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게릭병을 앓는 부산의 소설가 정태규씨(57·사진)가 눈으로 쓴 창작집 <편지>(산지니)를 최근 출간했다.

<편지>에는 단편소설 8편과 콩트, 스토리텔링 등을 합쳐 14편의 작품을 실었다. 구술과 안구 마우스에 의존해 작품을 썼다. 작가는 2년 전부터 천천히 몸 전체가 마비되어 갔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아쉬움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작품이 한 권 분량에 못 미쳐 두어 편 추가하려고 계획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구상만 겨우 끝냈을 때 나는 이미 말하는 능력을 잃고 있었다. 구술할 형편도 못되었다. 귀하신 안구 마우스는 자주 고장을 일으켜 미국 본사에 다녀오느라 적응할 시간이 부족했다.”

<편지>의 수록작 대부분은 작가가 아프기 전에 큰 줄기를 잡아 놓은 것이지만 그 가운데 ‘비원’은 말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던 지난해 여름에 집필한 것이다.

‘비원’은 루게릭병을 소재로 한다.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원망과 회한이 죽음의 공포를 버텨낼 만한 강한 위안과 결심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그렸다.

작가는 “이제 여유롭게 글을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는 “루게릭병이 허락한다면 널려 있는 시간에 여유롭게 새로운 단계의 글쓰기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부인 백경옥씨는 15일 “‘비원’을 쓸 때는 구술에 의존해 겨우 하루 원고지 6∼7장밖에 쓰지 못할 정도로 힘겹게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백씨는 “상태가 나빠져 요즘은 누워서 지낼 때가 많고 이젠 구술도 힘들다. 다행히 미국에서 수리한 안구 마우스의 성능이 좋아져 카카오톡으로 소통하며 다음 책 출간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는 2012년 겨울 루게릭병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다.

권기정ㅣ경향신문ㅣ2015-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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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10점
정태규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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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없는 마음에 띄우는 애잔한 편지 한 장

중견 소설가 정태규의 창작집이 출간되었습니다. 단편소설 8편과 콩트 6편을 묶은 『편지』는 작품 한편 한편이 지닌 개성과 싱싱한 생명력을 통해 루게릭과의 사투에 굴하지 않는 작가의 뜨거운 창작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표제작 「편지」는 어문연구소 연구원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한 여자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400여 년 전의 또 다른 부부를 병치하는 구성이 백미입니다. 발굴팀에서 일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조선시대의 부부가 주고받은 편지를 해독하게 된 여자는 임진왜란의 불길 속에서 스러져간 어느 지아비와 지어미의 절절한 사연을 읽으며 자신이 품고 있었던 짙은 그리움을 자연스럽게 상기하는데,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인간의 공통적 희노애락이 잘 드러납니다. 또한 이 작품의 뒤를 잇는 소설 「3일간」은 부부가 서신을 주고받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를 배경으로 한 정통 사극으로서 전란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한 무인의 충심과 아내를 향한 애틋함을 단단한 문장으로 써내려갑니다.

 

원망도 회한도 잊은 맹세 “살아남아요.”

소설 「비원」은 루게릭병을 소재로 했습니다.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남자가 병원에서 우연히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여자를 만나고 둘은 충동적으로 ‘비원(秘苑)’으로도 불리는 창덕궁 후원 구경을 나섭니다. 해설사와 관광객 무리를 멀찍이 뒤따르며 둘은 각자의 처지, 나아가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통을 나눕니다. 실낱같은 우연에서 시작된 만남이 죽음의 공포를 버텨낼 정도의 강한 위안과 결심으로 굳어지는 과정은 비원의 고색창연한 풍경과 덤덤히 어우러집니다.

“난 때때로 원망스럽소. 하느님께 따져보고 싶을 때도 있소.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고! 하느님이 나 같으면 억울하지 않겠냐고.”
“그래! 뭐라세요?”
그녀가 물었다.
“내가 미쳤다고 너하고 입장을 바꾸냐? 그러시데요.”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비원」 중

「그 여름의 끝」은 결혼을 약속한 어느 청춘 남녀의 파멸을 그립니다. 주인공 ‘유경’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듯한 ‘민준’에게 불안을 느끼며 그와 함께 피서를 떠나고 암자에서 지능이 낮은 거구의 사내 ‘바우’를 만나는데 그는 유경에게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보입니다. 녹음이 완연한 산속과 시원한 계곡 등 작품이 묘사하는 성하(盛夏)의 풍경은 생명력을 잃어가는 인간의 공포와 불안,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자연에 대한 경이를 신비스럽고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합니다.
한편 ‘N 형’이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인생의 굴곡에 따라 신념도 성격도 가치관도 바뀌는 현대인의 애잔함을 그린 「N 형을 위하여」, <명화극장>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 십여 년 동안 몰랐던 아내의 진면목을, 자신의 모자람을 깨닫는 남편의 이야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종교에 귀의해버린 옛 연인을 향한 여자의 가슴 시린 집착과 해탈을 그린 「하심」, 신체의 부자유를 극복하고자 애쓰는 아이의 모습을 환상적인 필치로 표현한 「비상」 등도 놓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인생은 어찌 보면 별것 아니다. 우습기까지 하다.”


『편지』의 2부를 구성하고 있는 콩트는 군더더기 없는 분량과 예상을 뒤엎는 결말이 매력인 장르지요. 절절한 애정, 지난한 투병, 대자연의 생명력 등 비교적 진중한 주제의식의 1부와는 달리 2부는 이러한 장르의 맛이 잘 살아 있습니다. 엉뚱한 아이 병삼이의 일화를 그린 「병삼이의 웃음」, 아들의 독후감을 대신 써준 아버지가 일으킨 해프닝 「우리 아버지」, 애주가 아버지를 금주케 한 딸아이의 귀여운 애교를 담은 「우리 집 그 인간」, 합승한 택시에서 이상형의 여성을 만난 한 남자의 분투기 「아뿔싸」, 역 광장에 자리 잡은 도사(道士)의 하루로 IMF의 애환을 그린 「두 도사 이야기」, 외계와의 교감을 통해 자연의 소중함을 상기하게 하는 「우주에서 온 편지」 모두 눈 뗄 수 없는 재기가 넘칩니다.
“쓰고 싶은 절실한 것, 지향할 만한 가치, 온전히 나만의 색깔을 지닌 성찰, 적어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그 무엇을 찾을 수가 없어 많이도 절망”했지만 『편지』에 이르러 정태규는 “삶을 지나치게 엄숙하게만 바라보아온 나의 엄숙주의에 대한 반성의 표현”을 내놓는 경지에 이릅니다. “삶은 콩트처럼 가벼울 뿐”이라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참으로 고된 풍화의 시간을 거쳤을 것입니다. 이렇듯 버리고 닳고 깎여나가며 더욱 단단하고 정교해진 작품세계는 한 장의 편지처럼 호젓하지만 독자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두터운 감동을 선사할 것입니다.

 

 

 


정태규 1958년 경남 합천 출생. 부산대학교 대학원(국문학과)을 졸업하였고, 199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집으로 『집이 있는 풍경』(개정판 『청학에서 세석까지』), 『길 위에서』가 있으며, 산문집으로 『꿈을 굽다』, 평론집 『시간의 향기』 등이 있다. 제1회 부산소설문학상, 제28회 향파문학상을 수상했다. 부산작가회의 회장과 부산소설가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차례

1부
편지
3일간(三日間)
비원(秘苑)
그 여름의 끝
N 형을 위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하심(下心)
비상

2부
병삼이의 웃음
우리 아버지
우리 집 그 인간
아뿔싸
두 도사(道士) 이야기
우주에서 온 편지

작가의 말

 

 

『편지
정태규 창작집

정태규 지음 | 문학 | 국판 변형 | 208쪽 | 13,000원
2014년 12월 31일 출간 | ISBN :978-89-6545-278-2 03810

중견 소설가 정태규의 창작집. 단편소설 8편과 콩트 6편을 묶었다. 작품 한편 한편이 지닌 개성과 싱싱한 생명력을 통해 고통에 굴하지 않는 작가의 뜨거운 창작혼을 드러내고 있다.

 

 

 

 

편지 - 10점
정태규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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