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펴낸 책보다 창업 그 자체가 더 뉴스가 되는 지역출판사

1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출판에 입문할 때 난 매우 불안정하였다. 편협한 독서와 좁은 인맥으로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집 근처 도서관과 서점을 배회하였다. 출판사 근무 경험도 없는 내가 어떻게 기획을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출판기획은 무엇인가,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책과 출판하고자 하는 책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정리가 덜 된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출판 창업을 결심하였다.

1년간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생각을 정리한 결과물이 지금의 산지니 출판사이다. 먼저 서울에 올라가서 창업을 할 것인가, 내가 나고 자라고 지금까지 생활해온 부산 지역에서 시작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결국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한번 해보자고 결심을 했고 2005년 2월 척박한 맨땅에 부딪히는 느낌으로 출판사를 시작했다.

2005년 10월, 출판사를 시작한지 8개월 만에 첫 책이 나왔다.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 『반송사람들』 두 책이었는데 홍보를 위해 지역신문사 문화부 기자를 찾아갔다. 처음으로 신문기사가 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정작 기사는 두 책에 대한 내용보다도 부산에 이러이러한 출판사가 생겼으니 많은 관심과 발전을 바란다는 요지였다.

서울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출판사가 생겼다가 사라지는데 지역(local)에서는 출판사를 설립한 것만으로도 뉴스거리가 되는 현실, 이게 바로 지역출판의 현실인가 싶어 자조적인 웃음이 나는 것과 동시에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결심 또한 생겨났다.


2. 지역출판사의 한계 뛰어넘기

『무중풍경-중국영화문화 1978-1998』은 2006년도 영화진흥위원회 출판지원도서로 선정된 책이다. 중문학 박사과정에 있는 후배에게 중국책 가운데 좋은 책이 있으면 추천해달라고 하니 이 책을 권해주었다.

중국영화계에서는 작은 고전이 된 책으로 저자 다이진화는 사유의 깊이와 폭넓음에 있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학자이자 작가인데, 글쓰기에 있어서도 정확한 어휘 선택과 개념정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번역이 여간 까다롭지 않은 책이었다.

모두가 그 책의 중요성은 인정하고 있지만 섣부르게 번역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에이전시를 통해 판권 확인에 들어가고 계약을 추진하면서 영화진흥위원회에 출판지원도서로 신청하였다.

그런데 이때 똑같은 책을 두 팀이 신청했다. 하지만 이미 판권을 확보한 우리 출판사로 몫이 돌아왔다. 번역 기간이 많이 걸려 출간 시한을 꽉 채워서야 출간하기는 했지만 두툼한 이 책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를 걷다-소설 속을 걸어 부산을 보다』는 부산의 대표적인 소설가 조갑상 경성대 교수의 산문이다. 이호철의 『소시민』의 배경이 된 완월동, 조명희의 『낙동강』, 김정한의 『모래톱이야기』에 나오는 구포다리와 을숙도……. 작가는 부산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소설의 현장을 살펴보고,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대와 지금의 변화된 모습들을 추억한다.

일면식도 없는 조갑상 교수를 창업 초기에 찾아갔다. 부산 문단 역사에 대표적인 인물인 요산 김정한 선생의 평전을 내보시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했다. 조갑상 교수는 김정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소설가로 요산의 평전을 쓰기에는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조 교수님은 지금 당장은 시기상조라고 하면서 상황이 무르익으면 추진해볼 만한 사안이라고 완곡하게 거절하셨다.

그런데 몇 달 후 부산에 대한 산문을 써놓은 게 있는데, 책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전화를 주셨다. 지역 출판사로서 꼭 내야 할 책이라 생각하고 출판을 결정했는데, 책의 느낌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사진이 필수적이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옛 사진은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그 모습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재 사진이 꼭 필요했다. 그런데 따로 사진가를 섭외하기에는 출판사 재정이 허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사진에 일가견이 있는 출판사 디자이너가 직접 사진을 찍기로 했다.

내면은 세심하지만 겉으로는 무뚝뚝한 작가의 성큼성큼 큰 발걸음을 종종거리고 따라다니면서 몇 날 며칠을 달동네를 오르내리고 도심을 걸어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1년여를 공들인 끝에 책을 내놓았는데 이후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어 출판사 재정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부산의 중견 시인 최영철 선생을 처음 본 것은 광주에서였다. 그것도 아주 우연히. 2006년 5월, 광주에 있는 거래서점인 충장서림과 삼복서점을 둘러보기 위해 광주로 향했다. 서점들은 광주 시내 한복판 충장로에 있었는데 주차할 곳을 찾다가 옛 도청(그때는 경찰청이 들어서 있었다)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차를 세워놓고 밖으로 나오는데 건물 한쪽에서 5‧18 문학행사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팔레스타인 등 외국 문인들도 참석하여 시낭송도 하고 강연도 들으며 함께 어울리는 자리였는데, 마침 최영철 시인이 시낭송을 했다.

몇 달 후 최영철 시인의 시집 『호루라기』를 주제로 부산 영광도서에서 독서토론회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최영철 시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몇 달 전 광주에서 열린 행사 때 뵈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왜 아는 척을 안 했느냐”며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반가워했다.

그동안 써놓은 산문을 모아 산문집을 내보시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을 했다. 최영철 시인은 팔리겠느냐고 걱정하면서도 원고를 건네주셨다. 이 책이 바로 『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이다. 부산의 풍경과 소재를 다룬 예술작품을 토대로 시인의 깊고 넓은 사색의 풍부함을 내보이고 있는 이 글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차별화된 책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지역화가 박경효에게 그림을 부탁했다. 사진을 싣기보다는 그림과 함께하면 좀 더 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화가가 부산 곳곳을 다니며 스케치하고, 채색을 하여 30여 점의 유화를 완성하기까지는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소모되었다. 시간과 공을 많이 들여 출간한 이 책도 우수문학도서로 선정이 되었다. 공들인 책은 누군가는 그 진가를 알아보는 것 같다.


3. 좋은 책을 세상에 남긴다는 높은 포부

5년 동안 출판 활동을 해오면서 출판사가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불리한 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성격의 기획출판을 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중요한 것은 출판미디어의 변화를 반영한 다양한 기획이며 다품종 소량출판을 통해 꾸준히 좋은 책을 시장에 내놓는 데 있다고 본다.

지역출판사로서 다양한 기획출판을 하는 것이 특이해 보였는지 여기저기 신문사, 잡지사, 방송국 같은 데서 인터뷰 요청을 하는 일이 많은데, 그럴 때는 꼭 산지니는 3등 전략(Sanzini Way)으로 나간다고 말하곤 한다. 모 잡지사 기자는 ‘3류 전략’이라고 기사를 잘못 쓴 적도 있지만, 결코 3류가 아닌 3등 전략이다.

이는 대형출판사들이 손대지 않는 틈새시장을 공략해 산지니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지역출판사로서 지역의 특성을 살린 책을 낼 수도 있고 서울 출판사들이 미처 다루지 못한 보석들을 발굴하여 책(종이책/전자책)으로 만들어 틈새시장을 찾아낼 수도 있다.

작가와 독자를 잇는 매개가 출판인이자 편집자이다. 출간할 책들이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책이 될 수도, 아까운 나무만 없애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이 세상에 정말 필요한 책인지 항상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출판을 한다는 것은 철학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발은 땅에 딛고 있되 머리와 가슴은 좋은 책을 세상에 남긴다는 높은 포부를 가지도록 노력하겠다.

-『나는 에디터다』(새물결)

나는 에디터다! - 10점
김병익 외 지음/새물결
Posted by 산지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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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성심원 2010.04.20 15: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네서점도 살려야하지만 지역 출판사도 살려야죠. 그래야 내 이야기, 내 이웃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으니까요.
    솔직히 서울중심의 책들은 가령 여행기만 해도 서울에서 어디로 떠나는 중심이라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읽으면 오히려 찾아가는길이 더 거추장스러워요.
    또한 마치 서울인들을 위해 지역민이 아닌 지방인들이 사는듯한 뉘앙스가 싫어요 ㅎㅎㅎ.
    아무튼 산지니출판사도 좋은 책 많이 출판하시고 덕분에 저도 우리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글을 많이 읽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BlogIcon 산지니 2010.04.20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응원 감사드려요. 성심원님. 앞으로 <산지니 로컬문화총서> 시리즈로 지역의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답니다. 시리즈 첫번째 책인 <신문화지리지-부산의 문화 역사 예술을 재발견하다>가 다음주에 나온답니다.


기쁜 소식 하나!

<무중풍경>이 2009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안개 속 풍경’이라는 뜻의 <무중풍경>은 현대 중국영화사와 영화비평에 관한 책입니다. 1999년에 다이진화가 쓴 이 책은 이미 ‘현대영화사의 고전’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중요한 저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중국 내 영화계 종사자들은 물론, 우리나라 중국문학, 영화 전공자들에게도 중요한 필독서로 꼽히고 있으니, 중국영화 마니아들에게도 훌륭한 참고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베이징대학 비교문학과 비교문화연구소 교수이면서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 객좌교수이기도 한 다이진화는 부단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고 있으며, 오늘날 중국 현대문학이나 문화를 연구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주요 비평가입니다. 신시기 20년간의 중국영화의 변천과 더불어 중국 사회사상의 흔적을 만나고 파악하고 사고한 저자의 모든 노력이 깃들어 있는 <무중풍경>은 저자가 생애를 통틀어 가장 아끼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목이 왜 <무중풍경>일까요? 알라딘에 올라온 ycsj님의 리뷰가 이에 대한 궁금증을 일목요연하게 해결해줍니다. 

다이진화(戴錦華; Dai, Jin-hua) 교수가 자주 쓰는 표현 중의 하나는 ‘탈주하다 그물에 걸림(逃脫中的落網)’이다. 시시포스(Sisyphus)를 연상시키는 이 말은 ‘곤경으로부터 탈출했지만 더 큰 그물에 걸린 격’인 중국의 사회`문화적 콘텍스트를 비유하고 있다. 1980년대의 ‘큰 그물’이, 문혁으로부터 탈출했지만 그 ‘문화심리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국가권력이었다면, 1990년대의 ‘큰 그물’은 전 지구적 자본에 포섭된 시장이다.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은 탈식민 문화(post-colonial culture)의 현장이기도 한데, ‘안개 속 풍경’과 ‘거울의 성’은 그에 대한 상징적 레토릭이다.

(
http://blog.aladdin.co.kr/739443174)


‘그물에 걸린’ 흐릿한 중국의 현실을 4세대에서 6세대에 이르는 영화감독들은 과연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다이진화 교수는 세대(generation) 성별(gender) 도시(urban) 등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도시’와 ‘영화’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영화만이 도시의 본질에 시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였을 정도입니다. 마침 산지니에서는 상하이영화와 상하이인의 정체성을 다룬 책을 준비 중입니다. ‘할리우드영화’ ‘홍콩영화’에 비해 ‘상하이영화’라는 개념은 다소 생소합니다. 하지만, 상하이 트위스트나 <색.계>의 배경 도시 정도로만 알고 있기에는 상하이 그리고 상하이영화는 광대하고 매력적인 주제임에 분명합니다.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노스탤지어를 재현한 <색/계>의 한 장면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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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람 2009.07.02 2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홋! 축하 드립니다.

  2. 자일리 2009.07.03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드려요^^

  3. BlogIcon 리브홀릭 2009.07.10 09: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축하드립니다~ ^^
    덕분에 학술원의 우수학술도서 선정 소식도 알게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