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러분

병아리 편집자입니다 :)

얼마 전 소개해드린 정우련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에 대한 기사가 부산일보에 올라왔네요.

외로웠던 유년의 기억과 그 가운데서 찾은 예술의 길,

정우련 작가가 풀어내는 깊은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보실까요?

***

'구텐탁, 동백아가씨' 삶과 예술, 사회에 대한 예리한 시선

구텐탁, 동백아가씨/정우련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언젠가 부패한다"고 한 말은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진 저항적 메시지였다. 내가 소설을 쓰려는 것도 자신의 본질이 거기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우련 소설가의 인생과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정 작가는 부산작가상을 수상한 소설집 <빈집> 이후 14년 만에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일상 가운데서 느낀 생각이나 소소한 감정들을 풀어낸 글이 대부분'이라고 밝혔지만 책에는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정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중략)

신경숙 소설가의 표절 사태를 다룬 '표절 유감'은 또 어떤가. 그는 '마음은 외롭고 배는 고프지만 정신은 살아 끊임없이 남다르게 창조하려는 귀한 작가들 때문에 예술이 살아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누군가가 창조한 빛나는 하나의 해답을 나도 모르게 쓱 훔치고 싶은 그 마음을 잘라야 한다. 그게 작가의 용기'라는 대목에선 문학에 대한 정 작가의 신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책과 그림에서 빚어낸 삶의 정수는 알알이 마음에 박힌다. 특히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 '빨간 칸나'에서 찾은 당당한 주체로서 여성, 하랄트 뮐러의 희곡 '시체들의 뗏목'에서 발견한 방사능 오염의 위험성과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고 있는 페미니즘과 원전 문제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정 작가는 이와 함께 아련했던 어린 시절 추억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나를 문학으로 이끈 건 유년의 슬픔'이라고 한 그의 말이 눈에 들어온다. 힘겨웠던 지난날이 밑거름이 된 덕분일까. 정 작가의 촘촘한 문장은 읽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글맛의 묘미를 알게 해 주는 그의 글은 '한 줌의 위안' 그 이상이 분명하다. 정우련 지음/산지니/260쪽/1만 3000원.

부산일보 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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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중략)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하략)


제11조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제21조 ①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제22조 ①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많은 분들이 모르고 계셨을 이야기

 

산지니와

블랙리스트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 정권에 비우호적인 문화·예술인을 탄압·규제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에서 비밀리에

   작성한 리스트.

  - 각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국가 차원에서 불이익을 주며 억누름.

 

 

 

탄핵정국에 이르러서야

이 이야기는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어린이뮤지컬 '구름빵'까지…지역 블랙리스트 23건  (국제신문)

 

최영철 시인은 2015년 산지니 출판사에서 펴낸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최 시인의 시집에는 세월호를 다룬 '난파 2014'란 제목의 시가 실렸다. 최 시인은 "세월호 시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기사 내용 중 관련 부분 발췌)

 

 

 

 

 

 

2017년 7월 27일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의 1심 판결이 있었습니다.

 

당시 약간의 논란을 불렀던 이 판결이

앞으로 재발할 수도 있는 제2의, 제3의 블랙리스트를

온전히 방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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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조명숙 소설집 『조금씩 도둑』에 수록된

단편소설 「점심의 종류」를 연재합니다.

 

 

 

 

점심의 종류

조 명 숙

 

 

 

시신도 만져 보지 못한 채 유미가 사라졌다.

그런데 누구도 모른다고 했다

 

 

 

 

마지막 화 

 

 

 

 

  검찰은 사고 직후 종적을 감춘 선주를 찾느라 법석이나 떨고, 매스컴은 선주의 비리를 캐는 데 열을 올리기나 할 뿐, 사고의 원인 규명이 점차로 유야무야되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애를 두고 혼자 빠져나올 수 있어? 죽더라도 같이 있었어야지. 참고 또 참았던 말을 결국 영애는 내뱉고 말았다. 시신도 만져 보지 못한 채 유미가 사라졌다. 그런데 누구도 모른다고 했다. 국정조사, 청문회, 재판 같은 절차는 마치 사고 기록 지우기를 목표로 한 듯 차근차근 진행되었지만 원인을 먼저 규명하라는 유족들의 요구는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 정치권이 편을 들어 한동안 마찰을 빚는 듯했지만 당신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라고, 나라를 계속 시끄럽게 하는 건 애국적인 차원이 아니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도대체 왜, 아이를 잃은 엄마의 말을 들은 체도 않는지, 도대체 왜, 원인규명 없이 엉뚱한 사람을 내세워 여론을 호도하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하던 그때 그녀는 지철에게라도 그렇게 물어야 했다. 싫다는 애 등 떠밀어 보낸 게 누군데 그래? 그 잘난 일, 딱 사흘만 쉬고 같이 가자니까, 왜 그렇게 악착을 떨었어? 평생 청소나 하면서 살아! 지철과는 그렇게 끝났다. 일 년에 한두 번 슬그머니 들르기는 하지만 서로 마주보지 않는다. 둘 다 잘못한 게 없으면서도 잘못을 뒤집어씌웠다는 걸 알지만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다.

 

  영미가 남은 볶음밥과 빈 그릇을 현관 밖에 내놓고 꺼진 풍선처럼 앉는다. 지금 이 순간은 산 상태일까, 죽은 상태일까? 확실한 형체를 가지고 움직이는 저 영미가 죽은 것일까, 산 것일까. 영애는 청맹과니처럼 눈을 깜빡이며 낯설고 어색한 이쪽 세계를 떠나 화면을 바라본다. 장동건과 원빈이 조우한다. 포연으로 범벅이 되어 시커먼 두 남자의 감격스러운 포옹. 절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인 것이 전쟁이다. 자꾸 위로 뻗치는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가진 영애와 찰랑거리는 영미의 머리카락이 저렇게 꽉 껴안고 살아 있음에 감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화다. 사는 게 전쟁이라지만 전쟁터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는 보다 자세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작용한다. 감정들은 제각각 움직여서 틈을 만들고 하나를 둘로, 둘을 셋으로 갈라놓는다.

 

 

 

  아버지 죽고 엄마는 영애와 영미를 장동건과 원빈처럼 키웠다. 영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어 영미 학비를 댔다.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장동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영미는 늘 고마워했고, 최선을 다해 가깝게 지내려고 했다. 언니 나 할 말 있는데.영미가 우정 다가앉는데,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다. 유미를 잃은 뒤 해죽해죽 웃기만 하던 엄마가 생각난다. 얘야. 내가 해 줄 말이 있는데. 지철이 집을 나가고 혼자 남았을 때도 해죽해죽 웃던 엄마. 얘야. 내가 해 줄 말이 있는데. 인생이란 걸 싹 잊어버려라. 우리가 뭘 인생이란 걸 살았다고. 그런 거 없었다. 해죽해죽 웃으면서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어느 순간 정말 깨끗이 싹 잊어버렸다. 영애와 영미를 업고 걸리고 겨울 골목을 쏘다니며 찹쌀떡을 팔던 일도, 대학 등록금을 넣지 못하고 함께 울었던 일도. 그 모든 일을 엄마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나서 영애에게도 깨끗이 잊어버리라고 했다. 나 이민 간다.영미가 조용히 말했다.

 

  부지런히 드나들며 자꾸 볶음밥을 시켜댈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영미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십 년이었다. 모든 걸 싹 잊어버린 엄마는 자주 길을 잃었다. 아무 데나 똥오줌을 누었고, 발가벗고 거리를 뛰쳐나갔다. 그러더니 어느 날 차에 치어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엄마가 죽었지만 슬프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담담해서 장례 끝난 뒤 영미에게 두 차례 빰을 맞았다. 좀 더 일찍 가지 그랬니.그때처럼 영미가 후려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영미에게 유미는 자식 같은 조카였다. 김서방이 이민 가재. 그렇잖으면 헤어지재. 언니 혼자 두고 가는 거 정말 마음이 아프지만, 김서방 따라갈래. 언니처럼 유령이 되긴 싫어.

 

 

 

  고지전 장면이다. 장동건은 북한군복을 입고 있다. 참호에서의 육탄전. 장동건은 자동 기계처럼 적을 죽인다. 원빈이 장동건을 발견한다. 장동건은 원빈을 알아보지 못한다. 장동건과 원빈의 육탄전. . 나야. 나 진석이야. 원빈이 소리쳐도 장동건은 계속 공격한다. 장동건은 살인기계다. 원빈이 살인기계에게 한사코 인간으로 접근한다. 시꺼먼 장동건의 얼굴. 광기 어린 장동건의 눈이 허옇게 까뒤집어진다. 원빈이 장동건을 제압한다. 마지막 밥과 김치를 입에 넣는다. 치통과 함께 밥을 씹는다. 치통과 함께 밥을 씹으면서 주방으로 간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저녁에 일하러 가기 전에 먹을 밥이다. 금방 지은 밥은 유미가 좋아하던 밥이다. 지철이 잘 먹던 밥이다. 그날 아침에도 먹은 밥이다. 이젠 못 봐. 안 올 거니까!새된 소리와 함께 영미가 문을 열고 나간다. 취사 버튼을 누르고 돌아서는데 뒷머리가 화끈하다. 몸이 휘어진다. 휘어진 몸이 바닥에 닿는다. 어느 곳에서나 사는 건 찬란하지 않다는 말을 해 주었어야 했다.

 

  문 소리의 여운이 사라진 뒤 영애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다. 텔레비전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간다. 텔레비전을 주시한다. 죽은 장동건의 몸이 태아처럼 오그라든다.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영애도 몸을 웅크린다. 모든 것이 처음의 그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우린 산 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다 잊어버리자. 유미가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엄마는 알게 되었던 거다. 스물셋에 알 수 없었던 일은 서른셋에 알게 되고, 서른셋에 알 수 없었던 건 마흔셋쉰셋예순셋그렇게 삶의 슬픈 의미는 아주 늦게야 알게 된다는 것을. 슬퍼하고 기뻐한 순간들이 모멸과 굴욕으로 가득 찬 것의 표면을 살짝 덮는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엄마는 다 잊어버리라고 했던 것이다. 영애는 웅크린 채 텔레비전을 본다. 점심을 먹는 건 아직 기억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기억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점점 약해지고 있지만 어쨌든.

 

  고통을 이기려고 잔뜩 몸을 웅크린 장동건의 뼈가 누런 황토에 말뚝처럼 박혀 있다. 장민호가 수습된 유물 중에서 녹이 슨 만년필을 집는다. 오십 년 동안의 회한은 담담해서 꼭 낙엽 같다. 썩은 낙엽은 지금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광고가 시작된다. 광고는 현재의 시간을 무차별 포격한다. 과거로 뭉쳐진 영애에게 현재의 파편이 날아온다. 슬픔보다는 기쁨을, 모자람보다는 넘침을 강조, 또 강조하는 현란한 색의 잔치를 영애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사고도 이렇게 광고였던 것 같다.

 

 

 

  그때 그 바다의 현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영화가 끝나자마자 밀려드는 광고처럼 평온이 끝나던 그 순간, 그 아비규환을 상상하는 일은 전파를 손으로 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백 명의 승선객 중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일흔일곱 명이었고, 시신으로 건진 사람이 또 일흔일곱이었다. 나머지 마흔여섯은 마흔여섯 날을 두 번이나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뒤집어진 배가 침몰하자 바닷물이 재빨리 흔적을 지워 버렸다. 해당 기관의 얽히고설킨 부패와 선주의 부정축재가 두 달 동안 매스컴 종사자들을 흥분시켰지만, 잔치는 곧 끝나 버렸다. 정치권에서는 애도를 무기 삼아 싸움을 벌였고, 방심과 안일의 타성을 곧 회복한 사람들은 여객선이나 비행기를 타고 여행했으며 위험한 일터에서 일했다. 애도의 상징이었던 노란 리본도 하나둘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는 말은 맞지 않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항의하고 싸우고 기억하려 애썼으므로 유미, 유미들은 확실히 조금 더 오래 기억되었다. 몇 가지 법안이 상정되었고, 입법부는 그중 몇 가지를 가결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십 년 동안 실제로는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유미가 없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텔레비전을 끄고 영애는 창가로 간다. 아직 시들지 않은 잎이 무성한 나무 사이로 젊은 남자가 걸어온다. 어깨가 곧고 걸음걸이가 빠른 젊은 남자는 105동 현관으로 사라진다. 창문을 연다. 세찬 바람이, 예기치 않았던 세찬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영애는 문득 놀라면서 혹 바람에 실려 왔을지도 모를 어떤 것을 찾는다. 냄새, 소리, 움직임. 한때 이 공간을 채우고 있던 냄새와 소리 움직임을. 아무 냄새도 나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끝

 

2014.04.16

잊지 않겠습니다.

 

 

 

조명숙 소설집 『조금씩 도둑』

 

조명숙 지음 | 문학 | 국판 변형 | 244쪽 | 13,000원

2015년 4월 6일 출간 | ISBN : 978-89-6545-286-7 03810

 

2012년 소설집 <댄싱 맘> 이후 3년 만에 소설가 조명숙이 네 번째 소설집을 출간했다. 어둠을 식별하는 감각적 문체와 정주하지 않고 유목하는 글쓰기 행보를 보였던 그가, 이번 소설집에서는 상처 입은 여성들의 세심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들로 돌아왔다. 특히 세월호 사건을 소재로 한 '점심의 종류'가 수록되어 있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와 현대인의 상실감을 엿볼 수 있다.

 

 

 

조금씩 도둑 - 10점
조명숙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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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조명숙 소설집 『조금씩 도둑』에 수록된

단편소설 「점심의 종류」를 연재합니다.

 

 

 

 

점심의 종류

조 명 숙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면서

 유미의 죽음이 심연처럼 가라앉을 때,

마침내 고통은 고통끼리 부딪쳤다.

 

 

 

 

2화

 

 

 

 

  영미가 숟가락을 뺏으려 한다.“미장원 갔다가 옷도 좀 사자.” 완강하게 뿌리치면서 영애는 쟁반을 들고 뒤로 물러난다. 영미가 깬돌의 모서리처럼 모난 눈으로 노려본다. 그러고 보니 영미는 방금 미장원에 다녀온 모양이다. 사흘 전보다 머리가 조금 짧아졌고, 헤어에센스 냄새도 난다. 물 한 모금 마신 영애는 영미가 가리고 있는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목을 뽑는다. 중학생 모자를 쓰고 교복을 입은 장동건과 원빈이 구두를 구경하고 있다. 선명한 다갈색의 구두 한 켤레에 모아지는 장동건과 원빈의 눈. 장동건과 원빈의 시간이 전진하고 있는 가운데 영애의 시간은 후진을 계속한다. 다갈색 스웨이드 신발을 신은 유미가 콩콩 발을 구른다.

 

  유미의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영애의 손에는 캔커피가 들려 있었다. 볕살 좋은 봄날이다. 유미가 눈을 찌푸리며 손으로 해를 가린다. 유미는 새로 산 스웨이드 신발을, 영애는 유미가 신던 낡은 운동화를 신고 있다. 유미가 영애를 껴안는다. 구두에, 옷에, 정말 고마워, 엄마. 나 취직해서 월급 받으면 엄마 다 줄게. 그래, 그래라. 그땐 엄마 청소일 그만두고 쉬기만 해. 알았지? 그래, 그러자. 유미와 영애는 햇살을 받으며 걷는다. 그래, 그래라. 우리 유미 취직하면 나 청소일 그만둘게. 영애는 중얼거린다. 그래, 그랬지. 우리 유미 취직하면 나 일 그만두고 쉬기로 했지. 그런데 우리 유미 아직 취직을 못했어. 그래서 내가 일을 쉴 수가 없어. 일을 하려면 먹어야지. 먹어야 일을 하지.

 

  화면이 갑자기 사라진다. 영미가 눈앞에서 리모컨을 흔들고 있다. “이러고 있는 거 유미가 다 보고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어? 유미도 이제 그만 언니가 편안해지길 바랄 거야. 이제 그만하자, 우리. 난 지쳤어.” 영미를 향해 물이 담긴 컵을 집어던진다. 컵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난 그만두지 않을 테야. 왜냐고? 모두들 그만두길 원하니까. 그래서 그만두지 않을 거야.” 걸레를 가져와 엎질러진 물을 닦으며 영미가 맞고함을 지른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계속해. 계속하라고. 실컷!” 곱슬곱슬한 영미 머리카락이 출렁거리면서 흔들린다. 영미 머리카락이 아래위로 왔다 갔다 한다. 나이를 먹어도 싱싱하고 탄력 있는 머리카락을 가진 영미가 운다. 영미와 함께 유미가 운다. 엄마. 이제 그만 날 잊어버려. 유미가 울면서 말한다. 영애는 입술을 꼭 문다. 나도 그러고 싶다. 지난 일이라 치고 다시 처음부터 살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일 뿐, 나는 다시 잊지 못한다.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하라니, 내 머리를 갈라 모든 기억을 꺼내 버리렴.

 

  계란 노른자와 다시마 가루로 만든 헤어팩을 잔뜩 바르고서 영미와 유미는 나란히 앉아 있곤 했다. 유미와 영미는 죽이 잘 맞았다. 엄마 노릇의 십분의 일은 영미가 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랬던 영미가 이제 그만 유미를 잊으란다. 서운하고 야속하고 밉다. 고통도 오래되면 지병처럼 지긋지긋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보기 싫거든 오지 마. 너 없이도 살아.” 중얼거리고서 영미를 외면한다. 입은 밥을 씹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깬돌들이 모난 모서리를 서로 부딪치고 있다. 장아찌를 씹던 이가 혀를 건드렸다. 씹던 일을 멈추고 얼른 물을 마신다. 그날도 이렇게 심하게 혀를 깨물었다. 대단한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닌데 혀를 깨물었고, 입안이 계속 불편했다.

 

 

  네온이 불야성을 이룬 유흥가. 대형 빌딩에서 쏟아져 나온 쓰레기가 주차장 한쪽에 태산처럼 쌓이는 시간. 영애는 십칠 층 룸을 청소하고 있었다. 술 냄새, 담배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을 때 세찬 바람 한 줄기가 들이닥쳤다. 꽃병이 넘어지면서 동료의 발등을 찍었다. 빌딩과 빌딩 사이로 가끔 용오름이 지나간다더니, 그런 것인가 여겼다. 그런데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시커먼 어떤 것이 바람을 타고 들어온 것 같았다. 오래 고인 물에 산다는 물컹거리고 기이한 큰빗이끼벌레 같은 것이 몸을 옥죄는 듯 숨이 막혔다. 뭐야, 이 기분 나쁜 냄새는? 동료가 투덜거리는데 또로롱 문자벨이 울렸다. 유미. 위젯을 끌어당기자 큰빗이끼벌레 같은 것이 창밖으로 쑤욱 빠져나갔다. 좋은 아침. 아빠와 난 잘 잤고, 기분도 좋아. 엄마만 남겨 놓고 와서 미안. 문자를 읽고 있는데 유미의 검고 탐스런 머리카락이 얼굴을 머릿속을 싹 스치고 지나갔다. 고약한 냄새를 지우면서 유미가 쓰는 샴푸 냄새가 났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유미가 보고 싶었다. 넌 꼭 대학에 보내 줄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십 분이나 지났을까. 지철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가 기울었어. 뒤집어질 것 같아. …유미, 유미가 안 보여. 화장실 간다고 했는데…. 지철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상에 하고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도 그게 다 남의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큰빗이끼벌레처럼 낯설고 무섭고 불길한 어떤 것이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졌을 때, 일은 이미 터져 있었던 것이다.

 

  영미에게서 리모컨을 뺏는다. “이러다 죽겠어. 차라리 죽어 버려. 그러면 잊을 거잖아. 유미한테로 가, 차라리!” 말 끝에 영미가 쿨쩍거린다. 사흘 전 정오에도 영미가 왔고, 볶음밥이 배달되었다. 텔레비전이 꺼졌고 물이 쏟아졌으며 쿨쩍 소리도 났다. 이 반복이 영화라면 얼마나 좋을까. 걸레를 빨아 바닥을 닦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청소를 하는 일, 어설픈 밥을 먹고 자는 듯 마는 듯 밤을 지내는 일, 신발을 신거나 세탁기의 버튼을 누르는 일, 이불을 덮고 다리를 웅크리는 일이 이미 본 영화라면. 그런데 사는 건 영화가 아니다. 매번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영화처럼 엄밀하게 똑같지 않다. 비슷하게 재현되는 장면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고, 그 변화는 보이지 않게 조금씩 바뀐 미래를 가져온다. 장면의 균열과 변화가 그것을 말해 준다. 지금 여기 있지만 십 년 전의 그것이 아닌 리모컨, 지금 여기 있지만 십 년 전의 그 사람이 아닌 영애, 지금 여기 있지만 십 년 전의 영미가 아닌 영미, 매일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는 유미. 그렇기 때문에 영애는 살아 있어야 했다. 내 속에서도 점점 희미해지는 유미를 누가 기억해 줄까? 질문을 담은 눈으로 영미를 본다. 영미에게 유미가 겹쳐진다. 잠 어린 눈을 비비며 식탁에 앉던 유미, 책가방을 메고 팔짝팔짝 뛰어서 목에 매달리던 유미, 젖은 머리카락으로 물을 뿌리며 환히 웃던 유미…가 영미처럼 있다.

 

 

  슬픔이 서슬처럼 담긴 눈길에 영미가 주춤하는 사이 초인종이 울린다. 영미는 얼른 영애 앞을 벗어나 조르르 현관으로 달려간다. 배달원이 철가방을 내려놓는다. 영애는 리모컨을 누른다. 3, 0, 9. 전쟁터에도 휴식은 있다. 잠시 문명인이 된 병사들은 장난을 친다. 원시인처럼 먹고 자며, 원시인처럼 흥분하여 싸우지만 또 원시인과도 같은 순수한 의지로 병사들이 휴식한다. 바뀐 장면. 포연 속에서 장동건이 포복하고 있다. 바로 곁 병사가 쓰러진다. 연발 총성. 장동건이 수류탄을 던진다. 장동건이 병사 셋과 함께 사이드로 빠지면서 원빈을 따돌린다. 돌격하는 장동건 뒤로 건물이 무너지고 파편이 튄다. 바뀐 장면. 장동건이 북한군과 육탄전을 벌인다. 엄호를 맡은 북한군이 장동건과 맞총질하다 죽는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배우들이 스러지는 장면을 지나 태극기가 휘날린다. 병사들이 평양에 입성한다. 거수경례하는 장동건과 원빈.

 

  볶음밥이 담긴 접시 두 개와 단무지, 양파와 중국 된장에는 랩이 씌워져 있다. 영미는 수저를 싼 종이와 볶음밥을 덮은 랩을 벗긴다. “먹자, 제발.” 영애는 화면을 가린 영미의 등을 민다. “비켜.” 옆으로 밀려난 채로 영미가 볶음밥을 먹는다. 볶음밥이 냄새를 피운다. 영애는 볶음밥을 기억한다. 그것은 몇 가지 야채를 잘게 썰고, 그것을 싸구려 고기 볶은 것과 섞어서 만든 음식이다. 영미가 막 랩을 벗긴 단무지는 절인 무에 설탕이나 사카린으로 단맛을 내고 약간의 식초를 뿌린 것이다. 양파는 가을에 심어 봄에 거두는 채소이며 동그랗게 생겼고, 여러 겹의 외피를 가지고 있다. 또 그것은 단맛과 매운 맛을 내는 것으로 여러 가지 음식에 양념으로 쓰인다. 새까맣고 진득한 중국 된장은 밀가루와 소금을 발효시켜 만든 재료에 캐러멜과 같은 첨가물을 넣은 것이다….

 

  피투성이가 된 원빈이 난투극을 벌이고 있다. 상대 배우는 아직 모른다. 몇몇 조연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최선을 다하는 태도인 체하는 것이 관객이다. 그녀도 엄연한 관객이다. 영애에게도 권리가 있다. 영화를 볼 권리, 맛있는 음식을 먹을 권리, 좋은 옷을 입을 권리 같은 것이 분명히 있다. 그 엄연한 권리를 누가 빼앗아 버렸는가. 온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워지는 것만 같다. 얼른 화면으로 눈을 돌린다. 불탄 시체들. 앙상하고 시꺼먼 뼈들. 장동건이 잿더미 속에서 만년필을 집어 든다. 표정이 침통하다. 새까만 뼈로 남은 하나의 목숨에, 하나의 목숨이었던 새까만 뼈에 장동건이 손을 얹는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은 참혹하게 죽지만 조용히 묻힌다. 더러는 묻히지 못하고 흙더미 위에서 썩는다. 목숨을 밟고 지나가는 탱크. 밥알처럼 으스러지는 뼈. 수없이 많은 유미들.

 

 

  영미가 볶음밥 접시를 들이민다. “먹어, 좀. 언니 볶음밥 좋아하잖아.” 못 들은 척한다. 옛날 일이다. 볶음밥을 좋아했고 만두를 좋아했다. 하지만 진흙이 메워진 것 같은 머릿속, 누런 위액이 구석구석 고여 있는 것 같은 뱃속, 스멀거리는 통증과 가려움으로 채워진 뼈와 살…. 고통의 증거들 속에서 배회하는 기억이 식욕을 가로막고 있다. 물끄러미, 영미를 본다. 음식은 이제 머릿속에 저장된 하나의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유미가 마음속에 있는 한 어떤 음식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음식을 넣으면 속에 있던 유미가 그것을 몽땅 뒤집어쓰고 말 것 같다. 반찬투정 없던 유미였지만 오래 보온된 밥과 시장에서 파는 김치, 무장아찌는 도저히 안 넘어간다고 했다. 김치가 떨어지면 어설픈 깍두기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영애는 유미가 먹지 못하게 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됐다. 유미가 싫어하던 것만 그나마 조금 먹을 수 있다. 어디에 있니? 점심은 뭘 먹니? 매일 주고받던 말의 기억을 다 잊어버린 뒤라면 모를까.

 

  러닝셔츠 차림의 오지호가 원빈에게 다가간다. 장동건을 찾아보자고 한다. 원빈이 격하게 받아친다. 나하고 상관없다고 했잖아. 훈장 못 받아서 환장한 인간이니 그 인간 죽든 말든 알게 뭐야. 오지호에게서 멈춘다. 선한 입매. 깊고 큰 눈. 주의해서 보지 않았지만 어느 때부턴가 주의해서 보게 된 배우다. 오지호가 화면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지철은 길게 찢어진 눈이었으나 입매는 묘하게 오지호를 닮았다. 눈 뜨고 웃어. 영애는 자주 지철을 놀렸다. 눈 작은 사람 간은 크다던데. 어, 그런가… 그런가 보군. 지철은 잘 웃었고 웃을 때면 눈이 거의 감겨 버렸다.

 

  유미는 죽었지만 그가 살았다는 것이 한동안은 위로가 됐다. 최소한 고통을 함께 나눌 상대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기 싫다는 걸 억지로 떠밀어 보낸 영애와, 같이 아침밥 먹고 유미가 화장실 간 사이에 무릎까지 차오른 바닷물을 헤치고 혼자 살아 나온 지철은 자신들이 고통을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서로를 찌를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그것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순항 중이던 배가 왜 갑자기 선로를 바꿨고, 그처럼 큰 여객선이 왜 순식간에 속수무책 뒤집어졌는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살 길을 찾아 뱃머리로 나온 일흔일곱 외에는 왜 단 한 사람도 구조될 수 없었는지, 살지도 죽지도 않은 마흔여섯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면서 유미의 죽음이 심연처럼 가라앉을 때, 마침내 고통은 고통끼리 부딪쳤다.

 

 

 

 

 

3화에서 계속됩니다.

 

 

 

조명숙 소설집 『조금씩 도둑』

 

조명숙 지음 | 문학 | 국판 변형 | 244쪽 | 13,000원

2015년 4월 6일 출간 | ISBN : 978-89-6545-286-7 03810

 

2012년 소설집 <댄싱 맘> 이후 3년 만에 소설가 조명숙이 네 번째 소설집을 출간했다. 어둠을 식별하는 감각적 문체와 정주하지 않고 유목하는 글쓰기 행보를 보였던 그가, 이번 소설집에서는 상처 입은 여성들의 세심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들로 돌아왔다. 특히 세월호 사건을 소재로 한 '점심의 종류'가 수록되어 있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와 현대인의 상실감을 엿볼 수 있다.

 

 

 

조금씩 도둑 - 10점
조명숙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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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조명숙 소설집 『조금씩 도둑』에 수록된

단편소설 「점심의 종류」를 연재합니다.

 

 

 

 

점심의 종류

조 명 숙

 

 

 

캡을 쓰고 작업복을 입으면

유미가 사라지기 전의 시간 속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어코 되돌려 놓고 싶은 순간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1화

 

 

 

 

 

  블라인드를 올리고 밖을 내다본다. 육 층에서 내려다보는 바깥은 고요하다. 이른 가을, 잔잔한 바람이 지나가는지 화단의 나뭇잎이 아주 조금 흔들린다. 숲에는 떨어진 나뭇잎이 이끼와 돌을 덮고 있을 즈음이다. 현관을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숲으로 가는 길이 있다. 오십 미터 간격으로 의자가 있고, 의자 아래에는 담배꽁초나 껌 같은 것이 떨어져 있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가끔은 개들도 지나가는 길이다. 숲에서는 여전히 나무들이 자라고, 자란 나무들의 가지는 잘리거나 굵어지고 있을 것이다.

 

  숲에 가지 않고 지낸 지 십 년이 됐다. 숲에만 가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옷가게라든가 과일가게, 빵집 같은 곳에도 가지 않았다. 집과 일터 외에 목적하고 가는 곳을 영애는 꼽아 본다. 은행. 월급이 들어왔는지, 전기료와 관리비, 전화 요금 같은 것이 잘 이체되고 있는지 확인한다. 시장. 김치와 무장아찌, 양말 같은 것을 산다. 바다. 회한이 치밀어 오를 때는 유미를 담그고 있는 바다에 간다.

 

  노천 주차장에는 먼지가 가득 앉은 그녀의 차가 있다. 지난 달 차는 유미에게 가다가 톨게이트를 눈앞에 두고 멈춰 버렸다. 돌보지 않음에 항의라도 하듯 갑자기. 뒤따르던 차들이 정체를 견디다 못하고 늘어섰다. 선글라스를 낀 마흔줄의 남자가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등산복 차림의 남자 둘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영애의 차를 갓길로 밀어붙이고 침을 퉤 뱉고 가 버렸다. 그 모든 일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운전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 건을 노리고 달려온 견인차 기사는 차가 멈춘 원인이 오일 오프 때문이라는 걸 알고는 제풀에 화를 냈다. 주유소에 가는 건 늘 지철의 일이었다. 지철의 출퇴근 거리가 멀기도 했고 외근이 잦아서 산 차였다. 그 차를 타고 바다에 갈 때마다, 차가 집에 도착하던 날이 생각났다. 환하게 웃던 지철과 팔짝거리며 좋아하던 유미였다. 우리에게도 차가 생겼어. 이제 어디든 갈 수 있게 됐어. 그들이 차를 타고 첫 주말 나들이를 한 것은 교외에 있는 숲이었다. 돗자리며 도시락에 아이스박스까지 싣고도 넉넉히 자리가 남아 이듬해에는 텐트까지 장만했다. 지철이 텐트를 치고 영애는 버너에 코펠을 올려 찌개를 끓였다. 삼 년도 채 못 가 시들해지고 말았지만 몇 번의 캠핑에 대한 추억은 차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모차를 밀며 103동에서 나온 여자가 상가 쪽으로 걸어간다. 사람이라곤 여자와, 유모차에 담겨 있을 아이뿐이다. 이곳의 정오는 늘 정적이다. 정오에 이곳 사람들은 점심을 먹으며 집에 있거나, 점심을 먹으러 외출했을 것이다. 그보다 일찍 많은 사람들은 일하러 가거나 학교에 갔을 것이다. 그보다 일찍 보다 조금 늦게 또 어떤 사람들은 휘트니스 클럽이나 백화점에 갔을 테고 더러는 병문안을 가기도 했겠지. 그중 몇은 법원이나 변호사, 회계사, 부동산중개업자에게 갔을지도 모른다. 드물기는 하겠지만 어쩌면 몇은 시 창작 강의나 사진 강좌 같은 걸 들으러 갔을 수도 있다. 이렇게 바깥을 내다보며 서 있는 사람도 혹 있을 것이다.

 

  영애는 유모차와 여자를 주시한다. 이 시간쯤에 종종 걸음으로 나타나는 여자는 대개 집안일을 두 시간 정도 해 주고 돌아가는 가사도우미일 확률이 높다. 지금 유모차를 밀고 있는 여자는 아이돌보미일 수도 있고, 아이를 돌봐 주러 온 할머니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육 층에서 보기에 여자의 다리는 길고 머리는 어깨에서 보기 좋게 찰랑거리는 것이, 아이 엄마 같다.

 

  하지만 여자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이곳 사람들은 서로를 모른다. 조금 전 지나친 사람이 빈집털이범이나 소시오패스일 수도 있고, 우울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몇 번 시도한 사람일 수도 있다. 상가가 있는 입구에서 205동까지 오는 동안에 돈을 빌려주고 떼인 사람과 남의 돈을 떼먹은 사람을 지나치기도 할 것이고, 주식투자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이 지나간 보도블록 위에 그녀의 발이 지나가기도 한다. 게임중독자나 여러 종류의 해킹프로그램을 가동하는 재주를 가진 컴퓨터 폐인, 사람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히키코모리, 건설업자, 사채업자, 베이커리 주인이 서로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엘리베이터에 함께 있을 수도 있다.

 

  또 그들 중에 국회의사당이나 시청 광장 같은 곳에서 영애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극도의 절망감과 간절함을 담아 침묵시위를 하고 있을 때 비난을 일삼던 사람들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래서 영애는 늘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곁눈질하지 않으려고 발끝만 쳐다본다.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해지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십 년 전에는 가끔 말을 걸어오기도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안심이 된다.

 

 

 

 

  유모차가 상가로 들어간 뒤 영애는 창가에서 물러선다. 정오이고, 밥을 먹어야 하는 시각이다. 밥 먹기 전에는 손을 씻어야 한다. 욕실로 가서 세면대 앞에 선다. 제복과 캡을 벗는다. 캡이 벗겨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머리카락이 부풀어 오른다. 말썽쟁이 아이처럼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자라 있다. 어제, 푸석푸석한 것이 하도 뻗치기에 가위로 대충 잘라 버렸다. 물끄러미 거울을 본다. 움푹 들어간 눈자위, 블랙헤드가 박힌 코와 뺨, 막무가내로 닫힌 입…. 깡마르고 윤기라고는 없는 여자가 그림자처럼 조용히 거울 속에 있다.

 

  손을 닦고 욕실을 나오는데 폰이 울린다. 폰은 거실 소파에 던져둔 가방에 있다. 천천히 걸어가서 가방을 연다. 폰을 꺼내 들여다본다. 영미다. “왔지? 나 지금 올라간다.” 엄마 죽고 유일한 피붙이로 남은 영미다. 잘 울고 매우 보채던 어린것이 벌써 마흔을 넘겼다. 한 달에 한 번 정도이던 영미의 방문이 지난달부터 사흘 간격으로 좁혀져 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가슴에서 자그락자그락 깬돌을 밟는 소리가 난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세상 어느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지만 영미에게만은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냉장고로 간다. 물을 마시고 전기밥솥을 열어 본다. 어제 저녁 지어서 보온해 둔 밥이 있다. 노리끼리하게 색이 변한 밥이 담긴 내솥을 쟁반에 올리고 수저와 김치, 무장아찌와 물 한 컵을 챙긴다. 시장에서 산 김치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나고, 무장아찌는 곰팡이가 피어 있다. 거실로 가서 TV와 외장형 수신기를 켠다. 되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밥 한 숟가락을 욱여넣는다. 장아찌 한 쪽과 물 한 모금을 섞어 목구멍으로 넘긴다.

 

 

 

 

  구식 외장형 TV수신기는 그제야 로딩을 마무리한다. 외장형 수신기는 저소음형 벽걸이 시계라든지, 수많은 흠집이 그 자체로 액정화면이 되어 버린 폰, 뒷꿈치가 나달나달해진 플라스틱 슬리퍼나 끈이 떨어진 운동화, 때가 묻고 색깔이 변한 토드 백 같은 것들과 함께 영애의 2024년에 와 있다. 그동안 여러 곳에 자동차 전용도로가 생겼고, 지하철 노선 두 개가 개통되었으며, 신용카드의 유효기간은 세 번이 지났다. 엄청나게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애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미는 돌아오지 않았고 유미를 잃은 상처는 조금도 아물지 않았다. 그것만이 엄연한 현실이다.

 

  밥 한 숟가락을 더 욱여넣고 3, 0, 9를 누른다. 제목이 뜬다. 태극기 휘날리며. 화면에 눈을 대고 다시 밥 한 숟가락. 이 오래된 영화는 몇 번이나 보았다. 현실이 아닌 영화라서 다행이야 생각하는 사이, 장민호가 전화를 받는다. 전화는 갑작스러운 것이지만 이미 여러 번 받은 적이 있는, 기다리던 전화다. 국군유해수습위원회 소속의 젊은이가 정중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장민호의 이름과 성을 묻는다. 예. 제가 이진석입니다.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젊은이가 다시 말한다. …혹시 이진태… 확실하지 않지만 혹시나 해서요…. 전화를 끊고 장민호가 멍한 표정을 짓는다. 예쁘고 발랄하며, 사려 깊은 태도로 조윤희가 다가든다. 할아버지. 큰할아버지 소식인가요? 장민호는 애매한 태도로 말을 흐린다. 아, 아니.

 

  바뀐 장면. 장민호가 옷을 갈아입는다. 낡은 책상 서랍을 열어 알약을 챙긴다. 지병이 있을 때도 됐지. 저 나이가 되어서도 변함없이 힘껏 달리고 섹스하고 먹어 대야 한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나이를 먹고 병이 생긴다는 것이 이제 그만 살아도 된다는 예고를 받는 것이라면 괜찮은 진행인 셈이다. 사진틀 두 개가 장민호의 시선으로 잡힌다. 그중 하나의 사진틀에 끼어 있는 사진에서 조윤희의 모습이 확인된다. 최근에 찍은 가족사진이다. 장민호가 그 옆의 사진틀을 집어 든다. 앉은 이영란 뒤로 장동건과 원빈이 나란히 서 있다. 멈칫거리는 장민호의 손,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 옷장 문을 열고 장민호는 오래된 대나무 상자를 꺼낸다. 다갈색의 구두 한 켤레 클로즈업.

 

 

 

  구두가 사라지면서 영화 속 시간이 거꾸로 가기 시작한다. 생기발랄한 장동건과 원빈, 그리로 이은주가 화사하게 웃는다. 그때 영미가 들어온다. 거꾸로 가고 있는 시간을 되돌리듯 영미가 쟁반 옆에 가방을 툭 던진다. “이걸 밥이라고 먹어?” 힐난인지 걱정인지 종잡을 수 없는 투다. 힐난이기도 하고 걱정이기도 하겠지. 묵묵히 밥 한 숟가락을 푹 뜬다. 그래. 이건 밥이 아니다. 영애는 밥 아닌 밥을 입에 넣는다. 밥과 장아찌를 씹는 입 저쪽, 어금니 하나가 시큰거린다. 어쩌다 밥알이 푹 빠지기도 하는 그 어금니는 썩어 뿌리만 남아 주기적으로 지독한 통증을 불러일으킨다. 치통은 모멸스러운 것이다. 발뒤꿈치에 두툼하게 앉은 각질이라든가, 큐티클이 자라는 손톱, 수북한 겨드랑이 털 같은 것들처럼, 치통이 올 때마다 영애는 십 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십 년째 치통과 함께 밥을 먹는다. 치통과 먹는 밥은 밥이 아니다. 귓밥이나 걸레, 제 손으로 대충 자른 머리카락과 변기 뚜껑, 제멋대로 퍼져 자란 눈썹과 굽이 낮은 구두 같은 것들과 함께, 여름옷과 겨울옷에서부터 가방, 신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낡은 것들과 함께, 베란다의 빨래대며 에어컨 실외기, 텔레비전 리모컨과 이불, 베개 같은 것들과 함께 영애는 치통의 발발지점에 머물러 있다.

 

  “여기 205동 602혼데요, 볶음밥 두 개요. 최대한 빨리요.” 가방 옆에 앉은 영미가 중국집에 주문을 한다. 그리고 한결 누그러진 투로 말한다. “볶음밥 먹고, 미장원 가자. 머리가 이게 뭐야?” 영미가 뻗쳐 오른 영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울컥 눈물이 솟으려는 걸 감추느라 영미 손을 떨친다.“캡 쓰면 돼.” 작업용 캡을 쓰면 아무리 잘 다듬은 머리도 한 가지 포즈로 나오게 되어 있다. 동료들은 일이 끝나면 캡을 벗고 난 뒤 움푹 들어간 자국을 고대기로 펴고 유니폼을 갈아입지만 영애는 캡을 쓰고 유니폼을 입은 채로 집에 온다. 아이가 살아 있는 이들은 아이를 잃은 여자의 뒤에서 수군거린다. 저 여자, 애가 죽었대. 안됐어, 참. 하지만 저 꼴이 뭐야. 십 년이나 됐다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회사에선 저런 여잘 왜 안 자른대? 더럽고 기분 나빠. 그때 그 사고로 특별법이라는 걸 만들어서 제 발로 나가기 전엔 못 자른대. 보상금도 꽤 받았을 건데 왜 꾸역꾸역 나오나 몰라. 그래도 너무하는 거 아냐? 이 자리라도 구하려고 목매달고 있는 사람 줄을 섰는데, 웬 특혜냐고. 일터에서의 따돌림은 고통스럽지만 견딜 만하다. 영애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다. 일을 하면서 고통을 잊으려는 것도 아니다. 캡을 쓰고 작업복을 입으면 유미가 사라지기 전의 시간 속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어코 되돌려 놓고 싶은 순간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2화에서 계속됩니다.

 

 

 

 

조명숙 소설집 『조금씩 도둑』

 

조명숙 지음 | 문학 | 국판 변형 | 244쪽 | 13,000원

2015년 4월 6일 출간 | ISBN : 978-89-6545-286-7 03810

 

2012년 소설집 <댄싱 맘> 이후 3년 만에 소설가 조명숙이 네 번째 소설집을 출간했다. 어둠을 식별하는 감각적 문체와 정주하지 않고 유목하는 글쓰기 행보를 보였던 그가, 이번 소설집에서는 상처 입은 여성들의 세심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들로 돌아왔다. 특히 세월호 사건을 소재로 한 '점심의 종류'가 수록되어 있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와 현대인의 상실감을 엿볼 수 있다.

 

 

 

조금씩 도둑 - 10점
조명숙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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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내일은 세월호가 침몰한지 2년이 되는 날입니다.

10년, 20년이 지나도 유가족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2024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부터 10년 뒤를 상상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세월호에서 딸을 잃은 어머니의 점심식사를 그린 「점심의 종류」 입니다.


"이걸 밥이라고 먹어?" 

힐난인지 걱정인지 종잡을 수 없는 투다. 

힐난이기도 하고 걱정이기도 하겠지. 

묵묵히 밥 한 숟가락을 푹 뜬다. 그래. 이건 밥이 아니다. 

영애는 밥 아닌 밥을 입에 넣는다. 

밥과 장아찌를 씹는 입 저쪽, 어금니 하나가 시큰거린다. 

어쩌다 밥알이 푹 빠지기도 하는 그 어금니는 

썩어 뿌리만 남아 주기적으로 지독한 통증을 불러일으킨다. 

치통은 모멸스러운 것이다. 발뒤꿈치에 두툼하게 앉은 각질이라든가, 

큐티클이 자라는 손톱, 수북한 겨드랑이 털 같은 것들처럼, 

치통이 올 때마다 영애는 십 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십 년째 치통과 함께 밥을 먹는다. 치통과 먹는 밥은 밥이 아니다.

-조명숙, 점심의 종류


주인공 '영애'가 먹는 것은 "노리끼리하게 색이 변한 밥", 

"시큼한 냄새"가 나는 시장에서 산 김치, 곰팡이가 핀 무장아찌입니다. 

이런 밥 아닌 밥을 입안에 욱여넣고 있습니다.


보다 못한 여동생은 중국음식점에서 볶음밥을 주문합니다.


"먹어, 좀. 언니 볶음밥 좋아하잖아." 

못 들은 척한다. 옛날 일이다. (…) 

음식은 이제 머릿속에 저장된 하나의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유미가 마음속에 있는 한 어떤 음식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음식을 넣으면 속에 있던 유미가 그것을 몽땅 뒤집어쓰고 말 것 같다. (…) 

영애는 유미가 먹지 못하게 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됐다. 

유미가 싫어하던 것만 그나마 조금 먹을 수 있다. 

어디에 있니? 

점심은 뭘 먹니? 

매일 주고받던 말의 기억을 다 잊어버린 뒤라면 모를까.

-조명숙, 점심의 종류


세월호 1주기가 조금 지나 열린 작가와의 만남에서, 

조명숙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상 속에서는 어느 평범한 아줌마로 살면서도, 작가로서 놓치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공감하는 태도였습니다. 작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뒤, 서울에 몇 번 간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광화문에 안 갔어요. 안 갔다고 해야 하나, 못 갔다고 해야 하나 헷갈리지만... 제가 좀 그런 것 같습니다. 깊이 공감하고 혼자 막 눈물도 흘리는데 실제로 행동은 안되더라고요. 


지난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럽고 힘들어 하고 있을 무렵에 저 역시도 어린 생명을 보내야 하는 일이 생기더군요. 그때 제가 그랬어요. "그래도 우리는 편안하게 보냈잖아. 그 바다를 보면서 보낸 사람들... 그 사람들은 마음이... 어떨까" 이후에 사건이 수습되는 과정과 몇몇 사람들의 몰지각한 행동들을 보며서 인간으로서 느끼게 되는 모독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

제 스스로는 「점심의 종류가 작위적인 부분이 많아서 (세월호) 유족 분들한테 죄송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으로 느꼈던 분노, 모멸감을 느끼면서 '아직도 나는 이것밖에 안되는가?'라는 생각도 했고요."


이 날 눈물을 훔치며 말씀하시던 작가님의 모습, 

그리고 함께 눈물 흘렸던 독자분들이 기억납니다.



그때 그 바다의 현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

이백 명의 승선객 중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일흔일곱 명이었고,

시신으로 건진 사람이 또 일흔일곱이었다.

나머지 마흔여섯은

마흔여섯 날을 두 번이나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조명숙, 점심의 종류


2014년 4월 16일, 

그날 이 세상을 떠난 생명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바다. 회한이 치밀어 오를 때는 유미를 담그고 있는 바다에 간다.


-조명숙, 「점심의 종류」


딸을 잃은 뒤 '영애'는 집과 직장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하지만

가끔 바다에 갑니다. 바다에 가는 것을 

이제는 소리도, 냄새도, 움직임도 느낄 수 없는 딸에게 가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부산입니다. 

이곳에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조금씩 도둑 - 10점
조명숙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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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단디SJ 2016.04.15 15: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난 저자와의 만남에서 「점심의 종류」 이야기를 하시며 눈물을 훔치시던 조명숙 선생님이 생각나네요... 4월, 참 예쁜 계절이면서도 여전히 가슴 먹먹해지는 계절이네요. 저 역시도, 잊지 않겠습니다.

  2. 온수 2016.04.18 12: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도 차가운 물로 몸을 씻지 못합니다. 그해 4월 그곳은 얼마나 추웠을까요. 가끔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작가와의 책이야기

사진: 김민영 

 

11월의 마지막 목요일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김비 작가님과 독자분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긴 제목 덕분에 『붉, 출』이라고도 불리는 이 장편소설은 

비상계단에 갇힌 가족의 이야기인데요

택배기사로 일하다 허리를 다친 남수, 근무력증을 앓는 아내 지애그리고 뇌성마비를 가진 아들 환이가 주인공입니다.

동반자살을 하기 전, 가족은 마지막 만찬을 위해 초호화 백화점에 왔다가

층수도 쓰여 있지 않고, 이상한 붉은 불빛으로 물든 비상계단에 들어섭니다.

여기서 비정규직 20대 정화, 명예퇴직 압박에 시달리는 명식

성전환 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려는 수현 등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출구를 찾아 헤멥니다

 

행사가 있었던 26일은 손발이 얼어붙을 만큼 바람이 강한 날이었어요

그럼에도 많은 독자분들께서 참석해주셔서 

행사 공간을 빌려주신 호랑이 출판사의 작업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난롯불 쬐며 이야기했답니다



이 날 이야기는 작가님께서 책의 일부분을 직접 낭독해주시면서 시작됐어요.


남수는 찬찬히 사방 벽을 둘러보았다. 손으로 짚어가며 붉은 벽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고 보니 매끈하게만 보였던 벽 위엔 무수히 많은 작은 돌기들이 오돌토돌 돋아 있었다. 조금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벽이었지만, 손으로 더듬어보니 무작위의 돌기가 빼곡히 만져졌다. 그것은 마치 공포에 질린 누군가의 팔뚝 같았다. "이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틀림없어."

성급한 손길로 그녀는 환이를 쓰다듬었다

(…) 

순간 남수는 엉뚱하게도 역사 속에 희생되어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택해야 하는 시간,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택할 수밖에 없는 순리. 그렇다면 우리는 차선이나 차악이 될 수 있을까? 남수는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쾅쾅, 또 한 번 있는 힘껏 철문을 두드렸다

"그럼 고장 아닌가?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고장이니 인재니 만날 그러잖아?"

"그러면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어야지. 갇힌 게 우리뿐이라는 건 말이 안 되지."

더 이상 지애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몸짓을 흉내라도 내듯 남수도 붉게 물든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상해, 여기.' 그녀는 또다시 그렇게 중얼거렸다(22~23)

 

소설 속 짧은 한 장면에서도 주인공들의 불안과 절망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붉, 출』을 암울한 이야기라 부르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 아닐까 합니다. 김비 작가님은 비상계단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혀 있으면서도 인물들이 그 안에서 스스로 원하던 것, 하고 싶어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뤄 나간다는 점을 짚으셨습니다. 가난 속에서 떳떳한 가장이 되기 힘들었던 남수는 계단 속에서 가족과 함께 걷고 있고, 침대를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했던 지애는 남수와 환이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존재가 됩니다. , 비틀린 팔다리 때문에 스스로 움직이기 힘들었던 환이도 비상계단에서는 온 세상을 자기의 그림으로 채우는 꿈을 이룹니다.

이런 점이 『붉, 출』의 숨겨진 반전이라고 할까요. 이어진 김대성 평론가님과의 대담에서도 이렇게 『붉, 출』을 숨겨진 면모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대담의 일부를 아래에 옮겨봅니다.


///


김비: 이 안이 굉장히 척박하고 암울하고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인 것 같지만, 이 인물들은 아무런 것도 변한 게 없다, 예상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많은 것을 이루고 변화된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거죠. 근데 그것은 그쪽 세계뿐만 아니고 우리, 이쪽의 세계의 반영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거든요.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떤 절망이 정말 절망일까. 혹시 내가 어디에 묶여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 저는 예전에... 예전을 생각하면 정말 많이 절망했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자학도 많이 하고 그랬었는데 요즘은 좀 자유로운 느낌을 조금조금씩 갖게 되요. 저 자신을.. 이제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저 자신을 추스르면서 내가 서 있는 여기를 나를 위해서 즐겁게 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아무 생각하지 않고. 가족, 사회, 정치, 다 생각 않고 나를 위해서. 오롯이 나 하나를 위안하면서, 나를 위해서, 그렇게 살고 있거든요. 그렇더라도 저는 그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느 서면 인터뷰에서 주인공인 남수라는 인물은 왜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고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냐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 실제로 보통의 이야기는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인물이 어떤 사건이나 이유.. 다른 계기가 있어서 다른 인물로 바뀌거든요. 선하게 깨우친다거나, 내가 이제 바뀌어야 되겠다, 내가 이제 가족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바뀌게 되는데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죠. 저는 인물을 바꾸는 대신 세계를 바꾼 거죠. 그러니까 그런 세계라면 그런 인물이 오히려 더 가장 희망적이고, 그 세계를 믿지 않고, 그 세계를 불신하는 비관적인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가장 희망적이고 생을 향해 가장 힘 있는 발걸음을 내딛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궁극적으로 굉장히 암울하지만, 여전히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으로 남아 있지만 제가 하려고 했던 것은 희망의 다른 얼굴을 얘기[하는 것이었어요.]


 


김대성: 여기에 한마디 더 보태면, (…) 절망이라는 거는 희망하기를 멈춘다는 거잖아요. 말 그대로 푼다면. 그런데 만약 이 세상이 개별자들의 희망을 지켜주지 못하는 곳이라면 우리가 희망하는 방식이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매번 실패하고 패배하고 좌절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당할 게 아니라 절망이 희망하기를 중단한다, 끊어낸다는 것은 다르게 접근해보면 직전까지 희망했다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막연한 희망들을 품고 상처받을까 두려워할 게 아니라, 잘 절망하자. 절망과 대면하자. 절망함으로써 직전까지 희망하지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자. (…) 남수 또한 (…) '저 위에 뭐가 있다 저 아래 뭔가가 있다' 이야기가 오갈 때 같이 움직이다가 매번 좌절[하고], 오히려 그 좌절을 선명하게 대면하면서, 언제라도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면서 건물 뒷편 계단 안에서의 생의 의지같은 것들을 좀 발견하는 장면들이 전반적으로 펼쳐져 있거든요. 그것이 말씀하셨던 세계를 아예 바꿔버리는, 태도를 바꿈으로서 그런 것과 연관이 되는 것 같아요. 절망하기로서의 희망하기의 문맥하고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김비: , 여기도 카피로 쓰셨지만, "희망이라고 다 옳은 게 아냐. 어떤 희망은 후련한 절망보다 못해." 희망이란 말이 물론 많은 걸 일으키고 있기는 한데, 너덜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문을 사이에 두고 바깥 쪽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소리가 있잖아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소리가 있잖아요. 되게 잔인하지만, 어쩌면 그게 우리 살고 있는 여기가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걸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세계에 살고 있고 그럼에도 나아가는 것이 책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잔인함을 오롯이 드러낼 수밖에 없는어쨌든 희망이라는 말 아닌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희망이 아닌, 희망을 짓누르는 다른 언어. 정말 우리를 일으킬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희망이라는 언어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요


김대성: [소설에서는] 여기가 몇 층인지도 몰라요. 160층 백화점에서, 지하로 내려가야 될지, 지상으로 올라가야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죠. 그런데 남수는 허리가 너무 안 좋고, 아이도 있고, 지애는 만성 무기력증이고. (…) 조금 내려갔다가도 다시 올라와야 되고, 그런 상황 속에서 그런데 위에서부터 소리가 들리고 문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거든요. 금방이라도 나갈 수 있을 것처럼. 그런 단서들이 소설에 전반적으로 계속 펼쳐져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 주신 것 같아요.

환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환이가 너무 핵심적인가요


김비: 그렇죠, 아무래도. (key).


김대성: 희망 말고 환이.


김비: 그거 좋네요.


김대성: (…) 모두가 무력해질 때 환이가 천진난만함으로 방향을 제시하거든요. "아이의 그림은 이제 혼돈에 빠진 그들을 이끄는 마술같은 표식이었다"라고 176페이지에서 177 페이지 사이에 걸쳐 있는 문장이 있는데. 되게 아무런 희망도 없[] 것 같은 뇌성마비[를 가진] 아이가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면서. 그것을 보고 여기가 몇 층이다. 우리가 몇 층 올라왔구나 [알게 돼요. 그 이전에는] 아무도 그걸 시도를 안 해요. 그냥 출구를 찾으려고 아등바등거리지 여기가 몇 층이라는 표시를 할 생각을 아무도 하지를 않는데, 환이가 그걸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그냥 그림을 그리는 거에요. 그게 표식이 되어서 작은 이정표가 되는데. (…) 마치 횃불 같[기도 하]고 가끔씩은 조명등 같고 촛불 같은 (…) 환이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를 [해주세요.]


김비: 아이.. 이건 개인적인 습성 같은데요. 전 항상 소설에 아이를 써요. 그것도 한 여섯일곱살의 아이를 꼭 쓰는 편이에요. (…) 어쩌면 그게 저 자신이 갖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동경, 계속된 동경이겠죠. (…) 내가 갖지 못한 순수함에 대한 욕망, 욕구 같은 것일 수도 있고, 그 나이대로 돌아가려는 회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이 아이 같은 경우는 장애[를 가진 소수자에요.] 성소수자는 제가 주변에서 많이 봤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편안하게 쓰는 편인데, 장애를 가진 아이를 쓰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건 뭐 취재하고 이런 어려움이 아니라 그 인물을 만드는 것 자체가, 일단 한 인물을 탄생시키는 거잖아요. 그것도 장애를 가진 한 인물을.. 그거는 굉장히 아픈 일이거든요, 제 생각으로는. 그런데 이 아이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요. 횃불이고 촛불 같다고 하셨는데. [제가] 어렸을 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저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행동하는데 주변에서는 제가 이상하다고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런데 만약에 환이가, 이거 정말 조심스런 얘기지만, 선천적으로 그런 몸으로 태어났다면 이 아이에게 과연 꿈꿀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일까, 이 아이는 꿈을 안 꿀까, 정말, 이 아이는 정말 고통스럽기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한 거거든요. 가끔 병원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같은 걸 보면 아이들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굉장히 순수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금방 고통을 가졌었던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순수한 웃음, 그런 걸 발견할 때. 이건 제 욕심일 수 있어요, 정말 위험한 욕심일 수 있는데 좀 그렇다면 좋겠다는 바람인 것 같아요. 누가 옆에서 이쁘다고 해 주면 자기 스스로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나 이쁘구나하고 생각하는 그런 존재이기를 바란 제 마음인 것 같아요. 그래서 되게 조심스러웠어요


(…)


김대성그러면 환이 이야기는 이 정도 하고요. 전작 『빠쓰정류장』에서는 기억 속의 장소를 찾기 위해서 로드무비처럼 계속 옮겨 다니[고, 찾고 있는] 그곳은 없는 곳으로 밝혀지는데, 정류장이라는 것이 머무는 장소는 아니잖아요. 머물지 못하고 바로 가야 되거든요. 정류장의 장소라는 것은 대합실 의자 정도의 공간? 떠남인지 상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 앉아야 다음 행보를 시작할 수 있는, 뿌리내릴 수 없는 존재들의 거처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붉, 닫, 출』은 계단이어서 이전처럼 수평적으로 옮겨 다닐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수직적이고 갑갑하고 변동 없는 장소로, 폐쇄적인 곳[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변화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세요. 겹쳐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 건 뭐냐면, (…) 소설에서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각 층들이 정류소일 수도 있다. [그곳이] 절망하면서 멈춰 설 수도 있구요,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는 그런… 내몰린 이들이 잠깐 머물 수 있는 거처일 수도 있겠다. 가까스로 버틸 수 있는 장소일 수도 있겠다, 라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초반에 남수가 ‘출구를 한 번 찾아 볼게’ 하고 계속 내려가거든요? 그때 위에서 지애가 ‘여보, 있어요?’ 하고 물어요. 그 때 남수가 ‘있어!’ 하고 대답을 하는데  [그 대화가] 무기력하고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애의 무력함을 드러내기보다는 이 폐쇄적인 공간을 그들의 교류와 교신이 일어나는 장소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조금 받았는데. .그런 면에서 이 계단은 폐쇄적인 공간은 아니구나. 언제라도 새로 시작할 수 있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질 수 있고,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고, 이곳이 좀 정류소 같은 느낌도 든다, 연장선에 있겠구나 하는 대목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적 공간에 대해서 염두에 두시거나 조금 더 이야기해주시고 싶은 대목이 있으면 들려주세요.


김비 (…) 실제로 이 공간은 부산에서 만났어요. 서면 cgv아시죠? 마트가 밑에 있잖아요. 지하주차를 하면 지나서 가야 하잖아요, 홈플러스를 지나서 가지 않으려면 비상계단을 올라가게 되있어요. 근데 그 비상계단 들어가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 비상계단에 층수가 없었어요. 중간쯤 올라가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는 거에요, 갑자기 두려움이 굉장히 크게 밀려왔었어요. 그게 이 이야기의 시발점이었는데 그 계단이라는 공간이, 과연 저 표지판이 없다면 무엇을 보고 오르내릴 수 있을까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그것을 생각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과 겹쳐졌어요.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끊임없이 누군가를 따라서 올라가고. 저도 그때 다른 게 앞에 없었거든요. 앞에 다른 사람이 걸어 올라가니까 올라가고. 어쩌면 계단이라는 공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이 자본주의 사회.

횡으로 설 수 없는 공간이에요. 일직선으로 설 수밖에 없는 공간이거든요.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이기도 하고, 저는 등장인물들이 또 다른 의미의 각자의 희망을 만들어 가면서 이 공간이 더 확장되기를 바랐어요. 욕심으로는 우주를 담고 싶었어요, 이 안에. 그래서 우주에 대한 힌트들이 남아 있어요. 이게 또 다른 세계이기도 하고, 이 공간을 태초로 돌리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하고, 작가로서 시도하는 전복, 빅뱅같은 의미였거든요. 실제로 굉장히 좁은 공간이지만, 작가로서는 이 공간이 우주로까지 확장되는 공간이었어요. 그래서 벌레 이야기도.. 벌레가 처음에는 눈에 있었죠. 마지막에는 이 건물 자체가 벌레처럼 꿈틀거린다고 했거든요. 확장되는 느낌이고. 이 인물들의 이름에도 유치하긴 하지만 한가지씩 힌트를 넣었어요. 혹시 아시나요?


김대성: 어떤..?


김비: 이름들에 은하계 행성들의 이름을 하나씩 집어 넣었어요


김대성: , 그렇구나. 수현, 지애,


다같이: 금이, 정화… 


김비: 정말 유치한 거거든요, 하지만-


김대성: 보물찾기 같은 거네요.


김비: 그렇죠. 환이는 앞에 나오죠. "그만해, 김달환!" 이렇게 나오잖아요. (…) 이 공간을 우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끝나는 건 우리밖에 없거든요. 그냥 우주는 계속 지나가고 있는 거죠.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끝이 아닌 웜홀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나가서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세계를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거든요. 협소하게 읽으면 협소하지만 작가로서는 굉장히 큰 것 까지 생각하면서 그려냈던 공간이었습니다.


김대성: 여러분, 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주가 여러분들을… (웃음)


김비: (웃음) 작가는, 아무래도, 병인 것 같아요. 굉장히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해요. 한군데에 몰아넣으려고 하고 그것에 잘 완성되면 되게 보람이 있어요. 인물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이건 우주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에요]. 


김대성: 계단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경향신문[에 실린 서평처럼 소설을] '재난' 이야기로서 읽을 수도 있지만 (…) 한 개인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부침을 묘사해놓은 것으로도 읽을 수 있거든요. 일상적으로 읽을 수 있는 문맥이 훨씬 풍부하다고 생각하는데..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는 재난이 아니라,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존재들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정서의 부침들, 이를테면 조증 같은거요. 좋았다가 끊임없이 추락하고. 추락하면서는 다시는 올라갈 수 없을 거라고 절망하면서, 바닥을 치죠, 그리고 이 추락은 얼마나 또 쉽게 됩니까. 그런 것들도 (…) 충분히 염두에 두고 쓰신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소설을 재난서사로 단박에 규정하기에는 좀 더 세밀하고 폭넓게 읽을 수 있는 대목들이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비: 맞아요, 저는 재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재난서사로 쓰려면 이 재난을 주인공들이 어떻게든 극복해야 하거든요.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데 제가 묘사한 방식은 재난서사의 극복방식은 절대 아니거든요. 누군가 영웅적인 행동을 해야 하고 누군가를 살려내야 하고 , 떠나면 안돼!’, 이런 게 있어야 되는데, 저는 재난서사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그냥 우리 현실과 꼭 닮은 궁지를 그려내고 싶고 그 궁지를 좀 깨트리고 싶었어요. 중간에 구상을 하는 와중에 세월호 사건도 있고 그래서 감금, 폐쇄라는 것이 굉장히 크게 다가왔어요. 너무너무 크게, 아프게 다가왔[어요].


(…)


독자: 여기서 조명이 세 번 바뀌잖아요, 처음에 붉었다가, 나중엔 파랬다가, 나중에 없어지잖아요. 어떤 뜻을 담으신 건[가요].


김비: 앞서 말했던 환경의 변화고요, 우주 얘기를 했잖아요. 우주를 만든 것은 불, 물 그런 물질이거든요. 그것의 상징을 쓰려고 했고저는 이 세상이 바뀌면 뭔가 굉장히 많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ㅠ요. 그 차이 없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불이 꺼지면서 밖으로 암흑이 되고 불빛이 떨어지잖아요, 불빛의 파편이 떨어지고 건물이 흔들리면서 먼지가 떨어지는데요. 그 공간 안에 우주의 모습을 그리려는 욕심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우주에 꽂혀 있었어요. 이 세계를 태초로 돌리고 싶은 욕망. (…)


독자: 아까 세월호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학생들이 몇 백 명 내려간다고 []셨잖아요. ‘수장 당한이런 표현도 있었고. 염두에 두신 건가요?


김비: 망설였어요. 이건 쓰면 안돼. 근데, 어차피 제가 현실을 담고자 했고무기력함을 담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여기를 담고 싶었어요.


김대성: 소설에서 35페이지에 보면 남수가 밑에서 되게 절망적으로 고꾸라져 있다가 힘을 내서 그는 제자리를 향해서 뛰고 있다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근데 이 제자리가 주기적인 표현인 것 같아요. 자기 자리이기도 하구요, 두 번째는 원래 있던 자리에요. 그럼 변한 건 없어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데, 근데 그게 원점이 아니라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 내가 와주기를 바라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자리, 책임을 짊어지는 자리이고 응답해야 하는 자리. 그래서 제자리가 되게 힘 있는 자리일 수 있겠다. 그래서 남수가 초반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혼자 걸음이 아니겠다, 이것은 지애랑 달환이의 걸음이 겹쳐져 있는 걸 수 있겠다. 이 절망적인 세계에서 우리가 뭐랄까요, 구조요청, 모두가 구조요청하잖아요. 누구나 쉽게 조난당할 수 있고. 절망에 빠질 수 있는데 이 구조요청에 응답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 바로 함께 조난당한 사람이 구조요청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구조요청에 가장 필요한 건 저는 응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사람을 건져 올리는 게 아니라 그걸 들어야 해요. 그리고 반응을 해야 하는데, 남수의 제자리를 향해서 뛰어올라갔다는 짧은 문장이, 책임을 지는 자리,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거란 측면에서 여기 나오는 많은 무기력한 존재들이 서로에게 응답하고 있고 서로에게 작은 책임을 붙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 건물 뒷면이 절망의 공간만은 아니다, 서로가 엉키고 어울리면서 결들을 달리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김비: 정확하게 읽어주셨는데, 아까 말씀 드렸듯이 이 사람들이 결국은 희망을 다 찾고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요.] 그것이 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믿음이고 신념이고 새로운 에너지거든요. 어떻게든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제자리 얘기를 하셨는데, 233페이지에 수현과 정화가 무리와 떨어져서 여행자처럼 계단을 여행하면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서 목종이 "그게 무슨 소리야. 다 똑같은데 가면 뭐해"라고 하니, 수현이 얘기를 합니다

아무리 똑같아 보여도, 같은 건 없지. 여기가 어디인지 우린 왜 여기에 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우린 어쨌든 다른 곳에 와 있잖아? 제자리를 도는 것 같지만, 여전히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일단 올라서면 그곳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잖아? 다시 돌아내려간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이미 그때의 거기는 아니잖아? (…) 내가 달라졌으니까, 아무리 그곳이 똑같은 곳이라고 하더라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져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가 똑같은 세계,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세계를 만들었지만, 결국에는 똑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계, 누가 구원해주는 건 정말 아니거든요. 우리 안에 있는 거죠. [후반부에] 종교에 관한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이 책 안에 제가 신을 넣었거든요. (…) 묵묵히 곁에서 남수의 모든 걸 지켜보고 제일 먼저 절망의 상태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을 때 가장 먼저 앞서서 걸어 올라가는 이름 없는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을 바로 신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고요. 신은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종교는 없지만, [저는] 구원을 찾아라, 믿어라, 이래라 그런 게 과연 신일까? 생각하거든요. 조용히 우리와 같이 쓰러지고, 같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하지만 아무 말 없이 가장 먼저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서 인도하는 인물이 신이 아닐까 생각해요.

 

///


남수가 번번이 되돌아오는 '제자리'가 

응답의 자리라는 말을 곱씹게 되는 저녁이었습니다.

(앗 응답하라 198...? 하핫)  

편집자로서 『붉출』을 여러 번 읽었지만, 작가님과 평론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인물의 이름에 은하계 행성들을 숨겨놓으셨다니!!! 저만 눈치 못 채고 있었던 건 아니겠죠;)


2015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새해 결심을 할 날도 (그리고 작심삼일 할 날도!) 멀지 않지만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응답하고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 따뜻한 12월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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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디자이너 2015.12.11 17: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난롯불 쬐며 같이 있었던 느낌이 드네요.

중단편 9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통해

삶에 휘둘리지 않는 작가 뚝심 엿보여

"달라졌다. 조명숙 작가의 소설이 달라졌다." 조명숙 작가의 네 번째 창작집 <조금씩 도둑>(산지니 펴냄)을 읽고 난 다음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그의 소설이 새로 발표될 때마다 읽어왔던 터라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조명숙의 소설은 <조금씩 도둑>과 그 이전의 소설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의 소설이 조금은 다정하고,  정감이 있는 푸근한 소설이었다면 <조금씩 도둑>은 훨씬 담담한 진술방식을 택하고 있다.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남아있는 수분 같은 걸(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말끔하게 닦아낸 다음 독자에게 내밀고 있다고나 할까. 또 하나는 작가가 타임캡슐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장이 젊어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 닿았다. 

 
작가에게 '담담한 진술' '젊어진 문장의 느낌'이라는 말을 했더니, 작가는 "다행"이라며 웃었다. 작가는 "초창기 작품들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진솔한 의미와 상황을 문장에 담게 됐다. '튀지 않는 진술'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며 "나이가 든 만큼 좀 노련해진 것 같다고나 할까. 젊었을 때처럼 애를 쓰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담담하게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창작집 <조금씩 도둑>에는 9편의 중단편이 수록됐다. '이치로와 한나절', '점심의 종류', '러닝 맨', '가가의 토요일', '거기 없는 당신', '사월', '나비의 저녁', '조금씩 도둑', '하하네이션'.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은 매일 매순간의 시간을 '꾸준하게 메워가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사실 등장인물들은 제각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감당하다 못해 쓰러지기 직전이다. 그 삶에 휘둘리지 않고 담담하게 진술할 수 있는 작가의 뚝심은 이 창작집 책갈피마다 엿보인다. 
 
'점심의 종류'는 세월호로 딸을 잃은 여인 영애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 어디에도 세월호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의 몇 페이지가 넘어갈 때까지 지독한 아픔을 견뎌내는 여인의 독백인 줄로만 알았다가 세월호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소설의 배경은 오는 2024년. 가족을 잃은 채 10년을 살고 있는 한 여인의 일상과 기억을 보여준다. 딸 유미를 그만 잊으라고 말하는 동생 영미를 향해 물이 담긴 컵을 던지는 영애. 소설을 통 털어 영애가 보인 격렬한 행동은 이것이 전부이다. "매일 조금씩 희미해지는 유미, 그렇기 때문에 영애는 살아 있어야 했다. 내 속에서도 점점 희미해지는 유미를 누가 기억해줄까?" 딸을 잃은 채 10년 째 살고 있는 어머니의 존재 이유에는 이런 슬픔이 짙게 배어있었다. 그 어머니의 하루 중 몇 시간을 다룬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가가의 토요일'은 부산 지하철 수영역 입구에서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어 파는 한 남자 가가의 토요일을 그린 소설이다. 태어날 때부터 귀가 들리지 않는 가가는 '가가'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가가는 새벽에 일어나 작은 수레를 끌고 가서 정성을 다해 맛있는 프렌치토스트를 만든다. 성실한 노동으로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던 가가는 수영로터리를 지나가는 시위대열과 만나게 된다. 이 소설은 2005년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열렸던 부산의 하루와 가가의 토요일을 담고 있다. 1987년 6월 부산역 광장에서 뻥튀기를 팔던 가가는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과 외침 속에서 귀가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가가는 '가가'를 외치며 그 시위대와 함께 걸었다. 그때가 다시 온 것인가 하면서 가가는 2005년의 토요일에도 시위대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소리들은 다시 사라져버리고 가가는 혼자 낡은 슬레이트 집으로 돌아간다. 
 
조명숙 작가는 "전통적인 소설 플롯을 버리고,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팽팽한 긴장으로 계속 이어가는 이런 방식을 '지진성 플롯'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제는 주변의 모든 것이 소설로 보인다. 주위의 힘든 상황, 참아내기 힘든 사람들도 모두 객관화 되어 보인다. 그런 것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잔영만 남았을 때 어느 순간 그 잔영이 문장으로 나온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하하네이션'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이 소설은 작가의 꿈을 꾸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장차 작가가 되려고 했지만,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소설이 현실보다 리얼하겠어?" 
 

박현주ㅣ김해뉴스ㅣ201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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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도둑 - 10점
조명숙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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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룡 평론가 '저자와 만남'서 "시인은 나르시시즘 극복해야"


중진 문학평론가 구모룡(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가 평론집 '은유를 넘어서'(산지니)를 최근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시인과 시가 다시 변화를 감행할 시점에 닿았다고 고찰했다. 그 방식은 '은유를 넘어서'라는 제목이 상징한다.

'은유를 넘는 것'는 어떤 걸까. 지난 9일 산지니출판사는 부산 러닝스퀘어 서면점에서 구모룡 평론가를 초청해 제67회 산지니 저자와의 만남을 열었다. 은유를 넘어서는 것의 의미와 접근법이 궁금한 이들이 많았던 듯했다. 좌석 30여 석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사회와 진행을 맡은 최정란 시인, 최학림 부산일보 논설위원은 저자를 친절하게 대하는 척하다가 이내 돌변해 몰아치듯 질문했다. 저자는 꿋꿋하게 의견을 내고 설명했다. "사실 언어 자체가 일종의 은유('A는 B다' 또는 '내 마음은 호수다' 식의 표현)다. 그러므로 은유 없이 소통이 안 되는 측면이 있다."

그의 설명은 은유 자체를 아예 부정하는 게 아니라, 죽은 은유를 남발하거나 무의식 상태이든 의도를 했든 간에 과도하게 은유에 기대어버리는 시 창작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됐다. "(남 또는 사물을 표현하기 위해)계속해서 이런 식 은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굉장한 동일성의 확대재생산일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동일성의 확대재생산'은 실제로 시에서 굉장히 위험한 요소다. 별 고민 없이 'A는 B다'라고 해버리거나 '내 마음은 호수다'라는 식으로 식상하게 표현할 경우 이는 일단 창작 주체인 시인 내면에 아무 변화도 못 일으키고, 'A를 B'에 '내 마음을 호수'에 가둬버려 문학을 파괴할 공산이 매우 커진다.

저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므로 서정시인이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이 나르시시즘(자기도취)이다. 시인이 자기 이야기에 갇혀서는 안 된다. 그걸 넘어서야 한다. 그 점을 표현하려니 '은유를 넘어서자'는 제목을 고르게 됐다. 이 중에서도 자기 아름다움에 도취하는 나르시시즘은 큰 문제 아닐 수 있다. 언젠가 극복 과정에 가닿을 수 있으니까. 문제는 타자를 외면한 나르시시즘이다."

수많은 이가 자기 세계에 갇혀 의미 없이 과장하고 호들갑 떠는 시를 쓰는 세태를 그는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어 최영철 송경동 시인 등을 언급하며 시와 삶이 일치하는 시인, 세월호 사고를 예로 들며 주체에서 확장을 거듭해 세계로 나아가는 소통의 시를 강조했다. '은유를 넘어서' 갈 방향이었다.

조봉권 | 국제신문ㅣ201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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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를 넘어서 - 10점
구모룡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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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니 평론선 12


은유를 넘어서

구모룡 평론집


수사의 은유를 넘어서, 시를 이해하는 진정한 길


대중들이 시에 다가가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요즈음, 수많은 문학용어와 낯선 문학기호를 통해 그 어려움이 배가되는 형국이다. 그러나 시와 문학에 대한 입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지금에도 시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문학의 모든 장르와 인문학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구모룡 문학평론가는 이에 다양한 평문과 비평을 통해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시적 지향에 대해 살피고자 시 평론집 『은유를 넘어서』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은유로서의 ‘시’가 아닌, 은유의 도서관을 나와 현실 지향적인 구체성을 획득한 시학을 개진하고 있다. 특히 최영철 시인의 시학을 평한 평론 ‘은유를 넘어서’가 표제로 등장해, 최 시인의 시 세계가 언어를 세계로 연결하는 것에서 그치는 ‘은유’를 넘어 일상적인 어법으로 모든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서정시학을 표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정말 가혹한 과업입니다.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는 것, 시와 잘 노는 것, 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와 그 도구인 언어를 잘 가지고 노는 것, 잃었던 흥을 되살리는 것, 우리말의 묘미를 드러내는 것, 그것이 시인의 고통스러운 과업입니다.”/ 배한봉과의 대담에서 최영철이 한 진술인데 시인의 시쓰기에 대하여 매우 적절한 해명이 아닌가 한다. 그가 말한 “가혹한 과업”은 ‘범속한 트임’의 필연이다. 나는 이러한 최영철의 시적 성취를 “은유 넘기”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_「은유를 넘어서-최영철론」, 274-275쪽.



수사의 은유를 넘어서, 시를 이해하는 진정한 길


저자는 시적 경험을 형성하는 것은 주체와 언어 그리고 세계라 말하며, 오늘날 시 속에 내재된 형식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른바 ‘극서정시’와 ‘미래파’ 논쟁이 그것인데, 소통불능의 과소비적 시들에 대해서 서정시 본연의 절제와 여백을 활용하고자 등장한 ‘극서정시’와 더불어 과잉된 수사와 난해한 독백과 해체로 가득한 ‘미래파’ 시를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미래파’ 시는 젊은 세대로 갈수록 시를 쓰고 읽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는 현상과 함께 새로이 나타난 한국 현대시의 흐름이다. 그럼에도 이들 두 흐름이 갖춰야 할 시의 본질은 ‘타자와의 공명’이자 ‘소통’에 있다며 시적 주체와 언어 세계가 만나 빚는 상호작용과 변증법을 모색함과 동시에, 시인의 표현이 자기 자신을 넘어 타자와 세계의 지평에 가닿는 작업이 중요하다 말하고 있다.



그들만의 성채에 갇힌 시와 시인을 구하라!


오늘날 ‘시라는 제도’ 안에서 ‘시인이라는 위신’에 만족하는 이들이 많은데, 저자는 소수 시인들에 한정하여 작품을 엄선하는 종합문학지와 달리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싣고 있는 시전문지에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견해를 내비친다. 저자는 시인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는 시가 아닌, 타자와 공명하는 시적 지평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타자와 시인의 관계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작업이 시쓰기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힘든 창조적 반복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지평을 개진하는 과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김명인의 시 「문장들」을 예시하며 “길 위에 서 있는 존재”인 시인들의 숙명, 즉 “힘겹게 부재의 언어, 침묵의 문장을 얻는” 시작 행위와 “지금-여기의 삶이 지닌 허위와 진실”을 드러내는 시쓰기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 시인의 시적 지평은 시행착오와 도로(徒勞)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 방황과 반복은 시인의 숙명이다. 그는 시를 만나기 위해 길 위에 서 있는 존재이다. 그는 부재와 현전 사이에서 요동하면서 힘겹게 부재의 언어, 침묵의 문장을 얻는다. 물론 이러한 규정에 대하여 지나친 엄숙주의라고 반발하는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시를 편지나 광고 카피와 같은 소통의 한 형식으로 보자는 실용주의적 견해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사물에 대한 내적 생명의 감각을 누가 표현하며 교환가치로 메말라가는 현실에 누가 제동을 걸 것인가. 시인은 개별적으로 만들어내는 시적 지평을 통하여 지금-여기의 삶이 지닌 허위와 진실을 드러내어야 한다. _「시를 만나는 기쁨」, 25쪽.


시를 만나는 기쁨을 논한다


누구나 시인의 생동하는 시어들을 만나며 공감하던 뜻깊은 순간들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가 주는 오롯하고 빛나는 감정들이 우리의 삶을 깨우치는 일은, 오늘날 세속화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느새 찾기 힘든 경험이 되곤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시를 만난다는 것은 시인이 감각하는 세계와의 경험을 또 다시 경험하게 해주는 삶의 독특한 체험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참다운 시를 만나는 것이란 소박한 삶의 국면을 들추어냄으로써 시인의 살아 있는 감각을 느끼는 기쁨이 된다. 저자는 시의 줄어든 위상에도 시적인 것을 찾아 온몸을 기투하는 시인들의 시들을 “사랑과 현대성”, “존재와 타자의 지평”이라는 주제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난파하는 세상과 시인의 눈물: 세월호 이후의 문학


세상의 시적 진실을 가장 먼저 마주하는 존재가 바로 예술가(시인)라 할 때, 2014년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가장 먼저 감각하며 표현한 것도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재난 이후의 공허한 처방보다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려 한 최영철 시인의 「난파 2014」, 「기억하자 이 비겁을」과 제 아이를 잃은 심정으로 애도시를 써내려가며 페이스북에 시편들을 발표한 나해철 시인의 「세월호 규명시 266」를 비롯해 그간 많은 시인들이 재난 이후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애도의 대열에 합류해왔다. 1980년대 광주 민주항쟁과 이를 탄압하기 위해 자행된 국가폭력 속 죄의식이 1980년대 한국 문학인들에게 자리하고 있었다면, 이제 다시 반복되는 우리 시대의 원죄 ‘세월호 참사’가 다시금 1980년대의 죄의식으로 시인들을 불러내고 있다. 구모룡 평론가는 시인들이 발화하는 어떠한 애도도 유가족의 슬픔을 치유할 수 없을 테지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도가 불러일으키는 완전히 새로운 삶”(롤랑 바르트)―비타 노바를 위한 시인들의 역할과 책무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강조했다.



저자 : 구모룡(具謨龍)

1959년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대학과 대학원에서 시론과 문학비평을 전공하였다.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도덕적 완전주의―김수영의 문학세계」)이 당선되었고 그 이후 문학평론가로 활동해왔다. 박사학위논문은 「한국 근대 문학유기론의 담론분석적 연구」(1992)이다. 1993년부터 지금까지 한국해양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지성사, 동아시아 미학, 문화연구 등을 가르치면서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 『앓는 세대의 문학-세계관과 형식』, 『구체적 삶과 형성기의 문학』, 『한국문학과 열린 체계의 비평담론』, 『신생의 문학』, 『문학과 근대성의 경험』, 『제유의 시학』,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 『시의 옹호』, 『감성과 윤리』, 『근대문학 속의 동아시아』, 『해양풍경』, 『예술과 생활-김동석문학전집』(편저), 『백신애 연구』(편저) 등을 출간하였다. 현재 제유(synecdoche)의 수사학으로 동아시아 시론과 미학을 설명하는 저술을 준비하는 한편, 새로운 시론과 평전 쓰기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은유를 넘어서 | 산지니 평론선 12

구모룡 지음 | 문학 | 신국판 | 350쪽 | 25,000원

2015년 5월 29일 출간 | ISBN : 978-89-6545-298-0 03810

산지니 평론선 12권. 구모룡 평론집. 은유로서의 '시'가 아닌, 은유의 도서관을 나와 현실 지향적인 구체성을 획득한 시학을 개진한다. 특히 최영철 시인의 시학을 평한 평론 '은유를 넘어서'가 표제로 등장해, 최 시인의 시 세계가 언어를 세계로 연결하는 것에서 그치는 '은유'를 넘어 일상적인 어법으로 모든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서정시학을 표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차례



은유를 넘어서 - 10점
구모룡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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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뒷모습에서

조명숙 소설집 『조금씩 도둑』독서후기

 


 

 

 

 

 

 

'이 단발머리 여자는 누굴까?'
'그녀가 읽고 있는 저 책을 뭘까?'
'그녀는 무엇 때문에 고개를 돌렸을까?'

 

   『조금씩 도둑』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참 단순하게도 표지의 여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던 여자. 창밖에 일어난 어떠한 일(사건)로 하여 순간 고개를 돌린 듯한(그녀의 단발머리가 흔들렸거든요!) 모습은 평화로운 여자의 시간이 깨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잔잔한 삶에 예고 없이 다가온 어떤 사건, 그리고 그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 제게『조금씩 도둑』의 첫인상을 그러했습니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밖을 내다본다'

 

 「점심의 종류」의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나와 상관없이 창밖의 풍경들은 시간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갑니다. 밖의 모든 것들은 10년 뒤의 미래를 살고 있지만,「점심의 종류」의 주인공은 아직 10년 전,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소설의 앞부분을 다시 읽었을 때, 잔잔한 창밖 모습이 왠지 환상처럼 느껴졌습니다. 밀려드는 시간의 홍수가 아픔을 채 덮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 고요한 풍경들이 진짜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2014년 4월, 시대적인 상처가 되어버린 '세월호 사건'. 소설을 그 사건이 발생한 뒤 10년 후 미래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영미가 볶음밥 접시를 들이민다. "먹어, 좀. 언니 볶음밥 좋아하잖아." 못 들은 척한다. 옛날 일이다. 볶음밥을 좋아했고, 만두를 좋아했다. 하지만 진흙이 메워진 것 같은 머릿속, 누런 위액이 구석구석 고여 있는 것 같은 뱃속, 스멀거리는 통증과 가려움으로 채워진 뼈와 살…. 고통의 증거들 속에서 배회하는 기억이 식욕을 가로막고 있다.
   
    지난 저자와의 만남(http://sanzinibook.tistory.com/1367)을 통해서 조명숙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 식지 않은 슬픔, 분노, 모멸감을 느끼며 '작년에 일어난 일'이 아닌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떤 창 밖의 풍경 속에 살고 있는 걸까? 궁금해졌습니다.

 

  「점심의 종류」를 비롯해 2008년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앞두고 촛불시위를 벌이는 애인을 찾는 여자의 우울한 일상을 그린 「거기 없는 당신」, 2005년 APEC정상회의를 둘러싼 어떤 사회적 기미를 ‘가가’의 하루를 통해 풀어낸 「가가의 토요일」까지. 무엇보다 이번 작품집에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인물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어떤 소설이 현실보다 리얼하겠어?”

「하하네이션」의 작가 지망생 '유'가 한 말처럼 작품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블라인드를 올리고 현대사회의 리얼한 모습, 그대로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조금씩 도둑』의 주인공들은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이치로와 한나절」의 '고아'인 주인공,「러닝 맨」은 '자식을 잃을 위기에 처한 아버지',「사월」은 '실질적인 결혼 생활이 끝난 여성',「나비의 저녁」의 남자의 충격적인 죽음을 이겨나가며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는 여자 등. 삶의 상처가 몸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마음의 응어리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소설들 속에서 이런 고통을 마주하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하지만 잔잔하게(하지만 뾰족하게) 밀려드는 고통을 참고 끝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은 아픔 끝에 묻어있는 따뜻한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은 표제작이기도 한「조금씩 도둑」입니다.

 

   "띠띠는 피융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초라하고 고되게 나이를 먹은 피융이 눈앞에 있었다. 띠띠는 피융의 곁에 누웠다. 피융에게서 시큼한 시장 냄새와 헤나 냄새가 함꼐 풍겼다. 띠띠는 피융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띠띠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훔쳐와 버려서 피융은 그 자체로 별로 남은게 없었다."

 

   용희, 선경, 영미 대신 피융, 바바, 띠띠라는 이름으로 우정을 쌓아가던 열여섯의 소녀들.  꿈 많던 청년기에서 중절 수술의 후유증을 얻게 되는 고단한 삶에 이르기까지. 세 소녀는 서로의 아픔을 조용히 끌어안으며 함께 생을 견뎌 나갑니다. 특히 친구 '피융'에게 조금씩 마음을 주고만 '띠띠'의 마음은 애달프게 다가왔습니다. 소설 중간마다  "괜찮아?"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내가 아닌 타인의 상태를 확인하고 안부를 물어보는 사소한 말 속에서 왠지 모를 위안을 얻습니다. 아마, 이 세 소녀가 고단한 생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이 말 속에 들어있었던 것을 아니었을까요?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시 책의 표지를 봤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느껴졌던 여자의 모습에서 창밖의 세상을 바라보고 삶의 고통을 잊지 않는 여자의 따뜻함이 느껴졌습니다. 아픔과 위로,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고된 현실을 걸어나갈 힘을 얻습니다. 9편의 작품들을 만나며 블라인드를 걷고, 밖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금씩 도둑』은 아픈 현실 위에서도 생의 꽃을 피우는 많은 사람에게 '괜찮아?'라는 말을 전하는 책인 것 같습니다. 아마, 표지 속 여자의 뒷모습도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닐까요? 

 

 

 

조금씩 도둑 - 10점
조명숙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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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1동 | 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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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조명숙 ‘조금씩 도둑’ 저자와의 만남 성황리 개최


상실, 그 이후에도 삶은 이어진다. 
 육체의 고통 속, 우리는 절절한 외로움을 느낀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마음이 아프다는 것.  여기, 자신의 아픈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글을 쓴 소설가가 있다.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후 작품집 ‘댄싱 맘’과 장편소설 ‘바보이랑’ 등을 쓴 소설가 조명숙<사진>. 그가 최근 소설집 ‘조금씩 도둑’을 출간하고, ‘저자와의 만남’이라는 행사를 통해 독자들과 만났다. 
 그날 그 현장을 찾아 조명숙의 문학, 그리고 그녀의 삶에 대해 들여다봤다. 
 특히 이날 행사에는 ‘정미숙’ 문학평론가가 대담자로 나서 유쾌한 대화를 이끌었다.
 “어떤 소설이 현실보다 리얼하겠어?”(221쪽)라고 말하는 조명숙. ‘리얼리즘’. 즉 현실인식이 그녀가 소설과 마주하는 방식이다. 
 이날 행사에서 정 평론가는 잔잔하게 마음에 울림을 전하는 그녀의 소설 속 ‘아픈 여성’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짚으면서 ‘고통의 감각’을 잃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전 보다 나이가 들고 몸이 나약해졌지만 여전히 사건과 사람에 대해 공감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학의 힘이 약해진 것이 현실이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문학의 힘이 세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스물셋에 알 수 없었던 일은 서른셋에 알게 되고, 서른셋에 알 수 없었던 건 마흔셋…쉰셋…예순셋…. 그렇게 삶의 슬픈 의미는 아주 늦게야 알게 된다는 것을.”(54쪽)
 그녀 특유의 고통의 감각을 가장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소설이 바로 ‘점심의 종류’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의 10년 후 모습을 그린 이 소설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병치해 소설 속 인물 ‘영애’가 영화 속 캐릭터와 자신의 모습을 일치 시키며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듯 그렸다.
 표제작 ‘조금씩 도둑’ 속 표면적으로는 동성애 코드가 담긴 소설이지만 그 속을 깊게 들여다 보면 ‘여성적 연대’가 가진 힘에 대해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각 파란만장한 사연으로 남성의 부재 속 살아가는 중학교 동창 피융, 띠띠, 바바. 모든 게 결핍된 그들의 삶 속에서 그래도 조금씩 마음을 훔쳐가는 너의 ‘사랑’이 있다.
 정 평론가는 이 소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녀의 소설 속 대부분의 작품에서 ‘남성적인 남자’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시인의 아내로 살아가면서 강해져야 했던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지 않았나 싶다”고 답했다.
 “아버지는 아직 달리고… 있다.”(83쪽)고 끝나는 소설 ‘러닝 맨’은 지난해 여동생을 폐암으로 잃은 그녀의 개인적인 아픔이 담겨있다. 
 이번 소설집에는 종이공장기계에 빨려 들어가 죽은 남편을 기억하기 위해 종이를 만드는 오윤에 대해 그린 ‘나비의 저녁’을 비롯해 그녀의 치밀한 문체를 마주할 수 있는 작품이 수록돼 있다. 
 이날 저자와의 만남 행사에는 웃음과 눈물이 공존했다. 그것이 마치 인생이고 그것이 마치 소설인 것처럼.
 조명숙 그녀가 그린 세상은 쓸쓸했지만, 외롭지 않았고 고요했지만 적막하지 않았다.
 조명숙. 산지니. 1만3000원.


이경관ㅣ경북도민일보ㅣ2015-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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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도둑 - 10점
조명숙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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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그 이후에도 이어지는 삶의 조각들'

이번 대담자로 나서 주신 정미숙 문학평론가는 이 카피가 조명숙 작가님의 작품을 잘 나타낸다고 말했습니다. 소담스럽게 차려진 작품들 안으로 비치는 삶의 민낯들은 아프고 치열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조명숙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계속해서 삶을 이어갈 희망과 이상을 만나게 해줍니다. 66회 산지니 저자와의 만남은 아프지만 따뜻했던 소설집『조금씩 도둑』의 조명숙 작가님과 함께 했습니다.

 

    

 

저자: 조명숙

1958년 김해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국어국문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96년 『진주가을문예』와 2001년 『문학사상』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창작집 『헬로우 할로윈』, 『나의 얄미운 발렌타인』, 『댄싱 맘』(2012 향파문학상 수상)과 장편소설 『바보 이랑』, 『농담이 사는 집』 등을 썼다. 2006년 장편동화 「누가 그랬지?」로 14회 MBC창작동화대상을 받았으며, 그림동화책 『샘바리 악바리』, 『아기뱀 꼬물이』를 냈다. 그 외에 산문집 『우리 동네 좀머씨』가 있고, 아내들을 위한 연시집 『하늘 연인』을 엮었다.

 

이번 저자와의 만남에서는 대담자로 정미숙(문학평론가) 선생님께서 참석해 주셔서 보다 유쾌하고 재밌는 시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정미숙(이하 정) 

오늘 부부의 날인데 공교롭게도 조명숙 선생님과 최영철 선생님을(조명숙 선생님과 최영철 선생님의 소설가  시인 부부이십니다.) 함께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더불어 모범적인 문인 부부를 보며 본받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웃음)

 

조명숙 선생님의 작품들은 문체가 친밀하고, 탄탄한 구성을 통해 집요하게 타자들의 삶과 상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조금씩 도둑』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참으로 치열하고 따뜻한, 그리고 아픈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표제작인 <조금씩 도둑>은 제목의 참신함에 반했고, 동성애적인 코드와 여성연대, 견딤을 만나며 참으로 아름답게 읽었습니다. 이외에도 조명숙 선생님의 『조금씩 도둑』에는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치로와 한나절>의 주인공은 '고아'로 설정되어 있고, <점심의 종류>는 시대적 상처인 '세월호 사건', <러닝 맨>은 '자식을 잃을 위기의 아버지', <가가의 토요일>은 '사랑이 모두 과거에 끝난 쓸쓸한 여성', <사월>은 '실질적으로 결혼 생활이 끝난 여성' 등 행복하지 않은 인물들의 집요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문맥을 쉽게 건너뛰지거나 과장하지도 않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사람들이 현을 직시하는 모습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절망-희망, 현실-이상의 변주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먼저, 표제작 <조금씩 도둑>에서 띠띠와 피융의 동성애 코드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동성애, 결혼, 여성주의는 어떤 것입니까?

 

조명숙(이하 조)

페미니스트냐, 동성애자냐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여자인 내가 어떻게 여성을 보는가? 그 관점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자로 살아가면서 제 존재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봤던 것 같고요.

 

선생님의 소설들에서는 (남성적인) 남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혹시 '남성은 믿을만한 존재가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시는 것인가요? (웃음) 

 

(웃음) 남자에 대한 신뢰도가 굉장히 낮습니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집의 중심은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제가 배우기로는 여자는 남자보다 약하다고 배웠는데 살아가면서 느끼는 바로는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것도, 가정을 지켜 나가는 것도 여자의 영향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남자들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물질적인 것보다 여자, 아이들이 가지는 문제에 대한 깊은 공감이 우선돼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것이 삶 전체를 포용하는 여성성이라 생각하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오랜 신뢰에 기반한 동성애적 코드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저 역시도 동성애를 관계에서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도둑>에서 조금씩 진행되는 동성애(사랑)가 굉장히 현실적으로 받아지면서, 한편으로는 여성주의와 맞물려 있다고 보는 것에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소설에는 '헤나 냄새', '시큼한 시장 골목 냄새'와 같이 후각이 많이 드러나는데 이는 굉장히 감각적이란 느낌을 줍니다. 작중 인물들이 대부분 몸이 아픈 상태로 등장하는데, 이는 오히려 세상과 더 밀착되어 있고 정신과 감각이 더 열려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각적 표현들이 인물들의 아픔을 더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몸', '아픈 몸'은 어떤 의미인가요? 

 

 

정신이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몸이 잖아요. 제가 나이가 드니까 그런게 보이더라고요. 어느날 한의원에 갔는데 어르신들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서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아픈 것은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 사람의 아픈 부분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픈 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함으로서 그 사람의 내면적인 고통을 조금 더 또렷하게 나타낼 수 있었고요.

 

선생님의 소설이 잔잔하게 와닿는 것은, 초심을 잃지 않는다고 할까요? 고통의 감각을 잃지 않는 느낌을 받아요. 조명숙 선생님도 이제 '나 조명숙이야'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셨는데, 이전 작품들에서도 느꼈던 아픈 여성들을 바라보는 그 감각이 여전하단 생각이 듭니다. 반면 몸의 문제를 여성과 인간의 경계로 바라보는 것은 굉장히 성숙되었단 느낌을 받았고요. 

 

일상 속에서는 어느 평범한 아줌마로 살면서도, 작가로서 놓치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공감하는 태도였습니다. 작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뒤, 서울에 몇 번 간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광화문에 안 갔어요. 안 갔다고 해야 하나, 못 갔다고 해야 하나 헷갈리지만... 제가 좀 그런 것 같습니다. 깊이 공감하고 혼자 막 눈물도 흘리는데 실제로 행동은 안되더라고요. 지난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럽고 힘들어 하고 있을 무렵에 저 역시도 어린 생명을 보내야 하는 일이 생기더군요. 그때 제가 그랬어요. "그래도 우리는 편안하게 보냈잖아. 그 바다를 보면서 보낸 사람들... 그 사람들은 마음이... 어떨까" 이후에 사건이 수습되는 과정과 몇몇 사람들의 몰지각한 행동들을 보며서 인간으로서 느끼게 되는 모독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제가 <점심의 종류>에서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 드릴려고 했는데,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해 주시니 바로 이야기 해야 겠네요. 선생님의 소설 대부분들이 과거에 이뤄졌고 현재에 반추하는 형식인데 <점심의 종류>는 10년 후의 미래에 와 있더라고요. 미래에 존재하는 여자가 밥을 잘 못 먹는 상황을 보면서 박완서 선생님의 나목이 떠올랐습니다.

 

제 스스로는 <점심의 종류>가 작위적인 부분이 많아서 (세월호) 유족 분들한테 죄송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으로 느꼈던 분노, 모멸감을 느끼면서 '아직도 나는 이것밖에 안되는가?'라는 생각도 했고요.

 

 

다른 소설들에서 결혼 생활이 피폐적으로 끝나지만 대안적인 가족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점심의 종류>를 읽으면서 선생님께서 얼마나 충격을 받으셨는지 느껴졌던 것 같아요. 동생의 위로도 10년이란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보면서 어떤 대안이나 여지가 없는 것이구나... 싶기도 했고요. 또 한편으론 문제는 가족 안으로, 쓸쓸함의 패턴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생님의 소설에서의 보잘 것 없는 남성들을 작파하고 남성과의 연대를 통해서 한 번 휘젓고 싶은 바람도 있습니다.(웃음) 

 

(웃음) 선생님은 참 용감하신 것 같습니다. (웃음)

 

제가 좀 용감하지요? (웃음) 선생님의 소설이 좋은 말로 하면 성숙하지만 나쁜 말로 하면 여성주의에 상처 받아서 기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많이 늙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성숙이죠! (웃음)

 

제가 작중 인물들을 힘없이 설정한 것은 어찌보면 불가항력적인, 우리가 정말 많이 싸우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은 결과들이 모여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상하게 요즘은 자갈을 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문학으로서나마 꿈틀거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양아름 편집자의 남자친구가 제게 정면으로 물어보더라고요. 문학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한다고 생각하냐고. 저는 그냥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문학의 힘이 크다고 생각하며 시작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요. 지금은 기대가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얼마 전, 늦둥이 아들이 박종철 관련 책을 읽고는 열사라면서 열변을 토하더라고요. 그것을 보면서 책(혹은 문학)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새삼 느꼈습니다. 아들과 세대차이가 제법 나는데 그것도 극복하고 말이죠. (웃음)  

 

 

(문학에 대한 기대가 없다)이렇게 말하면 안되는데, (웃음) 소설 쓸 때는 저의 마음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요. 후배 작가들은 문학의 힘을 믿고 발휘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비의 저녁>에서 결국 남편이 죽고 오윤이 혼자 남겨져 종이를 만들다 기계 속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굉장히 상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부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은데 저는 정말 신나게 썼습니다. 이 부분은 저의 지인이 종이 공장에서 근무를 할 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대요. 그래서 '이거 소설감이다' 싶으면서도 '거짓말 아니냐'고 물었는데, 실제로 신발만 남겨져 있었다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3년 뒤에 소설이 나오고 읽어나 보라고 보냈는데, '그냥 뻥을 친 건데 거기에 뻥이 더해져 이렇게 작품이 됐네.'라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웃음) 그리고 저는 이 작품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이유가 연애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썼거든요.

 

선생님, 연애... 연애는 아닙니다.

 

안 그래도 다른 분들도 연 애소설이 아니라 예술가 소설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저는 가끔씩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소설이지만 굉장히 비유나 시적인 표현이라고 느낄때가 있습니다. 혹시 남편 분인 최영철 선생님의 영향인 것인지요?

 

제가 등단이 늦지 않습니까? 저는 작품 활동의 공백도 있었고요. 제가 십 몇년이 지난 후에도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편으로는 문학의 성취를 이룬 시인하고 사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 열패감도 들고... 그래도 '저 사람은 내 손바닥 안이다' 싶은 위로를 하기도 해요. (웃음)

 

 

이번 저자와의 만남에는 웃음과 눈물이 함께 했던 진한 시간이었습니다. 시간 관계상 더 많은 이야기와 조명숙 선생님께 드리고픈 질문은 접어둬야 했지만, 조명숙 선생님의 작품으로 더 깊게 만나보기로 약속하고 아쉬움 마음을 달랬습니다.

 

 

 

▶▶ 조명숙 작가님의 작품을 만나보세요!

 

조금씩 도둑 - 10점
조명숙 지음/산지니
댄싱 맘 - 10점
조명숙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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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엘뤼에르 2015.05.22 13: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벌써부터 녹취록을 이렇게 발빠르게 풀어놓으시다니 대단해요.

    어제 일인데, 다시 활자로 읽게 되니 그날 저자와의 만남 시간에서 선생님들과 웃고 즐겼던 기억도 새록하고요. 잘 읽었습니다^^

  2. BlogIcon 서흔(書痕) 2015.05.22 14: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 어제 가고 싶었는데....
    못가서 정말 아쉽네요 ㅠㅠ
    학보 마감만 아니었으면 갔을텐데...

안녕하세요, 전복라면입니다.

마지막 발간일이 올해 3월 21일이었으니 두 달 쉬었네요. 주간 산지니에서 격월간 산지니가 될 위험......은 물론 없습니다. 2주는 기삿거리가 없어 쉬었고 그 이후부터는 아시다시피 세월호 사태가 일어나 '출판계 농담리더의 필독지' 연재를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이제 연재는 재개하지만 여전히 추모의 마음을 전합니다.

 

 

 

 

우리 시대 폭력은 어디에서 오는가?『폭력저자와의 만남 정보는 여기로

http://sanzinibook.tistory.com/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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