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전등을
끄고
달을 좇아

산지니 51회 저자와의 만남
9월의 저자 정천구

 

안녕하세요, 전복라면 편집자입니다. 9월 25일에 열린 산지니 51회 저자와의 만남은 특별히 부산외국어대학교 도서관과 함께했습니다. 이날의 초대 저자는 『중용, 어울림의 길』의 저자 정천구 선생님입니다.  대담에는 계간 오늘의 문예비평 편집위원이자 문학평론가인 손남훈 선생님이 함께해주셨습니다.

 

중용불가능-『중용, 어울림의 길』(책소개)

 

 

반갑습니다, 정천구 선생님의 『중용, 어울림의 길』이라는 책을 가지고 선생님과 직접 대담할 수 있어서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중용, 어울림의 길』 이전에도 『논어, 그 일상의 정치』라든지 『맹자독설』 같은 책들을 통해 유가의 필독서들을 번역하고 재해석해서 다시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오셨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중용, 어울림의 길』이란 책도 단순히 중국어를 번역했다, 지금 우리말에 맞게 맛깔스럽게 바꿨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내셨을 때 야심이라고 해야 할까요, 의도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마도 모든 저자들이 똑같은 생각일 것인데, 일단은 가장 남다른 책을 쓰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은 제 전공이 중국 고전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굳이 이걸 할 이유가 없었는데 작은 계기로 논어부터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원래 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일단 우리말 번역을 잘하는 걸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고전에 대해 정의를 내리라고 한다면, 조금 우스갯소리 같지만 “누구나 말하지만 아무도 안 읽는 책.”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사실 재미없습니다. 첫 번째는 지금 현재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읽기에 적절한 서적이 아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에 대한 해설이 적절하지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좀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다가 읽어보면 여전히 고리타분한 걸 보여줍니다. 그래서 고전이 현대적 가치를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논어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또 사고하는 것들이 1500년 전과 꾸준히 서로 통하고, 또 거기에 가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걸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건 현대적 관점에서 또 현재 일어나는 사건과 관련해서 풀어내는 것이 가장 적절하리라 생각했고요.

이미 관련 저술들이 많이 있지만 제가 그것과 확실히 다르게 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 『중용, 어울림의 길』을 썼습니다. 실제로 『중용』은 아주 양이 적습니다. 그래서 책 한권으로 다뤄내기가 굉장히 애매합니다. 『대학』과 함께 묶어서 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도 저는 『중용』이 정말로 가치 있는 책이라면 원문이 적더라도 거기서 오늘날 우리가 새겨볼만한 것들을 풀어내면 양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쓸 때 40여일에 걸쳐서 아주 빨리 썼는데, 그래야 제 색깔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오래 걸리면 남의 글을 흉내 내거나 참고해서 온전히 제 것이 아니게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논어, 그 일상의 정치』를 내고 난 뒤에도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오늘 질문하신 것처럼 어떤 야심이 있었느냐. 사실 숨은 야심은 이 책이 대박 나는 겁니다. 제 책을 읽고 감동을 받는 게 역시 가장 큰 야심이죠. 그리고 저는 제 책을 읽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사주시길 바랍니다. (일동 폭소) 그리고 독서보다는, 지금이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저는 독서를 중시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장서를 중시합니다. 독서로는 그 사람을 잘 알 수 없지만 장서를 보면 단박에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장서가 곧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보여준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여기 오신 분들이 『중용, 어울림의 길』을 읽고 장서로 마련하고 싶다는 꿈을 꾸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말씀 감사드립니다. 중간에 제가 끼어들어서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저도 남의 집에 가면 맨 먼저 그 집에 책이 뭐가 꽂혀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보면 “아, 이 사람 관심사가 이쪽이구나, 저쪽이구나.” 파악이 되고 그에 맞춰서 화제를 꺼내 이야기할 수 있거든요.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 이야기해봤습니다. 앞과 비슷한 맥락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드리자면, 왜 『중용』입니까?

 

사실 참 단순합니다. 『논어, 그 일상의 정치』를 썼기 때문이죠. 그다음 자연스럽게 “일단 사서(四書) 주석서를 써야 되겠다”라는, 어떻게 보면 기존의 통념 때문에 작업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가장 비중을 둔 것 중에 하나가 책 앞부분의 이 해제입니다. 대체로 『중용』을 자사(子思)의 작품이라 합니다. 공자의 손자인. 성리학 학자들, 특히 주희가 주장하면서부터 그 뿌리가 확고해졌는데 실제로 그 근거가 거의 없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자사가 『중용』을 썼다는 언급이 아주 간략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자사가 죽고 사마천이 『사기』를 쓴 기간이 거의 300여 년 차이가 납니다.

자사라는 인물도 불명확하고, 그가 쓴 책이 지금 현재 전하는 『중용』인지도 불분명한데 우리는 이미 자사의 작품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미 성리학적 사고에 익숙하다는 거죠. 성리학자들이 묶은 사서(四書)가 유가를 대표할 수 있는 고전이 될 수 있느냐? 이 사서를 중시했던 성리학자들의 해석이 과연 절대적일 수 있느냐? 800여 년 전 해석도 수없이 많은 해설서 중 하난데 우리는 아무 이견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가? 제가 『맹자』와 『대학』 작업도 하고 있는데, 이렇듯 사서를 다루는 이유는 주희와는 다른 해석을 할 필요가 있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도 있다는 인식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 우리 동아시아의 고전을 되살리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말씀하신 내용이 다음에 드릴 질문의 답과 상당히 겹쳐서 당황스럽습니다. (웃음) 고전이라는 텍스트를 과거의 것으로 가만히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는 거고, 계속해서 재발견하고 재해석해서 현실에 맞도록 의미를 찾아가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죠?

 

그렇죠. 고전이라는 것은 처음 형태대로만 남는 게 아닙니다. 시대마다 또 공간을 달리하면서 그것이 가치 있다고 했던 수많은 인식들이 모여서 고전으로 자리를 잡는 거죠. 그렇게 보면 고전이라는 것은 항상 어떤 시대든 그 시대 사람들이 가치를 발견할 때 고전이 됩니다. 고전이 가치 있으려면 현재의 내가 되살릴 수 있어야 하고 유용하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쓸모없는 것은 고문이지 고전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걸 고전으로 만드는 것은 항상 그 시대 사람이지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내용 측면에서 조금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듯이, “『중용』이 자사의 작품이다.”라는 통념을 이 책에서 논리적으로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순자』, 『맹자』와 『중용』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셨습니다.

 

책 뒤표지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논어』 『맹자』 『순자』 『예기』와 어우러진 새로운 『중용』을 읽다.” 출판사에서 저자보다 더 잘 붙여놨습니다. (웃음) 당연히 『중용』은 유가에서 가장 중시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유가의 다른 고전들과 긴밀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사의 작품이라고 하면 대부분 전국시대 이전 작품이라 합니다. 그런데 시절이, 내용을 굉장히 자세히 읽고 꼼꼼하게 따져보면 오히려 전국시대의 텍스트, 『순자』에 아주 가깝습니다. 저는 『맹자』와 『순자』 사이에 나온 것이 『중용』이라고 봅니다.

 

 

선생님께서 ‘중용(中庸)’ 가운데 ‘중(中)’을 많이 강조하시고 ‘어울림’이라고 자주 환용하셨는데, 일어나는 감정을 알맞게 처리하는 것, 상황에 맞게 처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울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중용’이 사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냐는 말도 있고요.
한편 든 생각이 이겁니다. 공자님도 불가능한 ‘중용’을 훨씬 후세대인, 그리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전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중(中)’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알맞다’라는 거죠. 일종의 상황에 알맞게 하는 것.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긴 하지만 상황이 늘 다릅니다. 그게 또 확 다르지 않고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더 처신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주 다르면 참으로 편한데, 너무 미묘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상황 자체를 파악하기가 어렵고, 알맞게 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상황에 알맞게 하는 것이 첫 번째 ‘중’이고 그다음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는 문제에 이 ‘중’이 어울려 있다, 이렇게 풀 수가 있습니다. 알맞게 할 수 있어야만 어울릴 수 있습니다.

‘중용불가능(中庸不可能)’을 제가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중용은 불가능하다 즉, 할 수 없다는 게 아니고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 번 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잘 하기는 어려운 거죠. 그래서 지혜도 필요하고, 지혜로워지려면 어질어야 합니다. 그래서 『중용』이 중요시하는 종목이 ‘지(智)’와 ‘인(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어려우면 공자도 불가능하다 했고, 저도 이렇게 주석을 달면서도 그런 느낌을 가졌지만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지향하는 게 인간적인 행위가 아닐까요. 그래서 유교 역사는 세상이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아지게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산업화가 이룩된 오늘날 욕구, 욕망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건 좋지만 문제는 그것을 무한히 긍정할 순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사람들이 바라는 대상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피를 말리는―요즘 공무원 시험이 그렇듯이― 그런 고단한 삶밖에는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성장을 해왔기 때문에 그 폐단이 지극히 큽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난 욕심을 갖게 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렸는데 그때 우리가 중시해야 될 게 과유불급이라는 거죠. 지나치게 모자란 것도 똑같은 건데, 모자라서도 안 되지만 지나쳐서도 안 된다. 그것을 조율할 때 필요한 것이 『중용』이 아닐까요.

‘중용’ 할 때 ‘용(庸)’이 바로 그 일상의 의미입니다. 일상의 자그마한 일에서 내가 편안하고 또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해주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중용이 불가능하거나 어렵진 않을 것입니다. 이 시대의 『중용』이 그런 의미에서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중용』의 시대적 배경이 춘추전국시대입니다. 딱 20세기, 21세기 지금 우리 시대와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급변하는 시대, 그리고 가장 혼란이 극심했지만 동시에 인간의 능력도 무한 긍정된, 그와 동시에 탐욕조차도, 욕심조차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던 시대입니다. 그때 그런 과속을 늦추기 위해서 나온 게 유가의 사상이고, 그중에 『중용』은, 이 시대 『중용』은 어떻게 생각하면 개개인마다 달라질 수 있지만 가장 필요한 화두가 될 거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중용』을 비롯해서 고전 텍스트들이라 하면 먼 이야기, 초월적인 이야기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렇죠. 잘산다, 행복이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이게 제일 불확실한 거고 불명확해요. 제가 아까 야간산행 이야기를 해드렸는데, 제가 야간산행을 할 때 당연히 손전등을 들고 갑니다. 제가 손전등을 들고 산꼭대기에 딱 왔을 때 나무가 듬성듬성 있고 등 뒤로 보름달이 비췄어요. 그래서 아 손전등이 필요가 없구나 해서 껐어요.

보름달을 받으면서 걷는데 문득 제 손에 들려있는 손전등과 달빛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들었어요. 손전등은 내가 필요한 부분을 명확하게 비춰주고 아주 밝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범위가 한정적이에요. 사방 3미터를 못 넘습니다. 그리고 건전지를 세 개 넣으면 열 시간 이상 쓸 수 있는 게 전부죠. 이게 지식이고 근대 과학기술의 한계일 것입니다.

반면에 달빛은 그 자체로 자유롭습니다. 달빛을 밝기로 따지면 굉장히 희미합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비추죠. 잘산다고 하는 것, 행복이라고 하는 것, 지혜라고 하는 것, 그것은 달빛에 가깝지 않을까요.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고 대충 넘어가죠. 덜 중요하고 덜 가치 있는 걸 쫓다가 저 멀리 있지만 귀한 것들을 놓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는 제가 지식과 통찰의 관계 때문에 손전등과 달빛을 떠올렸는데, 질문을 하시니 (그렇게도 대답할 수가 있네요).

삶의 지혜라고 하는 걸 사실은 얻기 어렵습니다. 왜 수많은 고전들이 있느냐? 뭐라 딱 떨어지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대로 이야기를 하는 거죠. 스스로 체득하고 그렇게 경험을 통해서 자기만 명확하게 인지하는 게 잘사는 길로 가는 게 아닌가.

잘사는 것이 공부의 핵심이라고 했는데, 저는 스무 살이 된 이후로 제 인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돈을 벌려고 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공부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겠다 해서 이렇게 왔는데 여러분 보시기에 제가 별로 잘사는 것 같지 않고 행복해보이지 않으면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을) 바꾸셔도 됩니다.(웃음) 그렇지만 저만큼 즐겁고 신나게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 부분은 제가 자신합니다.(웃음)

 

부럽습니다. (웃음) 저도 좀 그렇게 살고 싶은데 갈림길 앞에서 갈팡질팡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거든요.

 


누구나 똑같은 조건이죠. 결국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하고, 결단을 내려야 하고, 그다음에 실행을 해야 합니다. 선택의 문제가 우리가 공부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이왕이면 선택을 잘하는 것.

그런데 어떤 책을 읽어도 선택을 잘하는 법을 명확하게 가르쳐 줄 수 없어요. 내가 부딪치는 문제가 다 다르거든요. 백 퍼센트 다 알고 선택을 하는 건 어렵습니다. 불확실한 상태에서 저지르죠. 공자도 만 일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지혜를 쌓고 그렇게 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공부하다 보면 저지르는 과오가, 빨리 좋은 길을 찾아서 성과를 내고 싶어 하거든요. 바로 그런 면에서 고전이 중요하지 않을까. 천천히 가고, 더디게 가고, 게으르지 않은. 게으른 것과는 달라요.

요즘 왜 우리가 고전을 안 읽느냐. 고전을 안 읽는 것은 20세기 이후의 현상이라 생각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건 서둘러서 그렇습니다. 급하게 해서. 고전은 급하면 못 읽습니다. 우리가 라면을 잘 만들어서 팔긴 하지만, 서두름이 오히려 삶의 빈곤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요. 천천히 음미하면서 가는 삶, 그게 바로 고전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중용』의 성(誠) 자를 선생님께서 ‘성스럽다’라고 하셨거든요. 보통 ‘성스럽다’ 하면 거룩할 성(聖) 자를 써서 표기를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씀 언 변(言)에 이룰 성(成) 자, 자기가 한 말을 이루다라는 이야기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시적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의 글자이지만 그 속에서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그렇죠. 요즘 ‘번역’ 하면, 번역기도 나오고 있지만, 사실은 번역에 전제가 되는 게 있습니다.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이 텍스트를 나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해석하는 것을 옮겨 쓴 게 번역이죠. 말로 옮기니 번역이지 단순히 글자만 바꾸는 것은 진정한 번역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거죠. 제가 사서를 배울 때 그게 제일 답답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어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노트는 공책입니다. 빌 공(空) 자에 책 책(冊) 자입니다. 그러면 그 공은 아무것도 없느냐, 아닙니다. 무(無)가 아니고 무한(無限)히 넣을 수 있죠. 하지만 그냥 공, 하면 그 차이가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전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지금 사람들이 갖고 있는 언어와 관계에 맞게 텍스트를 풀어주는 것이 첫 번째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심사숙고했고, 그 의미가 저에게 와닿지 않으면 번역을 할 수 없습니다.

 

 

성리학이 이 책에서는 많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선생님 말씀처럼 우리사회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사상,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특히 병자호란, 임진왜란 이후를 기점으로 우리나라는 중국에서조차도 고집하지 않는 성리학을 말 그대로 신주 받들듯이 합니다. 그게 (주희)에 벗어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데올로기, 관념화죠. 관념화의 제일 문제는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것을 깨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책을 읽고 다른 책을 읽어보면 성격이 다르다는 걸 느끼실 겁니다. 기존에 나은 표방을 했든 안했든 (주희)를 바탕으로 번역을 하고 주희의 해석을 따릅니다. 저는 저의 해석을 사족(蛇足)이라고 달았지만, ‘주희도 한 학자고 나도 한 학자다. 그 사람이 주석을 달았다면 나도 해석을 달 수 있다. 왜 주희를 내가 따라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만약에 주희를 따르려 한다면 제가 굳이 이 작업을 할 이유가 없지요.

성리학의 폐단은 말하기가 굉장히 복잡하고 많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서 주희라든지 성리학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그 폐단이 팽배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책을 쓸 때 꼭 그 말을 씁니다. 제가 쓴 책을 읽되 다른 책을 같이 읽으라고. 제 책 역시 저의 해석일 뿐입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 어떤 요리사가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다 외우지 않죠. 맛있게 먹고 나옵니다. 모든 고전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해석도 주석도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논어, 일상의 정치』도 그렇고 『중용, 어울림의 길』을 쓸 때도 그 의도를 담았습니다. 절대화를 되도록 배제하고 이 텍스트가 나왔을 때 그 시점에서 들여다보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팔백여 년 전 성리학자의 해석을 굳이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정천구

1967년생.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삼국유사를 연구의 축으로 삼아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문학과 사상을 비교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는 대학 밖에서 ‘바까데미아(바깥+아카데미아)’라는 이름으로 인문학 강좌를 열고 있다. 저서로는 『논어, 그 일상의 정치』, 『맹자독설』, 『삼국유사, 바다를 만나다』, 『중용, 어울림의 길』이 있고, 역서로는 오카쿠라 텐신의 『차의 책』과 『동양의 이상』, 명심보감 완본을 번역한 『밝은 마음을 비추는 보배로운 거울』, 『삼교지귀』 등이 있다.

 

 

 

자료 제공/ 부산외국어대학신문 김덕현 기자
정리 도움/ 용달달, 별난오리

*위 내용은 분량 조절과 입말의 특성을 고려한 편집을 거쳤습니다.

 

 

52회 10월 역자와의 만남 :: 서신으로 읽는 두 지성의 세기적 사랑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