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여전히 소설을 꿈꾸는 소설가가 있다. 다만 살기 위해 자신을 감추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상처 받는 것에 익숙해져, 그것에 무뎌지는 자신을 마주하기 두려워지던 시기였다. 세상에서 고립된 게 외려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우연히 글을 쓰게 되었다. 겹겹이 쌓여있던 사연들을 내놓으며 억눌렸던 정체성을 길어 올렸다. 그렇게 글쓰기는 삶의 거의 전부가 되었다.

소설가 김비는 트랜스젠더이다. 학교에서 그녀는 세상의 편견을 배웠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정상’이란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에 희생되곤 했다. 생존을 위해선 몸가짐이나 행동, 말투를 조심해야 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만이 사회에 내디딜 수 있는 길임을 공부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글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배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그들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것이 큰 용기를 주었다.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학창시절부터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 흔한 백일장에서 상을 타본 경험 한 번 없었다. 글을 배우고 싶어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은 드라마 작가 교육원이었다. 방송극은 글도 쓰고, 돈도 벌 수 있게 해 줄 거란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초반에는 독특한 소재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선생이나 동기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상급반으로 올라가자 ‘난센스’란 규정이 돌아왔다. 애초부터 대중적인 코드를 바탕으로 한 방송극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기성의 가치관과 적당히 타협하며,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서사의 구조는 소수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 했던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소설, 추락하는 자들의 실패한 이야기

소설을 처음 쓴 것은 성소수자 온라인 동호회 게시판에서였다. 전에 써놓았던 방송극을 소설로 풀어 낸 것이었다. 사실 소설은 다른 어느 장르보다 전문적인 글쓰기이다. 단편의 미학과 장편의 문법도 엄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소설이 각별히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소수를 위한 글쓰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세상의 지배적인 가치를 단순히 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수의 이데올로기를 반성적으로 되물으며, 그것의 한계를 지시한다. 소설은 추락하는 자들의 이야기다. 온갖 성공의 스토리를 들려주는 자기계발식 영웅서사들이 만연한 시대에, 소설은 세상에 감추어진 가장 보통의 실패를 담는다. 소설에 자신의 사연을 위탁한 배경에는 아마 이런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김비의 짝지 박조건형이 김비를 그린 그림. 글의 노동은 멈출 수가 없다. kimbee.net 자료

소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할 때, 게시한 작품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호응해 주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생각이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는 환희를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동호회에서 알게 된 친구가 홈페이지를 개설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김비의 이야기를 더욱 경청하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마침 글쓰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고심 끝에 승낙했고, 그렇게 개설된 홈페이지(www.kimbee.net)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트랜스젠더 김비의 이야기에 세상이 응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홈페이지 개설은 그녀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김비의 이야기에 감응했다. 그녀의 사연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듬었다는 말을 들을 때면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설레기도 했다. 반면 트랜스젠더에 대한 단순한 의문과 의심에서 찾아온 이도 적지 않았다. 때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설이나, 성적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그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것은 선의로 응해준 각종 인터뷰들이었다. 그 즈음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도 상승하여, 여러 매체에서 김비를 찾곤 했다. 그녀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고자, 대부분의 제안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인터뷰는 진실을 전하기보단 그녀를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단일 뿐이었다. 기대가 실망으로 이어지는 날들이 연속되고 있었다.

문창과로 가는 대신 독서로 창작 연마

소모되는 시간이 쌓여갈 즈음, 다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잃어가던 자신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 ‘플라스틱 여인’. 트랜스젠더의 사랑과 비운을 담았다. 불안한 다수가 되기보단 안정적인 경계인이 되고자 한, 어느 여인의 선택에 관한 소설이었다. 이 작품으로 별다른 기대 없이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응했고, 당선되었다는 믿기 힘든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등단은 김비에겐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 여성동아 공모는 오직 여성들만 응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만해도, 김비는 주민등록상 남자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관계된 기자가 김비의 성정체성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행히 심사에 오를 수 있었고, 심사위원들은 그녀의 가능성에 내기를 걸었다. 김비에게 등단은 단순히 소설가의 지위를 공인 받았다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그보단 오히려 세상이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받아주었다는 감격이 더 컸다. 등단 이후, 김비는 자신의 소설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한 없이 부끄러웠고, 그리하여 소설을 공부하고 싶다는 바람이 더욱 간절해졌다.

소설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다짐했지만, 별다른 방법을 알진 못했다. 문예창작학과 진학도 고려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만류했다. 창작을 아카데믹하게 습득한다는 것이 김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문예창작학과의 존재를 감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내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그리하여 그저 독서에 열중했다. 여러 선생님들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작가 교육원에서의 경험이 서사적인 짜임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독서를 통해서는 주로 자신의 문장들을 점검할 수 있었다. 지금도 문장이 메말라 간다고 느낄 때면, 여전히 잘 써진 단편을 찾곤 한다.

김비의 짝지 박조건형이 그린 그림.

외면 당했지만 세상을 버리지 않은 소설가

등단 이후, 김비는 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음에 관해 탐닉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하기까지의 곤경과 그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다. 그 과정이란 동일성을 억지로 찾아내는 게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여로에 가깝다. 그렇게 발표한 작품이 ‘빠쓰정류장’(2012)과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2015)이란 장편이다.

‘빠쓰정류장’은 폐암 말기의 순옥과 직장에서 사고로 다리를 잃은 남편, 그리고 트랜스젠더 리브 간의 일시적인 동행을 그린 작품이다. 이들은 존재조차 확실치 않은 사연 많은 버스정류장을 찾아 전국을 떠돈다. 세상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있던 이들이 삶의 여러 관문들(터미널)을 통과한다는 상상력이 이채롭다. 반면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비상계단이라는 한정된(혹은 금지된) 공간에서 저마다의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과정을 담은 미스터리다.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져 있는 계단 위에서, 살기 위해 오르거나 내려가야만 하는 군상들의 제자리걸음을 담았다. 대체로 비슷하게 살 것이 강제되면서도, 그 안에서 어떻게든 서열을 정하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엾은 사람들의 일상을 신비롭게 묘사한다.

이처럼 김비는 절망 앞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곁에 있던 타자를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세상은 그녀를 쉽게 외면하곤 했지만, 그녀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김비는 한국문단에서도 약간은 비켜서 있다. 그녀는 마감이 없는 소설가이다. 청탁을 받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항상 쓸 수 있었다. 김비의 작품에 여러 출판사들이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소설이 조금 더 다양해 질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세상이 다채로운 만큼, 소설의 여러 매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기만을 바랐다. 매출의 규모가 문단 내 위상과 직결되고, 대형출판사의 바깥이 문단에서의 소외로 간주되는 시대이기에, 그녀의 바람은 더욱 소중하다. 배움을 ‘사는 재미’로 알고, 소설이 삶과 다르지 않은 김비의 이야기가 각별한 이유가 여기 있다. 다만 한 뼘 만이라도 더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그녀, 여전히 소설을 꿈꾸는 소설가 김비의 이야기는 언제라도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허민 문화연구자ㆍ인문학협동조합 연구복지위원장

한국일보 | 2016-04-24

원문 읽기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작가와의 책이야기

사진: 김민영 

 

11월의 마지막 목요일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김비 작가님과 독자분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긴 제목 덕분에 『붉, 출』이라고도 불리는 이 장편소설은 

비상계단에 갇힌 가족의 이야기인데요

택배기사로 일하다 허리를 다친 남수, 근무력증을 앓는 아내 지애그리고 뇌성마비를 가진 아들 환이가 주인공입니다.

동반자살을 하기 전, 가족은 마지막 만찬을 위해 초호화 백화점에 왔다가

층수도 쓰여 있지 않고, 이상한 붉은 불빛으로 물든 비상계단에 들어섭니다.

여기서 비정규직 20대 정화, 명예퇴직 압박에 시달리는 명식

성전환 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려는 수현 등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출구를 찾아 헤멥니다

 

행사가 있었던 26일은 손발이 얼어붙을 만큼 바람이 강한 날이었어요

그럼에도 많은 독자분들께서 참석해주셔서 

행사 공간을 빌려주신 호랑이 출판사의 작업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난롯불 쬐며 이야기했답니다



이 날 이야기는 작가님께서 책의 일부분을 직접 낭독해주시면서 시작됐어요.


남수는 찬찬히 사방 벽을 둘러보았다. 손으로 짚어가며 붉은 벽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고 보니 매끈하게만 보였던 벽 위엔 무수히 많은 작은 돌기들이 오돌토돌 돋아 있었다. 조금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벽이었지만, 손으로 더듬어보니 무작위의 돌기가 빼곡히 만져졌다. 그것은 마치 공포에 질린 누군가의 팔뚝 같았다. "이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틀림없어."

성급한 손길로 그녀는 환이를 쓰다듬었다

(…) 

순간 남수는 엉뚱하게도 역사 속에 희생되어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택해야 하는 시간,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택할 수밖에 없는 순리. 그렇다면 우리는 차선이나 차악이 될 수 있을까? 남수는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쾅쾅, 또 한 번 있는 힘껏 철문을 두드렸다

"그럼 고장 아닌가?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고장이니 인재니 만날 그러잖아?"

"그러면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어야지. 갇힌 게 우리뿐이라는 건 말이 안 되지."

더 이상 지애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몸짓을 흉내라도 내듯 남수도 붉게 물든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상해, 여기.' 그녀는 또다시 그렇게 중얼거렸다(22~23)

 

소설 속 짧은 한 장면에서도 주인공들의 불안과 절망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붉, 출』을 암울한 이야기라 부르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 아닐까 합니다. 김비 작가님은 비상계단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혀 있으면서도 인물들이 그 안에서 스스로 원하던 것, 하고 싶어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뤄 나간다는 점을 짚으셨습니다. 가난 속에서 떳떳한 가장이 되기 힘들었던 남수는 계단 속에서 가족과 함께 걷고 있고, 침대를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했던 지애는 남수와 환이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존재가 됩니다. , 비틀린 팔다리 때문에 스스로 움직이기 힘들었던 환이도 비상계단에서는 온 세상을 자기의 그림으로 채우는 꿈을 이룹니다.

이런 점이 『붉, 출』의 숨겨진 반전이라고 할까요. 이어진 김대성 평론가님과의 대담에서도 이렇게 『붉, 출』을 숨겨진 면모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대담의 일부를 아래에 옮겨봅니다.


///


김비: 이 안이 굉장히 척박하고 암울하고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인 것 같지만, 이 인물들은 아무런 것도 변한 게 없다, 예상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많은 것을 이루고 변화된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거죠. 근데 그것은 그쪽 세계뿐만 아니고 우리, 이쪽의 세계의 반영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거든요.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떤 절망이 정말 절망일까. 혹시 내가 어디에 묶여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 저는 예전에... 예전을 생각하면 정말 많이 절망했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자학도 많이 하고 그랬었는데 요즘은 좀 자유로운 느낌을 조금조금씩 갖게 되요. 저 자신을.. 이제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저 자신을 추스르면서 내가 서 있는 여기를 나를 위해서 즐겁게 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아무 생각하지 않고. 가족, 사회, 정치, 다 생각 않고 나를 위해서. 오롯이 나 하나를 위안하면서, 나를 위해서, 그렇게 살고 있거든요. 그렇더라도 저는 그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느 서면 인터뷰에서 주인공인 남수라는 인물은 왜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고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냐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 실제로 보통의 이야기는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인물이 어떤 사건이나 이유.. 다른 계기가 있어서 다른 인물로 바뀌거든요. 선하게 깨우친다거나, 내가 이제 바뀌어야 되겠다, 내가 이제 가족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바뀌게 되는데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죠. 저는 인물을 바꾸는 대신 세계를 바꾼 거죠. 그러니까 그런 세계라면 그런 인물이 오히려 더 가장 희망적이고, 그 세계를 믿지 않고, 그 세계를 불신하는 비관적인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가장 희망적이고 생을 향해 가장 힘 있는 발걸음을 내딛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궁극적으로 굉장히 암울하지만, 여전히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으로 남아 있지만 제가 하려고 했던 것은 희망의 다른 얼굴을 얘기[하는 것이었어요.]


 


김대성: 여기에 한마디 더 보태면, (…) 절망이라는 거는 희망하기를 멈춘다는 거잖아요. 말 그대로 푼다면. 그런데 만약 이 세상이 개별자들의 희망을 지켜주지 못하는 곳이라면 우리가 희망하는 방식이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매번 실패하고 패배하고 좌절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당할 게 아니라 절망이 희망하기를 중단한다, 끊어낸다는 것은 다르게 접근해보면 직전까지 희망했다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막연한 희망들을 품고 상처받을까 두려워할 게 아니라, 잘 절망하자. 절망과 대면하자. 절망함으로써 직전까지 희망하지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자. (…) 남수 또한 (…) '저 위에 뭐가 있다 저 아래 뭔가가 있다' 이야기가 오갈 때 같이 움직이다가 매번 좌절[하고], 오히려 그 좌절을 선명하게 대면하면서, 언제라도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면서 건물 뒷편 계단 안에서의 생의 의지같은 것들을 좀 발견하는 장면들이 전반적으로 펼쳐져 있거든요. 그것이 말씀하셨던 세계를 아예 바꿔버리는, 태도를 바꿈으로서 그런 것과 연관이 되는 것 같아요. 절망하기로서의 희망하기의 문맥하고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김비: , 여기도 카피로 쓰셨지만, "희망이라고 다 옳은 게 아냐. 어떤 희망은 후련한 절망보다 못해." 희망이란 말이 물론 많은 걸 일으키고 있기는 한데, 너덜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문을 사이에 두고 바깥 쪽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소리가 있잖아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소리가 있잖아요. 되게 잔인하지만, 어쩌면 그게 우리 살고 있는 여기가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걸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세계에 살고 있고 그럼에도 나아가는 것이 책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잔인함을 오롯이 드러낼 수밖에 없는어쨌든 희망이라는 말 아닌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희망이 아닌, 희망을 짓누르는 다른 언어. 정말 우리를 일으킬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희망이라는 언어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요


김대성: [소설에서는] 여기가 몇 층인지도 몰라요. 160층 백화점에서, 지하로 내려가야 될지, 지상으로 올라가야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죠. 그런데 남수는 허리가 너무 안 좋고, 아이도 있고, 지애는 만성 무기력증이고. (…) 조금 내려갔다가도 다시 올라와야 되고, 그런 상황 속에서 그런데 위에서부터 소리가 들리고 문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거든요. 금방이라도 나갈 수 있을 것처럼. 그런 단서들이 소설에 전반적으로 계속 펼쳐져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 주신 것 같아요.

환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환이가 너무 핵심적인가요


김비: 그렇죠, 아무래도. (key).


김대성: 희망 말고 환이.


김비: 그거 좋네요.


김대성: (…) 모두가 무력해질 때 환이가 천진난만함으로 방향을 제시하거든요. "아이의 그림은 이제 혼돈에 빠진 그들을 이끄는 마술같은 표식이었다"라고 176페이지에서 177 페이지 사이에 걸쳐 있는 문장이 있는데. 되게 아무런 희망도 없[] 것 같은 뇌성마비[를 가진] 아이가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면서. 그것을 보고 여기가 몇 층이다. 우리가 몇 층 올라왔구나 [알게 돼요. 그 이전에는] 아무도 그걸 시도를 안 해요. 그냥 출구를 찾으려고 아등바등거리지 여기가 몇 층이라는 표시를 할 생각을 아무도 하지를 않는데, 환이가 그걸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그냥 그림을 그리는 거에요. 그게 표식이 되어서 작은 이정표가 되는데. (…) 마치 횃불 같[기도 하]고 가끔씩은 조명등 같고 촛불 같은 (…) 환이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를 [해주세요.]


김비: 아이.. 이건 개인적인 습성 같은데요. 전 항상 소설에 아이를 써요. 그것도 한 여섯일곱살의 아이를 꼭 쓰는 편이에요. (…) 어쩌면 그게 저 자신이 갖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동경, 계속된 동경이겠죠. (…) 내가 갖지 못한 순수함에 대한 욕망, 욕구 같은 것일 수도 있고, 그 나이대로 돌아가려는 회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이 아이 같은 경우는 장애[를 가진 소수자에요.] 성소수자는 제가 주변에서 많이 봤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편안하게 쓰는 편인데, 장애를 가진 아이를 쓰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건 뭐 취재하고 이런 어려움이 아니라 그 인물을 만드는 것 자체가, 일단 한 인물을 탄생시키는 거잖아요. 그것도 장애를 가진 한 인물을.. 그거는 굉장히 아픈 일이거든요, 제 생각으로는. 그런데 이 아이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요. 횃불이고 촛불 같다고 하셨는데. [제가] 어렸을 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저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행동하는데 주변에서는 제가 이상하다고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런데 만약에 환이가, 이거 정말 조심스런 얘기지만, 선천적으로 그런 몸으로 태어났다면 이 아이에게 과연 꿈꿀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일까, 이 아이는 꿈을 안 꿀까, 정말, 이 아이는 정말 고통스럽기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한 거거든요. 가끔 병원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같은 걸 보면 아이들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굉장히 순수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금방 고통을 가졌었던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순수한 웃음, 그런 걸 발견할 때. 이건 제 욕심일 수 있어요, 정말 위험한 욕심일 수 있는데 좀 그렇다면 좋겠다는 바람인 것 같아요. 누가 옆에서 이쁘다고 해 주면 자기 스스로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나 이쁘구나하고 생각하는 그런 존재이기를 바란 제 마음인 것 같아요. 그래서 되게 조심스러웠어요


(…)


김대성그러면 환이 이야기는 이 정도 하고요. 전작 『빠쓰정류장』에서는 기억 속의 장소를 찾기 위해서 로드무비처럼 계속 옮겨 다니[고, 찾고 있는] 그곳은 없는 곳으로 밝혀지는데, 정류장이라는 것이 머무는 장소는 아니잖아요. 머물지 못하고 바로 가야 되거든요. 정류장의 장소라는 것은 대합실 의자 정도의 공간? 떠남인지 상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 앉아야 다음 행보를 시작할 수 있는, 뿌리내릴 수 없는 존재들의 거처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붉, 닫, 출』은 계단이어서 이전처럼 수평적으로 옮겨 다닐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수직적이고 갑갑하고 변동 없는 장소로, 폐쇄적인 곳[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변화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세요. 겹쳐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 건 뭐냐면, (…) 소설에서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각 층들이 정류소일 수도 있다. [그곳이] 절망하면서 멈춰 설 수도 있구요,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는 그런… 내몰린 이들이 잠깐 머물 수 있는 거처일 수도 있겠다. 가까스로 버틸 수 있는 장소일 수도 있겠다, 라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초반에 남수가 ‘출구를 한 번 찾아 볼게’ 하고 계속 내려가거든요? 그때 위에서 지애가 ‘여보, 있어요?’ 하고 물어요. 그 때 남수가 ‘있어!’ 하고 대답을 하는데  [그 대화가] 무기력하고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애의 무력함을 드러내기보다는 이 폐쇄적인 공간을 그들의 교류와 교신이 일어나는 장소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조금 받았는데. .그런 면에서 이 계단은 폐쇄적인 공간은 아니구나. 언제라도 새로 시작할 수 있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질 수 있고,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고, 이곳이 좀 정류소 같은 느낌도 든다, 연장선에 있겠구나 하는 대목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적 공간에 대해서 염두에 두시거나 조금 더 이야기해주시고 싶은 대목이 있으면 들려주세요.


김비 (…) 실제로 이 공간은 부산에서 만났어요. 서면 cgv아시죠? 마트가 밑에 있잖아요. 지하주차를 하면 지나서 가야 하잖아요, 홈플러스를 지나서 가지 않으려면 비상계단을 올라가게 되있어요. 근데 그 비상계단 들어가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 비상계단에 층수가 없었어요. 중간쯤 올라가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는 거에요, 갑자기 두려움이 굉장히 크게 밀려왔었어요. 그게 이 이야기의 시발점이었는데 그 계단이라는 공간이, 과연 저 표지판이 없다면 무엇을 보고 오르내릴 수 있을까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그것을 생각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과 겹쳐졌어요.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끊임없이 누군가를 따라서 올라가고. 저도 그때 다른 게 앞에 없었거든요. 앞에 다른 사람이 걸어 올라가니까 올라가고. 어쩌면 계단이라는 공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이 자본주의 사회.

횡으로 설 수 없는 공간이에요. 일직선으로 설 수밖에 없는 공간이거든요.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이기도 하고, 저는 등장인물들이 또 다른 의미의 각자의 희망을 만들어 가면서 이 공간이 더 확장되기를 바랐어요. 욕심으로는 우주를 담고 싶었어요, 이 안에. 그래서 우주에 대한 힌트들이 남아 있어요. 이게 또 다른 세계이기도 하고, 이 공간을 태초로 돌리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하고, 작가로서 시도하는 전복, 빅뱅같은 의미였거든요. 실제로 굉장히 좁은 공간이지만, 작가로서는 이 공간이 우주로까지 확장되는 공간이었어요. 그래서 벌레 이야기도.. 벌레가 처음에는 눈에 있었죠. 마지막에는 이 건물 자체가 벌레처럼 꿈틀거린다고 했거든요. 확장되는 느낌이고. 이 인물들의 이름에도 유치하긴 하지만 한가지씩 힌트를 넣었어요. 혹시 아시나요?


김대성: 어떤..?


김비: 이름들에 은하계 행성들의 이름을 하나씩 집어 넣었어요


김대성: , 그렇구나. 수현, 지애,


다같이: 금이, 정화… 


김비: 정말 유치한 거거든요, 하지만-


김대성: 보물찾기 같은 거네요.


김비: 그렇죠. 환이는 앞에 나오죠. "그만해, 김달환!" 이렇게 나오잖아요. (…) 이 공간을 우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끝나는 건 우리밖에 없거든요. 그냥 우주는 계속 지나가고 있는 거죠.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끝이 아닌 웜홀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나가서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세계를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거든요. 협소하게 읽으면 협소하지만 작가로서는 굉장히 큰 것 까지 생각하면서 그려냈던 공간이었습니다.


김대성: 여러분, 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주가 여러분들을… (웃음)


김비: (웃음) 작가는, 아무래도, 병인 것 같아요. 굉장히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해요. 한군데에 몰아넣으려고 하고 그것에 잘 완성되면 되게 보람이 있어요. 인물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이건 우주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에요]. 


김대성: 계단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경향신문[에 실린 서평처럼 소설을] '재난' 이야기로서 읽을 수도 있지만 (…) 한 개인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부침을 묘사해놓은 것으로도 읽을 수 있거든요. 일상적으로 읽을 수 있는 문맥이 훨씬 풍부하다고 생각하는데..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는 재난이 아니라,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존재들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정서의 부침들, 이를테면 조증 같은거요. 좋았다가 끊임없이 추락하고. 추락하면서는 다시는 올라갈 수 없을 거라고 절망하면서, 바닥을 치죠, 그리고 이 추락은 얼마나 또 쉽게 됩니까. 그런 것들도 (…) 충분히 염두에 두고 쓰신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소설을 재난서사로 단박에 규정하기에는 좀 더 세밀하고 폭넓게 읽을 수 있는 대목들이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비: 맞아요, 저는 재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재난서사로 쓰려면 이 재난을 주인공들이 어떻게든 극복해야 하거든요.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데 제가 묘사한 방식은 재난서사의 극복방식은 절대 아니거든요. 누군가 영웅적인 행동을 해야 하고 누군가를 살려내야 하고 , 떠나면 안돼!’, 이런 게 있어야 되는데, 저는 재난서사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그냥 우리 현실과 꼭 닮은 궁지를 그려내고 싶고 그 궁지를 좀 깨트리고 싶었어요. 중간에 구상을 하는 와중에 세월호 사건도 있고 그래서 감금, 폐쇄라는 것이 굉장히 크게 다가왔어요. 너무너무 크게, 아프게 다가왔[어요].


(…)


독자: 여기서 조명이 세 번 바뀌잖아요, 처음에 붉었다가, 나중엔 파랬다가, 나중에 없어지잖아요. 어떤 뜻을 담으신 건[가요].


김비: 앞서 말했던 환경의 변화고요, 우주 얘기를 했잖아요. 우주를 만든 것은 불, 물 그런 물질이거든요. 그것의 상징을 쓰려고 했고저는 이 세상이 바뀌면 뭔가 굉장히 많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ㅠ요. 그 차이 없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불이 꺼지면서 밖으로 암흑이 되고 불빛이 떨어지잖아요, 불빛의 파편이 떨어지고 건물이 흔들리면서 먼지가 떨어지는데요. 그 공간 안에 우주의 모습을 그리려는 욕심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우주에 꽂혀 있었어요. 이 세계를 태초로 돌리고 싶은 욕망. (…)


독자: 아까 세월호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학생들이 몇 백 명 내려간다고 []셨잖아요. ‘수장 당한이런 표현도 있었고. 염두에 두신 건가요?


김비: 망설였어요. 이건 쓰면 안돼. 근데, 어차피 제가 현실을 담고자 했고무기력함을 담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여기를 담고 싶었어요.


김대성: 소설에서 35페이지에 보면 남수가 밑에서 되게 절망적으로 고꾸라져 있다가 힘을 내서 그는 제자리를 향해서 뛰고 있다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근데 이 제자리가 주기적인 표현인 것 같아요. 자기 자리이기도 하구요, 두 번째는 원래 있던 자리에요. 그럼 변한 건 없어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데, 근데 그게 원점이 아니라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 내가 와주기를 바라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자리, 책임을 짊어지는 자리이고 응답해야 하는 자리. 그래서 제자리가 되게 힘 있는 자리일 수 있겠다. 그래서 남수가 초반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혼자 걸음이 아니겠다, 이것은 지애랑 달환이의 걸음이 겹쳐져 있는 걸 수 있겠다. 이 절망적인 세계에서 우리가 뭐랄까요, 구조요청, 모두가 구조요청하잖아요. 누구나 쉽게 조난당할 수 있고. 절망에 빠질 수 있는데 이 구조요청에 응답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 바로 함께 조난당한 사람이 구조요청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구조요청에 가장 필요한 건 저는 응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사람을 건져 올리는 게 아니라 그걸 들어야 해요. 그리고 반응을 해야 하는데, 남수의 제자리를 향해서 뛰어올라갔다는 짧은 문장이, 책임을 지는 자리,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거란 측면에서 여기 나오는 많은 무기력한 존재들이 서로에게 응답하고 있고 서로에게 작은 책임을 붙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 건물 뒷면이 절망의 공간만은 아니다, 서로가 엉키고 어울리면서 결들을 달리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김비: 정확하게 읽어주셨는데, 아까 말씀 드렸듯이 이 사람들이 결국은 희망을 다 찾고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요.] 그것이 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믿음이고 신념이고 새로운 에너지거든요. 어떻게든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제자리 얘기를 하셨는데, 233페이지에 수현과 정화가 무리와 떨어져서 여행자처럼 계단을 여행하면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서 목종이 "그게 무슨 소리야. 다 똑같은데 가면 뭐해"라고 하니, 수현이 얘기를 합니다

아무리 똑같아 보여도, 같은 건 없지. 여기가 어디인지 우린 왜 여기에 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우린 어쨌든 다른 곳에 와 있잖아? 제자리를 도는 것 같지만, 여전히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일단 올라서면 그곳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잖아? 다시 돌아내려간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이미 그때의 거기는 아니잖아? (…) 내가 달라졌으니까, 아무리 그곳이 똑같은 곳이라고 하더라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져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가 똑같은 세계,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세계를 만들었지만, 결국에는 똑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계, 누가 구원해주는 건 정말 아니거든요. 우리 안에 있는 거죠. [후반부에] 종교에 관한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이 책 안에 제가 신을 넣었거든요. (…) 묵묵히 곁에서 남수의 모든 걸 지켜보고 제일 먼저 절망의 상태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을 때 가장 먼저 앞서서 걸어 올라가는 이름 없는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을 바로 신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고요. 신은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종교는 없지만, [저는] 구원을 찾아라, 믿어라, 이래라 그런 게 과연 신일까? 생각하거든요. 조용히 우리와 같이 쓰러지고, 같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하지만 아무 말 없이 가장 먼저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서 인도하는 인물이 신이 아닐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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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가 번번이 되돌아오는 '제자리'가 

응답의 자리라는 말을 곱씹게 되는 저녁이었습니다.

(앗 응답하라 198...? 하핫)  

편집자로서 『붉출』을 여러 번 읽었지만, 작가님과 평론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인물의 이름에 은하계 행성들을 숨겨놓으셨다니!!! 저만 눈치 못 채고 있었던 건 아니겠죠;)


2015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새해 결심을 할 날도 (그리고 작심삼일 할 날도!) 멀지 않지만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응답하고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 따뜻한 12월 되세요!  


Posted by 비회원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족, 비상계단에 갇히다

“희망이라고 다 옳은 게 아냐. 어떤 희망은 후련한 절망만도 못해.” (98쪽)

노력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이 간절한 시대지만, 어느새 희망은 ‘고문’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어두운 현실을 견디는 데 이야기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스러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편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의 방식은 정면 돌파다. 이 소설은 우리를 둘러싼 암흑으로 몸을 던져, 희망이 아닌 다른 언어로 삶을 비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인 김비 작가는 장편소설 『빠스정류장』,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 등을 통해 꾸준히 위태로운 삶 속에서 반짝이는 힘에 주목해 왔다. 신작『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가난의 쳇바퀴를 도는 데 지쳐 동반자살을 택하지만, 자살이라는 출구조차 막혔음을 깨닫는 한 가족의 ‘후련한 절망’에서 시작한다.



삶을 향해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

우리의 현실을 빼닮은 비상계단과 등장인물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주인공 남수는 달동네에서 자랐고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가장이다. 택배기사로 매일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비관으로 가득 찬 그는 무기력에 빠진 아내 지애, 그리고 뇌 손상을 가지고 태어난 여섯 살 아들 환이와 동반자살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마지막 만찬을 위해 들른 160층 초호화 백화점 건물의 비상계단에 갇혀버리고 만다.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고,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자살시도마저 실패로 끝나나 싶지만, 남수는 오히려 꼭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느낀다. 생에 대한 그의 의지는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 아니라, 절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커멓게 끈적거리기만 했던 생각의 늪 속에서, 남수는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남루하기만 했던 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떠올랐다. (…) 기필코 여기에서 탈출하는 것. 그리하여 나를 억압했던 생을 농락하며, 망설임 없이 내 손으로 내 삶의 마지막을 선택하는 것. (18쪽)

남수 가족 외에도 계단에 갇힌 이들은 여럿이다. 비정규직으로 취직하면서 기초수급대상에서 탈락한 20대 여성 가장 정화, 명예퇴직 압박에 시달리는 명식, ‘일류대학 교수님 사모’이지만 남모를 아픔을 가진 해숙 등,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우리와 비슷하거나 우리가 일상에서 스쳐지나갔을 법한 사람들이다.

남수와 이들 일행은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좌절하지만, 더 위쪽에 있는 공중통로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계단을 오른다. 그러다 아래에서 구조가 진행되고 있으니 내려오라는 구조대의 방송 소리를 듣게 된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오히려 지진처럼 사방을 뒤흔드는 진동과 불길이다.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여러 재난들의 메아리이다.



“비상등이었다. 그런데, 붉은 색이었다”

한 편의 영화처럼, 강렬한 이미지와 빠른 전개를 갖춘 소설

비상계단이라는 한정된 장소 내에서 장편을 풀어가는 것은 난관이 될 수 있으나, 작가는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과 남수 가족 이외의 인물들을 적절히 등장시켜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한다. 문이 열릴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남수 일행이 버렸을 때 공중통로의 가능성이 제시되고, 새로운 인물들이 제시하는 비상계단에 대한 정보는 서스펜스를 끌어올린다.

색과 이미지가 중요한 상징으로 쓰이기 때문에 소설은 한편의 영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붉은 빛으로 계단 안 모든 것을 물들이는 비상등이 파란 바다색으로 바뀌면서 이야기의 반전이 시작된다. 또한, 소설 속 인물들이 각자 어떻게 이 계단에 갇히게 되었는지 털어놓으면서 모두가 붉은 띠로 가로막힌 문을 통해 이곳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정확히 몇 층에서 비상계단으로 들어왔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의 기본 설정에 대한 의문들과 이에 대한 힌트가 곳곳에 배치되어 재미를 더한다.




트랜스젠더 여성 작가가 쓴 소수자 문학

몸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 돋보여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저자 김비 작가는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 데에도 참여한 바가 있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약자, 여성 등 마이너리티의 삶에 꾸준히 주목하면서 김비 작가는 작품 속에 소수자로 살아오며 쌓은 통찰을 담아왔다. 이 소설에서는 희망에 대한 관점뿐만 아니라, ‘몸’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특별히 눈에 띈다.

공중통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주요인물 ‘수현’은 성전환 수술비용을 마련하려는 스무 살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성별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남수는 그를 괴물 취급한다. “인생 망치는 수술이나 하려고” 한다며 남수가 그를 비난하자, 수현은 ‘아저씨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만 나는 나를 믿는다’며 이렇게 말한다.

난 아저씨가 부럽지 않아요. 그렇게 간단하게 살 수 있는 삶이라도… 태어나보니 그 어떤 혼란도 없이, 그저 돈 벌면 행복하고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그런 삶이라도 (…) 아저씨한테는 그게 전부인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거든요. (85쪽)

한편, 남수의 아들 ‘환’이는 기형적인 팔다리를 가진 아이다. 남수는 한때 환이의 탄생에서 희망을 보았지만, 환이는 남수가 동반자살을 결심하게 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지애 또한 환이가 “족쇄” 같은 몸에 갇혀 살고 있다며 마음 아파한다. 하지만 환이는 오히려 “나… 안 이상한데? (…) 나, 지금처럼 예쁜… 내가 좋은데?”라고 말하며 웃는다.

‘비정상’의 몸을 가지고 있는 수현과 환은, ‘비정상’의 몸이란 본질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상’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기 위해 부여한 의미 때문에 만들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삶과 죽음을 가로질러

암흑 속으로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디딘다

절망의 바닥에 가닿은 상황에서, 남수를 일으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불신’이다. 남수는 열리지 않는 문이 끝을 의미한다는 것을 의심하고, 그가 딛고 선 현실을 비관하며 삶을 꿈꾼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의 아내 지애는 “당신이 나를 믿지 않든 (…) 지금 우린 당신이 필요해”라고 말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서로가 필요하다는 고백, 그곳에 이 이야기의 핵심이 있다.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부끄러운 것일까.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내게 미래로 나아갈 자격은 없는 걸까.” 김비 작가는 이런 질문에서부터 이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찬란한 희망이 아니라, 어두움과 위험이 깃든 희망을 이야기하는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지금 암흑 속으로 발걸음을 디디려는, 디뎌야만 하는 독자라면, ‘우리는 같은 곳에 있다’ 말하며 내민 이 손을 기꺼이 잡아도 좋을 것이다. 


지은이: 김비

1971년 남과 북의 경계 위, 삶과 죽음의 경계 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서른 살의 나이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세계문학웹진 『국경없는문학』www.wordswithoutborders.org의 세계 퀴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 단편소설 「입술나무」의 영어판을 게재하였고,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를 출간했다. 부끄러운 기억 같은 책 몇 권을 썼으며,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 데 함께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지음 | 문학 | 국판 268쪽 | 13,000원 

| 2015년 10월 20일 | 978-89-6545-319-2 03810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족, 비상계단에 갇히다. 
희망이 '고문'이 된 시대, 이 장편소설은 우리를 둘러싼 암흑으로 몸을 던져 희망이 아닌 '후련한 절망'에서 첫발을 내딛는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인 김비 작가의 네 번째 장편소설. 



차례

더보기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표지 일러스트와 캘리그라피,

그리고 본문 내 각 장의 제목에 쓰인 캘리그라피는 모두 김비 작가의 작품입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우르와시 부딸리아 편저 / 산지니 출판사


이화여대아시아여성학센터는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개발의 모습을 새로이 조명하고자, 새로운 대안을 위한 아시아 지역 교류(아레나)에서 2004년 출간된 『빼앗긴 사람들』의 한국어 번역판을 발간했다.

인도의 여성운동가로서, 아레나의 젠더 프로젝트에 관여해온 저자는 아시아 각국의 여성과 아이들이 개발 한가운데서 어떻게 권리를 빼앗기고 희생당하는지 사례 연구와 통계로 보여준다.

생태계 보전의 문제와 여성·젠더의 문제를 동시에 분석하고, 개발도상국 여성이 겪는 풍부한 사례와 함께 개발 이면에 감춰진 문제점의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현재 한국은 다문화 사회에 들어서면서 아시아 각국의 이주 여성과 이주 노동자들을 통해 아시아 각국과 밀접하게 연결된 상황이다. 이 책은 이처럼 전보다 가까워진 아시아권에서 일어난 개발 이면의 상처와 아픔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자원 수탈, 주민들의 대규모 이주, 정체성과 역사 말살, 지식과 생명체의 약탈, 상품화, 여성의 착취와 억압 등 개발 과정에서 일어난 폭력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단순히 개발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사람 중심’의 개발을 하자고 제안한다. 즉, ‘빼앗긴 사람들’의 요구와 희망을 개발의 중심에 놓자고 저자들은 목소리 높인다. 인권을 대가로 경제발전을 이루거나 비민주적 정권, 소수집단의 주변화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불평등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선진국이라 여겨져 온 싱가포르 사례에서는 성소수자가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어 개발 이면의 불평등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게끔 한다.


홍미은ㅣ여성신문ㅣ2015-07-17

원문 읽기

빼앗긴 사람들 - 10점
우르와쉬 부딸리아 엮음, 아시아여성학센터/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우리 옆의 약자』에 실린 박노자(오슬로국립대) 교수의 추천글입니다.

 

 

우리 모두 소수자다!

 

홍세화 선생이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서 한 가지 명언 격의 말이 있다. ‘존재를 배반한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처해 있는 처지와, 언론 등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입되어 결국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게 되는 의식은 거의 대조적인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 소수자 문제는 그 중의 하나다. 우리가 부르주아 언론에서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때에 이 이야기가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이야기’의 구조 자체가 이미 그렇게 잡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도, 그 이야기의 골자는 어디까지는 ‘불법 체류라는 약점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저 약자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겨주자’는 정도 이상으로 잘 나아가지 않는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여기려는 의식이 외국의 보수 매체에 비해 그나마 약해서 다행인지 모르지만, 악덕 기업주들에게 월급을 체불당하고 착취를 당하는 ‘저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멀리 있는 저들을 불쌍히 여겨주는’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와 참 사이 먼 의식이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극단적인 경우지만 사실 외국인의 노동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인 ‘불안 노동’의 한 종류일 뿐이고 ‘노동 불안화’의 희생자가 누구나 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존재의 기본적 조건이다. 임금 체불이나 손찌검을 덜 당하고, 월급을 약간 더 받고, 출입국관리사무소로부터 박해 받을 일은 없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지만, 사실 대형 마트나 텔레마케팅 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한국 여성의 처지는 근본적으로 그 외국인 노동자들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원래부터 근대적 무산계급의 특징이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불안 노동은 –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이든 국내인 비정규직의 노동이든 – 이 소외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몰고 가고 노동자를 직장 관계에서 원자화된 ‘일회용 용품’으로 만든다.

 

언제 비정규직으로 몰릴지 모를 우리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에 사실 ‘저들이 얼마나 불쌍한가’에 대해 ‘우월한 자의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는, ‘우리가 저들과 어떻게 연대해서 자본의 지배에 맞설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에 훨씬 더 부합되는 의식이다. 소수자라는 말이 요즘 인기가 많지만, 실제 지배계급이 사회적 자원을 독점하는 사회에서 피지배 계급의 대다수가 이런저런 측면에서 ‘소수자’의 신세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식의 형성은, 지배자들과 그들의 수하에 있는 매체들이 결코 바라는 것이 아니다. 저들이 소망하는 것은 결국 국적, 성별, 장애의 유무 여부, 고용 형태 등으로 생기는 ‘차이’를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그 차이로 인해 생기는 ‘거리’를 영구화, 절대화시키는 것이다.


무산계급, 즉 이 세계의 짓밟힌 모든 자들의 연대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소수자 담론’은 가능한가? 이수현의 이 번의 저서는 분명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그리는 소수자들이 우리와 멀고 다른, 연민의 대상이 돼도 연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니고, 우리 옆에 있고 우리와 쉽게 동일시될 수 있는 가깝고 친숙한 존재들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나와도 그들의 모습은 절대 ‘이방인’ 같지 않다. 안산시의 ‘국경 없는 마을’에서 고용 불안과 실업, 산업 재해에 시달리고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늘 걱정하고, 한국의 노동 운동의 문화도 많이 받아들여 ‘한국식’으로 머리띠를 매고 율동을 하면서 투쟁하는 한편 한국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본국의 문화도 전수하려고 애쓰는 저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우리’ 그 자체다.


저들에 대한 이수현의 서술을 읽노라면 우리 옆에서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고생하고 유럽이나 일본, 미국에 나간 한국 동포와 똑같은 걱정, 고민을 하는 저들을 ‘단속’한다는 당국의 처사를 무자비한 폭력 이외의 어떤 다른 것으로 보기 힘들게 된다. 한반도 바깥에서 사는 한국인들이 적어도 4~5백만 명으로 헤아려지는데, 우리가 ‘나가는’ 이민은 당연지사로 여기고 ‘들어오는’ 이민자들은 범법자 취급하여 ‘단속’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같은 노동자, 같은 인간들이 우리와 가까운 데에서 ‘단속’으로 인해 생계가 막막해져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도 보장할 수 없는 이 절박한 상황에서는, 그들과 당연히 연대해야 할 한국의 ‘주류’ 노동 운동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것은 이수현의 책 속에서 담겨진 근본적인 물음이 아닌가 싶다. ‘만국 무산자의 단결’이 표어가 아닌 현실이 되자면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현장 보고서의 형식을 띤 이수현의 책은 ‘아픈 진실’이다. 약은 쓴 맛이 나야 효과가 있다는데, 나는 이수현의 원고를 읽을 때에 정말로 ‘쓴 약’이라고 생각되었던 부분은 부산 삼광사 100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 관련 부분이었다. 불교와 오랜 인연이 되고 불교 공부를 늘 번잡한 일상 속의 ‘내면의 즐거움’으로 삼아온 탓인지, 계급사회 속에 편입되어 부처님의 본의를 잃은 종교가 그 원래 가르침의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는 이 담담한 ‘현장 이야기’를 읽을 때에 거의 눈물 날 지경이었다. “당신 죽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 있어. 나가라.” 이것이 깡패의 막말도 아니고 가장 자비스러워야 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성직자의 말이라면 우리 사회는 이미 파탄을 맞은 것이다. 마르크스가 한 때에 종교에 대해서 ‘짓밟힌 존재의 신음 소리이자 민중을 위한 마약’이라고 했지만 이미 ‘짓밟힌’ 처지에 놓여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조 운동을 한다고 무단으로 해고시키고 “죽든지 말든지 나가라”고 하는 종교 집단이라면 더 이상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희망을 대변할 줄 모르는, 말 그대로 ‘마약 제조 및 판매’ 업체 수준의 집단일 뿐이다.


하급 성직자(전도사, 부목)와 노동자(운전수 등)의 착취가 불교의 대형 사찰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대형 교회의 특징이기도 한데, 해당 사찰 내지 교회의 신도들에게 한 가지 꼭 물어보고 싶다. 여러분들이, “당신이 죽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해고 노동자에게 말하는 수준의 성직자들이 정말로 예수님이나 부처님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시는가? 저 성직자들을 존중해주고 헌금 내지 불전(佛錢)으로 저들의 ‘종교 자본’을 키워주는 것이 과연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원하실 일일까?


이수현의 책이 그리는 대한민국은 잔혹한 것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정도도 아니고 차라리 ‘유전즉신 무전즉수 (有錢卽神 無錢卽獸)’, 돈이 있으면 인간 이상의, 신과 같은 대접을 받고, 돈이 없으면 인간 이하의, 동물도 못한 대접을 받는 것은 박정희 식 ‘병영 자본주의’를 이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신자유주의적 모델의 실체다. “비정규직 노동자 주제에 무슨 연애를 할 수 있느냐”는 한 비정규직의 말을 읽었을 때에 노비들까지도 연애와 결혼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일상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비정규직을 ‘현대판 천민’이라 부르지만 연애할 생각을 못할 정도로 심신을 파괴시키고 자존심을 망가뜨리는 것은 전근대의 ‘천민 대접’보다 한층 가혹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은 뒤에 절망은 하지 않는다. 이 지옥을 인간이 살 만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투쟁하고 자신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생긴다. 1987년의 대투쟁은 결국 노동자에 대한 철저한 배제를 기반으로 했던 개발 독재 모델을 무덤으로 보내고 대자적 계급으로서의 한국 노동 계급의 탄생을 알리지 않았던가? 결국 언제인가 가까운 미래에 김대중과 노무현의 신자유주의도 노동자의 대투쟁으로 조각이 날 것을, 이 책을 읽고 믿게 되는 바이다.

 

'빌리 엘리어트'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감동적이고 기분 좋은 이 영화는 80년대 영국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모습과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본문 129쪽)

우리옆의 약자 - 10점
이수현 지음/산지니

 

Posted by 산지니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