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 이와나미쇼텐의 <사고의 프런티어> 시리즈 중 5권이 

동시에 번역출간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경향신문 백승찬 기자님께서 푸른역사에서 나온 이 책들을 소개해주셨는데요. 

<역사/수정주의>, <인종차별주의>, <권력>, <사회>, 그리고 시리즈의 입문서 격인 <사고를 열다> 입니다.

기사 읽기: “일본, 전후 책임 완수가 ‘대일본제국’ 연속성 끊는 길”


기사에서 소개해주신 대로 <사고의 프런티어> 시리즈는 

"현대 일본 사회에서 급부상한 키워드를 통해 

지식체계와 정치사회적 현실의 상호작용을 분석"합니다. 

"일본에선 1999년부터 지금까지 총 32권이 발간"되었는데요.


국내에 <사고의 프런티어> 시리즈가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저희 출판사에서는 작년에 이 시리즈 중 

정치학자 우에노 나리토시의 『폭력』을 출간했었죠.



2006년에 나온 원서가 산지니를 만나게 된 것은, 

젊은 연구자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부산에는 '해석과 판단'이라는 젊은 학자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2011년, '해석과 판단'의 연구 주제는 '폭력'이었는데요.

이때 모임의 구성원 중 한 명인 정기문 선생님께서 일본에 연수를 가 계셨고,

바로 이 책을 꼭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셨다고 합니다.

부산으로 돌아와 멤버들에게 이런 생각을 전하고,

저자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공식적 번역 경험이 없는 정기문 선생님이셨지만, 저자는

지역, 그리고 젊음이 가질 수 있는 활력과 가능성의 측면에서 

흔쾌히 번역을 승낙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기문 역자의 목소리로 직접 『폭력』이 어떤 책인지, 

이 책을 한국 독자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으셨던 이유는 무엇인 들어볼까요.


주체 내부에 꿈틀거리는 폭력과 주체가 살아가는 외부적 구조가 양산한 폭력의 층위를 고찰하는 『폭력』의 논의는,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는 폭력적 사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또한 근대 국민국가라는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비)국민에게 가해지는 폭력, 글로벌한 시대에 일상적 불안을 불러오는 테러, 질서와 폭력, 이성과 폭력, 우정과 적대 등의 논의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지금 여기의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된다.

_옮긴이의 말 중에서



한나 아렌트는 20세기를 '폭력의 세기'라 명명했습니다. 전쟁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이전 세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량의 죽음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20세기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으로 인해 폭력은 인간의 야만적인 행동이 아니라 합리성과 이성이 얽혀 있는 것임을 확인했던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기문 역자님께서 말하셨듯이, 오늘날의 글로벌 테러, 근대 국민국가의 폭력 등은 21세기에도 폭력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저자 우에노 나리토시는 아렌트, 슈미트, 벤야민,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 20세기 전반 독일어권 학자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폭력의 근원을 다시 물으며, 폭력과 뒤얽힌 근대, 국가, 전쟁, 정치, 이성 등의 논점을 충실하게 파고듭니다. 하나의 사건에 집중하기보다 폭력 그 자체에 집중해 폭력이 지닌 여러 층위를 고찰하는 것이죠.

///

역사 수정주의를 비롯해, 

근래에는 국민국가가 (비)국민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한 뜨거운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고의 프런티어> 시리즈의 『폭력』을 통해 이러한 쟁점들을 

그 뿌리부터 살펴보시는 건 어떨까요? 



관련글 읽기

  • 2014/05/26 『폭력』 읽기 전 준비운동!!
  • 2014/03/27 우리 시대 폭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폭력』(책소개) (1)
  • 2014/03/27 로쟈가 추천한 책


  • 목차

    더보기



    폭력 - 10점
    우에노 나리토시 지음, 정기문 옮김/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ㆍ‘신경숙 표절 논란 두 달’ 토론회…창비·문학동네 침묵에 쓴소리

    “1894년 갑오경장 이후 폐지된 과거제를 기다리면서 옛 문장 읽고 쓰기에 붙들려 살았던 100년 전 유생들은 여러모로 지금의 문학장을 닮았다. (…)다른 몸체로 옮겨가되 문학의 위대한 속성은 보존해야 한다. (…)그러니 겨우 신경숙쯤으로 징징거리지 말고 새로운 변화를 향해 야망을 품자.”(임태훈 평론가)

    신경숙 작가의 표절 논란이 촉발된 지 두달여 만인 26일 ‘리얼리스트’ ‘실천문학’ ‘오늘의 문예비평’ ‘황해문화’ 4개 문예잡지가 공동 토론회를 열었다. 논의는 두달간 침묵한 창비와 문학동네를 비롯한 문학장의 현재를 되짚고, 새로운 몸, 새로운 개념의 문학이 필요하다는 요구로 모아졌다.

    소영현 ‘21세기 문학’ 편집위원은 사태 이후 가을호 계간지들의 반응을 검토한 결과 “문학장의 일원들이 지난 두 달여간의 사태 추이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문학장의 미래를 위해선 ‘성역으로 지켜지는 획일적 문학관’이 변해야 한다며 장르문학에 대한 홀대, 흐릿한 순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끝내 고수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그는 “좋은 문학을 선별하고 판정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좋은 문학인지 그 판정 기준은 어떻게 구축돼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본격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태훈 ‘말과 활’ 편집위원은 “현행 문학제도를 이어갈 토대 붕괴는 시간문제”라며 ‘새로운 문학의 몸’을 상상해야 한다고 봤다. 그 대안으로는 크라우드 펀딩, 뉴스 펀딩 등을 통한 새 출판 생태계 구축, 나름의 미학적 성취를 이룩하고 있는 게임과 웹툰의 몸을 빌린 ‘다른 문학’ 등을 들었다. 

    임씨는 두달 간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은 ‘메이저 문예지 편집위원’에 대해서는 “이런 대응으로 세상을 휘몰아치는 말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을 리 없다. 느리든 빠르든 속도는 메시지다. 문학장 바깥의 속도를 영민하게 감지하고 필요한 메시지를 가속 또는 감속시킬 수 있는 능력의 결핍은 비평계 전반에서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비평가 개개인의 능력 차라기보다는 둔감한 제도와 자족적 문화의 한계”라며 “창비 가을호가 딱 이 사례”라고 말했다.

    박형준 ‘오늘의 문예비평’ 편집위원은 “창비, 문학동네에 요구되는 것은 ‘문학권력’이어서 미안하다는 반성이 아니다. 자신들의 물적·인적 기반과 파급력을 통해 수행·지향했던, 한국문학의 보편화·보편성에 대한 기획과 전략이 실패했을지 모른다는 것을 자성하지 않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신경숙 사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직접 현실과 조우하지 못하는 많은 작가와 비평가가 어떻게 ‘한국문학을 망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라고 했다. 이강진 평론가는 “창비와 문학동네는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각각의 논리로 신경숙 상찬에서 합의했다. 왜 그렇게 접근하는지, 서로 비판했다면 기묘한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보편적 사고라는 환상과 강박을 깨고 ‘끼리끼리’ 문화가 강화돼서 자기들 입장을 확고하게 내세워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근 창비가 내놓은 ‘내용 없는’ 가을호에 대해 토론 참가자들은 회의적이었다. 임씨는 “창비 얘기를 듣고 기운이 빠졌지만, 앞으로 하는 게 뭔지 상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씨도 “창비 가을호 목차를 보면서 ‘내가 왜 이런 걸 하고 있나’ 회의도 들었다. 정제된 입장을 기다리던 독자로서 착잡함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여란| 경향신문 | 2015-08-26

    원문 읽기

    오늘의 문예비평 2015.가을 - 10점
    산지니 편집부 엮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안녕하세요. (--)(__)(^^)

     

    주말을 지나온 사이 갑자기 날이 확~ 더워졌네요.

     

    아침에 오자마자 에어컨을 켜고, 차가운 커피를 한 잔 마셔도

    더위를 이기기가 힘든 것 같은데요,

     

    신문을 펼치자마자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이런 더위가 싸악~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왜냐고요?

     

    짜-잔!

    오늘 자(7/27) 경향신문입니다.

     

     

     

    눈치채셨나요?

     

    그래도 아직 잘 모르시겠나는 분들을 위해

     

     

     

     

     

     

     

     

     

     

     

     

     

     

    ☜ 이 전면광고를 주목해주세요!

     

    이제 아시겠죠?!

     

    ^_______________^ 

     

     

     

     

     

     

     

     

     

     

     

    조갑상 선생님의 소설집 『다시 시작하는 끝』광고가

    경향신문에 실렸습니다.

     

    오늘 경향신문을 읽다가 이 광고를 보시고

    반가워하셨을 분들도 있었을 것 같네요.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조갑상 선생님의 첫 소설집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7/27) 저녁 7시,

    자유바다소극장에서

     

    시민과 함께 하는 문학 톡!!

    조갑상 소설집 『다시 시작하는 끝』

     

    행사가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중앙역 2번 출구에서 약 200m 걸으면 '자유바다소극장'이 나옵니다.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
    도움말 Daum 지도
    Posted by 비회원

    [한기호의 다독다독]

    정말 앞날이 캄캄합니다. 작년의 ‘세월호 참사’는 국제적인 동정이나마 살 수 있었지만 올해의 ‘메

    르스 참사’는 국제적 외면을 자초했습니다. 거리나 상가는 한산해지고 소비시장은 잔뜩 얼어붙었습니다. 상황이 이럼에도 국민통합과 경제민주화를 이루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양파 껍질을 벗기듯 생각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여당의 원내대표마저 ‘벗겨’ 낼 태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삶의 안전망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불안을 넘어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심각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 공포의 대상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다 강한 존재, 악마 같은 존재에 기대려고 한다지요. 공포가 강할수록 사회가 보수화되는 것이 이런 이치라고 하는군요.

    이럴 때 인간은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갈구합니다. 하지만 한국 소설은 이야기보다 유려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바람에 독자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표절’이나 ‘자기복제’의 위험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신경숙은 그만의 고유한 문체로 지난 시절 대중을 압도한 작가입니다. 오길영이 <힘의 포획>(산지니)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신경숙의 문체는 “서정적이고 섬세”하기에 때로는 “감상성의 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문에 ‘표절 파동’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오길영은 좋은 문체는 “아름다운 문체(美文)”가 아니라 “대상의 진실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문체”라고 말합니다.

    올해 여름 독서시장에서도 대중은 ‘이야기’를 찾고 있습니다. 올해 여름 출판시장을 달굴 외국 소설 세 권이 그걸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오베라는 남자>(프레드릭 배크만, 다산책방)는 59세입니다. 열여섯에 고아가 된 그는 열심히 일해서 모기지도 갚고 세금도 내고 의무도 다했습니다. 소냐와 결혼하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자고, 서로 그렇게 동의했습니다. 40년 동안 한 집에서 살고, 같은 일과를 보내고, 한 세기의 3분의 1을 한 직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젊은 관리자들이 “이제 집에 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늘 똑같은 일만 한 것이 직장에서 쫓겨난 이유가 됐습니다.

    반년 전에 소냐가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자 그는 자살을 결심합니다. 자살을 결행하려는 순간 이웃집에 이사온 젊은 부부와 어린 두 딸이 찾아옵니다. 오베는 자신의 자살을 막은 그들에게 처음에는 까칠하게 대하지만 점점 마음을 열어가며 무심한 듯 열심히 챙겨줍니다. 오베는 근면과 성실을 최고 덕목으로 알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은퇴의 압박을 받는 우리의 평범한 이웃입니다.


    <나오미와 가나코>(오쿠다 히데오, 예담)는 가정폭력에 저항하는 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가나코 남편의 폭력은 결혼하고 3개월이 지난 무렵부터 시작됐습니다. 술에 취해 돌아온 남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갑자기 흥분해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두 손을 싹싹 빌며 사과했지만 폭력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갔습니다. 백화점 외판사원 나오미는 가나코가 ‘유일한’ 대학 동창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맞는 걸 보며 자란 나오미는 가정폭력이 주변 사람들마저 지옥에 빠트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친구의 아픔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나오미는 가나코를 설득해 가나코의 남편 다쓰로 ‘클리어런스 플랜’(남편 제거 계획)을 함께 세웁니다. 처음에는 겁에 질려 떨던 가나코도 점점 용기를 얻고, 자신을 구하겠다는 각오로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는 두 주인공이 그랜드캐니언의 벼랑 끝을 질주해 장렬하게 자살해 해방된 세계를 찾아가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당당하게 맞섭니다. ‘데이트 폭력’이 소셜미디어를 달구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늘 마주하는 일상의 작은 폭력이 실은 세계의 거대한 구조적 폭력의 씨앗임을 예리하고 생생하게 보여주는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가르치려 한다>(창비)의 문제의식과도 맥락이 닿아 있습니다.

    <황금방울새>(도나 다트, 은행나무)에서 열세 살 소년 시오는 엄마와 함께 북유럽 황금기의 명작들을 전시한 미술관에 들어갑니다. 엄마는 시오에게 렘브란트의 제자이자 페르메이르의 스승인 파브리티우스의 ‘황금방울새’가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이자 “내가 정말로 사랑한 첫 번째 그림”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때 미술관에서 테러가 발생해 전시회장은 아수라장에 빠집니다. 

    엄마는 즉사하고 시오는 사고 현장에서 만난 기묘한 노인 웰티의 청으로 반지와 작은 그림을 갖고 미술관을 빠져나옵니다. 사실상 고아가 된 시오는 엄마와의 마지막 추억이 살아있는 ‘황금방울새’ 그림을 품에 안고 웰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반지 주인을 찾아 나섭니다. 시오의 인생유전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상실과 집착, 운명에 대해 집요하게 묻고 있습니다.

    이야기성이 강한 세 소설의 공통점은 모두 ‘죽음’을 화두로 하고 있습니다. 한없이 지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아툴 가완디, 부키)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 즉 존엄한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를 갖고자 합니다. 그런 용기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소설들이 품은 이야기에서 위로와 구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한기호 | 경향신문ㅣ2015-06-29


    원문 읽기


    힘의 포획 - 10점
    오길영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루게릭병을 앓는 부산의 소설가 정태규씨(57·사진)가 눈으로 쓴 창작집 <편지>(산지니)를 최근 출간했다.

    <편지>에는 단편소설 8편과 콩트, 스토리텔링 등을 합쳐 14편의 작품을 실었다. 구술과 안구 마우스에 의존해 작품을 썼다. 작가는 2년 전부터 천천히 몸 전체가 마비되어 갔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아쉬움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작품이 한 권 분량에 못 미쳐 두어 편 추가하려고 계획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구상만 겨우 끝냈을 때 나는 이미 말하는 능력을 잃고 있었다. 구술할 형편도 못되었다. 귀하신 안구 마우스는 자주 고장을 일으켜 미국 본사에 다녀오느라 적응할 시간이 부족했다.”

    <편지>의 수록작 대부분은 작가가 아프기 전에 큰 줄기를 잡아 놓은 것이지만 그 가운데 ‘비원’은 말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던 지난해 여름에 집필한 것이다.

    ‘비원’은 루게릭병을 소재로 한다.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원망과 회한이 죽음의 공포를 버텨낼 만한 강한 위안과 결심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그렸다.

    작가는 “이제 여유롭게 글을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는 “루게릭병이 허락한다면 널려 있는 시간에 여유롭게 새로운 단계의 글쓰기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부인 백경옥씨는 15일 “‘비원’을 쓸 때는 구술에 의존해 겨우 하루 원고지 6∼7장밖에 쓰지 못할 정도로 힘겹게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백씨는 “상태가 나빠져 요즘은 누워서 지낼 때가 많고 이젠 구술도 힘들다. 다행히 미국에서 수리한 안구 마우스의 성능이 좋아져 카카오톡으로 소통하며 다음 책 출간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는 2012년 겨울 루게릭병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다.

    권기정ㅣ경향신문ㅣ2015-01-15

    원문 읽기

    편지 - 10점
    정태규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다들 프랑스의 <샤를리 엡도>지 테러 사건을 언론지상에서 접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었는데요.

    저는 그 사건을 바라보면서 과연 프랑스만을 옹호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으로 한참 고민스러워졌습니다.

    문화평론가 이택광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며칠 전, 경향신문 칼럼을 통해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저지른 사건의 이면을 들 보면, 약자들이 문화권력자인 서구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 '폭력'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테러범들을 옹호한다는 반대 댓글이 많이 달리기도 하였고요. 국내에서도 '표현의 자유'냐 혹은 '폭력의 또 다른 옹호'냐 하는 논쟁으로 뜨거웠습니다.


    [이택광의 왜?]‘표현의 자유’라는 상식에 대한 도전

    >>원문보기

    프랑스의 시사만평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는 ‘성역 없는 풍자’를 날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주간지는 ‘풍자’의 대상으로 삼을 ‘성역’에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종교지도자들도 포함시켰다. ‘성역 없는 풍자’는 근대 이후 계몽된 시민의 권리 중에서도 최상에 속하는 것이다. 일찍이 많은 사상가들이 앞다퉈 요구하고 옹호했던 권리가 바로 ‘표현의 자유’였고, 이 자유를 실현하고 있다는 척도로서 ‘성역 없는 풍자’에 대한 개인이나 사회의 개방성이 거론되곤 했다. 

    이런 관점에서 ‘표현의 자유’는 근대 문명의 원리로 간주되었고, 이를 억압하거나 배척하는 행위는 야만으로 규정되었다. ‘샤를리 에브도’ 사무실에 난입해서 만화가들을 살해한 알카에다를 자처하는 무장 괴한들의 행위를 야만이라고 부르는 서방 세계의 입장도 이런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모든 무장폭력은 문명을 파괴하는 야만적인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는 일고의 가치도 없이 비판 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내가 샤를리다”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사망한 만화가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연대의 목소리는 테러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용인하지 못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향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차이는 미세하게 보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내가 샤를리다”라는 구호는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가 일어난 그 원인을 드러내는 증상에 가깝다. 정작 이 구호에서 빠져 있는 것은 이번 테러를 촉발한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인 “누가 샤를리인가”라는 질문이다. 과연 “내가 샤를리다”라는 구호에 무슬림은 포함될 수 있는가. 무슬림이 “샤를리”이고자 한다면, 그는 세속주의를 용인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내가 샤를리다”라고 주장하는 세속주의자가 무슬림을 “샤를리”로 인정하려면 종교적 신념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샤를리 에브도가 평소에 주장해온 ‘성역 없는 풍자’는 이런 관용의 정신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었을까. 표현의 자유를 전면에 내세운 이 주간지는 ‘성역’에 대해 세속주의의 관점을 고수하는 입장에 더 가까웠다. 이 세속주의는 근본주의자에게 커다란 위협이었고, 따라서 주간지는 이슬람 세계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무슬림 무장단체들에 ‘눈엣가시’였다. 이런 위협이 현실적이었기에 문제의 테러 사건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샤를리 에브도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던 것이다. 

    내부적인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계화는 이주노동자들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냈다. 결과적으로 공존은 이제 선택 사항이라기보다 필수 사항이다. 이런 조건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근대적 원칙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원칙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모든 이들에게 허락되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지만, 일상에서 차별과 배제는 항상 일어난다. 그 까닭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권력 때문이다. 말하자면, 다 같은 표현의 자유라고 해도 권력의 유무에 따라 결과는 각기 다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표현의 자유는 사회적 약자에게 필요한 권리였다. 권력자에게 표현의 자유는 피곤한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우화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적 약자는 표현할 것이 있더라도 쉽게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합리적인 장치였던 셈이다. 독일 철학자 칸트도 이런 맥락에서 이성을 공공적으로 사용하는 것, 쉽게 말해 언론과 학문의 자유는 무한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표현의 자유는 화폐가치처럼 모든 것을 동일한 가치로 나누어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약자의 목소리가 소외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필요한 권리이다. 이번에 발생한 프랑스의 비극은 오늘날 상식으로 굳어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생각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이번 테러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관점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층위를 가지고 있다. 한국 역시 이런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극우주의자들이 피해자를 자처하면서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혐오감에 근거한 테러 행위를 ‘애국’이라고 치장하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은 프랑스의 비극이 소극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저는 개인적으로 홍세화 선생님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고 자라며, 프랑스에 대한 좋은 시각으로 성장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로 망명한 그의 프랑스 생활을 보며, '똘레랑스'(관용)라는 프랑스인들의 고유한 정신이 무척이나 부럽기도 하였는데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의 똘레랑스 정신이 훼손되고, 종교적 대립이 극심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지만 저는 이 기회를 계기로 기독교인인 프랑스인들이 먼저 반성하고 성찰한다면 이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개선되지 않을까 하네요.

    무차별 시민을 테러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나, 상대주의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폭력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논리도 있지만요)

    이번 기회로 프랑스인들이 모두 'Je suis Charilie'를 외치며 대동단결했다던데, 그들이 외치는 자유는 '프랑스인들만의 자유'인걸까요? 프랑스인들의 자유가 프랑스인들에게 소중한 만큼, 저는 이슬람인들의 종교적 가치도 무슬림들에게 소중하다고 봅니다. 



    계명대 독일러문학과 장희권 교수의 『글로컬리즘과 독일문화논쟁』


    이슬람 첨탑 금지 홍보 벽보. 첨탑이 미사일 탄두 모양으로 묘사됨. <바디쉐 짜이퉁>, 2010년 10월 12일. 독일사회의 이슬람 반대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려는 게 아닙니다. 기사(링크 참조)에도 나와 있듯 노르웨이인들 또한 무고한 이슬람 교도들을 더 많이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왜 제대로 보도되지 않고, 제대로 된 사과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묻혀버렸나 하는 것이죠.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서구언론 위주로 편향적으로 보도된 우리 언론의 문제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과적으로 이번 사태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주창하는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이 잘못을 저지른 것은 맞습니다. 과연 무슬림들은 총기 난사라는 해결책밖에는 없었던 것일까? 그들이 믿고 있는 신 또한 이런 결말을 바랐던 것일까, 하고 말이죠. 세월호 사건의 직접적인 책임이 이준석 선장과 유병언 회장에 있듯이요.

    하지만, 세월호 사건의 근본 원인이 우리 사회구조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듯, 이번 사태의 원인 또한 단순히 무슬림 테러리스트의 잘못만은 아닐 것입니다.

    '펜에는 펜으로 대항하라'라는 논지는 사실 이택광 교수가 지적했듯, 약자인 무슬림들에게 맞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프랑스인들의 표현의 자유에 대항할 마땅한 '펜'(문화 권력)이 없기 때문이죠. 그들이 칼을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한번 더 고찰한다면 글로벌과 전 지구화 사회의 이주현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민족 갈등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네요.


    함께 읽어볼만한 책 : 글로컬리즘과 독일문화논쟁


    글로컬리즘과 독일문화논쟁 - 10점
    장희권 지음/산지니


    *본 포스팅은 엘뤼에르 편집자 개인의 생각으로, 산지니 출판사의 입장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Posted by 비회원

    서신으로 읽는 두 지성의 세기적 사랑



         독일 실존철학의 거장인 마틴 하이데거(1889~1976)와 그의 제자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1906~1975) 사이의 사랑은 꽤나 유명하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등 ‘세기적 연인’들 사이의 관계와 이래저래 비교되기도 하면서, 하이데거와 아렌트는 이른바 지적인 사랑의 대명사로 회자돼왔다.


         이들의 관계를 단순히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그동안 많았다. 육체적·정신적 사랑을 넘어 제3자가 쉽게 규정하기 힘든 묘한 관계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정, 정신적 동반자, 사상을 교유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몽땅 녹아들어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실 하이데거와 아렌트 관계는 세간의 관심을 끌 만한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다. 둘 다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들인 데다, 열일곱 살의 나이 차이, 하이데거는 독일 민족을 강조했고 아렌트는 유대인이라는 차이도 있다. 더욱이 하이데거는 나치에 적극 협력했고, 아렌트는 전체주의 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한 명저 <전체주의의 기원>을 썼다. 하이데거와 아렌트가 처음 만날 때 하이데거는 유부남이기도 했다.


         이들은 첫 만남 이래 아렌트가 세상을 떠나는 1975년까지 무려 50년간 관계를 유지했다. 십수년간 서로 만나지 못한 경우도 있고, 편지를 주고받은 것도 그렇게 자주라고 할 수 없지만 그들은 그야말로 세기적인 사랑을 이어간 것이다.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신 속 대화, 주위 사람들의 증언 등을 통해 위대한 이 두 철학자의 삶과 사랑, 사고의 전개과정, 인간적인 면 등을 분석한다. 저자는 2005년 타계한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작가이자 미국 MIT 교수를 지낸 엘즈비에타 에팅거다.


         책은 1924년 늦가을, 열여덟 살의 아렌트가 마부르크대학 철학과 학생이 되면서 하이데거를 처음 만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간의 흐름 순으로 구성됐다. 첫 만남 당시 하이데거는 역저 <존재와 시간>의 집필을 막 끝낸 서른다섯 살의 대학 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교수였다.


         저자는 1925년 2월10일 하이데거가 아렌트에게 첫 편지를 보내고, 나흘 만에 두 번째 편지, 2주 후엔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까지 가까워지기 시작했음”을 알 정도로 두 사람의 삶과 생각을 내밀하게 분석한다.


         하지만 아렌트 중심으로 글을 쓴 흔적이 곳곳에 드러난다. 실제 책이 처음 출간될 당시 아렌트에게는 호의적인 반면,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어서 하이데거 측의 강한 반발을 부르기도 했다. 이 책은 두 사람의 편지를 소재로 한 첫 책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두 철학자의 내밀한 생각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경향신문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2013-08-16


    원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8162134375&code=900308




    나치즘 비판했던 그녀가 나치 옹호 思想家와 불륜을


    "아렌트는 '만약 당신이 날 원하신다면'이라며 조그맣게 속삭이곤 했다. 자신의 수줍음과 말 없는 숭배가 하이데거를 기쁘게 하고 흥분시킨다는 것을 그녀는 직관으로 알고 있었다."(39쪽)


         남자는 35세의 유부남 대학교수였고, 18세의 여자는 대학 신입생이었다. 1924년 독일 마부르크대학에서 시작된 이들의 '관계'는 이후 50년 동안 지속됐다. 현대 철학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두 사상가, 마르틴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다. 1995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돼 '공상 아니냐'는 논란을 일으킨 이 책은 편지와 증언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에 피와 살을 붙인다.


         그것은 숱한 철학서에서 두 사람이 보여줬던 관념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로 바뀌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 '사랑'의 현장에서 사상과 실존은 모순을 일으킨다. 존재와 시간을 탐구했던 하이데거는 거짓말과 광적인 집착, 상투적인 편지 문장을 썼던 사람이었고, 전체주의를 비판한 아렌트는 나치즘을 찬동한 사상가를 사랑했다는 걸 독자는 알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아렌트에 대해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여성이었으나 사적인 삶에 있어서는 여전히 전통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 2013.08.17


    원본보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16/2013081603345.html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 10점
    엘즈비에타 에팅거 지음, 황은덕 옮김/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김은경 편집자에 이어 이번에는 대표님 글이 경향신문 <책읽는 경향>에 실렸습니다. 이틀 연속입니다. 은경씨 글은 1면에 실어주는데 왜 내 글은 2면이냐고 대표님은 투덜댑니다. 하지만 오늘 출판사를 방문한 저자분께서도 신문에서 글을 보았다고 인사를 건네십니다. 신문은 안 보는 듯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보는 매체입니다.

    20대의 신뢰 회복, 혁명의 시작이다

    지금의 ‘방살이’들이 방에서 나와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하고, 거기서 다시 사회 혹은 동료들 속으로 돌아오는 일이 벌어지면 그게 바로 탈신자유주의 시대 공동체를 복원하는 첫 출발이 되리라는 점이다. 즉, 혼자 고독하고 외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 어쩌면 대한민국 경제가 다음 단계로 진화하는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방살이 20대 여러분, 어느 날 문을 노크하면서 “친구, 안녕?”을 외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차라도 한 잔 대접하거나 식어 버린 편의점표 삼각김밥이라도 내밀어 보면 어떨까. 또 당신도, “나 혼자 살 거야.” 라는 말도 안 되는 말로 위안을 삼으며 관계의 결핍으로 몸부림치는 친구의 방문을 노크하면서 “친구, 안녕?”을 외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혼자가 아니라 같이 밥 먹기 위한 노력, 이게 탈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하는 20대의 첫 출발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번져 가고 있다.
    지금 20대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리더와 진, 권력이나 교섭력이 아니라 방살이에 갇힌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고, 그러한 사회적 관계의 복원이다. “혼자라야 마음 편하다.”는 친구들을 불러낼 수 있는 우정과 그 친구들을 환대할 수 있는 밥상 공동체가 아닐까 싶다. 그런 다음에야 3무 세대란 말을 없앨 수 있고, ‘88만원 세대’를 한때의 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혁명은 이렇게 조용히』170-171쪽)

    대한민국 20대여! ‘쫄지 마, 안 죽어!’
    혁명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우석훈이 이야기하는 혁명의 복원이 대한민국에 필요하다. 지금 20대들도 혁명이라는 말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정과 환대의 공간 되찾기에서 혁명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20대의 신뢰회복으로 비정한 승자독식 체제에 파열구가 나는 것이 아닐까 상상하게 만든다.

    산지니 대표 강수걸


     

    -2010년 2월 19일 <경향신문>


    Posted by 산지니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