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진도 처가에 가면 장인어른과 함께

서망 수협공판장으로 싱싱한 해산물 사러 가는 길에

잠깐 지나치던 곳일 뿐이었습니다 이름이 특이했지만

수많은 항구들 중 하나일 뿐 특별할 것 없는

그 작은 항구에 마음 둔 적 없었습니다

그 작은 항구를

어린 딸아이의 손을 잡고 마냥 걸었습니다

노란 리본이 달린 등대와 하늘나라 우체통이 있는

부둣가 저 멀리, 자맥질하는 갈매기만 하염없이 바라보았

습니다

애써 슬픈 척, 애써 아픈 척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영정 앞에서

무릎 꿇고 절을 하는 나에게

딸아이는 물었습니다 아빠 지금 뭐해?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못했습니다

딸아이의 손을 잡고 마냥 걷기만 했습니다

팽목항, 그 이름이 내 가슴에 고유명사로 박히는 날이었습

니다

나는 내 아이의 손을 언제까지 잡아 주어야 할까요

조금만 더 크면 세상의 많은 것들에게로

마음껏 날려 보내 주고 싶었습니다

오래 붙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팽목항, 가슴에 새겨진 이 이름 앞에서

나는 딸아이의 손을 놓기가 두려워졌습니다

이 나라에 사는 동안은 내 아이의 손을

함부로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어떠신가요?


_이근영, 「팽목항」 전문

Posted by 에디터날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작고연약한것에대하여

#아이들과마시는나쁜선생이되었다

#그저물에말은밥에된장푹찍어

#고추한입먹는

#그런소박하지만정겨운맛이면좋겠습니다

#이근영심폐소생술


Posted by 에디터날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전북 남원에서 국어교사를 하고 있는 

이근영 시인의 시집 『심폐소생술』에는 

「현장체험학습 매뉴얼에 따른 공문서 작성-세월호, 그 후」라는 

조금은 특이한 시가 실려 있습니다. 



시인의 초고 원고를 조판하여,

편집부 교정을 마치고 시인에게 교정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시인에게 다녀온 1교지의 이 시에는 이런 코멘트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 시만 글씨체를 바꾸긴 힘들겠죠?

일부러 공문서 제목 그대로 따온 것을 강조하기 위해

글씨체를 다르게 썼는데..."




그러고 보니, 시인이 처음에 보내 준 한글파일의 원고에도 

다른 시들은 모두 명조체였는데, 

이 시만 일명 '굴림체'였습니다. 


조판을 하는 과정에서 

모두 동일한 서체로 바뀌었던 거였지요. 


그리고 이 시는 시인의 의견에 따라 

이렇게 재탄생했습니다. 



이 시는 세월호 이후 학교 내에서 작성해야 하는

 '현장체험학습 매뉴얼에 따른 공문서'의 리스트가 쭉 나열 된 것이 전부입니다. 


현장체험학습 매뉴얼에 따른 공문서 작성

- 세월호, 그 후


2016학년도 2학년 대상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실시 여부 및 장소 선정 관련 가정통신문 발송

2016학년도 현장체험학습(테마식, 숙박형, 수련활동) 실시(예정) 현황 제출

2016학년도 2학년 대상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실시 여부 및 장소 선정 설문 결과 보고

2016학년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수련활동 활성화위원회 개최

2016학년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수련활동 활성화위원회 구성 보고

2016학년도 2학년 대상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참여 여부에 관한 가정통신문 발송

2016학년도 2학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일정 및 예산 보고

2016학년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수련활동 활성화위원회 회의록

2016학년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용역 제안서 평가 실시

2016학년도 2학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제안서 평가 결과 보고

2016학년도 2학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관련 숙박시설 화재안전 점검 요청

2016학년도 2학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사랑티켓 구입

2016학년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에 대한 현장답사 실시 계획

2016학년도 2학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비 납입 관련 학생 및 인솔교사 명단

2016학년도 2학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비 납입관련 가정통신문 발송

2016학년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사전 답사 결과 보고

2016학년도 2학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비상연락망 운영 계획

2016학년도 2학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관련 수송버스 운전

기사 음주측정 및 수송버스 호위 요청

2016학년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인솔자 안전교육 및 사전연수계획

2016학년도 2학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오리엔테이션과 안전교육 및 성폭력 예방 교육 계획

2016학년도 2학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세부 추진계획 및 초과 근무계획 보고

2016학년도 2학년 테마식 현장체험학습 다과 품의

.

.

.



한 번의 현장체험학습을 가기 위해 작성해야 하는 공문서의 목록(무려 세 페이지)이 한 편의 시가 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 학교 현장은 많은 것이 달라진 모양입니다. 



달라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변했고, 무엇은 그대로일까요. 




심폐소생술 - 10점
이근영 지음/산지니


Posted by 에디터날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동글동글봄 2020.04.17 1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요한 건 문서가 아닌데요ㅠㅠ 에피소드 방출 재밌게 읽고 있어요. 이근영 시집 참 좋아요. 저도 좋아서 여기저기 홍보하고, 제 SNS에도 올리고요^^ 선생님 응원합니다

    • 이근영 2020.04.21 1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응원 고맙습니다^^ 누군가에게 제 시가 응원을 받는다는 게 기분이 참말로 좋아지네요^^



엄마, 담임이 나도 농약 좀 치고 오래

세상엔 엄마 같은 사람은 없어

누가 나를, 이 못생긴 얼굴을 사 갈까?

농약으로 버무려져도 윤기 반질반질 흐르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들만

백화점으로, 마트로 가서 팔리는 세상에서

엄마 닮은 이 빛깔, 아무도 쳐다봐 주질 않아

내 심장만 벌레가 다 파먹고 있어


엄마, 내 얼굴에, 내 심장에, 농약을 쳐 줘

농약을 쳐 줘 엄마, 윤기가 반질반질 나도록


_이근영 「못생긴 사과」 중에서



심폐소생술 - 10점
이근영 지음/산지니



Posted by 에디터날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Peace21 2020.04.10 09: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는 순간 먹먹해지는... 아픈 '시'입니다.
    근데, 요즘은 겉에만 살짝 흠집이 있지, 그 맛은 잘생긴 것 못잖은 '못난이 과일'이 인기인 것 같던데요~
    아이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담임의 편협한 시각이 오히려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