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추바이 선집
― 『신아국유기』, 『적도심사』
▶ 신생 소비에트러시아에서 전망을 찾고자 했던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자 취추바이의 여정
취추바이(瞿秋白, 구추백)는 중국 공산당의 초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러시아어 번역가이자 중국의 좌익 작가, 공산주의 혁명가이다. 중국근현대사상총서 열 번째 책으로 출간하는 이 선집에는 취추바이의 저술 가운데 『신아국유기(新俄國遊記)』와 『적도심사(赤都心史)』를 번역하여 실었다.
1920년 가을,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취추바이는 새로운 기회의 땅, 붉은 물결의 소비에트러시아로 향한다. 『신아국유기』는 저자가 중국에서 출발해 1921년 1월, 모스크바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베이징에서 출발해 하얼빈을 거쳐 모스크바로 들어가는 일정이었는데, 여러 가지 국내외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하얼빈에서 50일 이상 발이 묶이고, 이후에도 기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2021년 1월 25일이 되어서야 취추바이 일행은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브스키역에 도착한다. 이어 모스크바에 머물던 1년여의 기록이 『적도심사(赤都心史)』이다.
▶ 몰락한 신사집안을 뒤로하고
새로운 사회에서 주체로 서기를 희망하다
1899년 장쑤성 창저우에서 태어난 취추바이의 집안은 대대로 서생과 관리를 배출했던 신사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 취스웨이는 전통 지식과 예능에 재주가 있었지만, 생활을 꾸려나가는 재주는 없었다. 몰락한 집안에서 생계를 걱정해야만 했던 취추바이는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던 러시아어 전수관에 들어가 러시아어를 배우게 되는데, 이때 5.4운동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어 전수관의 학생대표로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이후 리다자오가 발기한 마르크스연구회에 참여해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를 공부하게 된다.
5·4운동이 퇴조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전망을 찾던 취추바이는 1917년 혁명으로 탄생한 신생 소비에트러시아에 눈길을 돌리고, 『신보(晨報)』의 특파원으로 모스크바에 가게 되는데 이때의 여정이 이번 선집에 실린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햇수로 4년을 머물면서 이론을 공부하고, 현실을 관찰하여, 실천에 참여할 기회를 갖는다. 이후 1923년 소비에트러시아를 방문한 천두슈(陳獨秀)를 따라 귀국하여 공산당의 선전업무를 담당하면서 『신청년(新青年)』, 『선봉(前鋒)』, 『향도(嚮導)』 등의 간행물 발행에 참여한다.
사회구조의 변화 속에서 신사 계급의 몰락은 필연적이었고 이에 따라 취추바이 자신 또한 존재를 상실하고 세계에서 부재하게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취추바이는 왕조가 붕괴되고 새로이 나타난 ‘사회’에서 그 자신이 변화한다면, 자신은 옛 체제와 더불어 소멸할 존재였을지언정 새로운 사회에서는 존재를 유지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주체로서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분투하다가 공산주의 혁명가로 생을 마감한다.
▶ 하얼빈을 출발하여 극동공화국을 거쳐 붉은 빛의 나라로
취추바이는 『신보』의 특파원으로 동지 2명과 함께 러시아로 떠나게 되는데, 『신아국유기』에는 출국을 결정하고 신변을 정리하면서 갖게 된 회한과 미래의 전망에 대한 불안감 등 자신의 심리적 변화와 더불어 중국 국내에서부터 극동공화국을 거쳐 모스크바로 진입하기 직전까지, 이동하는 도중에 보게 된 중국과 러시아 양국의 사회상이나 인간의 심리가 기록되어 있다.
1920년 10월에 베이징을 떠난 취추바이는 하얼빈에서 발이 묶이면서 이 ‘유기(遊記)’를 쓰기 시작하는데, 단순하게 보면 ‘중국에서 러시아까지’의 노정을 기록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저자의 사상적 경험이자 마음의 여정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921년 11월이 되어서야 탈고한 『신아국유기』에는 길 위에서 겪었던 모든 견문과 경험, 구체적인 사실, 마음의 여정 속 동요와 기복, 사상과 이론 전부가 들어 있다.
『신아국유기』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그는 저 멀리서 가냘픈 한 줄기로 빛나던 붉은 빛의 세계로 들어가 깨닫고, 그렇게 해서 얻어낸 빛을 다시 중국으로 가지고 와 단잠에 빠져 있던 중국의 인민들을 돕고자 했다.
나는 어쨌든 모두를 위해 광명의 길을 열고 싶다. 나는 가고자 하며, 또 나는 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 일떠섰다. 나는 아향(소비에트러시아)으로 떠난다.(1920. 11. 4. 하얼빈)
▶ 혁명과 내전을 겪은 이론의 실험장 모스크바에서
다양한 계급과 계층의 사람을 만나다
『적도심사』는 저자가 모스크바에 머물던 1년간의 기록으로서 『신아국유기』에 이어서 쓴 글이다. 두 책 모두 무미건조한 기행문이 아니고 여행안내서도 아니며,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서 그 수준이 상당하다. 저자는 “한 나라의 사회생활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이나 법령 몇 조항에 근거할 수는 없으며, 그 사회의 영혼을 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게다가 문학작품의 형식을 취해서야, 작자의 개성이나마 훑어볼 수 있는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책을 문학성 있는 시와 산문으로 채웠다.
혁명에 성공한 소비에트러시아와 볼셰비키는 백군의 반란을 빌미로 전시공산주의(戰時共産主義)라는 급진적 사회주의경제정책을 시행했다. 취추바이가 소비에트러시아로 들어갔을 때는 이러한 전시공산주의에서 벗어나 막 신경제정책(NEP)을 시작하던 단계였다. 혁명과 내전을 겪은 소비에트러시아는 이론의 실험장이었다. 당과 국가 차원에서 다양한 국가적·사회적 실험을 전개하고 있었고, 소비에트러시아 사회의 다양한 계급과 계층의 인간들은 이에 반응하여 실천하고 생각하며 삶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개혁과 변화의 현장, 그리고 그곳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접하고 관찰한 취추바이는 이를 기록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록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던 일, 러시아 귀족문화의 잔재를 경험한 일, 러시아식 사회주의, 러시아의 종교, ‘노동자’에 대한 상념, 시베리아 유배 경험자와의 만남 등 취추바이의 글쓰기는 모스크바에서 그가 보고 들었던 모든 분야를 가로지른다. 그러면서도 중국인으로서의 ‘나’의 존재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 톨스토이 생가, 야스나야 폴리아나 방문
취추바이는 모스크바에서 톨스토이의 손녀와 교류하면서 톨스토이 생가를 방문하는 여행단에 합류하게 되는데, 『적도심사』에서는 이때의 여행기를 제법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30여 명의 여행단은 기차를 타고 툴라로 가서 야스나야 폴리아나를 방문한다. 여행에 동행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혁명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생가에서는 또 톨스토이의 친척들을 여럿 만나 톨스토이의 생전 모습을 들어본다. 톨스토이파들이 꾸리고 있는 코뮌에도 들른다. 혁명 후에도 톨스토이의 유적이 보존되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야스나야 폴리아나에 혁명의 파도가 거세게 밀려왔을 때, 소장파 농민들은 들고 일어나 톨스토이의 재산을 나눠 가지려 했지만, 노인들은 톨스토이의 됨됨이를 기억하고는 차마 그렇게 하지를 못했었다. 나중에 중앙정부가 인력을 파견하여 이 역사의 유적을 지킨 것이다.
러시아에서 병을 얻어 힘든 생활을 하고 있던 취추바이에게 야스나야 폴리아나 여행은 답답했던 마음을 확 풀어주는 일이었다. 그 시골에는 세계적인 위대한 대문호의 흔적과 향기가 아직 남아 있었고, 구시대의 러시아, 즉 귀족적 풍모가 아직도 풍광에 남아 있었고, 사람들의 꿈에 서려 있었다. 취추바이는 평민 농민과 지식계급의 감정에는 사회문제가 여전히 선명하고 깊게 뿌리 박혀 있었지만 지식계급 문제와 농민 문제는 노도와 같은 10월혁명에 힘입어 그 뿌리가 흔들렸고, 이제 점차 해결되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서 그날의 감동을 기술한다.
▶ 직접적인 경험과 사고에 바탕을 둔 취추바이의 고민을
지금 다시 검토하는 일의 의미
취추바이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당시 소비에트러시아는 중국과 같은 농업국가 상태에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 있었다. 취추바이는 여기서 소비에트의 ‘사회’를 보려 했다. 그가 행했던 사회의 관찰은 곧 사회 성원들의 다양한 삶과 그들의 심리를 보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심리를 기록하는 것에 자기 글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소비에트 사회를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노동자, 농민을 포함한 피지배층—의 심리 기록을 통해 어떻게 사회적 주체가 형성되는지를 살핀 것이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취추바이는 초기 중국공산당의 실천을 조직하고 중국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중국 혁명의 진행 과정에서 ‘좌익모험주의’로 비판받고 실권을 빼앗겼으며, 정치적으로 실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경험과 사고에 바탕을 둔 취추바이의 고민을 지금 다시 검토하는 일은 오늘날 중국의 사회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방향을 모색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소비에트러시아가 막 건설되고 나서의 사회상과 이념적으로 교조화되기 전 중국 사회주의 운동의 실상과 그에 대한 대응을 알아보고, 그 가운데 간과되고 있는 지점, 놓치고 있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문장
북풍이 살을 에고 온갖 더러움과 추악함이 얽혀있는, 음침하고 어두운 곳, 나는 그곳에서 태어난 이래 빛 한 줄기를 보지 못했다―지금까지 햇빛이란 것이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인지 알지도 못한다.
책속으로 / 밑줄긋기
📌 P.79 문화는 천부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 P.153 이 두 책은 모두 저자의 문학 작품으로 그 수준이 유치하기는 하지만 결코 무미건조한 기행문도 아니며, 여행안내서도 아니다! 한 나라의 사회생활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이나 법령 몇 조항에 근거할 수는 없으며, 그 사회의 영혼을 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게다가 문학작품의 형식을 취해서야, 작자의 개성이나마 훑어볼 수 있는 법이다.
📌 P.158 무거운 어둠이 평화롭고 고요히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높이서 타들던, 은촛대의 양초는 이제는 짧아져 흐릿한 빛을 낼 뿐이고, 부끄럼 많은 항아姮娥는 이미 저녁 화장을 지운 뒤였다. 주흥도 다하고 피곤에 전 무희는 허리에 힘이 빠져 흐느적대고 있었다.
📌 P.180 톨스토이 전시관은 우리 아파트에서 멀지 않았다. 전시관은 청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소피아는 갖가지 그림과 사진을 설명해주었다. 톨스토이가 직접 그린 작은 그림에는 조랑말 한 마리와 성인 한 명이 있었다. 소피아는 말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주었던 장난감이라고 말했다.
📌 P.217 레닌은 대회에 출석하여 서너 번 발언을 하였다. 그는 독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발언이 침착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었지만, 절대 대학교수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진지하고 과감한 정치가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게 보였다. 한 번은 복도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 몇 마디를 나눌 수 있었다.
📌 P.278 이처럼, 나의 사명은 분명하다. “나는 장차 무엇이 되려는가?” 나는 ‘내’가 인류 신문화의 배아가 되길 바란다. 신문화의 기초는 본래 역사적으로는 대치해왔으나 지금 시대의 초입에 이르러 서로를 보조하는 두 문화, 즉 동방과 서방을 연결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저자
취추바이(瞿秋白, 1899–1935)
현대 중국의 정치가, 혁명가, 언론인, 문학가, 학자이다. 러시아어 전수관의 학생대표로 5.4운동에 참여하면서, 혁명가이자 정치가로서의 길로 들어섰고, 소비에트러시아 여행 이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혁명가로 살아갔다. 중국공산당 당 장정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중앙위원회 총서기로서 무장봉기를 지도하는 등 혁명운동의 최고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언론인으로서 공산당의 선전업무를 담당하고 『신청년新青年』, 『선봉前鋒』, 『향도嚮導』 등의 간행물 발행에 참여했다. 문인으로서 본서와 같은 문학성 짙은 글을 다수 발표하는 한편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에 참여하면서, 마르크스주의문예이론의 보급과 좌익문학 건설에 공헌했다. 학자이자 교육자로서 상하이대학上海大學에서 사회학과 교수로 교편을 잡았으며, 중국어의 라틴화 방안 등 중국언어문자의 개혁과 대중화를 연구하고 실천하려고 했다.
역자
이현복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청말 新政時期 문학담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강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중국현대문학과 문화를 가르치고 있으며, 중국 사회주의운동과 좌익문학, 華人文學 등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논문으로 「1920년대 중국 공산주의의 인간화와 혁명-瞿秋白의 이념의 현실화와 변용」, 「陳映眞 초기 소설에서 좌절과 절망의 의미-서사구조분석을 중심으로」 등이 있으며 역서로 『혁명과 역사-중국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원 1919-1937』, 『무중풍경』(공역), 『타이완신문학사』(공역), 저서로 『길 없는 길에서 꾸는 꿈 중국 신문학 100년의 작가를 말하다』(공저)가 있다.
목차
신아국유기(아향기정)
서언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발跋
적도심사
프롤로그
서
1 여명
2 무정부주의의 조국
3 전쟁과 노래
4 가을빛
5 코뮌公社
6 혁명의 반동
7 사회생활
8 「번민……」
9 하얀 달
10 러시아식 사회주의
11 종교적인 러시아
12 노동자의 부활
13 ‘노동자’
14 「사자死者의 집」의 환향인
15 Angel
16 귀족의 보금자리
17 모스크바의 붉은 물결
18 레닌과 트로츠키
19 남국 『혼이나마 돌아오시오, 강남은 애달프오.魂兮歸來哀江南』 유신庾信
20 관료문제
21 신新 자산계급
22 기아飢餓
23 영혼의 감상
24 민족성
25 “동방월”(중추절에 짓다)
26 돌아가세
27 지식노동
28 야스나야 폴리아나 여행기
29 “뭐!”
30 붉은 10월
31 중국인
32 집에서 온 편지
33 ‘나’
34 생존
35 중국의 ‘잉여 인간’
36 ‘자연’
37 이별
38 일순간
39 적막
40 새벽놀
41 표트르Pyotr의 성
42 러시아의 눈
43 미인의 소리
44 아미타불
45 신촌新村
46 바다
47 야우자Yauza강
48 새로운 현실
49 생활
미주
해제
취추바이 선집 ― 『신아국유기』, 『적도심사』
취추바이 지음|이현복 옮김|336쪽|148*212
978-89-6545-727-5 94820|28,000원
취추바이(瞿秋白, 구추백)는 중국 공산당의 초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러시아어 번역가이자 중국의 좌익 작가, 공산주의 혁명가이다. 중국근현대사상총서 열 번째 책으로 출간하는 이 선집에는 취추바이의 저술 가운데 『신아국유기(新俄國遊記)』와 『적도심사(赤都心史)』를 번역하여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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