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각주:1] 한때 이 땅 위 수많은 독서가들의 심금을 울렸던 강유원의 문장을, 전세계에 역병이 창궐한 작금의 시대에 다시 마주하자니 어쩐지 우습다. 병 때문에 서점은 한산하고,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유수의 도서전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취소되었다. 병든 인간도 책 읽기 어렵게 됐다. 매해 불황을 갱신하는 출판계에 푸념이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가끔 생각해본다. 매체환경에서 활자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는데, 우리는 왜 오늘도 책 만들기에 열중일까? 재밌는 점은, 입지가 점점 줄어든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어도 책 만들고 싶어하는 인간의 수는 그다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렇게 말해보기로 하자. 병든 인간만이 책을 만든다고….....

쏟아지는 신간들과의 경쟁에서 나름 선방을 한 책도, 그렇지 못한 책도 있지만 편집자에겐 모든 책이 다 아픈 손가락일 것이다. 옆자리 날개 편집자님은 자신이 만든 책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제 아픈 손가락이죠..."를 접두어처럼 붙인다. 

아픈 손가락 열심히 깨물다 보니 어느덧 연말이 왔다. 이제 손가락을 펴고 올해도 부지런히 만들어진 책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보려고 한다.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관심과 주문을 주시면 더 좋고!



 내맘대로 2020 산지니 북어워-드 

(심사위원은 저 한 명입니다...)



올해의 어려워!상        

도사카 준 지음·윤인로 옮김/일본 이데올로기론

 윤인로 비평가의 총괄기획으로 올해 첫 선을 보이게 된 [제국 일본의 테오-크라시 총서]의 첫 책이다. 침략주의가 팽창하던 시기, 전쟁 정당화에 일조했던 제국주의의 모순을 벗겨내고 일본 내부에서 일본주의를 비판했던 중요한 책인데... 원고를 읽을 때마다 어려워..! 소리가 절로 나왔던 책이므로 올해의 어려워!상을 수여하겠다. 교정 진도가 하도 안 나가서 보다 못한 편집장님이 두 팔을 걷어 부치셨던 기억이 있다. 어려운 책이지만, 1930년대 학자만이 할 수 있는 뼈때리는 비판이 있어서 중간중간 웃게 된다. 아래는 교정을 보다가 웃겨서 따로 메모를 해두었던 구절이다.

정말이지 인텔리가 자신은 인텔리 집단에 속한다는 일종의 집단의식에 입각하여 미리부터 자부심을 느끼고 그런 자부가 소멸하면 자기비하에 빠지며 그런 자기비하 속에서도 자기비하 그 자체를 자부심의 재료로 삼지 않고서는 안 되는 마음의 본바탕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일종의 우선적인 역사적 역할을 독점한 사회원동력으로 인텔리겐치아를 보고자 하는 욕망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나오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나만 웃긴가? 지금 읽어도 너무 웃기다. 




올해의 인기상        

이국환 지음/오전을 사는 이에게 오후도 미래다


자랑스러운 2020년 원북원 선정도서! 성원에 힘입어 특별 양장본까지 나왔다. 무선제본이 양장으로 리커버 된 것은 산지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예술과 철학에서 찾은 삶의 무게,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애정,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의미를 저자의 뭉클한 시선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다독을 자랑하는 저자의 풍부한 책 이야기로, 읽고 싶은 책들이 쌓여가는 것은 덤이다. 올해의 판매를 견인한 <오·사·오·미>에게 올해의 인기상을 수여한다. 




올해의 예쁜책상       

황경란 지음/사람들

표지도, 판형도, 내지도 마음에 쏙 들어서 출간제안서를 작성할 때마다 참고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에게 올해의 예쁜책상을 수여한다. 개인적으로 소설집은 이렇게 세로가 길고 가로가 짧은 판형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디자이너님과 이야기 하다가 표지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돼서 충격 받았다! 

표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그림자만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을 담아낸 소설집에 잘 어울리는 표지다. 살펴보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그림자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올해의 눈물상        

정경숙 지음/완월동 여자들

산지니 유튜브 라방 데뷔의 포문을 열어준 책! 정경숙 선생님과 변정희 선생님, 두 베테랑 활동가의 궁합이 보는 사람을 웃겼다가 울린다.(궁금하신 분들은 여기로..) 전국 최초이자 부산의 마지막 성매매 집결지, 완월동에서 활동가들이 언니들과 함께 '서로를 살린 이야기'. 세상의 낙인에 울고 서로를 향한 위로에 웃었던 완월동 여자들 18년의 이야기다. 이 책은 나를 너무 많이 울렸기에 올해의 눈물상을 수여한다. 이걸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날 것 같다. 특히 <언니야 놀자> 행사가 업주들의 훼방과 경찰의 방관으로 무산되었을 때 활동가들과 언니들이 쓴 글들이 내 마음을 너무나 사무치게 했다. 

"한 인간이 철저히 세상과 격리된 채 자신의 몸을 팔아 착취자를 먹여 살리면서도 자신들을 위한 행사에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침묵 해야 하는 현실을 보았다. (중략) 사람들은 세상에 정의는 살아 있고 모든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어떠한 상황도 눈감아 버리는 현실을 보았다. 언니들에게 더 많은 상처를 안긴 것 같아 죄송할 따름이다."

지금, 완월동은 폐쇄절차를 밟고 있다. 폐쇄라고는 하지만, 그 형태가 업주들에게 다시 이익을 물려주는 재개발이 될지, 도시재생이 될지에 또다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여기에 완월동이라는 문제의 진짜 해결이 달렸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올해는 반성매매 활동가들의 책이 특히 두드러지는 해였다. 봄알람에서 나온 신박진영 선생님의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을 곁들여 읽기를 추천한다.  



올해의 선생님상         

이진원 지음/좋은 문장을 쓰고 싶다면

교열 전문기자의 본격 바른 글쓰기 안내서. 산지니는 신간이 나오면 희망하는 편집자들에 한 해 한 권씩 가져갈 수 있게 하고 있는데, 이 책은 본사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편집자들이 한 권씩 챙겨간 놀라운 책이다.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이 책에 올해의 선생님상을 수여해야겠다. 

시도때도 없이 맞춤법을 지적하고 올바른 언어 사용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짜증나는)사람을 과잉교정인간이라고 부른다던데, 이 책이 과잉교정인간의 책 버전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글쓴이의 말이 죽순장아찌 담그는 방법으로 시작하는 책이다. 재밌다는 뜻이다. 

갑자기 이 포스팅의 맞춤법이 굉장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올해의 아쉬워ㅠ상          

리타 홍 핀처 지음/빅브라더에 맞서는 중국 여성들

이 책이 진짜 진짜 재밌는데, 아는 사람이 별로 없네... 올해의 아쉬워ㅠ상을 수여함으로써 좀 알려진다면 좋겠다. 

중국에는 전 세계 여성인구의 1/5이 산다. 이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고 더 나아가 공산당의 압제에 대항한다면 세계는 어떻게 바뀔까? 이 책은 너무나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보통 1세계와 3세계에 대한 페미니즘을 접한다. 베티 프리단이거나, 스피박이거나. 이 책은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중국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들려준다. 읽다보면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과 흐름이 어느 정도 맞닿는 부분도 있고,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다.(<-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많다ㅠ) 책이 가진 파워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해 무척 아쉬운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독자모임을 열어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독서모임을 갖고 싶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덧글 달아주세요♥



올해의 큰물에서 놀아라상         

황세원 지음/말랑말랑한 노동을 위하여

모 인터넷 서점의 1면을 장식해서 산지니 식구들을 기쁘게 해주었던 책, <말랑노동>에게 올해의 큰물에서 놀아라상을 수여한다. 

이 책은 노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기존의 제도를 점검하며 구체적인 미래상을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코로나19로 시장은 얼어붙었고 취업율은 바닥을 기고 있다. 오직 아파트와 부동산만이 한계를 모르고 치솟을 뿐...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소득일까, 그냥 돈일까? "일하고 싶다"고 할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직업일까, 직책일까, 혹은 '일 자체일까? 

한국사회에서 '일'으로 먹고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 책이 불러올 새로운 반향이, 다가올 2021년에 큰 영향을 미치길 바라며 더 큰물으로 나아가라 <말랑노동>아! 이 책은 더 잘돼야 한다!!




  1. 강유원, 『책과 세계』 [본문으로]
Posted by _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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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Peace21 2020.12.04 15: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려 이틀이나 준비한 열무 편집자의 '북어워드' 잘 봤습니다.
    재밌든지 눈물 나든지 교훈적이든지 어렵든지 모두 정성을 기울여 열심히 만든 책들인데, 이렇게 정리해 놓으니 더 뭉클하네요.
    일곱 권(플러스 알파) 모두 출판사 직원의 마음이 닿아 더 많은 독자가 읽고 공감하는 책이었으면 합니다.

  2. 고양이방범대 2020.12.04 16: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 사회에서 '일'로 먹고 사는 저의 심금을 울린 <말랑말랑한 노동을 위하여>.
    열무 편집자의 소개로 처음 알게 된 책인데 표지의 곰돌이 젤리가 말랑말랑이라는 부사가 퍽 마음에 드네요!
    딱딱한 라떼들 사이에서 말랑말랑했던 저는 점점 라떼의 습기로 딱딱해지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대코로나의 시대가 끝나면 한번 쯤은 산지니발 북토크나 소모임에 참여해서 다양한 의견들을 나눠보고 싶어요 !

  3. 파란 2020.12.04 16: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편집자님의 애정과 재기발랄한 말투가 돋보이는 포스팅이네요.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산지니와 열무 편집자님 모두 파이팅!

  4. 참치 2020.12.04 1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산지니에서 올해 이렇게나 좋은 책이 많이 나왔었군요!
    <완월동 여자들>과 <빅 브라더에 맞서는 중국 여성들>은 꼭 읽어봐야겠어요. 열무 편집자님에데 영업당했습니다!

    내년에도 여성주의, 페미니즘 관련 도서가
    많이 출간되었으면 합니다💜

  5. BlogIcon 동글동글봄 2020.12.10 1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재밌게 잘 읽었어요! <사람들> 만들 때 판형이랑 여백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한 번쯤 이런 판형으로 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원고 분량이 판형과 잘 어울려서 시도해볼 수 있었네요. <빅브라더에 맞서는 중국 여성들>은 저도 많이 아쉽네요. 힘들게 낸 책인데요. 스테디셀러가 되기를ㅎㅎ

***

산지니 도서를 

전자책으로 만나보세요. 

***


오늘 소개할 책은

<골목상인 분투기>입니다. 


전자책으로 어디에서든 가볍게 읽을 수 있어요. 




<골목상인 분투기>에는 

골목에까지 거대한 엉덩이를 들이대는 대기업들 때문에 

생업을 접어두고 거리로 나서야 했던 자영업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에 맞서 그때와는 또 다른 분투를 하고 있겠지요.

늘 지나던 거리에 문을 닫은 가게, 임대 종이를 붙여둔 비어 있는 가게를 보면

괜스레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이제 그만 '분투'하고,

그들의 작고 소중한 가게에서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길 

그 평범한 일상이 빨리 회복되길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골목상인 분투기 - 10점
이정식 지음/산지니


골목상인 분투기 - 10점
이정식 지음/산지니


Posted by 에디터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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