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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23 불안을 다듬는 끌질, 이병순 소설집 『끌』 (2)

이병순 소설집 『끌』

불안 허공 탈주




 『끌』은 제가 인턴을 시작할 때부터 줄곧 책상 위에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당시 방금 막 나온 신간도 아니었고, 사무실의 누군가가 읽다 잠시 위에 올려두신 것 같았습니다. 누가 제게 읽으라고 한 적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었지만, 왠지 시간이 날 때마다 눈이 가게 됐습니다. 그렇게 4주째 『끌』은 자리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명사」

 망치로 한쪽 끝을 때려서 나무에 구멍을 뚫거나 겉면을 깎고 다듬는 데 쓰는 연장.


 끌은 끊임없이 가구를 다듬습니다. 까슬한 겉을 깎고 다듬어야 죽은 나무는 비로소 공간에 놓일 수 있습니다. 『끌』은 불안하고, 텅 빈 공간에서 계속해서 끌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질


 볼라와 언감생심, 개죽, 인질 주인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비어 있다. 연한 하늘색 바탕에 사람의 두상 그림만 연회색으로 희멀겋게 파여 있다. 파인 부분은 마치 두상을 도려낸 흔적 같다. 인질 주인의 카카오톡은 누구와도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12쪽.)


 '인질'은 택시기사 동수와 인질 주인의 연결고리입니다. 동수는 인질을 통해 인질 주인에게 푼돈을 뜯어내 보려 하지만, 인질 주인은 연락도 인질을 구하려는 의지도 없어 보이죠. 어쩌면 인질 주인의 텅 빈 삶에서 인질은 그다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나 봅니다. 인질의 '현대인의 필수품'이라는 별명에도 불과하고 말입니다. 주변 인물과 동수의 통화를 생각해 보면 인질 주인은 그닥 행복한 생활을 한 것 같아 보이진 않습니다. 욕설이 가득한 지칭으로 인질 주인을 부르는 개죽의 말에서 오히려 인질을 찾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텅 빈 삶 속에서 인질 주인은 인질로부터 탈주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인질 주인은 '누구와도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고, 프로필의 두상은 마치 '도려낸 흔적' 같습니다. 



에볼라 출혈열 [ ebola hemorrhagic fever ]

: 에볼라 바이러스에 의해 발열과 전신성 출혈 증상이 발생하며 치사율이 매우 높은 질환

焉敢生心 [ 언감생심 ]

: ‘어찌 감(敢)히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으랴’







 놋그릇


  씨는 흙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고 손자 손에 이끌려 쪽마루에 올라선다. 맵싸한 향내가 코를 파고든다. 교자상 너머 병풍은 산처럼 우뚝하다. 영정 속의 얼굴은 모두 다 같아 보인다. 남편은 시아버지 같기도 하고 친정아버지 같기도 하다. 희로애락에 치이고 부대낀 흔적은 어디에도 비치지 않는다. 이승에서 겯고튼 흔적은 죽으면 바람이 다 걷어가 버리는 것일까. (49쪽.)


 손 씨에게 담배와 제사는 옛사람을 마주하는 기회이자 현재를 잊는 시간입니다. 언제나 생각에 붙잡혀 사는 손 씨는 놓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제사, 아들, 큰 며느리, 남편. 향불 앞에서 그녀는 꽉 막힌 현재를 벗어납니다. 손 씨는 "그저 향불 앞에 오래오래 엎드려 있고 싶"습니다.



서름-하다

「형용사」

「1」【(…과)】((‘…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는 여럿임을 뜻하는 말이 주어로 온다)) 남과 가깝지 못하고 사이가 조금 서먹하다.

「2」【…에】사물 따위에 익숙하지 못하고 서툴다.







 


 는 아내를 잡을 언턱거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품었던 고마움과 미안함은 내 분노와는 결코 맞먹지 못했다. 아내의 남자는 수필 쓰는 사람이라 했다. 수필 쓰는 사람, 그 소리가 내 귀에는 숫돌 가는 사람으로 들렸다. (67-68쪽.)


 '나'는 끌질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아내를 떠올립니다. '나'는 아내를 잘 알고 있지만, 아내는 어디선가에서 계속 때를 묻혀 오죠. 익숙한 아내가 낯설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과거와 지금의 아내를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옛 찻집 주인의 내연녀를 통해서도 아내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내연녀 영란에게, 아내에게 그랬던 것처럼, 서랍장을 남기는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아내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수필 (隨筆)

「명사」『문학』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 보통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뉘는데, 작가의 개성이나 인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유머, 위트, 기지가 들어 있다. 


숫-돌

「명사」

 칼이나 낫 따위의 연장을 갈아 날을 세우는 데 쓰는 돌. 

숫돌이 저 닳는 줄 모른다

 숫돌에 무엇을 갈 때마다 숫돌 자신이 닳는 것은 알지 못한 채 점차 닳아서 패게 된다는 뜻으로, 조금씩 줄어드는 것은 잘 느끼지 못하나 그것도 쌓이면 무시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부벽완월


 식이 왕명을 어기면서까지 지상을 죽인 것을 두고 그를 향한 시기심 때문이라는 말들이 떠돌았다. 변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기심에 사로잡혀 지상을 죽였다는 말은 틀렸다. (중략) 지상을 향했던 순정한 동경과 그를 품었던 절절한 마음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면 어떤 소문에도 의연해야 했다. (85쪽.)


 부식은 지상의 시적 감각과 능력을 몹시 사랑하고, 동경합니다. 윤언이 '글 동냥'을 한다며 조롱을 할 정도로 그는 시에 대한 애착이 깊고, 지상의 시를 좋아했습니다. 부식의 눈에 비친 지상은 고고하고, 고매합니다. 또 그에 대한 시기심은 부식을 더욱 안달하게 합니다. 그러나 지상은 부식과 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식은 정치적인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자 자신보다 관직에서 높은 성취를 이룬 인물입니다. 부식은 지상과 시에 대에 말을 나누고 싶지만, 지상은 날카로운 정치 이야기만을 늘어놓습니다. 오히려 시에 회의적인 모습도 보입니다. 높은 관직의 부식은 다른 의미로 지상에게 열등감을 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벽완월」은 부식의 눈으로 부식의 소리로 지상의 감정을 보여줍니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갠 긴 언덕에 봄빛은 푸른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남포에서 임 보내는 구슬픈 노래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은 어느 때 마르려는지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의 눈물을 푸른 강에 보태고.

<대동강, 정지상>   







 슬리퍼


  나이 때는 인생의 무게가 제 발밑에 있을 때였다. 또한, 발돋움하지 않으면 세상이 보이지 않을 것같이 초조함이 깃든 나이였다. 찰칵찰칵. 학생들이 카메라에 담기는 소리는 경쾌했다. K에게 부재중 전화가 마흔여섯 통이 와 있었다. (125쪽.)


 '여자'에게 신발은 구속입니다. 그녀가 앓고 있는 무지외반증은 그녀를 신발의 틀에 오래 잡혀있을 수 없게 합니다. 그런 '여자'에게 K는 계속해서 슬리퍼 대신 플랫슈즈를 권합니다. 마치 신발로 '여자'의 삶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발은 언뜻 우리의 발을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신고 있다 보면 발에 땀이 차기도 하고, 속에 날카로운 것이 있으면 오히려 우리 발을 해치기도 합니다. 보온성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아서 때로 한겨울 거리의 한기를 발에 전하기도 합니다. 발을 감싸는 듯하지만 어떻게 보면 발을 꽉 안아 붙잡고 있죠. '여자'에게 삶은, K는 신발입니다. 신발은 '여자'를 꽉 안아 그녀의 삶을 떠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여자'는 항상 슬리퍼를 착용합니다.



슬리퍼 (slipper)

「명사」

 실내에서 신는 신. 뒤축이 없이 발끝만 꿰게 되어 있다.

「참고 어휘」끌신.


간헐-천 (間歇泉)

「명사」『지리』

 일정한 간격을 두고 뜨거운 물이나 수증기를 뿜었다가 멎었다가 하는 온천. 화산 활동이 있는 곳에서 많이 나타난다.







 창(窓)


 게 창은 알맞은 양분의 햇빛을 관통시키는 프리즘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창은 프리즘도 사탕 빛 정서도 아닌 틀과 유리로 이루어진 건축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깨달았다. (137쪽.) 


 '창'은 흔히 소통의 소재로 등장합니다. 열리는 투명한 벽은 바깥 공기를 들이기도, 풍경을 보여주기도, 날씨를 알려주기도 하는 세상과의 연결고리입니다. 여자는 1층의 방범창이 마치 감옥 같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창을 흠집 내고, 깨고, 부수지만 결국 다시 창을 필요로 합니다. '덜 마른 옷을 입은 것처럼' 기분 나쁜 이곳에서 창은 외부로 통하는 공간이자 바깥세상을 막아주는 벽입니다. 반면 '나'에게 창은 양분을 통과시키는 프리즘이었습니다. 그리고 빛을 들여오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은 '나'에게 무겁기만 합니다. "넌 우리의 빛이다."가 "우린 너의 빚이다."가 되는 것처럼. 현실 속 창은 '틀과 유리로 이루어진 건축 구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빚에서, 젖은 습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와 '여자'에게는 창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窓)

「명사」

「1」=창문(窓門).

「2」『컴퓨터』모니터 화면에서 독립적인 환경을 나타내는 사각형 모양의 영역. 흔히, ‘윈도’라 한다.


창문 (窓門)

「명사」

 공기나 햇빛을 받을 수 있고,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벽이나 지붕에 낸 문.











 닭발


 린 시절, 엄마는 언도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닭발을 입에 물렸다. 닭발을 채찍으로 삼아 입안을 후려치려는 의도였다. 티끌만큼의 선처도 없었고 예외도 없었다. 닭발을 물지 않으려고 도리질을 쳤던 어느 날, 발가벗겨진 채 마당에 내쫓긴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중의 하나였다. (166-167쪽.)

 슨 말인가 묻고 싶었지만,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언도는 전화기에 거친 숨만 내보냈을 뿐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아교풀을 잔뜩 삼킨 것 같았다. (174쪽.)


 언도에게 '말'은 거짓말과 눌언이었습니다. '엄마'의 죽음 이후 자진해서 닭발을 씹는 언도는 그 거짓말과 눌언을 스스로 채찍질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언도는 말문이 트이자 오히려 군말이 줄었습니다. 헛말이 없는 입속은 빈 꽈리처럼 홀가분하고 유연합니다. 그런 언도에게 다시금 거짓말을 유도하는 사람은 언도의 눌언을 교정했던 '공'과 '선배'입니다. 그래서 언도는 오늘 다시 닭발을 씹습니다. 오도독하고 닭발을 물면 헛말은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아교- (阿膠-)

「명사」

 짐승의 가죽, 힘줄, 뼈 따위를 진하게 고아서 굳힌 끈끈한 것. 풀로도 쓰고 지혈제로도 쓴다.







 비문(蚊)


飛 [날 비]

蚊 [모기 문]


 엌의 선반과 살강을 달그락거리는 쥐가 아침의 적막을 깨뜨린다. 수리는 사과 소쿠리를 들고 툇마루에 나간다. 사과를 차례차례 헛간 옆으로 던진다. 물컹한 사과들을 만지자 쉬파리들이 후르르 날아오른다. 쉬파리 떼들이 후룩 수리의 얼굴을 덮치다 이내 허공으로 치솟는다. 손에 묻은 사과의 농액은 추깃물 같다. (183쪽.)


 비문증을 앓고 있는 수리에게 안유백은 썩은 사과입니다. 썩은 것만 보면 쉬파리가 들끓는 것처럼 보인다는 수리는 양반인 안유백에게 억압받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수리가 그린 안유백의 초상화는 탈주를 위한 열쇠입니다. 파과에 모여있던 쉬파리가 후룩 날아가 버리듯 수리는 도망치고 싶습니다.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면' 수리는 이제 그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파과 (破果)

「명사」

 흠집이 난 과실


추깃-물

「명사」

송장이 썩어서 흐르는 물. 








 끌은 끊임없이 가구를 다듬습니다. 꺼슬한 겉을 깎고 다듬어야 죽은 나무는 비로소 빈 공간에 놓일 수 있습니다. 『끌』불안하고, 텅 빈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해서 끌질을 하고 있습니다. 








 - 10점
이병순 지음/산지니

(단어뜻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tdweb2.korean.go.kr/main.jsp)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