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기] <왜성 재발견>후일담


EP.2 간절곶엔 포켓몬만 있는 게 아니에요!

 

 

  요즘 포켓몬 모바일 게임 때문에 더 유명해진 울산 울주군 서생면 간절곶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진하해수욕장이 있다. 부산 해운대나 광안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규모의 해수욕장이지만 회야강 하구와 연결된 주변 경관이 참 ‘이쁜’ 곳이다. 이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마을 서쪽 야산으로 조금만 오르면 서생포 왜성을 만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에 쳐들어왔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성이다.

 

▲ 서생포 왜성,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의 표지 사진이기도 하지요.

 

 

  1990년대 초에 기사 취재 때문에 처음 이 서생포 왜성을 찾아보고 받았던 강렬한 인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성벽의 보존 상태나 규모도 그랬지만 세 곳으로 구획된 각 성곽의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ㄱ 또는 ㄴ 자 형태로 꺾이도록 쌓은 출입구 구조와 사선 또는 포물선 형태를 한 성벽 모서리의 선형을 보고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 왜성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을 찾아가면 서생포 수군만호진성 터가 나온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 수군이 주둔했던 성인데 왜란 때 파괴돼 지금은 일부 구간에 성벽 밑부분인 기단석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왜란 때 이 성을 점령한 가토의 왜군이 이 성의 성벽을 헐어낸 뒤 그 돌을 옮겨다 서생포 왜성을 쌓았다고 한다. 왜란이 끝난 뒤에도 조선의 이 전통 수군 진성은 복구되지 않았다. 대신 조선 수군은 왜군이 이 성을 허물고 쌓았던 서생포 왜성을 진성으로 사용했다.  진하해수욕장 이름도 ‘진성 아래에 있다’(鎭下)는 뜻에서 불려진 것이다.


 

  서생포 왜성과 관련한 이러한 사실을 하나씩 알아가게 되면서 더욱 이 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울산에 이 곳 말고 가토의 부장이 쌓은 왜성(울산왜성)이 하나 더 있고 부산과 경남 일대에도 왜성이 여러 곳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울산 왜성

 

  ‘왜성 재발견’ 취재는 바로 이렇게 부산 울산 경남지역에 남아 있는 왜성들을 찾아 이들과 관련한 임진왜란사를 재조명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부산 울산 경남에서 취재활동을 하고 있는 한겨레 후배기자들과 뜻이 맞은 데다 마침 부산박물관에 왜성 전문가(나동욱 박사)까지 선뜻 나서줘 취재는 전반적으로 큰 무리 없이 순조롭게 이뤄졌다.

 

  하지만 30여개에 이르는 전체 왜성을 10차례로 나눠 함께 답사하다 보니 하루에 3~4개 성을 훑어가는 식으로 취재할 밖에 없었던 한계도 있었다. 필자가 직접 집필을 맡았던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 기장 죽성리와 임랑포 왜성은 모두 하루만에 답사를 끝낸 곳이다. 결국 기사를 제대로 쓰기 위해선 전문가와 기자들이 함께 한 기본답사 외에 필자 개인의 별도답사와 보충취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막상 신문에 기사가 나온 뒤에도 그랬지만 이를 보완해 책으로 낸 뒤에도 여전히 내용이 미진하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다.


  특히 각 왜성의 특성과 이에 얽힌 임진왜란 역사 및 사연을 알리는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 왜성을 어떻게 찾아가서 무엇을 봐야 할지에 대한 정보 제공에 너무 소홀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부산과 근교에 있는 왜성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충분히 주변의 관광지나 유적지 명승 등과 함께 둘러볼 만한 곳이 많다.

 

  기장 죽성리 왜성은 시내버스를 이용해 기장 청강리 사거리에 내린 뒤 기장문화원과 남산봉수대를 거쳐 가벼운 산행을 하며 찾아갈 수 있다. 기장문화원과 죽성리 왜성 근처 소름요 도자기 공방에선 임진왜란이 왜 일본에서 일명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는 유물과 흔적을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 기장 죽성리 왜성

 

  양산 증산리 왜성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증산역에 내린 뒤 걸어서 15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증산공원에 있다. 증산공원 산책길을 한바퀴 돌며 왜성 터도 살펴보고 정수장 쪽으로 하산하면 물금역으로 갈 수 있다. 물금역에선 기차가 아니더라도 부산 덕천동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가 있고 근처 용화사와 임경대와 같은 관광지도 둘러 볼 수 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렇게 대중교통을 이용해 왜성과 주변 볼거리를 찾아 보고 즐길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는 글을 써보고 싶다.

 

글 | 신동명 기자

 


  ◀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저자 3인방

   (왼쪽부터) 김영동 기자, 신동명기자, 최상원 기자


  *본 후기는 저자가 직접 실제 '왜성' 취재 이야기를

   작성해주셨습니다.   

 

 


 



왜성 재발견 - 10점
신동명 외 지음/산지니


:: 언론스크랩 

<한겨레21> 『왜성 재발견』 신간 소개 -  http://goo.gl/WMHtPY

<한겨레> 왜성은 치욕의 물증 아닌 전리품이다 - http://goo.gl/6RitYW

<연합뉴스> [신간들춰보기] 『왜성 재발견』 - http://goo.gl/etKqfK

<전남일보>왜성,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 - http://goo.gl/LtTSOH

<경상일보> 왜성 31곳 발로 뛰며 확인한 임진왜란의 전리품 - http://goo.gl/eBXtWw

 


Posted by 비회원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2화 ::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었다?! -부산 기장 죽성리·임랑포 왜성

 


 

 

“멀리 기차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어쩌다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갯마을.”

 

  난계 오영수(1909~1979)의 단편소설 <갯마을> 첫머리에서 이렇게 묘사한, 소설의 실제 배경이 된 마을은 부산 기장군 일광면 학리 또는 이을포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마을들과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이웃한 곳에 각각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와 장안읍 임랑포 마을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도시문명과는 거리를 둔 한적하고 외진, 그래서 더욱 평화로운 해안 포구죠.

 

  420여년 이런 마을에도 임진왜란의 광풍은 그냥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1592년 음력 4월 보름 부산 동래읍성을 함락한 왜군은 세 길로 나눠 북상하면서 이튿날 동쪽으로 기장을 거쳐 울산, 경주 등을 가차 없이 짓밟고 올라갔죠. 이후 왜군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반격에다 조선 수군의 해상로 봉쇄 및 의병 봉기 등에 따른 배후 보급로 차단으로 수세에 몰리자 이듬해 4월부터 한강 이남으로 물러나 동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장기전에 들어갔습니다. 이즈음 이곳 죽성리와 임랑포 마을에도 왜성을 남기게 됩니다.

 

■ 무명 조선 도공의 넋을 기리다

 

무명도공추모비(송중환 소름요 대표 제공) 

 

  죽성리 왜성 인근 서답골 또는 세답골이라 불리는 골짜기 한켠에 ‘소름요’라는 도자기 공방이 있다. 공방에서 해안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가마터 쪽으로 가면 ‘무명도공추모비’라고 새긴 비석이 서있다. 송중환 소름요 대표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 도공과 사기장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04년 5월 사비를 들여 세운 것이다. 송 대표는 이후 지역의 관심 있는 이들을 모아 조선사기장연구회를 만들고, 회원들과 함께 해마다 이 비석 앞에 차와 꽃을 올리는 추모제를 열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6세기부터 일본에선 차 마시는 풍습과 다도가 유행했다. 당시 100여년 동안 지속됐던 일본 전국시대의 내전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휘하에 복속시킨 영주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고 영토 확장의 야욕을 실현하려 조선을 침략한 전쟁을 일으킨 와중에도 나고야 진중에서 자주 다회를 열어 즐겼다고 한다. 이에 조선에 파병된 영주와 장수들은 조선 각지에서 수많은 도공과 사기장들을 경쟁적으로 붙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도자기 파편

 

 

  황구 기장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에 따르면 기장지역은 오래 전부터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장인과 흙, 물, 가마 등 조건을 모두 갖춘 대표적인 생산지라고 한다. 황 소장은 “2000년대 초 기장군 장안읍 임랑포 바닷가에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깨진 조각을 200여점 가량 수습한 적이 있다. 아마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도공들을 납치해가면서 도자기들도 함께 약탈해가다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사기장과 도공 등 포로들을 일본에 끌고간 왜군 영주와 장수들은 이들을 주로 자신의 고향에 강제이주시켜 평생 도자기를 구우며 살도록 했는데, 관련 기록이 주요 영주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문서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죽성리 왜성과 임랑포 왜성을 쌓고 주둔했던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와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는 모두 왜란 중 사기장과 도공들을 숱하게 붙잡아 끌고간 것으로 악명이 높다.

 

  7년 왜란 기간 동안 도공과 사기장 같은 장인 외에도 수많은 조선 민간인이 일본에 끌려갔다.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하나 일본 쪽 연구자들은 5만~6만명, 한국 쪽에선 10만~20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나가사키를 통해 포르투갈 노예상인들에게 팔려간 민간인까지 치면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 읍성·진성의 돌을 뽑아 왜성을 쌓다

 

두모포 진성

 

  “진중의 왜인들이 바야흐로 축성 공사를 일으켜 나무를 끌어오고 돌을 실어나르는 왜인이 도로를 메웠으며 옛 (기장)현의 성에서 돌을 반수 이상이나 뽑아내고 또 근처의 암석을 채취해 끊임없이 실어날랐다.”

 

  <선조실록>은 1595년 12월 죽성리 왜성 상황과 관련해 이런 기록도 남겼다. 왜군들이 죽성리 왜성을 증축하면서 조선 읍성과 수군 진성의 돌을 마구 뽑아다 썼던 것이다.

 

  성벽은 주로 화강암을 써서 70도 정도 경사지게 비스듬히 쌓았는데, 외성 일부 구간에서 수직으로 축조된 성벽이 드러나 이곳이 애초 조선 수군의 두모포 진성 남쪽 구간인 것으로 확인됐다. 왜군들이 조선의 진성 일부 구간을 편입시켜 왜성을 축조한 사례다. 왜성과 우리 고유 성곽의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전체적으로 죽성리 왜성은 청강천(신천천)의 자연지형과 해자를 통해 북서쪽의 외곽 방어망을 철저히 하면서 동쪽으로 죽성만 포구를 감싸안은 형태의 해안 요새로 보인다. 또 기존 조선 수군의 거점을 십분 활용하면서도 그 거점을 파괴하는 이중효과까지 노렸다.

 

  부산 복천박물관은 2002년 도로개설 구간에 포함된 죽성리 왜성 본성 북쪽의 외성 일부분을 발굴조사했다. 여기서 띠 모양의 성곽터(4개)에 ‘스리바치’라는 일본 전국시대 조리기구와 상감청자·백자·도자 파편 등이 출토됐다.

 

■고리원전 이주단지에서 확인된 왜성 유적

 

 ▲ 임랑포 왜성

 

  2001년 중앙문화재연구원은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일대 고리원전 주민 이주단지 예정터에서 발굴조사를 벌여 왜성 성곽터(3개)와 건물을 세우고 구덩이를 파냈던 흔적 등을 기와·도자기 파편 등의 유물과 함께 확인했다. 이 곳은 인근에 있는 고리원전의 추가 건설에 따라 장안읍 효암리 주민 50여가구가 집단 이주한 곳인데, 이주단지 터 조성 전 사전 지표조사에서 왜성 터 유구가 확인돼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임랑포 왜성 외곽부의 성터가 드러난 것이다.

 

  이주단지에 있던 외곽부 성은 고도가 높지 않고 임랑포 앞바다와 접해 있으나 해안 쪽으로 전망이 좋고 비교적 급경사를 이뤄 방어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은 철도와 도로 건설, 이주단지 조성 등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고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이 왜성은 규모는 비교적 작지만 성곽과 해자, 왜성의 본 모습을 알 수 있는 여러 시설물의 기초가 아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하지만 본성 일대조차 문화재나 공원구역 지정 등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방치돼, 대부분이 잡목과 수풀 더미에 묻히고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로 훼손되고 있어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더 이상 훼손을 막아 왜성 축성사를 이해하는 학술자료로서는 물론 아픈 민족사의 현장이라는 가치로 볼 때도 보존의 필요성은 충분해 보인다.

 

>> 3화에서 계속

 

*본 게시물의 순서와 책의 목차는 상이합니다.

*게시물의 내용은 책 본문의 내용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