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듯하더니, 다시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요즘입니다.

지난 9월 26일(월) 역시도 잔뜩 흐린 하늘 아래 눅진한 더위가 계속 됐는데요.

여름이 미련을 채 버리지 못한 가을밤, 39회 문학톡!톡!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이번에 함께 이야기나눌 작품은 조미형 선생님의 『씽푸춘 새벽 4시』!!

작년 12월에 출간한 작품집으로 진한 삶의 농도를 보여주는 소설들로 채워져 있죠.

 

 

▶ 『씽푸춘 새벽 4시』가 궁금하다면?

삶의 수렁에서 건져 올린 출구 없는 세계의 비정성-『씽푸춘, 새벽 4시』

 

 

 

이날 진행은 정훈 문학평론가께서 맡아주셨고요,

조갑상 소설가의 인사말로 문학 톡!톡!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왼쪽부터) 황은덕 소설가, 조미형 소설자, 김필남 문학평론가

 

대담자 : 조미형 소설가(저자), 황은덕 소설가, 김필남 문학평론가

 

황은덕(이하 '황') : 「다시 바다에 서다」의 여주인공 미아가 발견하는 사랑의 허상, 이런 주제가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자본주의의 논리와 다른 어떤 것의 대결, 그 속에서 철저하게 부서지는 개인(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표제작 「씽푸춘 새벽 4시」는 그 정점에 있는 것 같고요.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소재,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연결이 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필남(이하 '김') : 「나비를 보다」 같은 경우에도 그런 것 같아요. 굉장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도 거대한 사회,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움직이는 개인의 삶을 보여주죠. 그래서 읽는 내내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껴졌습니다. (웃음) 

 

조미형(이하 '조') : 사회라는 시스템 속에 소외된 나약한 인물들, 어두운 소설의 분위기 등을 말씀해주시는 것 같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살아가는 삶에서 사랑이 빠질 순 없죠. 그러나 요즘 주변의 여러 환경에 의해 사랑조차 바뀌는 걸 봤어요. 그래서 조금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음~ 예를 들자면 개인이 무언가를 하려고 했을 때, 사회가 억압을 한다든가 규칙을 요구한다든가 개인의 욕망을 꺾는다든가 하는 것들이요. 바람이 있다면, 작은 힘이지만 몇 명의 독자들이라도 제 글을 읽고 사회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하철 기관사의 자살 이야기나 거대한 사회 앞에서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개인의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지고, 고민을 하며 작품으로 쓰고 있습니다.

 

 

: 저는 7편의 작품을 보면서 대부분 비극적 엔딩이라고 생각됐습니다. 그 결말에 담긴 의미와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 결말을 죽음으로 마무리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죽었다고 읽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소설을 자세히 보면 「잉커송」에도 주인공이 죽었다고 확실하게 나오지 않고, 「다시 바다에 서다」도 그렇고요. 새벽이 끝나면 다시 아침이 오는 것처럼 조금은 모호하고, 열린 결말로 열어둔 것이었어요.  

 

: 조 작가님의 말을 듣고 다시 「잉커송」의 끝부분을 잠시 봤는데요. 내가 기수를 끌어안고, 기수가 떨어졌다는 부분은 있지만 내가 어떻게 됐다는 내용은 없네요. 그런데 방금 사랑에 대해서 쓰고 싶지 않고 하셨는데 소설 곳곳에 '사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시 바다에 서다」를 보면 분명 사랑에 대한 환멸을 느낄 수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씽푸춘, 새벽 4시」, 「연지연 꽃이 피면」, 「우리끼리 안녕」 등의 작품에서는 굉장히 낭만적인 사랑이 보입니다.

 

: 드라마에서 자주 다루는 재벌 2세의 환상적인 사랑 이야기와 같은 것을 싫어한다는 이야기였고요. 현실에서 사랑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죠. 그리고 사회의 가장 작은 부분은 가정이라고 생각해요. 그 가정이 단단하면, 사회도 단단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지금은 1인 가정이라고 해서 다 해체가 됐지만, 저는 1인 가정도 가정이라고 생각해요. 남녀간의 판타지의 사랑보다는 내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줄 때, 내가 나를 믿을 때 큰 사회가 완성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 「연지연 꽃이 피면」을 보면서 선생님이 쓰신 진한 사랑 이야기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웃음) 작품 전체를 봤을 때,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안구건조증, 불면증, 이유없는 가려움증, 두통 등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병들을 가지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 각각 인물이 처해 있는 힘듬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통증으로 표현한 거죠. 주인공의 직업, 생활환경, 상황, 내면 등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 선생님은 소설을 쓸 때 어디서 영감을 얻으시는지요?

 

  : 일상 속에서 소설을 쓰기는 매우 힘들어요. 심장이 떨릴 일이 적으니까요. 「씽푸춘, 새벽 4시」 쓸 때는 제가 통링에 있었어요. 거기서 여름과 겨울을 보내면서 40대 50대 중년의 남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집에서 할 수 없는 대화 속에서 삶의 짠내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아요. 사는 게 참 미지근한 맥주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우리가 원한 거는 거품이 있는 고급 샴페인인데, 현실은 미지근한 맥주...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행복이 현재형인지, 미래형인지 고민을 해봐야겠단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쓰게 됐죠.

 

 : 앞서 가족의 가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는데,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가족의 모습은 행복은커녕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 행복한 가족을 쓰면 소설이 안되잖아요. (웃음) 이런 상황이 됐을 때, 어떻게 행동할까?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어떤 꿈을 꾸고,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까? 이런 쪽으로 생각을 하며 주인공들을 움직이게 했던 것 같아요. 가족의 가치를 믿지만, 행복한 가족, 아름다운 가족 이야기는 굳이 저까지 쓰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웃음)

 

* 위의 대담 내용은 일부를 녹취하여 풀어쓴 것입니다.

 

 

독자와의 질의응답

 

Q. 일상 속에서 소설을 쓰기가 힘들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소설은 우리의 삶을 담고 있는 것이니 일상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조미형 작가님의 소설의 모티브가 되는 일상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A. 사람을 관찰하면서 모티브를 얻는 편입니다. 예컨데 지하철을 타면 신발을 많이 봐요. 어느 쪽의 신발의 굽이 얼마나 닳았나 같은 것을 보면서 저 나름의 상상을 하죠. 그러면서 한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의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뉴스나 신문을 보면서는 소외계층에 대한 기사에 관심을 가지고 스크랩하기도 하죠.   

 

Q. 카레이서가 직업인 주인공, 오토바이를 타는 고등학생 등 소설 속의 속도가 드러난 부분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A. 저 F1 좋아합니다. 운전도 좀 거칠게 하는 편이고요.(웃음) 「다시 바다에 서다」의 신제민의 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을 앞서가는 거야. 그게 내 인생의 목표니까. 난 그걸 위해 살아. 시간을 깨부수는 것. (P.29)

 

시간을 거슬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런 제 생각과 저의 평소 모습들이 소설에 반영되어 속도로 드러난 것이 아닌가 싶네요.

 

Q. 앞으로의 작품 계획과 끝 인사

 

A. 깊은 산속에서 절구를 가지고 뼈를 찧는 노인의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어요. 「씽푸춘, 새벽 4시」같은 진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씽푸춘, 새벽 4시』는 등단한 지 10년만의 작품집입니다. 다작은 아니지만 한 작품 한 작품마다 끝까지 붙들고 깊이 있는 세계를 만들어 가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하나하나 디디며 나갈 예정입니다. 

 

 

씽푸춘, 새벽 4시 - 10점
조미형 지음/해피북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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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별과우물 2016.09.28 15: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씨가 다시 더워져서 힘든 와중에 수고해주셨네요. ^^
    간접적으로나마 현장을 느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작가님의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ㅎㅎ

  2. 온수 2016.09.28 17: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뜨거웠던 문학톡톡이었네요. 현실을 미지근한 맥주로 표현하다니 인상적이네요

  3. 권디자이너 2016.09.30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고하셨어요.
    소극장이 아담~하니 분위기가 좋네요.

 

요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보면

컬러별로 책을 모아두고 찍는 게 많더라고요.

 

우리 산지니 책들도 한 미모하는데 

이런 유행에 빠질 수 없죠!

 

그래서 색이 고운 책들로 선정(?)하여

산지니 무지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 D

 

 

1. 선명선명. ver

 

2. 아련아련.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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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온수 2016.02.29 14: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니 그럴 듯하네요^^ 패션과 혁명이 선두에 섰군요.

 

독자서평은 나의 힘

 

 

아침에 출근을 하고 나면 으레 하는 몇 가지의 행동들이 있습니다.

 

 1. 물 한 잔 벌컥벌컥 마시기

 2. 다이어리에 오늘 일정 적기

 3. 출판사 카페, 블로그, SNS 보기 및 댓글 달기

 4. 메일 확인하기

 

업무와 관련해서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오늘 일을 시작한다'하는 저만의 워밍업(?) 같은 거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얼마 전, '4. 메일 확인'을 하다가 즐거운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제 옆자리 편집자님께서 이런 메일을 보내셨더라고요. (친절하게 리뷰 링크와 함께!)

얼마 전 출간된 조미형 소설집 『씽푸춘, 새벽 4시』의 독자 리뷰 였는데요, 실제로 책을 읽으신 분은 이 책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살짝 떨리기도 했습니다.

 

 

 

 

본 리뷰는 꽃도둑님께서 남겨주신 내용입니다.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제목부터 『씽푸춘, 새벽 4시』의 음울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는 것 같았어요!

 

 

 

 

조미형 작가님의 문장들을 '자객의 칼날 같이 민첩하고 예리하고 절제되어 있다'고 표현해주신 부분이 인상 깊었는데요, 무엇보다 이 소설집을 통해 조미형 작가님께 반하고 말았다니!! (꺄악~!)

 

 

 

조미형 작가님의 다음 책을 기다리는 팬이 한 명 더 추가됐네요!!

 

 

+ 댓글을 보니, 꽃도둑님의 리뷰를 읽고 책이 급 땡긴다는 어느 독자분의 말이 재밌어서 캡처해서 가져왔습니다. : )

 

 

 

페이스북의 좋아요(엄지척!) 하나에도 기분이 좋아지는데,

이렇게 긴 장문의 리뷰를 읽으니 왠지 오늘 근무의욕+전투력이 급 상승합니다.

 

 

더 좋은 책으로 많은 독자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해요~ ☞☜

 

 

** 꽃도둑님의 리뷰가 궁금하시다면... http://blog.aladin.co.kr/757832154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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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온수 2016.01.27 1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아요 서평 달리면 기분 좋아요. 짧은 글이라도.

  2. 권디자이너 2016.01.28 2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편집자에게 힘을 주는 '순수'한 독자평이네요.^^

 

조미형 소설집

『씽푸춘, 새벽 4시』

 

 

  등단 후 10여 년만에 출간되는 조미형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씽푸춘, 새벽 4시』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다시 바다에 서다」와 신작 소설 「나비를 보다」와 「연지연 꽃이 피면」을 포함해 총 7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지금부터 진한 삶의 농도를 가진 조미형 작가의 소설들을 만나보자.

 

 

 

 

 

 

 

 

비인간적인 사회의 논리 속에 갇힌 사람들


  이번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소설들은 인물들의 희망이나 의지를 부질없는 것으로 나타낸다. 이는 자본주의적 풍경의 한 모습으로, 개인의 삶을 짓밟는 비정한 시장의 논리이자 힘의 지배다.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씽푸춘, 새벽 4시」는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나’는 사업 실패 후 중국 통링에서 생가죽 무두일을 하며 사채업자 장두목에게 시달리는 빚의 노예가 된다. 사랑하는 아내는 사채업자에게 끌려가 고초를 당해 죽음을 맞지만 ‘나’는 이를 현실로 인정하지 못한다. 아내의 약값과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은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몰고 간다.

 

  장 두목이 쓰러진 내 얼굴을 발로 짓이겼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덜커덩거리는 창문 소리만 났다. 다행히도 두 개의 눈알은 제자리에 있었다. 왼쪽 무릎에 뭉개진 양파가 들러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 나는 은근히 장 두목의 쌍칼을 기다리고 있었다. 통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토함산 자락, 아름드리 소나무로 둘러싸인 고향 집에 가고 싶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가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터였다. 꿈길에서 본 고향 집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65쪽)

 

「씽푸춘, 새벽 4시」가 냉혹한 세계 속에서 폭력, 착취로 얼룩진 개인의 고통을 보여준다면 「나비를 보다」는 도시를 구성하는 비인간적 시스템에 개인의 희생을 강요당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도시철도 기관사인 주인공 ‘나’는 도시의 정확한 시간을 지키기 위해 매일 초 단위로 시간에 신경을 쓰며 하루의 대부분을 지하에서 보낸다. 이러한 주인공의 일상은 살아 있는 도시를 만드는 하나의 부속품으로 작용하지만 정작 개인의 삶은 무기력 속으로 빠지게 된다.

 

  직속 관리자인 팀장은 바뀐 운행스케줄에 대해서 언급조차 없이 안전운행만을 강조했다. (…)“도시 철도는 사람의 혈관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실수로 흐름에 문제가 생기면 도시 전체가 마비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괜히 졸다가 나비를 봤네, 어쨌네 하지 말고, 신속 정확하게 도착과 출발에 신경 쓰도록!”
팀장은 턱을 내밀고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144쪽)


  기관사의 기계적인 삶은 동료인 예비신랑 윤이 없어진 시점부터 점차 균열이 일어난다. 돌발승객으로 인해 열차가 지연되고, 안구건조와 피로 누적으로 전동차는 정차 위치를 벗어났으며, 출발하려는 순간 날아오른 신문지를 사람으로 오인해 ‘나’는 비상 브레이크를 당긴다. 1초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던 주인공의 삶에 이러한 균열은 공공성의 힘에 눌려 있었던 개인의 상처를 발견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자유를 일으켜 세운다.

 

 

 

사랑이라는 미망과 착각에 빠지다

 

  「씽푸춘, 새벽 4시」와 「나비를 보다」에서 보인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일까? 이에 대해「다시 바다에 서다」와 「잉커송」 두 작품은 사랑의 실체와 마주하면서 암울한 사회에서 사랑은 도구로 쓰일 뿐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의 시선이 커다랗게 일그러지며 내 얼굴에 꽂힌다. 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산소마스크를 끼고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어야 할 그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출렁이는 바다 위에 서 있는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36~37쪽)

 

  「다시 바다에 서다」는 외화 번역자인 정미아와 신인 영화배우이자 전직 카레이서 배우 신제민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정미아에게 타인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사회생활은 몹시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 “선택한 공간은 가상의 공간”으로 회화 번역을 하며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없는 영화 속 가상의 인물들만 만난다. 그런 정미아에게 제민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능력을 알아봐준 사람이다. “관계를 규정지을 만한 단어가 없”는 사이라는 사실이 당혹스럽지만, 미아는 제민이 자신의 현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라 생각한다. 이후 제민이 영화 촬영 중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고, 미아는 지독한 불면증을 앓기 시작한다. 제민의 사고 장면이 담긴 영화가 개봉을 하고 이를 본 미아는 제민에 대한 그리움을 참을 수 없어 우여곡절 끝에 그의 병실에 들어서게 되고, 그녀는 자신의 사랑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연수야!”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기수가 눈 위를 구르더니 곧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때 무언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두 팔을 벌린 것처럼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 잉커송이었다. 그 나무가 나를 향하여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241쪽)


  「잉커송」에서는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주인공에게 하룻밤을 즐겼던 클럽 매니저 박기수와의 인연이 엉뚱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버지가 위독하단 소식을 듣고 귀국한 그녀 앞에 기수가 여동생 연수의 약혼자로 등장한 것이다. 연수는 기수와 함께 상하이에서 사업을 하겠다며 떠나고, 아버지는 곧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연수를 찾아 중국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동생 연수가 맞닥뜨린 잔인한 현실들을 알게 된다. 연수가 갔다던 황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비로소 동생의 진짜 행방을 알게 되면서 소설은 대미를 보인다. 동생 연수에게 행복한 세계를 열어줄 것 같았던 사랑은 전혀 다른 현실을 보여주고, 그런 동생의 삶을 마주해야 하는 주인공 앞에도 결국 황폐한 세계만이 남아 있다. 언니인 주인공의 시선으로 “사랑은 애당초 없는 것”임을 깨달은 연수의 삶을 따라가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이기적인 세계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하다.

 

 

 

냉혹한 세계를 견디는 버팀목, 가족


  조미형의 소설에서 개인적인 영역은 공적 영역에 억압되어 매우 불안한 상태로 묘사된다. 「스노우 트리」의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방치하고, 「우리끼리 안녕」에서 부모는 가끔 전화해 돈을 부쳐달라고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작가는 불안한 상태의 사적 영역으로 가족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를 극복하고 비정한 사회를 견뎌낼 유일한 방법으로도 ‘가족’을 지목한다는 것이다.

 

  무휘는 연의 손을 잡았다. 작고 여린 손이 그의 손안에 들어왔다. 지난 세월 그토록 다짐했던 각오가 부질없음을 알았다. 전쟁을 끝내고 버드네에서 연을 안해로 맞아 부부로 살아가리라 소원했다. (200~201쪽)


 「연지연 꽃이 피면」에서 가야 최고의 칼잡이 무휘는 철을 다루는 기술을 빼앗으려는 왜의 공격이 빗발치는 난국 속에서 단 하나의 소원으로 연을 “안해로 맞아 부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끼리 안녕」에서는 교실을 박차고 나온 아이들이 용감하게 세상과 대면하는 장면을 통해 가족의 가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소설은 억압된 가족 질서에 비판적이지만 친구 일오의 “그럼 우리 셋이 가족이 되는 거지. 멋진 가족이 될 거야.”라는 말처럼 공감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가족을 모색한다. 또한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가족이라는 집단은 냉혹한 세계를 견디는 버팀목이 된다.

  “류지, 형 보러 갈 거야?”
  “가야지. 언젠가는…….”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형은 내 옆에 있다. 나는 세이초에 말했다.
  “형이 사진을 하려나 봐.”
  세이초는 말없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씨익 웃었다. 횡단보도 앞에 섰다. 편의점이 보인다. 뽀얀 김이 서린 유리창 너머 형광등 불빛에 편의점 안이 따뜻하게 보인다. 빨간 신호등이 졸립다는 듯 깜박인다. 나는 형의 휴대전화를 꺼내 눈에 푹 파묻힌 거리에 초점을 맞춘다. (106쪽)

 

  「스노우 트리」에서 스노우 트리에 집착했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슬픔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식에 대한 의무감보다 스노우 트리가 먼저였던 아버지,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삶을 이어갈 수 없었던 남자. 주인공 류지현에게 그런 아버지의 존재는 비겁한 겁쟁이이자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 우연히 건네받은 형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따뜻한 편의점 안을 들여다보는 나를 통해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씽푸춘, 새벽 4시

     

  조미형 지음 | 소설 | 국판 272 | 13,000

  2015년 12월 21일 출간 | 978-89-98079-11-6 03810

 

 소설집 『씽푸춘, 새벽 4시』는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다시 바다에 서다」를 비롯해 7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조미형 작가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삶의 심연을 드러내고 그 수렁을 건너는 것이 무엇으로 가능한지 탐문한다. 잔인한 시장논리가 사회를 떠받들고, 비인간적인 시스템이 도시를 지탱하는 냉혹한 세계를 불면증, 가려움, 편두통 등 인물들이 겪는 고통의 증상과 삶의 다기한 모습으로 그려낸다. 더불어 이번 작품집에는 신작 소설 「나비를 보다」와 「연지연 꽃이 피면」을 포함해 등단 이후 10여 년 동안 구축해온 조미형 작가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씽푸춘, 새벽 4시 - 10점
조미형 지음/해피북미디어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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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엘뤼에르 2015.12.23 09: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표지 분위기와 사진이 너무 어울리네요 :) 예뻐요 ㅎㅎ

  2. BlogIcon 잠홍 2015.12.23 1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아요 표지 속 인물이 걸어나올 것 같은.. 영화같은 사진이네요!!

  3. BlogIcon 동글동글봄 2015.12.30 10: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목과 표지 분위기 모두 잘 어울리네요. 읽고 싶은 마음이 퐁퐁: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