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언론스크랩

이택광의 시 | 버스는 두 시반에 떠났다 | 오래, 그냥(한겨레)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10. 24.

조금 쌀쌀하지만, 햇살 좋은 주말이 지나가는 동안 한겨레 신문에 산지니가 출간한 책 『금정산을 보냈다』 의 시가 한 편 실렸습니다. 이택광의 시라는 추천 코너인데요.  무언가를 오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냥'하는 것이 좋다라고 표현하시며, <버스는 두 시 반에 떠났다>라는 시를 소개해주셨습니다.

흔히 무엇이든지 의미 두기를 좋아하는데, '그냥'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는 듯하면서도 그 어떤 것보다 무언가를 관통하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원문의 일부는 아래에 있습니다.

 

이택광의 시 | 버스는 두 시 반에 떠났다

오래, 그냥

 

버스는 두 시 반에 떠났다
-도요에서 / 최영철

하루 예닐곱 번 들어오는 버스에서 아저씨 혼자 내린다
어디 갔다 오는교 물으니 그냥 시내까지 갔다 왔단다
그냥 하는 게 좋다 고갯마루까지 가 보는 거
누가 오나 안 오나 살피는 거 말고 먹은 거 소화시키는 거 말고
강물이 좀 불었나 건너마을 소들은 잘 있나 궁금한 거 말고
그냥 나갔다 오는 거 주머니 손 찔러넣고 건들건들
한나절 더 걸리든 말든 그냥 나갔다 오는 거
아저씨는 그냥 나갔다 온 게 기분 좋은지
휘파람 불며 그냥 집으로 가고
오랜만에 손님을 종점까지 태우고 온 버스는
쪼그리고 앉아 맛있게 담배 피고 있다
그냥 한번 들어와 봤다는 듯
바퀴들은 기지개도 켜지 않고 빈차로 출발했다
어디서 왔는지 아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새끼를
일곱이나 낳은 발발이 암캐와
고향 같은 건 곧 까먹고 말 아이 둘을 대처로 떠나보낸 나는
멀어져가는 버스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먼지를 덮어쓴 채 한참

 

“때로 우둔이 길 없는 길을 오래가게 한다”고 시인은 시집 서문을 갈음했다. 식상한 듯하지만, 요즘 시절을 꿰뚫는 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우둔’이라기보다 ‘오래’일 것이다. 무엇이든 지속하기 어려워진 시대에 시인은 오래갈 것을 주문한다. 역설적으로 그 오래가는 것이야말로 ‘우둔’인 것이다. 오래가는 이라면 개의치 않을 문제이지만, 다른 이들에게 무엇인가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는 고집은 ‘우둔’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오래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인은 슬쩍 그 ‘비결’을 흘려준다. “그냥 하는 게 좋다”고 말이다. 목적 없이 그냥 하는 것, 다시 말해서 목적 없음이라는 목적. 이 오래된 격언이 시인의 생활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 홀로 버스를 타고 그냥 시내에 갔다 오는 한가한 마음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항상 우리는 목적에 시달리고, 무엇인가 달성해야 한다는 닦달에 들들 볶인다. (중략)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시인은 그럼에도 “그냥 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멀어져 가는 버스 뒤꽁무니를 먹먹하게 쳐다보고 있는 시인의 모습은 초탈하다기보다 어쩔 수 없는 곤혹을 감당하는 위인에 가깝다. 미련이 남은 삶이기에 시인은 남아 있는 나날을 지탱해야 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 도시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목적에 매여 아등바등 살아왔던 시인에게 ‘도요’에 사는 ‘아저씨’처럼 그냥 시내에 나갔다 오는 삶은 여전히 낯선 것일지도 모른다. (이하생략)

 

2016-10-22 | 경희대 교수 이택광 | 한겨레 
원문읽기

 

금정산을 보냈다 (반양장) - 10점
최영철 지음/산지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