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편집자 열무입니다 :)


긴 연휴가 휘리릭 지나가니 내일은 또 선물같은 한글날이네요.

저는 요즘 산지니 SNS채널 중 하나인 '네이버 포스트' 담당이 되어서 

주마다 <열무 편집자의 시샘> 시리즈를 포스팅하고 있어요.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로 접속해주세요!) 

독자 여러분들께 좋은 시들을 배달하고, 산지니 시집들을 소개하기 위해 열게 된 시리즈인데요, 이번주엔 21세기 중국 현대시인들의 시선집 『파미르의 밤』을 소개해보았습니다. 


이번 포스팅을 준비하면서 저는 시촨 시인의 시에 완전 빠져버렸어요 ㅋㅋ 

그래서 블로그에도 그의 시를 한 편 소개해볼까합니다.

여러분도 잠시 일상에서 빠져나와 중국의 현대시 한편 감상해보세요 :)



필요 없다


분홍색 귀들에게 부탁할 필요 없다

그들은 경우 있는 소리만 받아들이므로

하지만 너의 목소리는 갈수록 경우가 없어진다

마치 해질녘 법원 창밖에 울리는 천둥소리처럼


머리를 울긋불긋하게 염색했지만, 새가 아닌 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할 때, 돌을 던져 길을 물을 수밖에 없는 너

별과 달, 산등성이가, 큰 곰 한마리의 울음을 허락하지만

그러나 도시에서, 너의 슬픔은 마치 화폐만큼이나 가치가 없다


자기의 팔뚝을 물어 잇자국을 남길 필요 없다

벽에 난 구멍 속의 쥐를 방해하지 마라, 그건 너의 이웃

찻잔이 탁자에서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질 찰나

귀신같은 속도로 손바닥에 받아야 한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할 땐 아껴 써라

푼돈마저 벌지 못할 땐 욕망을 깨끗이 없애라

그렇다고 기존의 도덕에 새로운 도덕을 추가할 필요 없다

저들 인기 있는 사람들을 보라, 저들 바보들을 보라


이제부터 홀로 한밤중의 전화를 받는다

수화기에서 통화중 소리밖에 안 들린다면 플러그를 뽑으라

이제부터 홀로 땅콩을 깐다

이 경우없는 맛을 가상하면서, 탐욕의 미를 슬며시 폭로한다


갈수록 경우가 없어지는 너의 목소리가 외로움으로 인해 더욱 커지고

허공이 탱크를 몰아 너의 몸을 공격해 점령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수면제에 의지할 필요 없이, 집 문을 나서라

공중에 매달린 여관을 찾아가 거기서 네 불면의 지붕을 바라보라


혹은 쓰레기 냄새 풍기는 거리를 지나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네가 너무 일찍 뿌렸던 시들을 수거하라

거물들의 심리적 질병은 모방할 만한지

아무리 완벽한 조롱이나 풍자 역시 사상의 결핍을 의미한다


영화관에 잠입할 필요 없다, 영화가 끝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영웅들처럼 팔자걸음을 걷지만,

연거푸 하품을 한다

손가락에 박힌 나무가시를 뽑아낼 필요 없다

그냥 아프도록, 감염되도록, 곪아 터지도록 내버려 두라


죽은 자의 명의로 영혼을 처형하는 구름을 반대해야 한다

편리를 위해 땅을 뚫을 필요 없다

그러나 여전히, 시시각각 사람들은 죽어간다

마치 재미있었던 말이 시간이 갈수록 재미없어지는 것처럼


이제부터 홀로 낡은 자전거를 나는 듯 빨리 달린다

또한 폐허 속에서 다시 한 번 발가락을 셀 필요 없다

가능하다면, 바다로부터 뛰어 건너라

뛰어 건너지 못하면, 기꺼이 바다에 빠져 죽으라


시촨, 「필요 없다」, 『파미르의 밤』(2011, 산지니) 중에서 


너무 좋지 않나요? 

세계시인선 하면 보통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올라버린 이들의 시를 떠올리게 되는데,

현대시를 읽는 재미도 쏠쏠한 것 같아요.

이번 달은 『파미르의 밤』을 읽으며 중국 현대시의 매력에 빠져보는 건 어떠세요?



파미르의 밤 - 10점
칭핑 외 지음, 김태만 옮김/산지니


네이버포스트도 구경오세요 :)

[네이버포스트 바로가기] 

중국 시인들은 어떤 현대시를 쓸까? ―『파미르의 밤』

Posted by _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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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비라코 2020.10.08 1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갑니다
    멋지게 정리하셨군요

  2. BlogIcon 동글동글봄 2020.10.08 13: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파미르의 밤> 좋아하는 책이랍니다!. 네이버 연재글도 잘 읽었어요. 시샘시리즈 연재 챙겨볼게요:)


 

양말을 빨아 널어두고
이틀 만에 걷었는데 걷다가 보니
아, 글쎄
웬 풀벌레인지 세상에
겨울 내내 지낼 자기 집을 양말 위에다
지어놓았지 뭡니까
참 생각 없는 벌레입니다
하기야 벌레가 양말 따위를 알 리가 없겠지요
양말이 뭔지 알았다 하더라도
워낙 집짓기가 급해서 이것저것 돌볼 틈이 없었겠지요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양말을 신으려고 무심코 벌레집을 떼어내려다가
작은 집 속에서 깊이 잠든
벌레의 겨울잠이 다칠까 염려되어
나는 내년 봄까지
그 양말을 벽에 고이 걸어두기로 했습니다


작은 풀벌레는 양말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양말 속의 작은 풀벌레를 떼어내는 순간, 그 벌레는 집(생명)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그 작은 풀벌레가 생명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금 당장 신어야 할 양말을 내년 봄에 신을 것이라고 미룹니다. 이 순간, 그 작은 풀벌레는 생명을 얻게 되죠. 이런 생태학적 상상력은 작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감응, 더 나아가 나의 생명과도 소통하고 있다는 각성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말’이라는 흔한 소재를 끌어왔지만, 그 일상적 소재는 생명의 신비로움을 발견하는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양말 속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화자의 작은 노력에서 놀라운 생명 존중사상이 느껴지지 않나요.

위 시는 이동순 시인의 「양말」이라는 시인데요.
시인은 언덕에서 불어오는 한 점의 바람에서도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고, 양말 속에 감추어진 작은 벌레 하나에서도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여 시로 형상화합니다. 이동순의 시에서 생명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건강한 생명의식은 등단작부터 최근의 시에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여러 시에서 다양한 진폭으로 확대 변주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동순의 시는 근원적으로는 노장사상과 그 맥락을 같이하면서 동양적 형이상학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동순의 시에서 노장사상은 자연을 넘어서 우주적 상상력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생명의 발견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변하는 것은 변하는 것대로,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연과 순응해가는 것이죠. 그는 자연을 관조하고 즐기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의 일부로 감응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공간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과 감응하고, 그 자연의 질서 속에서 참된 진리에 도달하는 길, 그것이 이동순의 서정시가 지향하는 시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등단 37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이동순 시인은 지금도 꾸준히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그동안 시집만 『개밥풀』 『물의 노래』 『지금 그리운 사람은』 『철조망 조국』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꿈에 오신 그대』 『봄의 설법』 『가시연꽃』 『기차는 달린다』 『아름다운 순간』 『마음의 사막』 『미스 사이공』 『발견의 기쁨』 등 13권을 발간하였습니다.

이 13권의 시집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이동순 시인의 시세계를 한 권으로 만나볼 수 있는 시선집이 이번에 저희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최영철 시인, 김경복 평론가, 황선열 평론가가 그동안 발간된 이 13권의 시집에서 오랜 고심 끝에 100편을 선정해서 담았는데요. 이동순 시정신의 본령을 담아내는 작업인 만큼 시 선정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이동순 시인의 시세계가 응축된 시선집 『숲의 정신』과 함께 자연과 하나 됨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요.

숲의 정신 - 10점
이동순 지음, 최영철.김경복.황선열 엮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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