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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24 유배지에서 쓴 아빠의 편지


유배지, 아빠, 딸.
어울릴 수 없는, 아니 어울려서는 안 될 세 단어다. 그런데 아빠는 어느 날 홀연히 짐을 챙겨 유배지로 떠났다. 그리고 편지를 썼다. 두 딸에게.

"소망한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좁쌀 한 톨처럼 작은 기억으로나마 남는 거였지. 훗날 아빠가 너희 곁을 떠난 뒤에라도 이 책을 펼치기만 하면 활자 하나하나에 아로새겨진 아빠의 사랑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여행 편지는 그렇게 시작됐다.

-부산일보 서평 중에서

 『유배지에서 쓴 아빠의 편지』, 신국판 변형, 316쪽, 값13,000원

 
20년 기자생활을 마친 저자가 전국 유배지를 돌며 역사와 삶의 이야기를 두 딸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엮었습니다.

유배지를 찾아 걷기 시작한 이유

"삶은 때때로 번민과 방황의 시간에 갇히기도 하는 것이니 살아갈 날을 위해선 지혜와 용기와 필요할 것 같아서다. 길을 잃거나 헤매지 않는 지혜는 어디서 얻는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좌절과 절망을 기어이 떨쳐내는 용기는 또 어디서 나오는지, 유배의 그 간단치 않은 여정을 버텨낸 유배자의 정신과 자세에서 한 수 배우고 싶었던 거다." (6쪽)


저자는 전라도를 시작으로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와 남해를 거쳐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유배지를 탐색했습니다. 정암 조광조의 적려유허비가 있는 화순군 능주의 운주사와 강진의 영랑생가, 다산초당 등 남녘의 땅을 돌아 연산군이 최후를 맞은 강화도 교동, 남양주의 광해군 묘를 돌며 옛사람의 이야기와 아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남해 노도로 향하며

 

남해 노도에 있는 서포의 유배처. 서포 김만중은 국문소설 '구운몽'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남해 옆 작은 섬 노도에서 그가 유배 생활 했던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50여 걸음쯤 올라가면 초옥 마당. 방 2개에 부엌 하나가 전부지만 유배객 처지에 이 정도면 저택이겠다 싶더구나. 더군다나 서포는 유배기간 내내 생업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바닷가에 하염없이 앉아 있거나 책을 쓰는 일에만 몰두해 섬사람들이 ‘묵고노자 할배’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니 이만한 집이면 족했을 거야. 게다가 뒤로는 산에 등을 댈 수 있고 앞으로는 시원스레 펼쳐진 푸른 남해바다가 눈맛을 즐겁게 해주니 죄인된 자가 이만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겠지. (219쪽)

 

다산초당 가는 길

다산초당 가는 길

유배된 사람의 가련한 처지를 일러주는 것도 있더구나. ‘매조도’가 그것이지. 비단 위에 수묵으로 시를 짓고 그 위에 매화나무에 앉은 새 두 마리를 그렸는데 그림에 얽힌 사연이 참 애잔하단다.

그 비단은 선생의 부인께서 평소 다정했던 남편에게 보내준 것으로 시집올 때 입었던 여섯 폭 다홍치마래. 남편을 유배 보내고 홀로 자식을 키우며 그리움을 삭이던 아내가 유배생활에 몸도 마음도 지쳤을 남편에게 보낸 선물이었어. 장롱 속 깊이 간직했던 빛바랜 치마를 보낸 것은 아마 신혼시절의 추억이 담긴 다홍치마를 보고 남편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게야.

다산초당

다산은 그 비단치마를 잘라 두 아들에게 교훈의 글을 써주고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시집간 외동딸에게는 ‘매조도’를 선물한단다. 그림 옆에는 시도 한 수 곁들였지.
(97쪽)

파르르 새 날아 뜰 앞 매화에 앉네
매화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
여기에 둥지틀어 너의 집을 삼으렴
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단다

 
자가용보다 대중교통과 걷기를 통한 여정!
그 여정은 길과 마음과 편지를 이어줍니다. 그리고 아빠와 딸을 이어줍니다. 전국의 유배지와 역사 속 인물과 사건들을 탐문하는 사이, 시와 소설, 영화 이야기는 물론 가슴 밑바닥에 묻어두었던 기억의 파편들도 들려줍니다.


▶영월에서 강릉까지

동강과 곤드레밥과 영화 <라디오스타>의 무대로 유명한 영월. 버스가 터미널로 들어설 무렵 차창 밖을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앉은, 위세가 남다른 건물이 눈에 들어오더구나. 영월군청 청사였어. 과도하게 푸짐한 덩치로 야트막한 건물들을 호령하듯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영 마뜩찮더구나. 왜 우리나라 관공서 건물들은 하나같이 겉멋 부리는데 열중하고 고압적이기까지 할까.

청령포

해질 무렵이라 부리나케 택시 잡아타고 청령포로 향했단다. 청령포는 어린 단종이 유배됐던 곳이야. 이번 영월여행의 목적지지. 관광지라지만 시내버스는 하루에 몇 편밖에 없다는구나. 대개 차를 몰고 오거나 전세버스를 이용해서 그런가봐. 그럼 아빠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은 어쩌나. 각자 알아서 하시라는 말씀이지.


청령포는 섬 같더구나. 서쪽으론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은 폭이 3,40미터쯤 되는 강물에 둘러싸여 있으니 육지 속의 섬 아닌 섬, 꼼짝없이 갇힌 신세야. 청령포를 가둔 강의 이름은 서강. 강이라 하기엔 품이 좀 좁고 개울이라 하기엔 건너기가 좀 벅찰 듯하더구나. 그래서 서강 양쪽에는 작은 배가 대기하고 있단다. (187쪽)

* 사진설명 :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 단종의 거소가 있던 곳 주변에는 송림이 제법 울창하다. 숲 한가운데는 600살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 많은 소나무 관음송이 있다.


 
책 속 대상은 저자의 친 딸이지만, 불특정 독자를 향한 조언이기도 합니다. 고난의 세월을 예감했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고 타협하지 않은 자들의 강건한 삶을 더듬어보라고 딸들에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유배자들에게서 한숨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용기, 유배의 세월을 수련의 시간으로 삼는 지혜를 배우자고 권합니다. 

“사람답게 따스한 체온을 지닐 줄 알고, 남을 보듬어 안을 줄 알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고, 부끄러워할 줄 알고, 참아낼 줄 알고, 희망을 품을 줄 아는 것, 참 만만찮은 일이지. 해도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기본, 사람답게 사는 길이란다. -중략- 그런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고 아빠는 너희가 그렇게 자라나 주길 바라고 또 바라고 있단다.”(174쪽) 


 

글쓴이 박영경은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어설픈 20대와 어정쩡한 30대를 거쳐 지금 무덤덤한 40대 후반을 지나고 있다. 부산대에서 지질학을 배웠고 동아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올림픽이 열렸던 그 해 가을, 기자가 됐다. 그저 세상을 좀 더 알았으면 했고 인문학과 예술의 향기를 맡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여겨서다. 운이 좋았던지 만 19년 기자생활의 절반가량을 문화부에서 보냈다. 기자로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자부심의 8할은 그곳에서 얻었다.
성격으로 치면 경쾌 발랄 활달보다는 깐깐 까칠 담담에 가깝다. 외골수는 아니지만 한 고집 하는 편이고 붙임성이 없다 보니 사람 만나고 사귀는 일을 즐기는 쪽이 아니다. 사회생활 피곤해진다,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크게 불편을 느끼거나 눈살 찌푸리게 한 적은 없다. 타고난 성정이 그런가보다.
2008년, 부산일보 기자인생을 뒤로 한 채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장사꾼으로 살아볼 심산인데 그 방면엔 완전초보, 하나부터 열까지 까막눈에 젬병이니 서툴고 어눌하기 그지없다. 헌데도 외롭고 힘들겠지, 걱정보다는 다른 세상에서 또 어떤 소중한 인연을 만날까, 기대가 더 크다.

 

Posted by 산지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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