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길의 첫 마을인 매동마을에서 민박을 하기로 했다. 매동마을엔 민박하는 집이 30여 가구쯤 되는데 그중 한 집을 소개받았다. 마을회관 앞에 도착하니 민박집 할아버지가 경운기를 몰고 마중나와 계셨다.  경운기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 민박집에 도착했다.

매동마을 가는 길


할아버지 민박집 이름은 '대밭 아랫집'. 이름이 너무 정감 있게 들려 "할아버지, 집 이름이 대밭 아랫집이네요"하면서 웃었더니 할아버지도 "대밭 아래 있으니께 대밭 아랫집이재" 하시며 허허 웃으셨다. 그러고 보니 집 뒷켠으로 대숲이 무성했다. 마을의 다른 집들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했다. '마을 어귀 첫집'  '파란대문집' 이런 이름들일까.

이 마을도 여느 농촌처럼 젊은 사람이 별로 안보였다. 할아버지네도 1남4년데 다 출가해 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농사짓기 힘들지 않냐고 여쭤보니 요즘은 기계화가 많이 이루어져 농사도 예전만큼 힘들지 않다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앞마당에 이앙기, 탈곡기, 도정기, 우리가 타고온 경운기 등 농기계들이 그득했다.

매동마을엔 70% 정도가 우렁이 생태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농촌생태체험도 할 수 있다. 마을사람들은 농사도 짓고 민박 수입도 얻고 일석이조인 것 같다. 아랫집엔 상추 비닐하우스를 하는데 요즘 수확철이라 하루에 몇십상자를 내는데 왠만한 도시 월급쟁이보다 낫다고 하신다. 농사가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늘어나는 도시 빈민이나 일없는 도시 실업자들에게 농촌이 대안이 될 순 없을까 생각해본다. 

대밭 아랫집(왼쪽)과 장정식 할아버지


우렁이 농법에 쓰는 우렁이는 외래종인데 우렁이만 키워 파는 농가도 따로 있다고 한다. 모내기를 하고 나서 모가 좀 자란 후에 우렁이를 풀어 놓으면 이 기특한 놈들이 잡초를 싹 먹어치우는데 먹는 양이 엄청나서 잡초가 자랄 새가 없다고 한다.

"벼도 풀인데 어찌 벼는 안먹고 잡초만 골라 먹어요?"
"우렁이는 논바닥에 기어다니니께 벼를 못먹재. 벼는 키가 크잖여. 지가 점프 안하믄 못먹재."
"해마다 우렁이를 사서 풀려면 우렁이 값도 만만치 않겠는데요?"
"그래도 제초제 농약 값보다 싸게 쳐. 농약은 또 사람이 뿌리야 되재. 우렁이가 훨씬 낫당께. 지가 댕기믄서 풀 다 먹어뿐게"
"그래도 우렁이 쌀이 농약치는 것 보다는 수확이 적지 않나요?"
"그라재. 쪼매 적게 나오긴 한데, 그래도 친환경쌀이라 그냥쌀보다 훨 비싸게 나가니까 괜찮애"

일반쌀이 가마당 17만원 정도면 우렁이쌀은 가마당 24~5만원은 받는다고. 장정식 할아버지는 우렁이 칭찬으로 입에 침이 마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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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 만나다
빨리 가면 안보이던 것

몰랐던 것,
스쳐지나가던 것들을

 

1992년 부산에서 경남 고성으로 거처를 옮겼죠. 내가 사는 마을은 고성군 대가면 갈천리 어실마을이라고 깊은 곳이예요. 우리 마을에서 고성읍까지 다니려면 오전 7시, 오후 3시 이렇게 하루 두번 있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좀체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그는 걷기 시작했다고 했다. 가는 데만 2시간 반이 걸렸다.
"그때부터 길과 친해진 것 같습니다."

동길산 시인이 산문집 '길에게 묻다'(산지니)를 냈다. '길에게 묻다'는 말 그대로 길 위에서 길과 대화하며 쓴 글이다. 합천 밤마리 들길을 시작으로 창원 주남저수지 둑길, 최계락 시인의 외갓길, 진주 경남수목원 침엽수길, 남해 다랑이마을 논길, 거창 빼재, 고성 대가저수지 등 경남 20개 시·군의 사연 있고 풍경 있는 길들을 급할 것 없이 걸었다. 영주동 시장통길, 이기대 해안길, 청사포 오솔길, 영락공원 묘지길 같은 부산의 길도 담았다. 부인 박정화 씨가 동행하며 그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영주동 시장길과 청사포 오솔길

 



요즘엔 부산서 보름, 고성서 보름씩 지냅니다. 부산에 있을 때도 걷습니다. 약속이 생기면 해운대에서 서면이나 중앙동까지 걸어갑니다. 운동 삼아 모래주머니를 발에 차는 날도 있어요.

 
약속시각보다 두어 시간 일찍 출발해 걷다보면 길 위에서 빨리 가면 안보이는 것, 몰랐던 것, 스쳐지나가던 것을 보게 되고 옛날 그대로여서 반가운 풍경과 변해서 흥미로운 풍경을 챙기고, 사람을 만날 수 있단다.

생소한 길의 설렘도 좋지만 기억이 묻어있는 길이 좋더라고요. 내가 영주동에서 태어났으니 책 속의 영주동 시장통길에 애정이 많이 가고 지금 살고 있는 고성의 대가저수지길도 사랑하죠. 숨어있는 것은 아니면서 낮고 평평해서 예쁜 티, 잘난 티 안내는 그런 길이 오래 마음 속에 남습니다.

 
이 책은 동 시인이 2007년 '국제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다듬고 엮은 책이다. "문체를 현재형으로 했습니다. 길을 걷고 있는 이 느낌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에. 문장에서 반복법이 자주 쓰인 건 벽돌을 한장 한장 쌓아올리는 삶의 과정을 그런 방식으로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거고요."

주남돌다리

"최고 명소"를 꼽아달라는 말에 동 시인은 난감한 듯 웃으며 "주남저수지의 돌다리"라고 했다. "서로 다른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고, 좋고 나쁨이 공존하는 삶을 긍정하게 해주는 곡선미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내면의 자신을 찾아가 만나는 과정이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 2009년 2월 19일 국제신문에 실린 조봉권 기자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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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밤마리 들길


밤이 맛있는 마을, 밤마리. 낯설면서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멀리 있으면서 가까이 있는 이름이다. 생밤을 깨물듯 콕 깨물고 싶은 이름이다. 생각만 해도 밤꽃 향기에 정신이 어찔해지는 이름이다. 생각만 해도 밤꽃 향기에 옷자락이 옷소매가 물드는 이름이다. (본문 중에서)


천자는 마차를 타고 천재는 걷는다
언제부턴가 인간이라는 동물은 걷기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도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가장 혁명적인 사건은 직립보행이었습니다. 천자는 마차를 타고, 천재는 걷는다고 합니다. 니체는 “창조력이 가장 풍부하게 흐를 때는 언제나 나의 근육이 가장 민첩하게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책은 시인이 근육을 가장 민첩하게 움직이면서 얻은 사색의 결과물입니다.


등단 20년 만에 낸 첫 산문집
저자 동길산은 20년 전인 1989년 등단한 전업 시인입니다. 경남 고성의 시골에서 살면서 시 쓰기에 전념하고 있는 저자는 그동안 『을축년 詩抄』 『바닥은 늘 비어 있다』 『줄기보다 긴 뿌리가 꽃을 피우다』 『무화과 한 그루』 등 여러 권의 시집을 펴낸 바 있습니다. 하지만 산문집을 펴낸 것은 등단 20년 만에 처음입니다.

신국판, 값10,000원

이 책은 저자가 부산 곳곳을 비롯하여 경남 20개 시·군을 한 군데 빠짐없이 발품해서 쓴 부산·경남 기행 산문집입니다. 그러나 책의 제목 『길에게 묻다』에서 짐작해볼 수 있듯이 이 책이 단순한 기행소감문이나 여행안내서는 아닙니다. 저자는 길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통로로 생각하고, 바로 그 길에서 나와 다른 남과 소통하는 광장을 발견합니다.


들길 한가운데 나를 세우다
모든 사유는 걸음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풍경에 끝없는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자동차를 타고 한 바퀴 휙 둘러보는 걸로는 결코 대신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와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걷기는 바쁘고 힘든 일상에서 상처받은 나를 치유하고, 지치고 찌든 몸과 마음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일입니다. 들길 한가운데 나를 세우면 몸이 낭창대고 마음이 낭창댑니다. 싱그러운 마늘밭과 버드나무를 보면서 나를 바라봅니다.

800km 산티아고 순례길에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례길을 걸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나를 찾는 여정이었다고. 하지만 굳이 그 먼 나라가 아니면 어떤가요. 시인은 살고 있는 고성집 인근의 부산 경남에 있는 길들을 새롭게 걸어봅니다.

오광대의 발상지인 합천 밤마리 들길을 걸으며 부당한 권위를 거부하던 저항의 길을 느낍니다. 창원 주남저수지 둑길을 걸으며 둑길 이쪽과 저쪽이 하나로 이어져 상생하고 화해함을 기대합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넘나드는 사천 선진리성 성길에서는 안이면 어떻고 밖이면 어떠냐고 말하는 성의 소리를 들으며, 삶의 낙천성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부산 경남의 인문 지리지
합천 밤마리 들길, 거창 빼재 고갯길, 부산 이기대 해안길 등 18군데의 길이 실린 1부에서는 주로 아름다운 산책길을 소개합니다. 혼자서 걸으며 사색에 잠겨도 좋고, 연인끼리 걸으며 다정한 말을 나누기도 좋으며, 혹은 사이가 틀어진 가족이 함께 걸으며 화해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기대 해안길


 

감만동에서 온 선옥이 엄마도 야호다. 표정도 야호고 속내도 야호다. 선옥이 엄마는 이런 데가 있는 줄 모르고 지낸 사십대 중반 소띠다. “부산 살아도 이런 데는 못 봤어예. 그저께 난생 처음 와 보고 오늘 또 왔어예.” 처음 와서도 야호다. 두 번 세 번 와서도 야호다.
삼십대 쥐띠인 이병제씨는 공무원답게 점잖다. 점잖게 말하지만 야호이기는 마찬가지다. “근사하네요. 바다와 산과 사람이 한데 어울러져 멋지네요.” 뜸을 들이다가는 부산사람들 복 받았다는 말을 꺼낸다. 다음에 좋은 사람과 같이 오고 싶다고 한다. 그 말이나 야호나 같은 말이다. ('부산 이기대 해안길' 중에서)

 

2부에서는 길을 걸으며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 17군데를 소개하고 있다. 카랑카랑한 지리산 아래 산청 산천재에서 남명 조식을 만나고, 숲길을 한참이나 올라간 김해 천문대에서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만납니다. 또 통영 남망산에서는 박경리, 윤이상을 비롯한 통영의 예술가들을 추억합니다. 사천 굴항과 군위숲에서는 조선 바다를 지키기 위해 왜적에 맞서 싸우다 죽어간 이순신과 이름 없는 조선 수군을 애도합니다. 길 하나하나에 서려 있는 우리 역사와 문화를 돌아다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함안 채미정 가는 길. 길가집 마당에서 김장을 담그는 아주머니.

 

곶감이다. 꽃감이다. 꽃 같은 감이다. 길가 촌집들을 넘보며 지나다가 선다. 대문은 열려 있고 점심 무렵 햇볕이 모조리 마실 나온 성싶은 촌집. 마당 안쪽엔 대나무 장대가 횡으로 걸쳐 있다. 대나무 장대에 간격을 맞춰 매단 곶감. 간격을 맞춰 꽃핀 꽃감. 들어간다. “사진 좀 찍어도 되겠습니까?” 곶감 아래서 김장김치를 버무리던 아주머니 둘, 누군고 본다.

한 마디 두 마디 말이 오간다. 말만 오가기 뭐해 김장김치를 맛보이고 “김치만 먹어서 우야겠노. 밥 있는데 한 그릇 퍼다 줄까?” 밥도 내놓는다. 도회지 나간 자식들 대하듯 대한다. 얘기 중에 함안 조씨가 나오고 한 아주머니가 무어라고 물어본다. 사투리 탓에 말이 빠른 탓에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못 알아듣고 엉겁결에 예라고 얼버무리자 더 챙겨 준다. 국까지 ‘뎁혀서’ 내온다. 상을 차린다. “아저씨도 조씬교?” 나중에 되짚어 보니 물은 말이 대충 그렇지 싶다. 이 근동은 함안 조씨 집성촌이다. ('함안 채미정' 중에서)




문체에 대한 저자의 꿍꿍이
『칼의 노래』 저자 김훈 선생은 라디오 대담프로에 나와 자신의 문체에 대해 언급하면서 문체는 음색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듯이 사람마다 문체도 다르단 얘기였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시인 동길산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체는 지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산문집은 문체에 대한 저자의 꿍꿍이입니다.

동길산의 문체는 굳이 말하자면 벽돌쌓기 문체입니다.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아가듯 한 문장 한 문장 글의 담장을 쌓아갑니다. 벽돌 한 장이라도 빠지면 위태해지는 담장처럼 한 문장이라도 빠지면 위태해지는 글이 저자가 추구하는 문체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문체를 세 가지로 말합니다.

짧게, 현재형, 그리고 ‘남보다 먼저 안 웃기

짧은 문장은 속도감을 준다. 그러나 글이 짧다고 짧은 문장이 아니며 글이 길다고 긴 문장이 아니다. 짧아도 긴 문장일 수도 있으며 길어도 짧은 문장일 수 있다. 일사일언처럼 결국 적재적소의 문제이다. 문장이 길어야 할 때 짧은 문장은 잘못된 문장이며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형은 생기가 있다. 생동감을 준다. 현장에 있는 느낌을 준다. 일 분 일 초 만 지나도 과거가 되는 현실에서 현재는 얼마나 짧은가. 얼마나 귀한가. 욕심일는지 몰라도 나는 현재를 진득하게 붙잡고 싶고 내가 붙잡은 현재를 글 읽는 이와 함께 나누고 싶다. 현재형 문장은 그러한 나의 욕심이다. 욕망이다.

남보다 먼저 안 웃기.
우스운 얘기를 들려준다며 동네 조무래기들을 모아놓곤 얘기 도중에 먼저 웃던 형들의 기억! 글에도 표정이 있다면 표정관리가 잘 된 글이 좋은 글이리라. 나의 감정을 드러내기 전에 읽는 이가 감정을 드러내게 하는 글이 좋은 글이리라. 슬슬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글을 쓴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우면서 나는 웃음을 참는다.(동길산)


이상이 문체에 관한 저자의 생각이고, 그런 글을 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책은 비록 산문집이기는 하지만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하고 읽어도 좋겠습니다.

동길산 시인은
1960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을축년 詩抄』 『바닥은 늘 비어 있다』 『줄기보다 긴 뿌리가 꽃을 피우다』 『무화과 한 그루』를 펴냈습니다. dgs1116@hanmail.net

책의 사진을 찍은 박정화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2006년 인도기행사진전을 연 바 있습니다. chand14@hanmail.net


제1

 

합천 밤마리 들길
창원 주남저수지 둑길
사천 선진리성 성길
삼천포 노산공원 돌나무길
마산 산호공원 ‘시의 거리’
부산 영주동 시장통
함안 말산 고분길
진주 경남수목원 침엽수길
‘밀양’역 광장
태종대 등대길
하동포구 물길
해운대 청사포 오솔길
부산 이기대 해안길
남해 다랑이 마을 논길
거창 빼재
최계락 외갓길
부암동 굴다리
부산 영락공원 묘지길

제2부

산청 산천재

김해 천문대
낙동강 하구의 노을
함안 채미정
통영 남망산과 한려수도
범일동 증산
밀양 감내
의령 설뫼
영도다리
지리산 백무동
창녕 비봉리 유적
사천 굴항과 군위숲
양산 삼수리
진해 웅천 도요지
거제도 외포
마산 중앙부두
고성 대가저수지

Posted by 산지니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