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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니 책/비평지 문학사상

바다에서 세상을 본다면? - 문예비평지 『문학/사상』 12호-바다정동 출간 기념 구모룡 문학평론가와의 대화 :: 북토크 후기글

by ujustice 2025. 11. 27.

지난 11월 19일, 산지니X공간에서 『문학/사상』 12호 출간 기념 북토크가 열렸습니다. 바다에서 세상을 본다! 그동안 육지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했던 우리에게 신선한 울림을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주제 기획부터 원고 청탁까지, 로컬 문예비평지 『문학/사상』의 출간 전반을 주관하는 구모룡 문학평론가가 진행했기에 더욱 구체적이고 알찬 북토크였습니다. 그 현장 지금 바로 소개합니다!

 


 

이소영 편집자(『문학/사상』 편집장)

네, 안녕하세요. 저는 『문학/사상』 편집장 이소영입니다. 12호 출간 기념회에 오신 여러분, 그리고 유튜브에서 보고 계신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문학/사상』 12호에서는 ‘바다정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북토크에서는 『문학/사상』의 든든한 편집인이시자 문학평론가이신 구모룡 선생님과 함께 바다정동 그리고 바다를 감각하고 사유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로컬 문예 비평지 『문학/사상』은 지역 문학을 조명하고 있고, 주류 담론이 들여다보지 않는 문제들을 계속해서 논해오고 있습니다. 우리 『문학/사상』에도 많은 관심과 구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문학/사상』 정기구독 모집 안내

『문학/사상』은 주류 담론이 들여다보지 않는 문제를 관점으로 가져와 문학과 그의 토대가 되는 사상의 지형을 뒤흔든다는 기획 아래 창간된 비평지입니다. 주류 담론의 지형을 뒤흔드는 텍스

docs.google.com

 

구모룡 문학평론가(『문학/사상』 편집인)

우리 편집장님이 소개를 잘하셨는데 『문학/사상』 12호가 나왔습니다. 반연간지니까 6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러분들 그동안 우리는 중심의 관점, 국가의 관점 이런 것보다 주변의 관점 그리고 국가를 넘어서 지역과 해역, 바다 같은 것을 되짚어보거나 거슬러 보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제주나 오키나와 같은 해역을 통해서 바라보고, 부산을 시야에 두고 세계를 해석하는 논의들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러한 우리들의 생각이 문학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문학 창작하고도 연관시켜서 살펴봤고요. 또 그러한 일들이 좀 더 확장되고 심화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왔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과정 중에 있고 그러한 과정을 좀 확장하는 의미에서 이번 호에 바다정동이라는 개념을 들고나왔습니다.

두 편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한 편은 자연을 미디어로 생각하는 이론을 가지고 바다와 자연이 우리의 감각과 사유를 연결 짓는 미디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쓴 것입니다. 제가 쓴 글은 <바다를 감각하고 사유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글인데 여러 가지 바다와 관련된 생각들을 소개하는 입문적인 글입니다.

그동안에 해양 문학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들을 해왔습니다. 우리가 육역 중심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바다를 타자화하거나 대상화해 온 경향들이 컸습니다. 그럴 때 대양, 즉 Ocean에서 활동하는 어선, 상선에서 일하는 분들의 문학적인 관점이나 창작 활동을 통해서 육역의 시각을 전복하는 이야기들을 해왔는데요. 그것이 어떻게 보면 한편으로는 이 바다라는 개념을 협소화시킨 면도 있다. 너무 대양 위주의 관점을 강요한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있습니다.

육지에서 바라보는 바다를 해양으로 인식하는 잘못된 인식을 교정하기 위해서
대양적 시각을 우리가 거듭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런 전체를 아우르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할 단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이번 12호에 바다정동이라는 주제를 설정하게 된 것입니다.

 

로맹 롤랑(좌) / 프로이트(우)

로맹 롤랑, 19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죠. 로맹 롤랑은 인도 철학에 해박하고 인도 사상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종교적인 감성이 뛰어난 작가입니다. 이분이 프로이트하고 친구지간인데, 프로이트의 글을 읽고 프로이트에게 대양의 느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제안을 한 것이 유명한 ‘대양의 느낌’이라는 겁니다.
이 대양의 느낌이라는 것은 망망대해 같은 느낌을 말합니다. 로맹 롤랑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했는데 프로이트는 그걸 별로 수용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는 오히려 유년기의, 의식이 미분화된 상태에서의 감각 정도로 생각하고 로맹 롤랑의 ‘대양의 느낌’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대양의 느낌’이라는 걸 가지고, 우리가 육지를 구획하듯이 바다도 연안과 해협 또는 대양 이런 식으로 구역 지어서 논의를 해봤습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바다의 철학』을 쓴 저자(군터 숄츠)는 이 로맹 롤랑의 대양의 느낌이라는 사건을 굉장히 지엽적인 일로 치부합니다. 그래서 별 그렇게 중요한 개념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결국 하게 되었고, 대양의 느낌보다는 바다정동이라는 더 포괄적인 주제를 갖게 되었습니다.

 

대양의 느낌을 떠올리는 가운데, 에리카 발솜이라는 영화 비평가가 쓴 『대양의 느낌: 영화와 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에리카 발솜도 역시 로맹 롤랑의 개념을 갖고 왔지만 결국은 그 개념이 협소하다는 걸 인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인식을 바꾸는 데는 이 대양의 느낌이라는 게 굉장히 소중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바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기존의 인식 체계가 바뀔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점에서 에리카 발솜도 이 개념을 가져다 쓴 거고요. 로맹 롤랑이 이야기한 이 대양의 느낌이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는 건데, 이는 종교적인 심성과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감각은 오늘날 기후위기시대, 인류세 시대의 시대적인 요청과도 결부된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리카 발솜의 논의는 ‘로맹 롤랑의 개념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대양의 느낌을 재해석할 수 있겠다, 육지와 바다를 넘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과 비인간 이런 것들을 사유하는 데 바다라는 것을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겠다’라고 이번 『문학/사상』 12호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육지적인 사유를 할 때는 감각이 시각 중심입니다.
전솔비 선생님의 글에서 보면 ‘바닷속은 시각이 아니다, 바닷속은 청각입니다.’ 우리가 종교에서는 대체로 시각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노자 사상에서도 보는 것을 멀리 하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듣는 것, 성경에서 믿음은 듣는 데서 나온다고 말하며 청각을 강조합니다.
또 바다의 고래와 사람을 비교를 하고 있는데요. 고래는 육지에서 바다로 들어간 포유류고, 사람은 바다에서 육지로 나오는 포유류입니다. 그래서 이 둘의 비교가 상당히 의미가 있겠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바다를 가지고 사유를 하면은 기존의 우리 생각이 상당한 전환을 이룰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지구의 73%가 바다입니다. 30%도 안 되는 이 육지 가운데에서도 많은 부분들이 물로 차 있습니다. 또 그 육지 가운데 사람 사는 곳은 절반도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바다라는 개념을 또 끌고 올 필요가 있겠는데 아흔에 다 이른 허만하 시인이 최근에 놀랍게도 시집을 냈습니다.
『별빛 탄생』이라는 시집이 올해 나왔습니다. 이 시집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바다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 가운데 <최고의 바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최후의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지는 그날, 바다는
터지는 햇빛 가루 반사하는
모래사장에 엎드려 어깨
들썩이며 혼자서 알몸
그대로 흐느낄 것이다. 접은
팔에 얼굴을 묻은 채, 멀리
휘어지는 해안선에서
부서지는 흰 물결소리처럼
한정 없이 혼자 사람이 없는
순결한 시간을 잠들 것이다.
지구에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 야생의 시간을.

인간이 사라지고 다시 바다만 남는 지구를 상상하면서, 오히려 인간 이전 야생의 시간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허만하 시인이 훨씬 나아간 거죠. 그래서 이런 시를 읽고 우리가 바다를 통해서 이런저런 문학적인 가치나 삶의 문제를 재인식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까 언급했던 『바다의 철학』이라는 책은 군터 숄츠라는 사람이 쓴 책인데, 이번에 글 쓰면서 다시 정독했습니다. 이번 『문학/사상』 표지색과 비슷하죠😂 우리가 그동안 바다의 철학이라는 걸 생각을 안 했잖아요. 인간의 철학이지, 어떻게 바다의 철학이냐?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이 『모든 삶은 흐른다』이 책도 실제로 바다를 가지고 철학자가 사유를 펼친 책입니다. 로랑스 드빌레르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과거에는 철학사에서 바다의 철학이 쭉 개진되었습니다.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말한 탈레스가 그리스 철학의 출발 지점에 있는데 에게해 항구 도시에서 사상을 펼쳤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바다 철학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고,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해양의 사상은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서울과 다른 사상이 나올 수 있다는 걸로 뒤집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 철학사는 바다에서 시작됩니다. 이게 쭉 진전되다가 바다가 자본주의가 되면서 그런 철학들이 사라지기 시작해요. 이런 이야기를 이 철학사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특히 바다의 철학이 사라진 것은 기술의 발달하고 맞물려 있습니다.

범선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바다와 인간과의 관계에서 역동적인 문학과 철학이 있습니다. 조지프 콘래드도 ‘해양문학의 본령은 범선 시대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조지프 콘래드가 19세기와 20세기로 넘어오면서 해양 문학을 썼는데 이 사람은 영국에서 동남아 또는 호주로 항해하면서 많은 글을 썼죠. 그런데 이 사람은 범선을 타다가 증기선으로 옮겨 탄 사람인데,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면서 범선과 증기선이 교차하는 것을 뜻합니다. 증기선으로 넘어오면서 해양 문학이 기울죠. 또 제국주의가 훨씬 더 속도를 냅니다.

우리가 개항하고 조선이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하고도 연결이 됩니다.
어쨌든 이처럼 인간의 기술 발전, 자본주의 이런 게 맞물려서 철학이 후퇴해요.
바다에 대한 사유가 후퇴한다는 겁니다.
특히 컨테이너가 등장하면서 바다의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에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래서 해양문학도 실종되고 바다 철학도 실종되는 시대가 된 겁니다.

 

제가 지금 기억이 안 나는데, 오늘날 자본주의를 ‘컨테이너 자본주의’라고 지칭하는 분도 있습니다. ‘맥도날드 하다’ 이런 말도 하지만 ‘컨테이너 하다’ 이런 말도 하죠. 이런 점에서 어느 날 갑자기 바다에 대한 사유가 필요한 게 아니고, 바다에 대한 사유가 원래 더 많았는데 이 자본주의와 기술이 발달하면서 바다에 대한 사유와 감각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로랑스 드빌레르도 ‘바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렇게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지금 바다를 아는 것처럼 떠들고 있지만 제대로 바다를 아는지도 모르겠어요. 대양으로 항해를 해본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경험적인 한계가 있죠. 어쨌든 이런 이야기를 로맹 롤랑의 ‘대양의 느낌’을 매개로 이야기를 해봤고, 그다음에 ‘바다정동’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로랑스 드빌레르의 책 『모든 삶은 흐른다』라는 책에서 보면 서구인들은 바다와 대양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북극, 남극 이 다섯 개만 대양입니다. Ocean입니다. 그다음에 지중해, 에게해, 동해, 서해, 남해 이건 전부 연안입니다. Coast입니다. 근데 아직 우리는 육지에 인접한 바다를 연안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하고 일본 사이에 있는 대한해협도 연안이에요. 중국하고 사이에 있는 황해, 그다음에 동중국해, 남중국해까지도 다 연안입니다.

그래서 이 대양과 연안의 구분을 거듭 이야기합니다마는, 아직 우리가 이걸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그만큼 우리가 바다를 매개로 한 지구적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의 문학이라는 것도 인간 중심, 그다음에 육지나 뭍 중심의 문학이 그동안 지배적이었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 바다를 가지고 사유를 하는 문학들이 바다가 중요한 만큼 이제 활성화되고 있는 편입니다.

 

한국이 다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김혜순 시인이 아닐까 이런 이야기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김혜순 시인이 최근에 낸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라는 시집을 제가 읽고 깜짝 놀랐어요. <오션 뷰>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한번 읽어볼게요.

일 년 열두 달
광안대교가 찾아와서 창문을 두드렸다

비가 와도 예외는 없었다
이 슬픔을 해결해야 해 생각했지만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또 찾아왔다

집안엔 흘려보내지 못한 눈물이 늘
고여 있었고
눈물 위에 기선이 떠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
광안대교는 다리를 늘어뜨려
창문을 부수려고 했다

집안의 가구들이 물속에서 스크럼을 짰다
그러면 여자는 눈을 감고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설 준비를 했다

눈을 뜨면 어느새 광안대교의 우람한 다리들이
집안에 들어와 있었다

광안대교가 여자의 머리채를 움켜 쥐었다
여자의 몸이 태평양 저 건너편으로 떨어졌다

여자의 영혼이 소금처럼 풀어지고
바다는 한없이 아파했다

밤이 지나 등불이 꺼지면
광안대교는 어느새 창밖에 서 있었다
물속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저녁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다

내가 방문을 열자
여자가 욱신거리는 바다 밑 동굴에 앉아
조그만 물고기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역시 김혜순 시인은 참 시를 잘 쓰는 대단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비싼 아파트가 뭡니까? 오션 뷰를 가진 아파트죠. 근데 오션 뷰가 아니죠. 아파트에서 바라보는 바다가 오션이 아니잖아요. 연안이자 코스트죠. 오션 뷰라는 것은 사실상 아파트 광고에서의 사기에 가깝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에서 광고는 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과장은 다 허용하는 거죠. 마치 시적 허용처럼.
근데 김혜순 씨는 이걸 정말 오션으로 해석합니다. 광안대교 너머 바다가 아파트로 들어오고 그 여성이 태평양까지 갔다가. 그다음에 이 시의 끝부분을 보면 화자가 등장해서 그 여성이 욱신거리는 바닷속 동굴에서 물고기를 보살피고 있다고 합니다. 이 시에 3단계 변화가 있는데, 이 시를 해석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시에 대한 해석은 제가 여기에서 충분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고, 어쨌든 이 시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과 광안대교 너머 바다, 그리고 그 바다를 통한 여성의 몸의 느낌이 정동이거든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바다정동을 잘 나타낸 아주 잘 그려낸 시고, 마침 광안대교를 바라보는 아파트를 설정했다는 게 또 놀랍습니다.

 

놀랍게도 서양의 사상가들도 대부분 바다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롤랑 바르트 같은 경우에도 ‘바다는 아무것도 없다, 텅 비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요. 롤랑 바르트는 기호학자잖아요. 자기가 해석할 기호들은 바다 이편에 있다. 바다 이편에 있는 깃발, 신호, 간판이나 사람들의 옷, 그을린 피부 이런 게 전부 다 기호학적인 해석 대상이고 바다에는 없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근데 김혜순 시인의 시를 읽어보면 바다를 통해서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한 편의 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가 있는데 한창원 소설가가 최근에 『바다어 마음사전』이라는 책을 냈어요. 이 책에서 파도에 대해서 이야기한 걸 제가 살펴봤습니다. 이제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조금 전에 롤랑 바르트 같은 경우에 ‘바다는 텅 비어 있다, 아무것도 기호학적으로 해석될 게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한창원은 거문도에서 살면서 늘 바다와 함께 소설도 쓰고 『바다어 마음사전』 역시 자기 정동을 글로 쓴 책이라고 할 수 있겠거든요.
한창원은 ‘파도에는 생각지도 못한 파장이 있다. 갯바위를 타고 오는 파도가 힘을 다 소진하고 물러가며 기다렸다가 다음 것이 오는 게 아니다. 앞 파도의 생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다음 파도가 덮친다. 밀려나는 것과 몰려오는 것이 부딪히며 힘이 일정 부분 상실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파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도 미포에서 청사포까지 자주 산책하는데 이 파도를 보고 있으면 늘 같은 파도가 아닙니다.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계속 변화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롤랑 바르트는 이 바다를 텅 빈 공간이라고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만큼 무중심의 기호학이라는 걸 알 수가 있는데 마침 부산의 김미령 시인이 쓴 <파도의 새로운 양상>이라는 시를 보면 됩니다. 우리 『문학/사상』에 실려 있습니다.

이 시를 읽어보면 파도가 밀려오고 파도가 밀려가는 이 과정을 어떤 분노로 이야기합니다. 분노의 정동으로 이야기하죠.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아요. 거기에 그쳤다면 상투적인 감각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죠. 거기서 그치지 않고 파도가 오가는 이 과정을 수많은 기호를 파생시키는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새로운 관점 하나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시적 화자가 자기 자신과 함께 파도가 떠밀려갑니다. 그럼 이렇게 해석하거든요. 이 시 속의 화자는 새로운 파도가 되어서 저 대양으로 나아가는 것은 시인이 이 시를 통해서 존재론적인 전환을 사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를 읽으면서 또 생각해볼 게 바슐라르가 쓴 책 『물과 꿈』 있잖아요. 바슐라르는 원초적인 사유를 했고 그것이 우리 모든 상상력과 이미지에 살아 있다고 그래요. 그게 우리에게 섬이고, 울림과 반향을 일으킨다. 이게 바슐라르의 이론인데 신화 소설을 해석하는 데 현상학적으로 굉장히 의미가 있거든요.
바슐라르의 『물과 꿈』에서 ‘강은 우리에게 서정성을 주지만 바다는 난폭한 물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다를 난폭한 물이라고 이야기하고, 강의 물에 더 포인트를 둡니다. 그러니까 서정적인 물인 강에 더 의미를 두고, 분노의 물인 바다는 사람들이 난폭함을 투사하는 그런 상상력의 대상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바슐라르의 관점을 김미령의 시에다가 대입을 해보면 분노의 바다를 이야기했다가 그 파도가 일으키는 수많은 기호들을 이해하고, 그다음에 새로운 관점을 찾아내고, 고생대 식물처럼 덩치 굵은 체념들을 넘어서서 파도를 타고 멀리 떠밀려간다. 이렇게 그 분노에 가역하지 않고 새로운 신생을 이루어내는 시적 자아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슐라르가 말 못한 걸 이 시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다정동이 김혜순 시와 김미령의 시집에서 시적으로 잘 표출되고 있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월러스 니콜스라는 사람이 쓴 『블루마인드』 굉장히 유명하죠. 그동안 우리는 인간에게 치유를 주는 역할이 숲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근데 임상 실험을 통해서 확인해 보니까 바다가 숲보다 훨씬 치유력이 더 높답니다. 거기에 착안해서 쓴 책이 월러스 니콜스의 『블루마인드』입니다.
월러스 니콜스는 바다의 푸른색에 감정 이입하며 바슐라르가 이야기하는 강에서의 서정적 삶을 바다에 가져옵니다. 바다를 통해서 감정적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고 하면서 치유 프로젝트를 만들어요. 이 치유 프로젝트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쓴 책이 『블루마인드』입니다.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지만 바다를 역시 돈으로 생각하는 큰 틀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바다가 훨씬 더 치유력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이걸 프로젝트화하고 있으니까 한계가 있어요. 바다의 다양성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아까 『바다의 철학』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로맹 롤랑이 이야기한 대양의 느낌도 바다 철학사에서는 지엽적인 거라고 그랬죠. 롤랑 바르트도 바다는 텅 빈 공간이라고 이야기했고, 바슐라르도 강과 서정시를 연결하면서 대양의 문제를 상당히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로맹 롤랑이 말한 대양의 느낌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 인간의 몸도 70% 이상이 물이죠. 바다와 똑같습니다. 지구의 구성과 거의 같습니다. 연결, 공감, 전체, 합일 이런 데 관심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한쪽만 보는 거죠. 바다가 텅 비었다든지, 바다는 난폭하다든지, 아니면 바다는 종교적인 감각과 연결된다든지 이런 식인데 양면을 다 봐야 된다는 겁니다. 단절, 고립, 소멸도 가져오고 해서 양쪽을 이해할 때 육지에서 살면서 바다를 함께 아우르는 인식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아직 충분하지가 않다는 겁니다. 『바다의 철학』에서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 밀레토스라는 항구에서 비롯된 탈레스의 물의 사상이죠. 그다음에 칸트도 바다를 숭고로 이야기합니다. 바다에서 압도적인 숭고를 이야기하면서 이게 단 하나의 이론이라고 요약을 해버리죠. 그다음에 보수주의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에드먼드 버크도 숭고를 이야기합니다. 대체로 많은 철학자들이 바다를 두려움, 공포, 그리고 무한함 이런 것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결국 우리에게 바다정동으로 이해되고 있고 그리고 미학적으로는 숭고로 이해되는 그런 경향들이 있습니다. 서양 주류 철학사에서는 대부분 바다를 숭고로 이해하고 있고, 헤르더조차도 숭고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를 볼 때 항해와 난파라는 개념이 지배적입니다. 해양 문학도 항해와 난파라는 이 은유의 범주를 크게 못 벗어나거든요.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바다정동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신화 소설 그리고 바다를 해석하는 미학이나 철학에서도 좀 더 폭넓게 논의가 되어야겠습니다.

부산은 서울과 달리 동아시아 지중해의 네트워크 도시이자 허브입니다.
바다를 향해 열린 도시고 이런 데서 서울과 다른 사상이 나올 수 있습니다.
충분히 나올 수 있고 그런 게 개진되어야 되고 그런 문학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걸 우리『문학/사상』에서 하고 있는 건데, 잘하고 있습니까?😂

 

칼 슈미트

그동안 사람들은 칼 슈미트가 말하듯이 너무 땅 중심이었습니다. 땅 중심이었는데 대양적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해양의 관점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노력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노력하고 있지만 그들의 개념을 보면 대체로 영토 개념이나 세계 지배 체제 이런 개념들이 항상 틈입하거든요. 칼 슈미트도 굉장히 국가 중심의 사상을 펼칩니다.

 

이제 바다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하는 이론들과 논의들이 많이 나오고 있거든요. 주로 일본 학자들입니다. 일본 도쿄 대학에 있는 하마시타 다케시라든지, 그 제자 하네다 마사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키나와 입문』이라는 책을 보면, 류큐국에서 오키나와가 되기까지 오키나와가 해역을 통해서 어떤 활동을 해왔는가를 되짚어보면 일본이 도쿄 중심의 국가주의가 될 필요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오키나와가 하나의 해역을 아우르는 활동을 한다는 것은 아시아와 태평양이 평화로운 세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해역 세계를 중심에 놓고 사유하면 국가가 가지는 힘 이런 데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합니다

강화도 조약의 가장 핵심 의제가 뭐였는지 아십니까? 강화도 조약이 될 때 조선 정부는 계속 쓰시마와 하겠다 하고, 일본 메이지 정부는 쓰시마와 하지 말고 메이지 정부하고 항로를 잇자 합니다. 그러다 쓰시마는 몰락하죠. 쓰시마는 조선을 통해서 쌀을 가져가야 되는데 메이지 정부가 강화도 조약을 하면서 왜관을 항로로 바꿔버립니다.
이런 것들도 다 해역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일본 메이지 정부의 국가주의가 개입하면서 쓰시마 네트워크 그리고 동남아까지 해역의 네트워크가 실종되고, 일본인은 제국과 조선과의 관계로 변질되는 걸 보여주죠.

이런 것도 해역 세계라는 관점으로 해석하면 다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다음으로 해양 도시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가령 제주도 같은 경우는 제주도 사람들의 인식이 굉장히 해역적입니다.
제주도의 <탐라순력도> 가운데 <한라장촉>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제주가 있고 저 안남, 베트남, 여송, 필리핀, 말레이시아까지 다 있어요. 근데 조선 정부가 인식하는 지도를 보면 일본이 제주도만 하게 그려져 있고 조선 정부는 중국만 하게 그려져 있어요. 중국만 하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엉터리 지도죠. 세계 인식이 바로 지도인데 조선이 인식하는 거 하고 제주가 자기들 인식하는 거하고 완전 딴판입니다. 즉 중심의 해역을 가지고 인식하면 섬 네트워크로 바라보게 된다는 겁니다. 이걸 이제 해양 도시라고 보면 항구 도시들끼리 네트워크가 되는 거거든요. 이러한 이야기들을 일본 학자들이 굉장히 많이 하고 있고, 또 그런 걸 통해서 작품으로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 한국에서 더 없이 중요한 도시, 해양 도시 부산에서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시스템이 1급 체제고 또 서울 중심주의가 너무 강하게 작동하다 보니까
부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저 해양수산부 이전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하마시타 다케시는 일본 메이지 정부가 또는 일본 근대 제국주의가
오히려 오키나와를 완전히 엉망진창을 만들어 놓았다고 얘기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제주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부산이라는 이 Seaport city가 이렇게 쪼그라들었던 것도
국가 중심주의가 만든 것이라고 해석할 수가 있겠죠.


놀랍게도 자크 아탈리라는 사람은 아시아의 바다를 이야기합니다.
근대 영국이 패권을 가지고 있을 때까지가 대서양의 시대인데 지금은 태평양의 시대예요. 태평양과 대서양을 아우르는 나라가 지금 패권국이죠. 미국이죠.
그동안 조선 해양 기술이 발달하면서 컨테이너 혁명 이후에 물동량이나 배후 공업단지, 산업단지, 첨단 기술 이런 것들이 아시아의 해안 도시에 많이 배치돼 있습니다. 물론 그런 기술의 우위는 여전히 미국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해저 광케이블도 거의 90%가 미국 겁니다.
그렇지만 교역과 조선업은 아시아의 시대입니다. 조선업은 한국, 중국, 일본이 최고입니다. 이런 시대니까 태평양의 시대죠. 이런 시대에다가 이제 북극까지 이야기되고 있으니까 대양에 대한 인식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겨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적인 이야기는 바다정동하고는 조금 좀 거리가 있지만 이런 문제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메탄이 지구 온난화를 지금보다 몇 배 더 촉진하는 역할을 하거든요. 동토층에서 메탄이 올라옵니다. 선박에서 뿜어내는 오염물질도 엄청납니다. 북극 항로가 열리면 선박이 뿜어내는 오염량이 3분의 1이 줄어들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를 줄여 갈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논란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도 우리가 해볼 수가 있는데, 우리가 인류세, 기후 위기 다음으로 이런 걸 우리가 바다정동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허만하 선생님의 『별빛 탄생』 시집에서 마지막 부분에 있는 <물의 종착지>라는 시를 가져와 봤습니다.

바다 깊이에서 하늘 구름으로 머물다 다시 땅을 찾는 큰 동그라미를 물은 그린다. 사람이 보는 것은 언제나 물 행보의 한 단면이다. 물은 태양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물은 언제나 운동중이다. 시간처럼 정지할 줄 모른다.

<물의 종착지>의 한 부분인데요. 왜 이런 구절을 시집의 뒷부분에 배치했을까 생각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어쨌든 두서없이 바다를 감각하고 사용하는 방법의 여러 가지 어떤 가능성들을 제 나름대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문학/사상』 12호 출간 기념 북토크 후기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유튜브 영상에서 더 생생한 현장 만나볼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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