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첫인상은 그게 뭐지?’였다. 생전 처음 듣는 단어가 좀처럼 입에 붙지 않아 속으로 몇 번을 따라 뱉었지만 이번에 서평 맡은 책이 뭐지?, 하고 누군가 물으면 단박에 대답하지 못한 기억이 몇 번 있다. 데린쿠유. 터키에 있는 대규모 지하 도시. ‘깊은 우물이라는 뜻(130)으로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 속 인물들의 성장 서사를 그리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어다.


주인공 현수는 형인 명수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와 엄마인 복임의 서늘한 시선 속에서 자란 28세 청년이다. 자기주장이 없고, 타인과 잘 어우러지지 못하는 이른바 무디고 미련스럽고 살진 똥돼지의 이미지’(17)로 학창 시절을 보낸 현수는 성인이 되어서도 주류에 속하지 못한다. 자신이 재단해서 깎은 든든한 방패 뒤에서 자신을 욕보는 사람들을 욕하고 자위하며 미성숙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는 게임과 만화 그리고 먹는 것을 좋아하며, 진로나 미래에 대한 목표는 딱히 가지고 있지 않다. 아버지의 소유 건물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용돈을 받아 근근이 한 달씩 버틴다. 그러던 중 아버지를 찾아온 세라를 만나는데 그녀는 아는 고모임을 자처하며 현수에게 꺼림칙한 아르바이트를 제안한다.




"왜 그런 것 있잖아요. 따뜻한 물속에서 감지되는 차가운 기운 같은 거요. 처음에는 그게 차가운 건지도 모르다가 어느 순간 알게 되죠. 그렇게, 그냥 알겠더래요. 자기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조금만 잘못한 게 있어도 이상하게 눈치가 보이고,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고 그랬는데, 그런 자기 마음을 부모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더래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서요."(193쪽)




세라가 현수에게 부탁한 아르바이트는 간단하지만 위험한 제안이었다. 양명시 시장 후보 송찬우의 실체를 몇 차례에 걸쳐 인터넷에 게시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세라는 인터넷과 컴퓨터 사용이 미숙해서 본인이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덧붙였다현수는 오직 ‘26년 전에 송찬우가 전세금 2,000만 원을 들고튀었다.’라는 사실과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었고, 두 살 무렵 해외 입양을 보내게 됐다.’사실을 가지고 인터넷 서치를 시시작한다. 세라는 아르바이트에 대한 담보로 현수의 아버지 경술에게 빚을 진 것도 있으니 차를 사주겠다고 제안하지만 현수는 이 일이 영 탐탁지 않았다. 더군다나 26년 전의 돈을 이제 와 걸고넘어진다는 사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현수는 그러던 중 세라의 주변 인물을 통해 세라가 했던 말들의 일부가 거짓임을 알게 되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이 일을 반드시 해나가야 할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 위키피디아 수정과 검색을 통한 인터넷 이용이 잦았던 현수는 금세 송찬우라는 인물에 대해 정리한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돈 떼먹고 오리발’, ‘자식 버린 정치가라는 제목으로 현수는 글을 게시하게 되고, 그 바람에 송찬우 측의 사람에게 잡혀 송찬우와 마주하게 된다.







현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 일이 아르바이트를 빌미로 한 숨은 의도(134)가 있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된다. 28년간 친부모라고 믿은 경술과 복임은 친부모가 아니었으며, 의도된 만남으로 마주하게 된 세라와 찬우가 자신의 진짜 부모라는 사실과 비로소 마주한다. 하지만 세 사람은 온전한 가족이 될 수 없다. 세라는 자신의 데린쿠유인 송찬우에게 얽매여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고통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송찬우를 택하지만, 오히려 이는 더한 고통이 되어 그녀를 덮친다. 어릴 적 우물에 빠졌을 때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124)던 것처럼, 그녀는 수십 년이 지난 이후에도 자신의 데린쿠유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곳에 갇혀 있다. 한편 송찬우는 이미 제도적으로 두 아이가 있는 여자와 혼인을 한 상태였으며, 생물학적 아버지 이외의 어떤 역할도 수행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 세 사람은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고 나아갈 수 없는 미성숙한 위치에 서 있다.


그러나 세라는 잠시 동안 우리는 가족이었다.’며 과거를 회상한다. 평생을 아픈 몸을 가지고 품은 아이였기에 세라는 자신의 몸이 더 악화되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임신 후 약을 끊고 난 뒤 손가락이며 팔꿈치가 틀어지고, 팔목 발목 연골마디들이 부어올라 딱딱하게 굳은(236) 그녀의 몸은 어쩌면 세라에게 사랑의 흔적으로 남은 것이 아닐까?


경술은 끝까지 아니라, 단언했지만 묵묵히 세라를 사랑했을 것이다. 현수를 거둬들인 것에 큰 공을 세운 건 아이러니하게도 복임이지만, 세라의 자식이던 현수를 가족의 품에 안겨주기 위해 애쓴 건 경술이었다. 세라가 자신의 데린쿠유에 빠져서 나올 생각도 못 했다면, 경술은 세라라는 데린쿠유에 빠졌지만 나와야 한다는 자각을 했기에 단언하는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복임은 진짜 자식인 명수의 죽음 이후 공허함이란 감정에 젖은 모습을 보인다. 먼저 간 아들인 명수는 그녀의 데린쿠유가 되어 오랜 시간 그녀를 고통에 허덕이게 한다. 현수가 자신을 왜 키웠냐며 복임에게 묻자, 복임은 내가 키우자고 했다.’(221)고 짧게 말한다. 복임 역시 경술과 같이 데린쿠유에 빠져 그저 허덕이기만 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을 키우기 싫다고 하지 않은 복임에게 왜 그랬냐는 질문을 현수가 던졌을 때 돌아온 대답은 어쩌면 현수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을 지도 모른다.




네 아버지, 입양 자리 알아본답시고 몇 며칠 밖으로만 돌더라. 애는 나한테 던져놓고……. 지금 생각해도 희한하지. 사람 마음이 어찌 그렇게 기울던지내가네 아버지한테 그랬어. 이 아이는 내가 키운다고, 어디다 내려놓을 데도 없는 애나한테 왔으니, 내가 키울 거라고 했다.”(221쪽)


"자식 키우면서 마음 아프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다던. 내 품에 기어든 자식, 먹이고 입히고 하다 보면 밉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고… 자식이란 게 그런 거지. 자식은 다 똑같아.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221쪽)




현수는 세라가 부탁한 글 대신 강세라와 송찬우 그리고 민현수가 등장하는 새로운 글을 쓰기로 한다. 현수의 글쓰기는 일종의 의식이다. 세라와 찬우의 사랑 아닌 사랑의 부속물이던 자신이 하나의 온전한 주체로 새로운 사랑을 맞이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러한 글쓰기는 현수가 오랜 시간 좋아해 온 다솜에게 한 발 더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현수는 버티기 힘든 고통에 내몰릴 때마다 신체가 굳는 증상이 나타나곤 했다. 이것은 마음속 지하도시인 데린쿠유의 시각화와 같은 모습으로 세라에게도 비슷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찬우를 통해 모든 내막을 알게 되었을 때 현수는 다솜에게 의지한다. 다솜은 작고 다부진 손으로 현수의 상처를 매만져 주는데 다솜은 건강한 주체로 현수와 새로운 서막을 써 나갈 자격이 충분히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이 현수가 봐온 무자비한 속성을 가진 사랑과 다른 사랑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데린쿠유는 각 인물의 고통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촘촘히 엮인 탄탄한 구성을 갖춘 글이다.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라는 유사성 아래에서 고통을 어떻게 희석하는가에 대한 차별성을 가지고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 된다. 이 소설은 추리 소설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른들을 위한 성장 소설이다. 어쩌면 현수뿐만 아니라 우리도 우리만의 데린쿠유에 그동안 빠져 있던 것은 아닐까? 이제는 데린쿠유 밖으로 나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사람이 외로운 거, 무서워. 외로운 거나 무서운 거나 샴쌍둥이 같아서 그게 그거지만… 그게 왜 무서운지 아니?"

대답을 들으려고 물은 건 아니지 싶어 현수는 잠자코 세라를 보았다.

"외로운 게 무서운 이유는 스스로를 천대하게 만들기 때문이야. 외로움은 스스로를 속이도록 만들어. 약하고 비굴하게 만들고 자신을 접어버리도록 만들지. 안 그럴 것 같은데 사람이 그렇게 돼."(45쪽)








데린쿠유 - 10점
안지숙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데린쿠유                                          



마음속 깊고 어두운 지하도시를 헤쳐 나가는 
어른들의 성장소설

비정규직 인생의 애환을 생생하게 담은 소설집 『내게 없는 미홍의 밝음』을 펴낸 안지숙 작가가 첫 번째 장편소설로 다시 한 번 독자를 끌어들인다. 

실감나는 대화와 빠른 전개, 경쾌한 분위기로 풀어가는 인물들의 서사는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터트리게 하는 묘한 매력을 선사한다.

위키피디아에서 글을 수정하며 세상에 일조하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는 백수 민현수. 이런 현수에게 세라는 꺼림칙한 아르바이트를 제안한다. 인터넷상에서 송찬우를 괴롭혀달라는 것인데 현수는 송찬우의 삶을 파고들면서 자신의 삶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퍼즐을 맞춰나간다. 어린 시절 형의 죽음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현수의 성장소설이면서, 마음속에 어둡고 복잡한 지하도시 데린쿠유를 품고 살아야 했던 어른들의 성장소설이다.


현수는 아버지 소유의 공동작업실에서 청소나 형광등 가는 일을 하면서 용돈을 받아 쓴다. 아버지 그늘에 편안하게 먹고사는 태평스러운 젊은이로 보이지만 속까지 무사태평한 건 아니다. 현수에게는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는 어릴 적 상처가 있지만 누구도 현수의 상처를 들여다보지 않았고 현수조차 자신의 마음속 상처를 돌보지 않았다. 현수는 폭식을 일삼으면서 무기력한 청년으로 자랐다. 

그렇게 아무런 야망 없이, 무탈하게, 무해한 존재로 살아가던 현수에게 최근 수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거부하기엔 너무 아까운 조건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현수는 자신의 삶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간다. 매사 무기력하기만 했던 현수는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아픈 사연에도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 현수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소설은 현수의 이야기가 되고 동시에 세라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고통을 치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수는 갑자기 나타난 세라에게서
수상한 아르바이트를 제안받는다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각자 작업을 하는 공동 작업실에서 관리자를 자임하며 세월을 보내는 현수에게 의문의 여자, 세라가 나타난다. 세라는 아버지의 지인으로, 현수에게 ‘아는 고모’를 자처하며 아르바이트를 제안한다. 

이번 선거에서 양명시 시장 예비후보로 나온 송찬우의 뒤를 캐서 인터넷상에 올려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송찬우를 해작질하는 수고비로 차 한 대를 주겠다고 한다. 

현수는 느닷없이 나타난 세라의 아르바이트 제안이 수상하지만 단번에 아르바이트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 꺼림칙하지만 현수는 세라의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아들인다. 

소설은 현수라는 입체감 있는 캐릭터로 빠르게 사건을 전개한다. 실감나는 대화와 빠른 전개로 인해 지루할 새 없이 소설에 몰입하게 한다. 작가는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붙잡고서 소설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꼬불꼬불한 지하도시를 들여다보다
현수와 현수를 둘러싼 어른들의 성장스토리

데린쿠유는 터키에 있는 거대한 지하도시다. 현수를 비롯해 주변 인물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하나의 지하도시를 숨기고 산다. 마음속 지하도시는 숨기고 싶고, 숨고 싶은 시간이 심연처럼 혹은 미로처럼 얽혀 있는 데린쿠유와도 같은 곳이다. 

세라의 말처럼 “우물보다 무한정 깊고 무한정 더 큰 지하도시. 그런 곳에 틀어박히면 모종의 어떤 위협에서도 무한정 멀어질 것”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스스로 그곳에 갇혔으나 결국은 세상 밖으로 나온다. 마음의 상처와 숨기고 싶은 기억을 고통스럽지만 끄집어내는 것이다. 소설은 독자에게 각자 마음속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길 권하며 일단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첫문장

현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머리를 헝클었다.


 책속으로 밑줄긋기

p.7 현수는 사소한 일에도 금방 피곤해졌다. 뚱뚱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그런 경향이 있다. 같은 일을 해도 표면적이 넓어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많이 소비되기 때문일 것이다. 에너지가 딸리면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마련이다. 언젠가 위키에도 그렇게 작성해 넣었다. 현수가 작성한 위키의 글을 읽고 누군가 편견이라고 여겼다면 비웃거나 수정을 했을 것이다.

p.12 다솜은 단단해 보이는 이로 닭다리를 뜯으며 말했다. 앞니 두 개가 유난히 큰 다솜의 작은 얼굴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성깔 있는 토끼를 연상시켰다. 반반치킨 하나를 너끈히 먹어치울 수 있는 현수는 땅콩과 아몬드만 얌전히 씹었다. 회비 없는 회식을 이뤄낸 ‘능력자 다솜’을 칭송하는 사람들과 달리 현수는 놀라지 않았다. 남들 몰래 수줍어하며 다솜을 눈여겨봤기 때문에 공용회비가 어떻게 절약되는지 알고 있었다.

p.129 현수의 잡념 속으로 데린쿠유가 비집고 들어왔다. 우물보다 무한정 깊고 무한정 더 큰 지하도시. 그런 곳에 틀어박히면 모종의 어떤 위협에서도 무한정 멀어질 것이다. 세상은 현수를 잊을 것이고,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관심도 결국 끊길 것이다. 공상 속으로 달아나면서 현수는 눈앞에 걸려 흔들거리는 경고장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p.130 그것은 미로였다. 아니, 통로였다. 깊은 우물처럼 지하로 들어간 공간들을 이어주는 통로. 그 통로의 중심은 지하로 들어가는 관문 아래 수직으로 깊은 곳에 있을 거였다.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순간이동을 하고 싶었다. 터키에 있는 현실의 데린쿠유로 직접 갈 수도 있다는 생각 같은 건 현수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자 소개

안지숙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오랫동안 문화기획사에서 일하며 여러 책을 집필했고, 실제 생존자와 사망자의 가족 이야기를 다룬 기록 『1995년 서울, 삼풍』을 공저했다. 비정규직 인생으로 살아온 애환을 담은 소설집 『내게 없는 미홍의 밝음』을 냈다. 앞으로도 꾸준히 읽고 생각하고 쓸 예정이다. 현재 두 번째 장편소설을 집필 중이다.






데린쿠유

안지숙 장편소설 

안지숙 지음 국판 변형 | 264쪽 15,000

978-89-6545-606-3 03810 

위키피디아에서 글을 수정하며 세상에 일조하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는 백수 민현수. 이런 현수에게 세라는 꺼림칙한 아르바이트를 제안한다. 인터넷상에서 송찬우를 괴롭혀달라는 것인데 현수는 송찬우의 삶을 파고들면서 자신의 삶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퍼즐을 맞춰나간다. 어린 시절 형의 죽음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현수의 성장소설이면서, 마음속에 어둡고 복잡한 지하도시 데린쿠유를 품고 살아야 했던 어른들의 성장소설이다.

 

 


데린쿠유 - 10점
안지숙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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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글동글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