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련 소설집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팔팔 끓고 나서 4분이 지나면 다 사라질 거야.

삶도, 사랑도.”

다 자라지 못한 마음을 끌어안고

끓는점을 서성이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작가 정우련의 두 번째 소설집. 『빈집』 이후 16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집으로 오랫동안 공들여 집필한 단편들이 모였다. 전작 『빈집』에서 유년시절 가족과 집을 소재로 가족 균열의 모습을 담담히 드러냈던 정우련은 이제 시선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각 소설에 단단한 깊이를 더한다.

정우련의 소설 속에서 화자의 시선은 다양하다. 화자는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일 때도 있으며, 때론 남편과의 끊임없는 언쟁에 소모감을 느끼는 중년의 여성이기도, 친구 앞에서의 모습이 전부인 청소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모두 팔팔 끓거나, 끓었거나, 끓기 전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삶과 사랑에서의 4분의 의미와 무용함을 되새긴다.

 

 

가장 뜨거웠던 시간 후에

뭉근한 삶의 궤적을 돌아보다

표제작 「팔팔 끓고 나서 4분간」은 대학 강사와 수강생 ‘나’의 만남을 통해, 뜨겁지만 4분이 지나면 그뿐인 사랑의 덧없음을 그린다. ‘나’와 ‘그’는 폭력에 대한 아픔을 공유하며 깊은 사이가 되지만, 사랑은 점점 식어간다. 소설은 점차 바래가는 나의 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요양병원에서 연명하는 아버지의 삶을 교차한다. 아버지의 삶은 ‘4분 후’로 비유되며, 빛나는 시간이 지나버린 삶에 대한 쓸쓸함을 되뇌게 한다.

이런 정우련의 삶에 대한 무거운 시선은 「처음이라는 매혹」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서 살아가는 88세 독거노인의 어느 하루를 그린다. 노인은 권태에 찌든 채 이제 본인에게 남은 매혹적인 순간은 죽음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나’는 노인의 권태를 들여다보며 나의 삶을 관조한다. 「통증」은 전쟁의 상흔을 몸속에 품고 있는 조각가 남편을 바라보는 소설가 아내 ‘나’의 이야기이다. 둘은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나오던 사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결국 서로를 연민하는 동시에 증오하게 된다. 이렇게 정우련은 뜨거웠던 순간이 지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네며, 독자에게 각자의 삶의 궤적에 대해 반추하게 한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아픔을 긍정하며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태도

정우련은 전작에 이어 유년기의 ‘성장’에 주목한다. 「말례 언니」는 이웃집 가사도우미 말례 언니의 연애편지를 대필해주는 초등학생인 ‘나’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말례 언니의 불안한 삶을 관찰하는 ‘나’는 그 과정에 얽혀 비극을 겪지만 결국 성장한다. 「까마귀 길들이기」에서 역시 사춘기 소녀들의 아픈 통과의례와, 그 후의 성장 과정을 이야기한다.

한편 유년기의 성장을 반추하며 ‘지금’의 시선에서 나의 성장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우리들」에서는 B여상 동창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여상 시절을 회상한다. ‘우리들’은 어느덧 다 성장하여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외롭고 거칠었던 성장기도 긍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처럼 정우련 작품 속의 인물은 성장과정과 성장 이후의 시기에도 어두운 현재를 지나지만, 늘 빛에 대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정우련은 이를 통해 아프지만 가능성 있는 성장의 힘을 이야기한다.

 

 

흑색과 백색의 무미건조한 삶 속에서

와락 얼굴을 묻고 싶은 촉촉한 작품들

마지막 작품 「만선」은 실화를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이다. 소설은 1982년 인도양에서 참치잡이 만선을 하고 돌아오던 중 96명이 탄 베트남 난민선을 만나 그들을 구조한 선장의 이야기를 전한다. 베트남 난민을 외면하라는 정부와 회사의 지시를 거부한 선장의 내면적 갈등을 공유하고, 96명의 생명을 구한 일을 ‘만선’이라고 본 선장에 대한 외경심을 이야기한다. 정우련의 소설에서는 이처럼 건조한 삶을 버텨내는 촉촉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는 작가가 삶에서 ‘4분’의 쓸쓸함을 말하지만 결국 삶을 긍정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또한 단편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풍부한 주변 인물의 설정에서,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돋보인다. 작가는 결국 4분 뒤에 남는 것은 사람이며, 그들은 때로는 어깨를 내어주고, 울고, 웃음 지으며 ‘함께’ 삶을 살아간다고 말한다. 작가가 건네는 일곱 편의 이야기를 통해 나와, 친구와, 가족의 4분을 들여다본다.

 

첫 문장

그들은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출발할 때는 그녀가, 휴게소를 두어 번 지나서는 그가 운전대를 잡았다.

 

책속으로 /밑줄긋기

P.14 어느 날 문득, 그녀는 어디서부턴가 자신이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을 어떻게 되짚어가야 할지 막막했다. 갱년기와 함께 느닷없이 찾아온 그 느낌은 흰옷에 남은 묵은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도무지 문장이 되지 않는 지옥 같은 날들. 숨길 수 없는 것이 어디 감기와 사랑뿐일까. 소설가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도 금방 탄로 나고 마는 일 중 하나였다. 그녀는 초조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하지만 잠들지 못하는 밤에 책상에 앉는다고 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도 호소할 길 없는 피로감이 쌓여갔다.

P.16 나무에 결이 있듯이 돌에도 결이 있다구. 어떤 물질이든 결을 거스르지 않고 깨나가야 스스로 제 몸의 긴장을 풀지. 몸을 열고 긴장이 풀린 돌을 깨는 거야 두부 자르기보다 쉬운 일이야. 남들은 그 큰 돌을 어떻게 깨냐고 놀라지만 알고 보면 다 요령이 있는 거라구.

P.176 물이 끓기 시작해서 4분 후면 계란이 알맞게 익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끓고 나서 4분 후면 끝이라는 거. 그다음은 잡지의 부록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란 생각이 들더라. 그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또 내일과 같은 그런 반복이거나 연명에 지나지 않는 삶이잖아.

P.181 엄마는 해 질 녘이면, 누군가 내다 버린 의자를 기운 누더기 같은 다 쓰러져가는 집 앞에 갖다 놓고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곤 했다. 어딘가 이승 저 너머에 가 있는 것 같던 그 공허하고 외로운 눈빛. 살짝 취해서 비칠대며 골목을 걸어 들어오던 노인의 입가에 걸려있던 어딘지 민망해하는 듯 권태가 묻어나던 희미한 웃음. 이상하게도 그런 모습들이 떠오르면 울컥 울음이 치밀었다. 가난과 죽음이 잠복해있는 도시의 뒷골목으로 흘러들어 온 노인에게서 문득문득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P.184~185 그러고 보면 요즈음 들어 엄마는 말끝마다 ‘생전 처음’이란 말이 입에 붙었다. 독감이 나아서 퇴원한 뒤부터는 유독 더 그랬다. 늘 먹던 음식인데도 생전 처음 먹어본다고 감탄하거나, 약 먹을 시간을 놓쳐서 통증이 느껴지면, 세상에 이렇게 아프기는 생전 처음이라고 쩔쩔맸다. 이리 땐땐하고 맛있는 감은 생전 처음 먹어본다거나, 봄도 아닌데 딸기를 먹어보기도 생전 처음이라든가, 자주 꾸는 연탄불 피우는 꿈을 꾸고 나면 그리 불이 안 붙기도 생전 처음이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자 소개

 

정우련

199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문단에 나온 이후 「자수정 목걸이」로 2000년 제5회 부산소설문학상을, 소설집 『빈집』으로 2004년 제4회 부산작가상을 수상했다. 2017년 끝에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를 발간한 뒤 비로소 소설 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목차

 

통증

까마귀 길들이기

우리들

말례 언니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처음이라는 매혹

만선

 

작가의 말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정우련│240쪽│국판 변형(135*205)
978-89-6545-628-5 03810
15,000원│2019년 9월 30일

『빈집』 이후 16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집으로 오랫동안 공들여 집필한 단편들이 모였다. 전작 『빈집』에서 유년시절 가족과 집을 소재로 가족 균열의 모습을 담담히 드러냈던 정우련은 이제 시선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각 소설에 단단한 깊이를 더한다.

정우련의 소설 속에서 화자의 시선은 다양하다. 화자는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일 때도 있으며, 때론 남편과의 끊임없는 언쟁에 소모감을 느끼는 중년의 여성이기도, 친구 앞에서의 모습이 전부인 청소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모두 팔팔 끓거나, 끓었거나, 끓기 전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삶과 사랑에서의 4분의 의미와 무용함을 되새긴다.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 10점
정우련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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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탁, 동백아가씨 - 10점
정우련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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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솔직한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 

정우련 작가 인터뷰

 

안녕하세요. 산지니 2월 인턴 봉선2 입니다. 

『이야기를 걷다 - 소설 속을 걸어 부산을 보다』 서평에 이어, 이번에는 직접 작가님을 뵙고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터뷰라는 자리에서 작가님과 만나기 전 떠올랐던 단상과 함께, 기억에 남았던 작가님의 대답을 생생한 육성으로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첫 소설집 『빈집』(2003)이후, 오랜만에 산문집으로 돌아온 정우련 작가와의 만남을 소개합니다!   

 

내가 침묵의 언어를 이해하게 된 건 순전히 S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랑 열쇠고리처럼 붙어 다니기 시작한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나와는 달리 방울처럼 활발했다. (중략)어느 날부턴가 S가 결석을 했다. 선생님의 부탁으로 그 아이 집을 찾아갔다. 몇 조각인지 모르게 쩌억 갈라져 테이프를 붙여둔 그 집 유리창문이 생각난다. 나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웃음기를 싹 거두어가던 곤혹스런 표정까지. 찢어지게 가난한 제 집 형편을 들켜버린 때문일까. 그 뒤로 학교에 온 S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아이 속에 있는 슬픔을 보았다. 그전보다 더 그 아이에게 살갑게 굴었다. 그 아이는 그럴수록 더 입을 꼭 다물었다. 슬픔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송정 연가」,  『구텐탁, 동백아가씨』 중에서 

  

 ▲구텐탁, 동백아가씨 표지

 

책을 읽기 전에 문득제목이 궁금했다<구텐탁, 동백아가씨>. 한국말로 하면 안녕하세요, 동백아가씨쯤 되겠다. 2013 10, 파독 근로자들의 애환을 달래기 위해 이미자, 조영남, 아이돌 가수 2PM이 독일 프랑크프루트에서 공연을 했다. 음악회는 성황리에 끝이 났고, 공연을 보며 눈물 짓는 교민의 모습에 그들의 서러움과 애환,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에세이집들은 화려한 제목으로 독자를 유혹한다. 구텐탁 동백아가씨가 방영된 지 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문예창작학과에 재학 중인 나는 북 콘서트나 강연 등으로 다양한 작가를 만나볼 기회가 있었다. 책을 읽고 그 책을 쓴 작가를 만나보며 느낀 점이 있다. 대부분의 작가는 문체와 성격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정우련 작가도 그랬다. 담백하고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특유의 솔직함으로 가슴을 퉁, 하고 울리는 그녀의 문체는 독자의 마음 속에 감동을 일으킨다. 정우련 작가는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내가 상상했던 대로 온화하면서 솔직했다. 광안대교가 보이는 카페에서 작가를 만났다.  


▲창 밖을 바라보는 작가님


1. 『구텐탁, 동백아가씨』가 출간된 지 약 한 달이 지났습니다. 2003년 소설집 『빈집』(하늘연못)을 출간하신 이후 정말 오랜만에 산문집을 내셨는데요. 출간 이후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책이 나오고 난 뒤, 주위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많이 왔어요.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글을 써야 하는데 제 글이 청승맞다 보니깐(웃음) 산문집을 읽고 울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2. 책을 엮으시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소설은 허구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을 설정할 때 별 문제가 없지만 산문은 실제 인물과 사실을 그려내야 하니까 원고를 묶을 때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딸은 자기를 그렇게 냉혈한으로 만들 수 있냐고 원망하더군요. 「민달팽이가 간다」에서 책을 버렸던 친구도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런 반응을 들으면서 , 이게 산문이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소설은 그런 부분에서 자유롭잖아요.

 

3. 부산일보에 「그림에세이」, 「미술기행」등을 연재하시기도 했고, 오늘 이야기 나눌 책 『구텐탁, 동백아가씨』에서는 '4부 그림이 있는 풍경'에서 따로 미술 관련 산문들을 모아 엮어주시기도 했습니다. 언제부터 미술 관련 에세이를 쓰시게 되셨는지, 그 계기는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청탁 때문이죠. 저 같은 게으른 사람은 이렇게 꾸준히 못써요. (웃음)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할게요. 2003년에  『빈집』이라는 첫 단편집이 나왔어요. 표지는 박병재 화가의 <빈집>이라는 작품이에요. 갤러리에서 작품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사려고 했는데 이미 팔렸다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포스터라도 한 장 구해서 집에 붙여놨죠. 그렇게 벽에 붙여 둔 작품을 떠올리며 쓴 단편이 빈집이에요. 책 표지를 정할 때, 딸이 작품<빈집>을 넣는 게 어떠냐고 물었어요. 그 당시에는 괜찮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는데 지금은 후회하죠빈집에 <빈집>이라뇨. (웃음) 그리고 얼마 안 지나서 한 기자에게서 차 한 잔 마시자는 연락이 왔어요. 제 책에서 미술에 관하여 서술 한 것을 봤는지 미술 에세이를 한번 써보자고 제안하더군요. 자신 없었지만, 한 편만 쓰고 그만 두자는 생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쓰기 시작했어요.


4. 책에 안 실린 글은 아까워서 어떻게 하나요?

 이후에도 청탁이 들어와서 <LA 미술 기행>코너를 맡기도 했어요. 책을 내자는 제안도 종종 들어왔지만 출판사와 성격이 맞지 않아서 거절한 적도 있지요. 이번 산문집에는 짧은 미술 에세이를 모아서 부를 나누어 실었어요. <LA 미술 기행>은 어느 정도 분량이 있기 때문에 이후 책으로 엮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5. 소설가로 등단하셨지만, '미술 작품'이 작가님께 특별하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도서관에 살다 싶이 했어요. 책 읽다가도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종종 안 읽힐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땐 화집을 읽었어요. 그 버릇이 습관이 되다 보니 미술사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흐름을 알게 되었어요. 조지아 오키프가 이런 말을 했어요. 화가란 세상에서 감동받을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 마지막 인간이라고요. 대상을 보고 아무런 감명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고 싶겠어요? 대상 앞에서 감정이 불편하거나 감동할 때 무엇인가 그리고 싶다고 느끼는 사람이 화가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문학이나 그림, 음악 같은 예술은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지 같은 감동을 표현한다고 생각해요.

 

6. 『구텐탁, 동백아가씨』 속 산문들을 읽으면서 울컥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엄마와 딸」에서 고추자루를 머리에 이고 걸어오는 어머니를 볼 때,  「남원사람」에서 아재가 호마이카 밥상을 짊어지고 시골장을 떠돌아 번 돈을 받아 등록금을 냈을 때도 마음이 아렸습니다. 이 작품들 이외에도 주로 감정적으로 와닿았던 글들이 대부분 '1부- 아침 숲길을 걸으며', '2부- 세상 속으로', '3부- 장소와 사람'에 집중되어 있었는데요. 여기 담긴 글 속에서 작가님은 유년 혹은 개인적인 경험을 에세이의 소재로 삼고 계십니다. 일기를 포함하여 자전적인 에세이 쓰기와 소위 '허구'의 장르로 일컬어진 소설 쓰기와는 차이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소설과 산문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소설과 산문의 차이는 '인물 묘사'에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있는 인물을 주제로 잡고 글을 쓴다고 할 때 소설은 있는 그대로 쓸 수가 없어요. 소설은 완벽하게 작가가 개입할 수 있잖아요. 인물에게 살을 붙이고 이야기를 끌고 가다보면 어느새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있기 때문이죠어느 것이 진실이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소설이라는 장르에서는 '진실'이냐 아니냐, 라는 문제보다는 작가가 얻은 깨달음을 어떻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산문은 허구가 끼어들 수 없죠. 해석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에 작가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어요. 감동은 산문이 더 짙겠지만. 저에게는 소설 쓰는 게 더 재미있어요. 인물을 이리저리 주무르고 놀 수 있잖아요. 놀이 치고 이만큼 재밌는 게 있을까요? (웃음)

 

                                         작가님이 작업하시는 카페에서 바라본 광안리 전경

 

7. 「호떡 한 개의 위안」처럼 작가님은 글을 통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조그마한 사건을 애정 어린 시선과 담담한 문체로 표현해주십니다. 요즘에는 주로 어떤 것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일상적인 곳에서 소재를 얻기도 하고, 역사적 사건이나 신문기사를 가지고 소설을 쓰기도 해요. 산문 「우리들의 아름다운 선장」속에서 다룬 전재용 선장님 이야기를 장편으로 쓰고 있어요. 1985년은 폭압적인 정권의 시대였잖아요. 전 선장님은 참치를 가득 실은 만선을 이끌고 부산으로 오는 중에, 베트남에서 탈출한 보트 피플을 만나게 되요. 전 선장은 난민들의 삶에 관여하지 말라는 회사의 지침을 무시하고 96명의 난민을 구출하고 해고를 당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났어요. 저는 이 사건을 가지고 뭐라도 쓸 수밖에 없었던 거죠. 어렵사리 전재용 선장님과 만나 인터뷰를 하고 당시 상황을 되짚어가며 취재를 했어요


- 그럼 조만간 선생님 신작 소설을 만나 볼 수 있는 건가요? 

 네 그렇죠. 열심히 가다듬고 독자를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8. 「꽃, 페미니즘을 말하다」,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에서는 각각 이전까지 남성 위주였던 미술사에서 독자적 세계를 펼친 조지아 오키프와 1910년대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문필가, 여성 운동가로 활동한 나혜석의 비극적 삶을 조명해주셨습니다. 이 글을 쓰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홍승은'이라는 작가를 아시나요? 젊은 여성 작가인데, 유년 시절부터 부조리에 맞서 문제를 제기했다고 해요.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책으로 엮었는데 놀라웠어요. 공감되는 말이 많더라고요. 저는 나혜석에서 홍승은까지 왔다고 봐요. 나혜석은 191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 교육을 받고 그림을 그려요. 나혜석이 외친 것은 단 하나에요.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것. 홍승은이 말하는 것도 그거잖아요. 여성 남성의 젠더에 따라 차별받는 삶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아주 기본적이고 간단한 문제에요. 나혜석의 주장은 당시에 공론화되지 못하고 단순한 가십거리로 묻히고 말았어요. 세월이 흘러 21세기엔 여성들이 연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나혜석과 조지아 오키프와 같은 선각자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돼요.

 

9. 현대에 와서도 페미니즘 운동은 계속되고 있는데요. 더 이상 차별에 침묵하지 않겠다는 미투(MeToo)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문단 내에서도 오래 침묵 속에 묻혀졌던 성폭행 및 성폭력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참 애석한 일이에요. 고은 시인이 젠더 의식이 부족했던 시대의 사람이라고 해도, 대중적으로 세계적인 작가로 불리는 사람이 왜 세계의 흐름을 못 읽어내는 것일까요. 함석헌 선생이 그랬잖아요. 해방이 도둑같이 왔다고. 지식인들은 해방이 올 거라는 것을 몰랐어요. 가령 친일 행위를 한 자를 두고 그 때 시대가 그랬으니까 용서를 해야 하느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그 시대에 저항한 사람들을 무엇이 되나요? 고은 시인 성추행 사건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영미 시인이 방송에 나온걸 보고, 모 시인이 최영미 시인의 과거사를 언급하면서까지 비난했는데요. 그 소식을 듣고 얼굴이 붉혀졌어요.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는 경우잖아요. 문제는 고은 시인의 성추행 문제인데 그 이야기는 희석시켜 버리고, 최영미 시인을 비난하면 안 되잖아요.

 

10. 작품 활동이 뜸했지만, 지금부터 부산에서 열심히 글을 쓸 것이라는 기사를 봤습니다. 「송정연가」, 「고향마을로 가는 마실등 여러 작품에서 작가님께서는 아름답고도 변해가는 쓸쓸한 부산의 모습을 묘사해 주셨는데요. 소설가로서 부산은 어떠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작가들에게 고향은 작품의 원천이에요. 대게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유년의 기억이 많이 작용해요. 작품을 낼 때 프로필을 보면 출생 연도와 출생지가 빠지지 않아요. 이것으로도 작품과 작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요. 제가 태어난 '영도구 대평동'이라는 공간은 제 문학의 우물이에요. 퍼내도 마르지 않은 우물 같은 것이죠. 그 공간의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면에는 고향을 많이 떠올려요. 저한테는 이 공간이 제가 유년의 상처, 슬픔, 아픔, 사색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고 머물렀던 소중한 곳이에요. 이곳 광안리에서 글을 쓰지만 광안대교가 주는 공간의 기운이 글 속에 어떤 식으로든 스며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하죠.


11. 「읽는인간에서 영화가 원작에 못 미치는 이유는, 영상 언어가 그 촘촘한 문학 언어의 구체적이고 섬세한 상상력을 따라잡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했습니다. 다만 대중은 문학보다 영화나 다른 매체를 선호하는 것이 현실인데요. 문학이 가지고 있는 호소력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문자언어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을 일으키는 힘은 대단해요. 문학은 작가가 만든 인물과 화자, 사물과 소도구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문학은 어머니고 영화는 아들이라고 한다면 요즘 세상은 아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잖아요. (웃음) 조지아 오키프는 <독말풀 꽃>이라는 그림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어요. "독말풀 꽃은 서늘한 저녁에 핀다. 달빛이 비치는 어느 저녁, 나는 그 꽃을 125개까지 세어 보았다. 그 꽃들은 뜨거운 낮에는 죽는다. 꽃의 고운 향기를 떠올릴 때면 나는 그날 저녁의 신선함과 달콤함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이 문장을 영상 언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영상 언어가 짚어낼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어요. 저도 영화를 좋아하지만, 문학을 각색한 한 영화는 아무리 봐도 원작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아요.


▲'선생님 웃으세요. 찍습니다. 하나 둘' 


12. 이제 곧 봄이 올 건지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 독자들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산문이 어렵거나 고민을 하면서 읽는 글이 아니에요. 삶을 살면서 떠올리는 미련이나 일상의 이야기에요. 편안하게 읽으면서 자신의 삶과 유년을 반추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생은 천 번을 살아도 좋을 만큼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천 번 말고 만 번을 살아도 인생은 아름답죠. (웃음) 저에게 대단한 독자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짧은 글이라도 읽고 감상을 전해주는 독자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동안 게으르게 썼지만 열심히 활동해서 독자들과 소통하는 계기를 만들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정우련 작가님과의 만남, 어떠셨나요? 첫 인터뷰라서 긴장을 많이 했었는데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기분 좋게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인터뷰를 통해 작가님과의 따뜻한 만남이 되었길 바랍니다. 책 읽기 좋은 봄이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올 봄, 따뜻하고 솔직한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와 함께 기분 좋은 시작을 하는 건 어떨까요?   

 

구텐탁, 동백아가씨 - 10점
정우련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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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디자이너 2018.02.21 1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터뷰 정리하느라 고생하셨네요.
    아직 책을 전부 읽지 못했는데 인터뷰 글을 보니
    얼른 읽고 싶어지네요.^^

  2. BlogIcon 산그늘12 2018.02.23 1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님의 다음 작품이 기대 되네요.
    특히 난민들을 구하고 해고당하셨다는 선장님 이야기가

  3. 로미오 2018.09.29 1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우련 선생님 잘계시나보네요...
    부산외대 학부전공 떠나서 1학년 2학기
    영역 교양 글쓰기 과목중에 독서와 글쓰기
    과목으로 통해서 선생님과 연을 맺었는데
    오랜만에 이렇게 소식을 접하네요...
    정말 순수하시고 정이.많은 선생님이셨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 잘계시죠...
    세월이 흘렸네요 여러모로 저도 서른중반
    중심이 되었네요 ㅎㅎ 스무살 초반에
    선생님을 뵙고 수업듣던시절이..

안녕하세요, 병아리 편집자입니다.

국제신문에 『구텐탁, 동백아가씨』 저자 정우련 선생님 관련 기사가 올라왔네요~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이 담긴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

더 깊은 감성으로 돌아온 정우련 소설가
지역 문단 기대주서 잠시 이탈, 13년만 산문집 ‘구텐탁…’ 출간

- 자기고백·타인 향한 시선 담아
- “봄에 새 소설집… 열심히 쓸 것”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를 낸 정우련 소설가를 만났을 때 어쩐 일인지 그는 진심으로 부끄러워했다.

“무려 13년 만에 책을 냈는데 소설집도 아니고 산문집이라니, 어디 얘기도 못 했어요. 그동안 문단 선배들의 꾸지람을 많이 들었거든요. 이렇게 작품을 안 쓰니 정우련이는 이제 끝난 것 같다고 호된 말도 듣고….”

199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한 그는 2000년 부산소설문학상을, 2004년에는 소설 ‘빈집’으로 부산작가상을 받았고, 사람 좋아하는 성격으로 부산작가회의 등 단체 활동도 열심히 하는 지역 문단의 기대주였다. 이후에도 신문에 칼럼과 에세이를 쓰고 단편도 발표했지만, 소설집 한 권을 낼 만큼은 되지 못했다. 가족에게 정신과 시간을 쏟아부어야 했던 시기에 그는 ‘대열’에서 이탈해야 했다.

그가 그동안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며 살았는지는 산문집을 통해 일부 알 수 있다. 표제작보다 더 마음을 파고든 글은 ‘송정연가’다. 슬픔이 자신의 모태신앙이라고 쭈뼛거리듯 말하는 이 글은 소설가로서 자기 고백 같다. 작가에게 고향이란 글의 원천이며, 감성의 근원이며 때로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그의 고향은 영도 대평동이다. 옛 조선소는 영화를 누렸을지언정 사람들은 가난했다. 엄마가 가장 절실한 시기에 엄마와 떨어져 대평동에 살았던 소녀는 말이 없었다. 만국기를 달고 출항하는 어마어마하게 큰 배를 보면서 소녀는 언젠가 저 배를 타고 다른 세상으로 가겠다고 생각했다. 마을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 다니던 소녀는 지금 어디든 바다를 떠나 살고 싶지 않은 소설가가 됐다.

작가는 자신을 문학으로 이끈 것이 유년의 슬픔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처럼 나약하고 상처 많은 인물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부유한 환경에서 곱게 자랐다면 절대 소설가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 집안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고, 문학적 환경은 아니었거든요. 어느 파독 간호사의 기구한 삶을 옮긴 ‘구텐탁, 동백아가씨’를 표제작으로 삼은 건 그래서 의미가 있어요. 삶에 굳건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사는 인물들,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 알고 보면 역사의 희생양인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건네는 인사 같은 느낌이니까요.”

지금 그는 꽤 들떠있는 것 같다. “다른 지역을 오가며 다른 일로 바쁘게 살았는데 지금부터는 부산에서 열심히 글을 쓸 거예요. 이제 아이들도 저 갈 길 가고 나 자신과 내 글만 생각해도 될 만큼 여유가 생겼어요.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작품 써내는 소설가들 보면서 부럽고 초조했거든요. 한참 뒤처졌으니까 더 매달려야죠. 참, 산문집이 먼저 나오긴 했지만 초봄에는 소설집도 나올 거예요”.

 

국제신문 신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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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탁, 동백아가씨 - 10점
정우련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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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병아리 편집자입니다 :)

얼마 전 소개해드린 정우련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에 대한 기사가 부산일보에 올라왔네요.

외로웠던 유년의 기억과 그 가운데서 찾은 예술의 길,

정우련 작가가 풀어내는 깊은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보실까요?

***

'구텐탁, 동백아가씨' 삶과 예술, 사회에 대한 예리한 시선

구텐탁, 동백아가씨/정우련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언젠가 부패한다"고 한 말은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진 저항적 메시지였다. 내가 소설을 쓰려는 것도 자신의 본질이 거기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우련 소설가의 인생과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정 작가는 부산작가상을 수상한 소설집 <빈집> 이후 14년 만에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일상 가운데서 느낀 생각이나 소소한 감정들을 풀어낸 글이 대부분'이라고 밝혔지만 책에는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정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중략)

신경숙 소설가의 표절 사태를 다룬 '표절 유감'은 또 어떤가. 그는 '마음은 외롭고 배는 고프지만 정신은 살아 끊임없이 남다르게 창조하려는 귀한 작가들 때문에 예술이 살아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누군가가 창조한 빛나는 하나의 해답을 나도 모르게 쓱 훔치고 싶은 그 마음을 잘라야 한다. 그게 작가의 용기'라는 대목에선 문학에 대한 정 작가의 신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책과 그림에서 빚어낸 삶의 정수는 알알이 마음에 박힌다. 특히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 '빨간 칸나'에서 찾은 당당한 주체로서 여성, 하랄트 뮐러의 희곡 '시체들의 뗏목'에서 발견한 방사능 오염의 위험성과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고 있는 페미니즘과 원전 문제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정 작가는 이와 함께 아련했던 어린 시절 추억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나를 문학으로 이끈 건 유년의 슬픔'이라고 한 그의 말이 눈에 들어온다. 힘겨웠던 지난날이 밑거름이 된 덕분일까. 정 작가의 촘촘한 문장은 읽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글맛의 묘미를 알게 해 주는 그의 글은 '한 줌의 위안' 그 이상이 분명하다. 정우련 지음/산지니/260쪽/1만 3000원.

부산일보 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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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탁, 동백아가씨

정우련 산문집

 

▶ “젊은 날의 내 앞에는 언제나 힘든 일상이 떡 버티고 있었다.”

외롭고 쓸쓸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

인생과 문학, 예술에 대한 깊은 단상을 새긴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가 출간됐다. 정우련 작가에게 부산작가상을 안겨준 소설집『빈집』(2003)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책이다. 저자는 전작에 꼭꼭 눌러 새겼던 고독을 갈무리하여 이번 산문집에서 담담한 문체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공황 당시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였을 한 떠돌이 노동자의 애환을 담은 노랫말이 가슴을 아릿하게 파고든다. 어린 날의 그 집을 떠난 이후, 또는 그 어딘가로부터 돌아갈 수 없이 멀리 와버렸구나, 하는 그런 아련한 느낌. -「500마일즈보다 멀리」 중에서

짧은 노랫말로 입을 연 저자는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왔던 이야기들을 독자 앞에 꺼내 보인다. 인생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소소한 행복을 찾고 아름다움을 읽는 저자의 모습은 곧 우리들의 모습이다. 저자는 글을 통해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떠나 와버린 ‘어딘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억에만 남은 그리운 ‘누군가’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인생에 대해 말한다. 가난과 외로움이 언제나 따라 붙던 유년의 기억부터 결코 순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던 여성으로서의 삶, 지금도 이어지는 예술가로서의 길까지.

▶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만져지는 이곳에서

나는 또 한동안 지친 날개를 쉬고 싶다.”

낡은 둥지에 새겨진 유년의 아픔과

굴곡진 삶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을 말하다

정우련 작가는 일상의 이야기 가운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짚어간다. 넉넉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유년기, 가족들도 그리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 고등학교 등록금 청구서 앞에서 등을 보이던 아버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어머니의 뒷모습. 작가는 이렇듯 빈자리가 훨씬 컸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유년시절의 나는 늘 슬펐다. 할머니가 누룩을 빚어 만든 술 익는 냄새도 슬펐고, 검은 천이 덮여 있던 콩나물 시루에서 콩나물이 자라는 것도 슬펐다. (…) 엄마를 떠나오면서, 나는 말 없는 아이가 되었다. 내 안에서는 들끓는 언어가 소용돌이치는데 한 마디도 뱉어낼 수 없었다. -「송정 연가」 중에서

돌이켜보면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그 아픔마저도 아련한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겨진 옛 동네를 다시 걸으며 미소를 띨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며, 힘들었던 기억을 글로 쓰고 다독일 수 있을 만큼 마음도 차분해졌다. 오래 묵은 기억은 아픔인 동시에 선물이었다.

저자는 유년의 슬픔이 자신을 문학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비록 가슴에 남은 수많은 기억들로 ‘시도 때도 없이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안고 살게 되었지만, 저자는 그 기억에 감사한다. 기억 속에는 슬픔이 가득하지만, 이제는 청승스럽다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 저자는 슬픔의 시간을 ‘가장 순수하고 진실해지는 순간’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예술의 기반이 된 그 오래된 감정을 모두 끌어안는다.

▶ “길을 떠나는 누구나가 길 끝에서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를 만나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처럼.”

도서관의 문학소녀, 작가가 되다

이 책에는 문학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착과 열정이 드러난다. 저자 자신의 본질이 소설에 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은 냉담해서, 저자는 ‘돈 안 되는 소설’ 말고 드라마 대본을 써보라는 주변인들의 말에 상처를 받는다(「민달팽이가 간다」). 첫 장편의 완성을 코앞에 두고 ‘다시는 소설 같은 거 쓰지 않을 거’라며 괴로움을 토로하는 동료 작가와 함께 고민하기도 한다(「토지문화관에서 보낸 한 철」). 한 줄 한 줄 쓰는 글이 독자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면서.

5년째 장편을 만지고 있는 소설가도 있었다. 신경숙 표절 사태 이후 작가로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고. 그저 아무렇게나 소설 써서는 독자에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이제 한 달만 주무르면 던져도 될 것 같다고 수줍게 웃었다. 그 웃음은 일상의 온갖 핑곗거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내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죽비 같았다. -「토지문화관에서 보낸 한 철」 중에서

학창시절 육성회비를 낼 돈으로 덜컥 세계문학전집을 사고,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으로 달려갔던 문학소녀는 이제 작가가 되어 현실을 마주한다. ‘참담한 심정’으로 겪었던 신경숙 표절 사태 이후, 저자는 독자 앞에 내밀어도 부끄럽지 않을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록작「표절 유감」을 통해 저자는 창작자 스스로가 갖춰야 할 정직성과, 표절의 유혹을 과감하게 잘라낼 수 있는 용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속으로/밑줄긋기

p.21. 문학이 주는 힐링은 느리게 오는 것이다. 문학은 어떤 스님의 즉문즉설처럼 그 자리에서 묻고 곧바로 답을 주진 않는다. 온갖 불행한 인간들의 삶 속에 스스로 발을 담그고, 그 속에서 사랑하고 고뇌하고 갈등하면서 달팽이처럼 천천히 자기 길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문학이 주는 놀라운 힘이요, 느린 힐링이다.

pp.56~57. 선생이 남기고 가신 육필원고며 필기구, 저작들, 젊은 날의 사진, 반짇고리, 밭농사 기구들까지. 그것들 앞에 가만히 다가서면 선생이 그럴 수 없이 가깝게 느껴졌다. 『토지』를 끝내고 나니 늙은이가 되어 있더라는 선생의 탄식이 들리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p.108. 대평동이 내게 마냥 행복한 공간만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태생적 명랑함으로 내게도 유년은 유쾌하고 즐거운 기억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성장통이란 어떤 아이에게도 피해 갈 수 없는 통과의례인 법. 내성적인 아이였던 내게 그것은 좀 더 지독했다.

p.151. 콜비츠의 <집 없는 도시인>(1926)에는 구걸할 힘조차 없어 보이는 한 가족이 등장하지요. 남편을 잃은 여인과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 더 이상 굴러떨어질 곳 없는 도시의 최하층민으로 전락한 한 가족의 절망적인 순간 말입니다. 배가 고파 울다 지쳐 잠든 큰아이와 나오지 않는 젖을 빨며 엄마 품을 파고드는 갓난아이를 안고, 어떻게 하면 이 자식들을 먹여서 살려낼까 하는 고뇌에 찬 어머니의 비참한 모습.

pp.216~217.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로 1910년대의 뛰어난 문필가로, 여성운동가로 활동한 그녀의 이혼 후의 삶은 참혹했다. 이혼한 여성에게 주어진 조선의 불합리한 가족제도와 공권력까지 동원할 수 있는 남성 중심의 권력 앞에서 그네는 무기력했다. 그네의 분노는 심신을 병들게 했다. 한때 왕성한 예술활동으로 자신을 몰아붙이기도 했지만 그네는 끝내 52세의 나이에 행려병자로 죽어간다. 동시대 여성들에 비해 100년을 앞서 산 선각의 삶은 그토록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저자 소개

정우련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여대 문예창작학과를 거쳐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16년 동안 여러 대학에 출강하였다. 199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2000년 부산소설문학상을, 2004년에는 소설집 『빈집』으로 부산작가상을 수상하였다. 부산일보에 「그림에세이」, 「미술기행」 등을 연재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목차

 

 

 

정우련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

정우련 지음 | 국판 | 260쪽 | 13,000원 

| 978-89-6545-462-5 03810

인생과 문학, 예술에 대한 깊은 단상을 새긴 산문집. 인생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소소한 행복을 찾고 아름다움을 읽는 저자의 모습은 곧 우리들의 모습이다. 저자는 글을 통해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떠나 와버린 ‘어딘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억에만 남은 그리운 ‘누군가’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인생에 대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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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련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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