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화론과 중국



“구망救亡의 길은 철도를 건설하고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철도를 건설하고 기기를 사용하려면 서학 격치에 밝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 서학 격치는 우회로가 아니다. 구망을 말한다면 이것을 버리고서는 불가능하다” 중국 사상가 옌푸 <원강> 中

19세기 말의 중국은 격동기였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무기력하게 영국에 패한 중국의 청나라 왕조는 홍콩을 영국에 굴욕적으로 넘겨야만 했고, 중국에는 농민혁명이 발발해 남경에는 태평천국이 건설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의 몰락은 기정사실이었고,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양 기술을 받아들여 군대를 근대화하고, 정치적 중흥을 모색하려는 양무운동을 전개한다. 바로 이 시기에 중국 청년들의 상당수가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옌푸도 그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던 옌푸는 선정학당에서 영어를 배운 후 해군 항해사로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영국 왕립 그리니치 해군대학에서 유학을 마친 옌푸는 중국 해군을 교육하는 일에 매진했지만, 청나라는 여전히 복고적 전통에 집착하는 관료 조직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옌푸는 허약한 중국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결심으로 언론가의 길을 택한다.

당시 옌푸가 쓴 글의 제목들만 봐도, 그가 얼마나 중국이 강력한 국가가 되기를 갈망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강함이란 무엇인가>, <세계 변화의 빠름을 논함> 등의 글을 연이어 발표하며, 그가 영국 유학 중에 접했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저작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옌푸는 스펜서의 사상을 통해 중국의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계획하려 했지만, 스펜서의 저작물은 너무 많고 방대했다. 그런 옌푸에게 다가온 책이 바로 다윈의 불독으로 유명한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라는 저술이었다. 옌푸가 <천연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이 책은 중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사회진화론은 당시 망국의 길을 향해 가던 중국사회의 생존윤리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천연론>에서 헉슬리는 생물학적 진화론이 인간사회의 윤리적 규범에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즉 당시 스펜서에 의해 널리 유명해진 적자생존이라는 진화의 법칙이 과연 인간사회의 윤리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했으며, 실제로 이 책의 결론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헉슬리 스스로가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당대에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과학자이자 교육자였으며, 지적으로도 스펜서보다 훨씬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옌푸가 번역한 <천연론>은 그 책이 중국사회에 사회진화론을 전파시킨 결론이 역사적 아이러니임을 보여준다. 즉, 헉슬리의 스펜서에 대한 비판서가, 중국에서는 사회진화론이 유행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훗날 이 책을 읽고 중국 최고의 지식인으로 성장하는 후스는 <천연론>을 읽은 당시 학생들이 그 책의 내용보다는 국제정치에서 냉혹하게 작동하는 적자생존이라는 현실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천연론>이 중국에 번역되고 소개되는 과정은 그 자체가 중국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서양의 과학기술과 학문이 중국 근대로 편입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즉 20세기 초반 중국은 당시 중국이 처해 있던 위기적 환경의 맥락 속에서 모든 서구적이고 이질적인 사상을 변용해 받아들였다.

 

과학은 어떻게 중국의 근대를 직조했는가

”‘과학구국科學救國’ 사상은 근대시기 중국의 구국 사조 가운데 하나이다. 과학구국 사상은 아편전쟁 시기에 발생해서 양무운동洋務運動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신해혁명辛亥革命을 거친 후 5.4 신문화운동을 기점으로 확실한 하나의 과학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 중국 과학 정책과 사상의 면모를 살펴보더라도 그 근간에 ‘과학구국’의 이념이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한성구

1919년 5.4 신문화운동의 구호는 과학과 민주였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중국에 과학이 소개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서학이라 불리는 형태로 명청(明淸) 시기에 서구 근대과학이 중국에 소개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학문을 그다지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양무운동으로 서양의 천문학, 기상학, 역학, 화학, 수학, 생물학, 지질학, 지리학, 광학 등의 저술들이 번역됐지만, 보수파들의 반대로 양무운동은 중체서용 정도의 선에서 서구과학을 소개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기예의 관점에서만 서구과학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던 양무운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변법파의 역할 덕분이었다. 변법파는 도구로서만 과학을 받아들이던 과거 지식인들의 한계를 넘어, 서양 과학을 사상으로 받아들였다. 변법파에 의해 일종의 보편적 가치체계로까지 지위가 상승한 과학은 강유위, 양계초 등의 사상가들에 의해 중국의 전통 관념을 비판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일종의 사회개혁사상으로 변모하게 된다.

유신 변법운동을 거치며 과학이 중국의 전통을 혁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직조할 사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5.4운동 시기가 되면 과학은 중국을 계몽시킬 유일한 수단으로 여겨지게 된다. 5.4 신문화 운동의 기치는 반봉건, 반전통이었고, 계몽을 위한 방법으로 선택된 과학은 급진파와 보수파, 전통 사대부와 현대적 지식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긍정하는 합치된 견해였다. 당시 과학은 새로운 중국을 직조할 유일한 방법론이자 이론이었고, 이런 분위기는 과현논쟁을 거치며 과학을 거의 종교의 지위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과현논쟁에서 과학의 편에 섰던 지식인들은 대부분 급진주의자들이었으며, 과학이 인생관이 된다는데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1920년대의 중국에서 과학은 어떻게 보면 근대과학이 탄생한 유럽에서는 이미 그 흔적이 희미해진, 강력한 계몽사상으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던 셈이다.

신문화운동의 기세가 아무리 대단했어도, 중국이 서양 제국주의에 밀려 퇴보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에 과학은 여러 구국사상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과학 구국은 마르크시즘과 경쟁하는 사조 중 하나로 인식됐다. 과학이 구국사상으로 자리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대부분 유학생들이었고,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유학을 하던 리스쩡 등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과학은 도구가 아니라 과학적 방법, 과학 정신, 그리고 정신의 본질로까지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들과 당시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과학구국사상은 당시 중국 젊은이들에게는 일상적 구호가 됐고, 다양한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에 의해 1920년대 중국은 과학으로 전통을 뒤집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열망에 빠져들게 됐다.

훗날 중국공산당의 초대 지도자가 되는 천두슈 또한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펴내며 진보적 지식인들과 함께 과학구국사상을 전파하는데 매진했었다. 천두슈에게 과학은 단순히 자연의 비밀을 발견하는 방법론을 넘어, 세계관과 인생관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이념이었다. 천두슈는 과학과 민주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했다. 천두슈와 같은 지식인들의 사고방식을 과학만능주의라고 비판한 장군매같은 철학자가 있었지만, 1920년대 중국에서 과학주의는 이들을 누르고 승리를 거뒀으며, 이후 과학적 유물론을 기초로 하는 마르크스주의가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는 사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과학이 당시 중국사회를 직조한 핵심 사상이라는 점은, 중국 전통 내에서 과학과 비슷하게 사용되던 ‘격치 格致’라는 단어 대신, 모든 지식인들이 ‘과학’이라는 단어를 수용한 데서 알 수 있다. 양무운동과 변법운동을 넘어 5.4 신문화운동을 거치며 과학주의로까지 성장한 중국 근대의 과학은,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내재돼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관념을 중국이 받아들이는 마중물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 사상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주의에 기반을 둔 이데올로기로서 받아들여진 셈이다. 이러한 점은 과현논쟁에서 보여준 천두슈의 발언들에 명확히 나타난다. 당시 논쟁을 정리하는 서문을 쓴 천두슈는 과학파와 현학파 모두 이 논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오직 과학적 사회주의와 역사적 유물론만이 과학으로 중국을 구원하는 길임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구망과 계몽의 변증법 속에서 과학은 사회개혁에 있어 더욱 빠르고 실천적인 마르크스주의에 주도권을 내어주게 되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성질은 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약속을 제시함으로써 수많은 중국의 지식인들을 혁명의 열기 속으로 흡입”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국사회의 기저에 스며든 사상으로서의 과학


혁명의 열기가 무르익어가던 1930년대와 40년대에, 중국사회를 주도한 이념은 분명 마르크스주의였다. 과학은 마르크스주의가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표면적으로 과학을 하나의 이념이나 사상으로 내세우는 학파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학은 중국의 혁명 시기 수면 아래로 내려가 조용히 혁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아 보였다.

최근 중국과 미국이 새로운 냉전체제를 만들어가는 기저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양국의 치열한 경쟁이 숨어 있다. 불과 지난 20여 년 동안, 중국은 상당 부분 미국의 기술력을 따라잡았고, 안면인식이나 5G 기술 등에서는 이미 미국을 뛰어넘은 것으로 평가된다. 시진핑 주석은 취임 전부터 과학기술에 대한 무차별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천인계획을 넘어 만인계획을 통해 해외의 우수한 과학기술인력을 모조리 중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중국의 과학기술정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과학기술인들이 주체적으로 이를 이끌어나간다는 점이다. 혁명이 종결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 같았던 사상으로서의 과학은 1970~80년대 다시 중국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며 사회를 주도하는 이념으로서의 과학이 중국에 건재함을 과시하곤 했다.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사상으로서의 지위를 한번 획득했던 과학은, 여전히 현대중국을 이끌어가는 심장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마오쩌둥은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높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식 탐구자이자 사상가이자 철학자로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섭렵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마오의 독서생활>이라는 책에는 그가 조지프 톰슨의 <과학대강>, 막스 플랑크의 <과학은 어디로 가는가>, 아서 에딩턴의 <물리세계의 본질> 등을 읽었다고 쓰여 있다. 1940년 혁명근거지에서 자연과학연구회가 결성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연과학은 인류가 자유를 쟁취하는데 필요한 무기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자연계에서 자유를 얻기 위하여 자연과학으로 자연을 이해하며, 자연을 극복하고 자연을 개조하여 자연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물론 과학에 대한 마오쩌둥의 생각은, 과학으로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것을 파괴하고, 철저히 중국을 구국하는데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한 국가의 지도자가 조지프 톰슨과 막스 플랑크의 책을 읽으며 새로운 국가의 형태를 구상했다는 건 한국의 대통령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큰 차이임에 분명하다. 20세기 초 동아시아에는 사회진화론의 바람이 똑같이 불었고, 조선에도 과학은 분명히 큰 변화의 동력으로 다가왔었다. 도대체 중국에선 사상의 위치를 점유했던 과학이, 왜 조선과 대한제국에선 그렇지 못했었는지를 이해하는 작업은 한국사회에서 과학의 지위와 역할을 이해하고 이를 직조하는데 아주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로운넷=김우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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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두슈 사상선집 - 10점
천두슈 지음, 심혜영 옮김/산지니

진화와 윤리 - 10점
토마스 헉슬리 지음, 이종민 옮김/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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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14. 유교를 대체한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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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람들은 데[Democracy]선생과 싸이[Science] 선생을 옹호해서 많은 일들을 치렀고 많은 피를 흘렸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비로소 이 두 선생이 암흑 속에서 차츰차츰 그들을 구출해 광명한 세계로 이끌어 냈다. 지금 우리는 오직 이 두 선생만 있으면, 정치적·도덕적·학술적·사상적인 모든 암흑에서 중국을 구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천두슈가 <신청년>에 쓴 글 중에서 

5.4 신문화운동은 낡은 전통의 타파를 외치면서 과학과 민주를 기치로 내걸었고, 전국적인 지지를 타고 전통주의자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5.4 운동 이전부터 동도서기 혹은 중체서용을 주장하던 철학자들은, 여전히 중국의 정신을 기틀로 서양의 과학을 도구로만 수용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근대 중국에서 과학의 의미를 둘러싼 논쟁은 피할 수 없는 폭탄이었다. 서양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서 흔들리던 중국의 위상과 새로운 중국을 위한 다양한 이념과 주장들 사이에서 과학은 당당하게 그 논쟁의 중심에 섰다. 5.4 신문화운동이 한창이던 1923년, 새로운 중국을 꿈꾸던 지식인들은 약 1년 동안 과학의 의미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는 <과학과 인생관>이라는 책으로 발간된다. 흔히 ‘과현논쟁’으로 불리는 이 논쟁의 내용과 그 의미는 근대 중국이 설립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생관은 과학으로 결정할 수 없다

5.4 신문화 운동은 낡은 전통으로 대변되는 공자의 유교와 미신을 타도하자고 외쳤지만, 중국 내에는 여전히 19세기 말부터 동도서기 혹은 중체서용의 입장에서 서구 과학문명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를 중국의 전통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지식인 집단이 존재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으로 서양문명의 위기를 경고하던 서양 사상가들의 외침은 이들에게 좋은 근거가 되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이들 국수주의적 지식인들에게 중국 전통문명을 재평가할 구호가 됐고,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북경에서 중국 정신문명을 치켜세우자,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됐다.

1918년 양계초는 지질학자 정문강과 철학자 장군매 등을 이끌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유럽을 시찰했고, 바로 그 시찰을 통해 서구의 몰락을 확신했다. 특히 이들은 더 나아가 ’과학파산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베르그송 등의 반과학적 생명철학에 기대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은 서양 근대를 구분짓는 ‘과학과 이성’주의 사조에 대한 대립으로 인문주의를 강조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기계주의적 공업문명을 반대하면서 창조적 진화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흔히 문화 보수주의라 불리는 이 학파의 저작들은 현학파의 주요 이론틀이 됐고, 장군매는 바로 이 과학파산론의 직계가 되는 철학자였다.

장군매의 글 <인생관>의 핵심은 과학이 세상의 보편적인 진리인 것처럼 선전되고 있지만, 세상 대부분의 일들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특히 인생관처럼 주관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군매는 과학파가 주장하는 과학과 대비해서 인생관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주장했다.

1. 과학은 객관적이고 인생은 주관적이다. 

2. 과학은 논리적 방법의 지배를 받지만, 인생관은 직각에 근거한다.

3. 과학은 분석적 방법으로 시작하지만, 인생관은 종합적인 것이다.

4. 과학은 인과율의 지배를 받지만, 인생관은 자유의지에 따른다.

5. 과학은 대상의 동일성에 근거하지만, 인생관은 개성에 근거한다. 


장군매의 논리는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칸트 이후 아주 오래된 인문주의자들의 논리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뉴턴의 고전역학이 근대과학의 시작을 알린 이후, 서양 철학은 자연과학에 대비한 철학의 고유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 없이 대응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르그송 같은 철학자들은 세계대전과 기계문명을 계기로 서양철학적 전통 안에서 과학과 대비되는 인본주의의 고유함을 주장했고, 이러한 철학전통은 훗날 프랑스에서 과학전쟁을 야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주관적, 직각적, 종합적, 자유의지적, 개성’으로 특징 지워지는 인생관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인문학의 고유영역이며, 과학과 인생관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라는 고유영역에서 설명력을 지니는 독립적인 학문체계가 된다. 이처럼 과학과 인문학의 영역 고유성을 주장하고 난 뒤, 장군매는 아담 스미스·마르크스·쇼펜하우어·플라톤 등의 사상가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해왔으나, “기나긴 역사의 어둠 속에서 불을 밝혀 우리의 앞길을 인도한 사람은 이들 몇 명뿐이었다”는 주장으로 인생관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바야흐로 중국은 신문화를 추구하고 있지만, 사조의 변천은 곧 인생관의 변천이며 따라서 과학은 사조를 변화시키는 도구로 부적절하다는 뜻이다. 

지질학자의 반박 - 과학적 방법론의 가능성

장군매의 글을 읽은 과학파의 많은 지식인들은 대응해야할 필요를 느꼈다. 그 중에서도 스스로 지질학자이자 사상가였던 과학자 정문강은 장군매의 주장에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현학은 참으로 무뢰한 귀신이다. 거수에서 2000여년간 빈둥거리다 근래에 이르러 점점 밥 먹고 살 길이 없어지자 홀연히 거짓 간판을 쓰고 새로운 명패를 걸고 어깨를 으쓱이며 중국으로 달려와, 허장성세로 이목을 끌며 사기를 치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믿어서는 안된다.”

그는 인생관은 시비진위의 기준이 필요 없다는 장군매의 주장에 대해 시비진위를 따지지 않으면 대체 어디서 기준을 구하느냐고 반박했고, 과학은 바로 그 시비진위를 구하는데 가장 적격의 방법론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과학이 인생관의 문제를 모두 설명하지 못해도, 논리학적 방법론과 추론을 통해 과학의 재료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마치 고대의 몇몇 사상가들만이 인류의 길을 밝힌 것처럼 주장한 장군매의 발언을 이렇게 받아쳤다.

“과연 그와 같다면 책도 읽을 필요가 없고 학문도 추구할 필요가 없고 인식과 경험 모두 쓸모 없고 단지 ‘자기의 양심이 명하는 바에 따라 주장하기만’ 하면 만사 그만이니, 인생관이란 ‘모두 양심의 자율에서 비롯되고 결코 그렇지 않은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책을 읽고 학문을 추구하고 인식과 경력을 쌓는 것은 전부 시간 낭비인 셈이다… 따라서 어떤 살인마가 나타나, 그 살인주의를 내세워 “스스로의 양심이 명한 바에 따라 일어나 ‘살인주의’를 천하 후세의 모범으로 삼으라고 주장하더라도”, 우리는 다만 그 사람 역시 쇼펜하우어나 마르크스와 똑같은 대인물임을 인정하고, 또 “기나긴 어둠의 역사 속에서 불을 밝히고 우리의 앞길을 인도한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대체 무슨 말인가? 사람들이 각자 제멋대로의 인생관을 들고 나와 ‘일어나 주장할’ 경우, 그것이 어찌 공자, 석가, 묵자, 예수의 인생관보다 고명치 못하다 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런 사회라면 하루라도 살 수 있겠는가?”


정문강 초상화/출처=한국인문고전연구소


즉, 정문강은 장군매의 주장처럼 주관과 직각, 그리고 양심에만 의존하는 현학은 상대주의의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장군매가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공자와 마르크스 등의 위대한 인물들과 시장에서 오가는 발언들의 차이조차 구별할 수 없다고 일침을 놓은 것이다. 특히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과학의 가치를 폄하한 장군매의 궤변에 대해 정문강은 과학의 가치를 이렇게 요약한다.

“과학의 재료는 인류의 모든 심리적 내용이 포함되며, 모든 참된 개념 추론은 과학이 연구할 수 있고,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과학적 목적은 개인의 주관적 선입견을 물리치고, 사람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은 사실의 진위를 변별하고 참된 사실을 추출하여 상세히 분류한 다음 그들 사이의 질서를 찾아 간단명료한 언어로 개괄하는 것이다..”

정문강은 과학의 가치를, 과학이 발견해낸 결과주의에 기대어 주장하는 게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장군매가 인생관에 대비해 과학의 초라함을 지적할 때, 과학의 결과주의에 기대어 인생관이 여전히 과학에 의해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한 것을, 정문강은 과학의 핵심은 과학적 방법론에 있다는 적확한 논증으로 꼬집고 있다.

“과학은 또한 교육과 수양의 가장 좋은 도구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날마다 진리를 구하고 수시로 선입견을 없애게 하며, 과학을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구하는 능력이 생기게 해 주고, 진리를 사랑하는 참된 마음을 가지게 해 주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만나든 항상 냉정하게 분석 연구하여 복잡한 것들 속에서 간단함을 구하고, 문란한 것들 가운데 질서를 구하여, 논리를 가지고 자신들의 생각을 훈련하고 상상력을 더욱 늘리고, 경험을 가지고 그의 직각을 이끌게 하여 직각 능력이 더욱 활발해지도록 해주는 것이다… 과학의 만능, 과학의 보편성, 과학의 명확성은 그 재료에 있지 않고 그 방법에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제임스의 심리학, 양계초의 역사연구법, 호적의 홍루몽 강의 및 근 300년 경학 대사의 학문연구 방법” 등이 모두 과학이다.”

특히 정문강은 장군매의 논리가 기대고 있는 베르그송이라는 철학자가, 중국의 정신문명을 추켜세운 버트란드 러셀에 의해서조차 “베르그송은 파리의 패션 부인들 덕에 명성을 얻었을 뿐이다. 그는 철학에 대해 공헌할 것이 거의 없고, 동료 철학자들도 그를 무시한다”고 말한 사실을 거론하며, 서양철학의 겨우 한 유파에 불과한 베르그송 철학에 감화돼, 과학을 공부할 생각도 안하고 다시 송명시대의 철학으로 돌아가자는 낡은 생각을 강요한다고 말했다. 

장군매와 정문강 사이에 벌어진 이 첫 논전은 1980년대 서양의 과학전쟁과 한국에서 최근 벌어진 통섭논쟁에서 과학자 측과 인문학자 측이 내세운 논리와 거의 유사하다. 이는 중국이 이미 1920년대 중국 문화에서 과학의 위치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겪으며 21세기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런 논쟁조차 시작하지 못한 한국에 비해 과학의 자리를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적어도 중국사회는 이미 100년전 사회변화라는 실천의 가치 속에서 과학의 자리를 고민했고, 그 고민의 흔적은 과현논쟁으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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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예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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