변화를 감행한다. 시인은 물질과 속도에 중독된 우리에게 마주해야 할 세계의 진면목은 무엇인지 어둠을 직면하며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진다.


문이 없었을 때는 아무 일 없었다

문이 없었을 때는 열고 닫고 잠그고 부수고

몰래 넘어갈 일 없었다

모두 문이요 모두 안이요 모두 밖이었으니

들어오시오 나가시오 들어오지 마시오 나가지 마시오

문이 없었을 때는 이런 말도 없었다

(…)

모두 문이 아니고 모두 안이 아니고 모두

밖이 아니게 되었을 때 어디가 어딘지 몰라

다들 기웃거리게 되었을 때

참 이상하게도 문이 너무 많이 생기고 나서

긴 파국은 시작되었다 


_「문이 생기고 난 뒤」 부분





고지가 없는 사막에도,

밀려오는 파국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세계






시 「금정산을 보냈다」는 아들이 중동 갈 적에 가슴 주머니에 쥐어 보낸 무언가에 대해 쓴 것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금정산은 화려한 산은 아니지만 부산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마음먹으면 갈 수 있는 넉넉한 산이다. 시인은 아들이 나고 자란 부산의 모태와도 같은 금정산을 시로 선물한다. 금정산은 우리를 품은 자연 같기도 하고, 그 자연이 머금고 있는 어떤 적막 같기도 하고, 힘 넘치는 거친 청년과 삶을 다독거리며 이모저모를 모색하는 중년 같기도 하다. 시인은 고지가 없는 사막에서도, 밀려오는 파국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세계가 무엇인지 시로 당부한다.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먼 서역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뭘 쥐어 보낼까 궁리하다가 나는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녀석의 가슴 주머니에 무언가 뭉클한 것을 쥐어 보냈다 이건 아무데서나 꺼내 보지 말고 누구에게나 쉽게 내보이지도 말고 이런 걸 가슴에 품었다고 함부로 말하지도 말고 네가 다만 잘 간직하고 있다가 모국이 그립고 고향 생각이 나고 네 어미가 보고프면 그리고 혹여 이 아비 안부도 궁금하거든 이걸 가만히 꺼내놓고 거기에 절도 하고 입도 맞추고 자분자분 안부도 묻고 따스하고 고요해질 때까지 눈도 맞추라고 일렀다 서역의 바람이 드세거든 그 골짝 어딘가에 몸을 녹이고 서역의 햇볕이 뜨겁거든 그 그늘에 들어 흥얼흥얼 낮잠이라도 한숨 자두라고 일렀다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 도통 우러러볼 고지가 없거든 이걸 저만치 꺼내놓고 그윽하고 넉넉해질 때까지 바라보기도 하라고 일렀다 


_「금정산을 보냈다」 부분





시인을 길러준 고향 

부산이라는 말, 釜山이라는 말




언젠가 시인은 서울살이 2년이 10년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시인에게 지역은 중앙에서 소외된 곳이 아니라 자신을 길러준 고향이다. 부산 ‘서면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시가 있다.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밟힌다. 「서면 천우짱」에서는 “매정하게 돌아서 간 청춘이 불쑥 돌아올 것 같”다며 옛 거리를 서성이고, 「색다른 만세사건」에서는 “남단의 최고 번화가 부산서면로터리에 방뇨”한 옛일을 불러오고 있다. 시인은 자신을 길러준 부산에 대한 감수성을 시에 담았다.

없어진 지 오래인 서면 천우장 앞

그때 매정하게 돌아서 간 청춘이 불쑥 돌아올 것 같아

푸른 시절이 걸어나간 길 저편을 악착같이 바라보며

조금 두둑해진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데

천우장 자리 들어선 새 건물 3층 천우짱노래방이

하염없이 목을 빼고 있는 첫사랑을 비틀고 있다

천우짱 천우짱 숨가쁜 맥박소리로

쿵덕쿵덕 흘러간 세월을 비틀고 있다


_「서면 천우짱」부분




우둔과 실패를 가공하는 시, 

대담에서 펼쳐지는 가감 없는 대화


이번 시집에서는 대담을 실어 시인과 가감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대담자 최학림은 문학담당 기자생활 20년 동안 경남·부산의 작가 18명을 소개한 산문집 『문학을 탐하다』(산지니, 2013)를 내놓으며 지역문학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그는 책에서 최영철 시인과 함께 보낸 시간들과 변화하는 작품 세계에 대해 담담하지만 뜨겁게 담아냈다. 이번 대담은 시인과 문학기자 사이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 사이로,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다정하게 가감 없이 나눈 대화를 실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서로 ‘형’이라고 부르는 사이다. 최학림은 시인보다 어려 형이라 부르는 건 당연한데 최영철 시인도 덩달아 최학림에게 형이라고 부른다. 최영철 시인 특유의 재치로 같은 최 씨니까 형이라고 불러도 된단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남을 반복하며 농밀한 대담을 나누었고, 이렇게 나눈 대담은 시와 작가를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재미로 다가온다.



언제라도 죽음을, 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또 지옥을 직시할 때, 오늘이 마지막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때, 삶은 정말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찬란해지는 게 아닐까. 그리고 원하는 걸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때가 청춘이라면 원하지 않는 걸 덜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말년이다. 나는 지금 슬슬 완행열차로 갈아타고 있는 중이다. 느리고 불편하지만 삶의 진경을 놓치지 않는 완행열차가 역시 좋다. 


_「대담」 중에서



   

산지니시인선 001 『금정산을 보냈다』


 최영철 지음 | 문학 | 46양장 | 144쪽 | 11,000원

 2014년 8월 25일 출간 | ISBN :978-89-6545-248-5 03810


최영철 시인의 열 번째 시집. 강인한 생명력과 자연의 진정성을 발굴한 전작과 달리, 생성과 파멸, 환희와 비명이 교차하는 시편들로 다시 한 번 시적 변화를 감행한다. 시인은 물질과 속도에 중독된 우리에게 마주해야 할 세계의 진면목은 무엇인지 어둠을 직면하며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진다.





 



 


금정산을 보냈다 - 10점
최영철 지음/산지니









Posted by 동글동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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