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유령 이야기를 읽었던 것은 언제일까요?


출처: gholly-fromb.tistory.com


초등학생 때는 문방구에서 무서운 이야기 모음집을 사 읽곤 했습니다. 

손바닥만한 책에 나오는 귀신 이야기가 너무 무서워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계속 등 뒤를 돌아본 기억이 있는데요.


그 이후에 활자로 만났던 유령들은 

진지한 문학 작품의 상징적 인물이거나

사회과학 책에서 '냉전의 유령'과 같은 비유 정도여서,

해질녘 귀갓길에 마주칠 것 같은 존재로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나와 이 세계에 공존하는 존재로서의 유령은 

글보다는 무더운 여름 친구들이 담력 겨루기처럼 하는 수다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무심하게 꺼내시는 이야기에서 더 자주 만나는 것 같습니다.


무섭기는 한데 믿는다고 선뜻 말하기는 부끄러운 것.

저에게는 그런 존재였던 유령과 사람들의 관계를 연구하는 책이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입니다.



권헌익 교수의 베트남 2부작 완결판이라고 볼 수 있는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 베트남의 다낭과 인근 지역을 배경으로 합니다.

베트남에서는 '미국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은 1975년에 끝났지만,

전쟁은 베트남인들의 삶 구석구석에 스며 있고

삶의 터전 그 자체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책에서 중요한 장소로 등장하는 껌레(Cam Re) 지역은 

전쟁 때 조성된 광활하고 오래된 묘지에 위치합니다. 

거의 모든 껌레 가구의 농지에는 십여 기 이상의 무덤이 있고요. 


출처: bettertour.tistory.com


베트남인들의 삶에서 유령은 낯선 이방인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이미 관계를 맺고 있는, 

그리고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한 남자는 밭에서 전쟁 중 죽은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기도 하고

어느 마을에서 늘 같은 길에 나타나는 외국 군인 유령은 주민들에게 익숙한 존재입니다.


책에서는 "누군가의 유령은 다른 이의 조상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연, 혈연이 없고 때로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데도 

베트남인들은 유령들을 위해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립니다.

이러한 추모는 1980년대의 경제 개혁 이후에 뚜렷한 문화적 현상으로 부상했다고 합니다. 


유령을 위한 향과 가짜 돈.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seafaringwoman/5455195256/


저자는 베트남에서 

"망자의 역사와 산 자의 생동적 활동이 공존하는 상황"을 목격했다고 씁니다.

예를 들어, 책에서 중요한 인물인 '연꽃'이라는 소녀 유령이 있습니다. 

연꽃은 생전에 고아였고 생계를 위해 땔감을 모아 팔았는데, 

땔감을 모으던 중에 강물에 휩쓸려 자신이 살던 지역과 멀리 떨어진 강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자신의 시신이 묻혀 있는 마을에 사는 여자아이의 몸에 들어와 

그 아이의 가족들에게 시신을 찾아달라고 요청합니다. 


텃밭에서 어린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자 

연꽃은 그 가족에게 자신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족의 둘째 딸이 된 연꽃은 놀랍게도 

전쟁 당시 혁명 활동에 동참했던 이들 여럿이 있는 이 가족의 일원으로서

사회적 정의를 위해 활동하는 유령으로 성장합니다. 

가족의 이웃인 찌엠 아저씨는 연꽃의 성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혁명가를 길러내는 것은 그녀 가족의 전통이다." 

찌엠 아저씨에게 저자는 조심스럽게 질문합니다. 


“아저씨, 실례가 된다면 용서하세요! 당신은 연꽃이 진짜라고 진정으로 믿고 있나요?”

“조카야, 그녀가 진짜가 아니라면, 너는 왜 내게 그녀에 대해 묻고 있는 거냐?”


-유령의 변환 중에서

중요한 것은 유령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망상이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자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직접 유령과 대화하기도 합니다! 
제7장 유령을 위한 돈을 읽어보세요.)


조상을 위한 가내 제단. 

출처: travel.tourism.vn


베트남 문화에서 유령은 베트남인들이 집 안에서 추모하는 조상과 

국가적 기념의례의 대상인 전쟁영웅에 비해 주변적인 존재이지만, 

이들 못지않게 베트남인들의 일상에 함께하는 존재입니다.

특히,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향, 그리고 집이 아닌 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조상과 유령의 구분이 모호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런 맥락에서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은 유령을 '사회적 사실'로 연구하고 있다고 할까요. 



출처: www.theodysseyonline.com


문화인류학자들은 대체 뭘 공부하냐?는 질문에 대해, 이런 답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세계가 사실(fact)에 기대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꿈과 망상, 희망과 두려움, 상상과 야망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이해한다. 

인류학자들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일축하지 않는다. 

Savage Minds Interview: Sarah Kendzior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은 문화 인류학의 

"인류학적 통찰의 거의 완벽하고 경이로운 예"라는 찬사를 받았는데요,

(마이클 램벡 런던정경대학교 인류학과 교수의 평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베트남 전쟁 유령과 그들을 위한 의례의

선명한 사회적·정치경제적·종교적 함의에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베트남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을 읽을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베트남의 냉전사와 우리나라의 상황을 겹쳐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규모 학살과 극단적인 '내 편' '네편' 구분으로 점철된 냉전을 겪은 한반도.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냉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 '거리에서의 비극적 죽음'으로 가족과 고향을 잃은 베트남인들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북의 고향을 떠나신 저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얼마 전 2주기를 맞이한 세월호 유가족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한국인들도 베트남인들도

상처를 겹겹이 축적한 채 살아가고 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한국은 베트남 전쟁 참전국이지요. 

베트남인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한국인들이 

많은 베트남인들을 학살했다는 것을 기억하면

저는 베트남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

끝으로,

책이 나오기까지의 우여곡절에 대한 몇 가지 여담을 해보렵니다. 


1. 영혼이냐 유령이냐?!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의 원제는 Ghosts of War in Vietnam 입니다. 

번역서를 맡게 되면 언제나 큰 고민이 한글 제목을 어찌할 것인가?! 인데요.

눈썰미가 빠르신 권헌익 교수님 팬(...) 여러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동안 언론 기사에서 Ghosts of War in Vietnam은 

쭈욱 '베트남 전쟁의 영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번역을 맡아주신 박충환, 이창호, 홍석준 교수님께서는 제목을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로 옮기셔서 저에게 원고를 보내주셨지요.

저는 원서와 교정지와 언론기사를 번갈아 쳐다보며 

유령? 정말 유령에 대한 책이란 말이야?? 라는 의심을 했지만 

이내 글에 빠져들었고, 

추상적인 느낌의 '영혼' 보다는 도발적인 '유령들'이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의 제목은 권헌익 교수님, 번역자 선생님들과의 논의를 거쳐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


2. 유령을 어떻게 표현하지?

혹시 눈치채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유령'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이미지를 단 한 컷도 쓰지 않았는데요,

그 이유는 한 번이라도 '유령'을 이미지 검색해보셨다면 아실 겁니다.

'유령' 하면 주로 납량특집에 나올 법한 오싹한 이미지뿐이라는 사실ㅠㅠ 


그래서 책의 표지 작업에도 사실 난관이 있었습니다. 

산지니에서는 담당 편집자가 디자이너님이 참고할 만한 이미지를 찾기도 하는데요,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의 경우 저는 

베트남인들이 거리에서 향을 피우거나 기도하는 모습 사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적당한 이미지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어정쩡한 사진들을 전달했고  

표지 시안이 나왔으나 디자이너도 편집자도 만족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침 부산의 민주공원에서

꾸준히 베트남인들의 전쟁 기억에 대한 작업을 해오신 

이재갑 사진작가의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

그런데 전시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

그런데 담당 편집자인 저는 오후에 해외로 출국해야하는 상황!!!


그야말로 절규... 할 뻔 했습니다


저는 부리나케 전시회에 가서 사진들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디자이너님과 적절한 작품을 골라

이재갑 작가님께 연락을 드리니 흔쾌히! 표지 이미지 사용을 허락해 주셨어요.

이 자리를 빌어 이재갑 작가님께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드립니다. 


표지에 사용된 이재갑 작가님의 작품 <빈딩성 가족무덤> .


이렇게 출간 전에 일어난 일들을 적다 보니 책이 드디어 나온 것이 새삼 놀랍고(ㅎㅎ)

많은 분들의 도움 덕분임을 되새기게 됩니다.

이제는 독자 여러분들과 만날 일만 남았네요 :)

독자 여러분께도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과의 만남이 기억에 남는 일이기를 기대합니다!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 10점
권헌익 지음, 홍석준 외 옮김/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동남아 4개국 순례기 '배낭에 문화를 담다' 발간 민병욱 부산대 교수

동남아는 일본이나 중국보다 오히려 더 가까운 이웃나라가 됐다. 그만큼 한국인이 많이 '가본 곳'으로 각인된다. 그럼에도 동남아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값싼 열대과일을 너무 쉽게 떠올리는 열대 휴양지로만 시선이 고착화된 것은 아닐까?

현지인 삶 진지한 태도로 관조 
그들의 생활예술 담담히 풀어 내 
"여행은 차이를 경험하는 것 
그들을 통해 날 되돌아보게 돼"

민병욱(59)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이런 시선에 교정을 요구한 에세이 '배낭에 문화를 담다'를 최근 펴냈다.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등 소승 불교 4개국 순례기를 담았는데, 어떤 해변이 더 아름다운가를 비교한 여행 가이드북이 아니라 동남아 사람의 삶을 진지한 태도로 관조하고 그들이 숙성시킨 생활예술을 담담한 문체로 풀어낸 문화여행서다. 그래서 아름다운 바다나 향긋한 열대과일보다 더 아름답고 향긋한 사람 이야기로 가득하다.

라오스 빡세에서 씨판돈으로 가는 트럭버스 체험도 그런 그의 태도가 묻어난다. "우마차와 같이 가끔은 널뛰기를 하면서 트럭버스의 천장이나 손잡이에 부딪치고 옆 사람의 무릎에 앉거나 발을 밟는다. 그때마다 널뛰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보고 라오스 사람들은 해맑게 웃으면서 먹거리를 건넨다."

그는 차이를 중시했다. 여행은 차이를 경험하는 것이며, 그 차이로 인하여 나를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그는 서문에서 썼다. 다르기 때문에 눈길을 끌고, 그 눈길에 익숙해지면 닮게 되고, 그렇게 닮다 보면 어느새 소통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런 삶과 여행에 대한 관조가 특유의 짧은 문장으로 갈피를 채웠다. 

하지만 성찰에 무게중심을 둔 책은 결코 아니다. 책을 읽는 재미는 오히려 여행지에서 우연히 접한 생활 예술과 영화에 대한 고찰에서 더 크게 느껴진다.

태국 인형극에서는 조종자가 왜 숨어서 줄이나 막대로 인형을 조종하지 않고 직접 무대 위에 올라오는지, 시장과 거리예술이 무엇을 어떻게 공유하는지(태국 후아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그랜 토리노'에서 왜 하필 몽족 소년 타오와의 우정을 그렸는지(라오스) 등에 대한 해석도 그래서 더 흥미롭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애를 태우며 찾던 소통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배낭여행은 2002년부터 시작됐다. "파견교수로 중국에 가서 문헌 자료를 찾고 있었는데, 문득 문헌 자료보다 곁눈으로 엿본 삶의 현장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동안 아시아, 유럽은 물론이고 북아프리카 일부 국가도 다녀왔다. 

하지만 그는 방문한 국가나 도시 수가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올 여름방학 계획도 다 세워 놓았다며 웃었다. 한 달 동안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를 여행할 계획이란다.


백현충ㅣ부산일보ㅣ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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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에 문화를 담다 - 10점
민병욱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