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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전성욱 평론가의 문화 읽기17

가족이라는 아포리아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의 지층에서 5월은 무엇보다 광주에 대한 기억으로 들끓는 시간입니다. 물론 그 역사적인 5월도 유족을 비롯한 피해 가족들에게는 상처로 얼룩진 가족사의 어떤 질곡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컨대 강풀의 카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의 서사가 역시 그 가족들의 원한을 복수라는 형식으로 해원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요즈음의 한국소설은 늘 그래왔지만 특히 가족에 예민합니다. 당대의 주류적 서사들이 가족에 어떤 집착을 보인다는 것은 우리사회에 대한 일종의 증후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월을 맞는 저에게도 가족이란 진정으로 곤란한 아포리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며칠 전엔 ‘어버이 날’을 맞아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뵙고 왔습니다... 2013. 5. 13.
사랑과 죽음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2012)는 지금까지 그의 작품들이 대체로 그러했던 것처럼 역시 엄숙한 사유를 요청한다. 죽음 가까이에 닿아 있는 노년의 삶이란 적요한 가운데서도 격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삶은 지속되고 있으나 죽음이 언제 그 일상을 덮쳐올지 모르는 막연한 시간들 속에서 말년의 삶은 불안으로 만연해 있다. 의 첫 장면은 충격적이다. 시체의 부패 냄새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조대가 문을 뜯고 들어가자 여자의 시신이 수의를 입고 누워있다. 그리고 영화는 피아노 연주회에 참석한 관객들을 오랫동안 비춘다. 그것은 아마도 이 연주회에 참석한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일들을 예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느의 발병과 그 후에 겪게 되는 인간적 존엄의 훼손을 지켜보아야 하는 조르주의 처지.. 2013. 2. 6.
상하이 기행 세상의 모든 여행은 위험하다. 떠남과 만남, 그 구체적 사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상념과 관념으로 존재하던 여행은, 바로 그 떠남의 순간부터 무수한 만남들의 지평을 연다. 그러므로 여행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경험 속으로 자기를 내던지는 기투이며, 이 때문에 모든 여행은 그 알 수 없음의 암흑 가운데서 두려운 마음으로 떠도는 방황인 것이다. 그러니 예정된 ‘일정’이란 언제나 배반될 수밖에 없으며, 우발적인 사건들의 터무니없는 전개로 여행의 시간이란 극히 혼돈스러운 것이다. 6월의 끝자락은 무더웠고, 학기말의 일정들로 마음은 몹시 빠듯했다. 작은 여행 가방에 억지로 쑤셔 넣은 물건들처럼, 분주한 일상을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내 마음은 영 거북하기만 했다. 그것은 공항에서 만난 K도 마찬가지였던 것 .. 2012. 7. 8.
청춘의 시간 (정지우 연출, 2012)는 나쁜 영화다. 박범신의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으므로 그것과의 관련성을 말 할 수는 없다. 다만 은교는 베아트리체가 아니고 그러므로 노시인 이적요는 단테가 아니다. 은교는 그저 어린 소녀고, 그래서 늙은 이적요는 청춘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절망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저 그런 일종의 탄로가(歎老歌)로 전락한다. “늙는다는 건 이제껏 입어본 적이 없는 나무로 만든 옷을 입는 것이라 시인 로스케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는 벌이 아니다......” 결국 영화는 예술의 영원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동경을 외면하고, 육체의 노쇠라는 그 유한성에 편파적으로 집착한다. 그리하여 영혼에 대한 고담준론을 피하는 대신, 내러.. 2012. 6. 8.
공생의 조건 안면이 있던 어느 사서로부터 청소년 인문학 강좌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다. 조금의 망설임 뒤에 바로 수락했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기회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것은, 쓰고 읽어야 하는 계기들에 나를 접속함으로써, 그 부담 속에서 쉬지 않고 공부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번다하지만 그 많은 청탁들에 쉬이 응하곤 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지식의 전체주의적인 통합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의 연대와 교섭이다. 그래서 첫 책으로 최재천 교수의 을 골랐다. 백양산 자락 어딘가에 있는 구포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마치 등산을 하는 것처럼 유쾌했다. 토요일 아침 도서관 앞마당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은 한가로워 보였고, 나도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약간의 설렘까지 느끼.. 2012. 5. 28.
기억이 부르는 날에 (이용주, 2012)은 기억에 대한 영화다. 기억이 ‘환기’의 힘으로 작용할 때 그것은 ‘되살려내는 힘’이다. 그러나 기억이 ‘고착’의 힘으로 작용하면 그것은 ‘붙들어 매는 폭력’이 된다. 세속의 이해는 이 영화를 풍속의 고고학으로 향수하지만, 실로 그 향수가 바로 기억의 나쁜 사례인 것이다. 음대를 다녔지만 아나운서가 꿈이었던 여자는, 그 이루지 못한 꿈을 지체 높은 남자와의 결혼으로 보상받으려 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결혼이 오래가기는 힘든 법. 여자는 가까스로 두둑한 위자료를 받아내고, 이제는 ‘첫사랑’을 찾아 기원의 자리를 더듬는다. 덧없는 이상을 좆아 살아왔던 여자에게, 세속의 난삽함이란 그렇게 상처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여전히 철들지 못한 여자는, 세속을 버리고 기억으로 만든 과거의 어떤 .. 2012.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