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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슬픔.’ 이 두 단어는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너무 익숙한 단어들이기에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두 단어의 관계도 진부하다. ‘전쟁’ 하면 ‘기쁨’ ‘환희’보다는 ‘슬픔’ ‘절망’을 먼저 떠올릴 테니까. 그래서인지 두 단어의 의미는 실제 담고 있는 깊이만큼은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의 슬픔>을 읽으면서 ‘전쟁’과 ‘슬픔’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어느 때보다 뼈아프게 다가왔다.

 

<전쟁의 슬픔> 저자 바오 닌 (출처: 서울신문)

 

이 책의 저자 바오 닌 (Bao Ninh)은 1952년 1월 18일 베트남 중부 응에 안 성 지엔 쩌우 현 출생이다. 본명은 호앙 어우 프엉이며, 필명은 선조들의 고향인 꾸앙 빈 성 꾸앙 닌 현 바오 닌 사에서 따왔다.
1969년 쭈 반 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 살에 베트남 인민군대에 자원입대했다. 3개월간 사격 등 군사훈련을 받고 인민군 이등병을 10사단에 배치 바로 B3 전선에 투입되었다. 첫 전투에서 소대원 대부분이 전사하여 5갱러 만에 소대지휘관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 동안 최전선에서 싸웠다. 베트남전쟁의 마지막 작전이었던 사이공진공작전에 참여한 그는 소대원들과 함께 떤 선 녓 국제공항 점령 전투에 투입되었다. 1975년 4월 30일에 남베트남 공수 부대와의 치열한 최후 교전 끝에 떤 선 녓 국제공항을 장악했을 때 살아남은 소대원은 그를 포함하여 단 두 명이었다. 이 전투와 함께 길고도 길었던 베트남전쟁은 끝났고, 그는 전사자 유해발굴단에 참여하여 8개월간 베트남 산하에 버려진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전역 후 하노이로 돌아와 응우옌 주 문학학교에 입학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첫 장편인 <전쟁의 슬픔>은 출간되자마자 문학계와 독자로부터 뜨거운 환영과 찬사를 받고 16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선 여느 소설보다 작가와 관련된 배경지식을 잘 알아야 한다. <전쟁의 슬픔>은 작가의 삶과 뗄 수 없는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소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저자인 바오 닌은 실제로 만 17세에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고, 1969년부터 1975년까지의 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저술했다. 작가 바오 닌은 어느 전쟁 소설보다도 사실적으로, 전쟁에 대한 미화나 과장 없이, 안타깝고 끔찍하고 잔인하며, 아주 가끔 따뜻했던 전쟁이 어린 연인의 청춘과 사랑을 어떻게 미궁에 빠뜨렸는지를 냉정하면서도 격정적으로 진술한다.

 

<전쟁의 슬픔> 표지

 

<전쟁의 슬픔>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전쟁 이후 첫 건기, 주인공 끼엔은 전사자 유해발군단의 일원으로 부대원들이 전멸당한 전선으로 이동 중이다. 살아남은 단 열 명의 전사 중 한 명인 끼엔은 그 지역이 익숙하다. 패배가 낳은 수많은 혼령과 귀신을 마주하자 끼엔의 마음속으로 바로 작년까지 이어졌던 수많은 전투와 전투에 희생된 전우들, 그리고 전쟁이 갈라놓은 첫사랑 프엉이 찾아온다.
끼엔은 열일곱 살 나이에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라면 끼엔처럼 전쟁에 나서지 않은 젊은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막 피어나기 시작한 첫사랑을 두고 떠나야 하는 아픔을 겪는다.
전쟁은 일상을 파괴하고 대지를 할퀴며 인간의 영혼을 상처를 입혔다. 끼엔에게는 그의 첫사랑 프엉만이 마음속에 유일한 실체다. 처절한 전쟁은 아군과 적군, 군인과 민간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구분 없이 너무나 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끼엔의 영혼은 전쟁 속에서 메말라 간다. 그리고 믿기지 않게 종전이 선언된다.
지옥보다 끔찍한 전장을 경험한 끼엔에게 종전은 전쟁보다 실감 나지 않는 현실이다. 그리고 더욱 믿기지 않는 첫사랑 프엉과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은 프엉과의 추억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변화시키고,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방황하는 끼엔이 할 수 있는 것은 글을 쓰는 일로, 끼엔은 자신이 기적처럼 살아남은 전장에서의 죽음을 쓰기 시작한다.

 

줄거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전쟁 그 자체에도 집중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사랑’의 이야기와,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이야기까지 사유를 확장한다. ‘전쟁’ 자체의 이야기도 다른 전쟁 소설과는 다르게 전쟁 당시의 상황보다 전쟁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과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에 초점을 맞춘다.

 

남겨진 사람들이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그중 소설 속 주인공은 홀린 듯 매일 밤 글을 쓴다. 작가는 글을 쓰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며 글쓰기에 대한 의의를 이야기한다. 아래의 글처럼 작가는 전쟁에 대한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시에 전쟁의 슬픔이 가실 때까지 그 아픔을 곱씹기 위해 소설을 쓴다.

 

 

글을 써야 한다! 잊기 위해 쓰고 기억하기 위해 써야 한다. 의지하고 구원받기 위해, 견디기 위해, 믿음을 간직하기 위해, 살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 매일같이 거리를 지나다니는 낯선 무리가 우연히 서로의 인생에 증인이 되듯이 친한 사람들에 대해 글을 써야 할 필요가 있다. 삶과 영혼 속에서 서로 다른 세상과 상반된 것들에 대해 써야 하고, 태어나 자란 집들과 보금자리와 도시에 대해 써야 한다. 비 내리는 어두운 밤, 길모퉁이 가로등을 지나고 지붕들 아래를 걷는 사람들의 삶 속에 얼마나 많은 운명과 역경이 있는지 알고 있기에 이에 대해 써야 한다. (198쪽)

 

 

소설은 중반부까지 여러 인물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혼재되어 있어 집중해서 읽기 힘들었다.  그러나 중반부 이후에는 주인공 끼엔과 프엉의 사랑에 서사가 집중되어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둘의 사랑 이야기는 전쟁 이야기만큼 책 속에서 절절하게 묘사된다. 사랑할 나이에 전쟁을 해야만 했던 끼엔은 프엉과 이별하고 전쟁을 하며 황폐해져 간다. 남은 프엉 역시 전쟁 전의 해맑고 순수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변한다. 이런 모습과 함께 전쟁터의 끔찍한 맨 얼굴을 보여주며 작가는 이념이라는 가치의 대립으로 생긴 ‘전쟁’보다 진짜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구절을 삽입하여 대비를 극대화한다. 아래와 같은 구절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그의 인생에는 딱 두 번의 사랑밖에 없었다. 한 번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그와 프엉의 사랑, 또 하나는 전쟁 이후의 다른 사랑, 역시 그와 그녀의 사랑이었다. (195쪽)


철로 위에서 기차 바퀴가 끝없이 덜컹거렸다. 신호등, 간이역, 나무숲을 스쳐 지났다. 가끔씩 짧은 다리를 지날 때는 천둥 같은 소리가 터졌다. 거대한 전쟁의 밤이 평원을 뒤덮었다. 끼엔의 가슴속에서 수많은 생각과 어리석은 감정들이 불쑥불쑥 깨어났다. 영원히 이렇게 같이 있고,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걸 버릴 수 있다. 중대도 없고 대대도 없고 전쟁도 없다. (235쪽)

 

 

참혹한 전쟁 현장을 보여주며 시작한 이 책은 점차 시공간을 넘나들며 전쟁 전의 걱정이 없었던 따뜻한 모습, 전쟁 시의 긴박한 모습, 전쟁 후 남겨진 자들의 무기력한 모습을 겹쳐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지점은 전쟁이 끝난 후의 모습이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쉽게 회복하지 못하고 전쟁의 기억 속에 산다. 작가는 소설 내에서 시종일관 전쟁의 잔인함과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인간의 모습을 책 속 인물을 통해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책 말미에는 그러한 작가의 생각이 아래와 같은 구절을 통해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 슬픔과 고통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어 전쟁을 거치고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하나로 커다랗게 뭉쳐진 응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받아들여야 세상에 태어날 수 있듯이, 또한 삶을 다하는 날까지 고통 때문에 살아야 하며 행복을 추구하고 사랑을 하고 예술을 하고 즐기고 견뎌야 하리라. (216쪽)


추악하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전쟁의 비인간성은 그러한 시대를 겪었다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고통의 기억에 시달리게 만들고, 영원히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만들고,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만든다. (265쪽)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했다. 들여다보고 성찰해 보면 사실이 그렇다. 손실된 것, 잃은 것은 보상할 수 있고, 상처는 아물고, 고통은 누그러든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슬픔은 나날이 깊어지고,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 (266쪽)


전쟁으로 폐허가 된 후에 사람들은 다시 사업을 벌이고, 예전의 생활수준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재산, 내면적 삶의 가치는 한번 무너지거나 부서지고 나면 누구도 처음의 순수한 시절로 되돌리지 못한다. (278쪽)

 

 

 끼엔은 전쟁이 끝나고, 힘든 전쟁의 기억들을 피하려고 하지만 결국 그 전쟁의 기억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며 산다. 유해발굴단을 하면서 믿음과 삶에 대한 욕망을 느끼게 되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쓰며, 전쟁의 슬픔을 곱씹고서야 잠이 든다. 
 

작가는 '아무리 좋은 전쟁도 가장 나쁜 평화보다 나을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전쟁 이후 바오 닌이 베트남 문단에 등장하기 이전까지 베트남전쟁 문학은 조국 통일과 민족 해방의 영광, 집단을 위한 개인의 영웅적이고 숭고한 희생을 노래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바오 닌은 전쟁이 몰고 온 당연한 살육, 희생자들을 영웅시하고 신격화하는 시절 동안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모든 것들에 대해 위로를 건넸다. '모든 것들' 중에는 그 자신도 있으리라.

 

처음 출간될 1991년 당시에는 전쟁을 폄하한다는 의견 때문에 <전쟁의 슬픔>이 아닌 <사랑의 숙명>을 제목으로 냈다고 한다. 그 제목을 본 순간 어쩌면 전쟁의 반대말이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 역시 전쟁을 통해, 사랑이라는 가치에 대해 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전쟁을 통해 희생된 생명과 그 속에서 사라진 개인의 '사랑'과 같은 위대한 가치들을 위로하며 글을 마친다.

 

전쟁의 슬픔 - 10점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도서출판 아시아

Posted by 실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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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글동글봄 2018.05.25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의 반대말이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네요. 호치민에 전쟁박물관에 간 적이 있는데 얼마나 끔찍한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금도 지구 반대편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 여름 모기 2018.05.25 14: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이네요. 직접 총칼을 메고 전쟁터에 뛰어든 경험은 없지만..또 그런 경험을 일생 누구나 하는 건 아니지만...이 글을 읽으니 한 인간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전쟁을 겪고 살아남는다면 역시 할 수 있는 건 그걸 기록으로 남기는 일 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읽어보려고 검색하게 됐고 여기 들어오게 됐어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