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징적 요소로 스토리 구성

김비 소설가가 최근 펴낸 새 장편소설 '붉은등, 닫힌문, 출구없음'(산지니 출간)은 매우 인상 깊은 전개를 보여준다. 특히 도입부는 읽는 이를 압도한다. 한 번 쥔 책을 여간해선 놓을 수 없을 만큼 이야기가 긴박하고 빡빡하다.

밀리고 밀려 사회의 벼랑 끝에 온 주인공 남수 가족의 상황, 그들 각자의 아픔, 끔찍한 결심에 이르게 된 절박한 처지까지 단번에 드러낸다.

남수는 "LED 패널 공장, 자동차 부품 프레스 공장, 금고를 만드는 회사를 거쳐 택배 일까지 왔는데도" 삶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택배를 하다 허리를 다치고, 빚을 내 구매한 트럭은 고장 나고, 빚을 돌려 막으려고 제2금융권에서 빌린 돈이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아내 지애는 무기력하고, 어린 외아들 환이는 장애가 있다.

   

이곳은 갓 지은 160층짜리 초호화 건물, 화려한 백화점이 있고 첨단 상업시설이 즐비한 곳이다. '극단적 선택'을 하기로 남수가 마음 먹자 아내 지애는 "마지막으로 좋은 곳 한 번"이라고 통사정한다. 그 통에 남수 가족은 160층 건물의 쇼핑센터에 온다.

그런데 남수 가족은 그만 빨간색 출입통제선 넘어 제한구역에 들어서고 여기에 완전히 갇혀버린다. "문도 다 닫혀 있고…층수가 없어. 몇 층인지 적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숫자가 보이질 않아." 호화찬란하던 빌딩은 이들 부부에게 순식간에 절망과 고통뿐인 공간이 된다. 애초에 '죽을 결심'까지 하고 왔던 남수의 머리에 이때 처음 떠오른 생각은 '억울하다'이다.

남수는 아내 지애와 다투고 서로 아픈 곳을 건드려 가면서도 "그 누구도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일직선의 미로"인 이곳을 아래위로 뛰어다니며 살길을 찾아 나선다. 이 모습을 김비 작가는 밀도 높고 능숙하게 그린다.

자신들만 갇힌 줄 알았던 이곳에서 남수 가족은 다른 조난자를 만나기 시작한다. 이들에게서 소문과 정보를 듣게 되고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자본의 힘을 과시하는 이 빌딩은 서둘러 짓느라 아직 미완성이라는 점. 치명적인 결함을 무시한 탓에 빌딩은 이미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는 점. 바깥엔 '열쇠를 쥔 사람'이 있지만 선뜻 갇힌 자들을 구하지 않는다는 점도 알게 된다.

이 장편소설은 상징적인 요소가 선명하고 많아 보인다. 특히, 남수 가족이 처한 상황을 상징으로 읽으면 '여기가 몇 층인지도 모르며, 끝없이 올라가도 닿을 수 없고, 끝없이 내려가도 찾을 수 없는' 숨가쁘고 아득하고 희망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지극히 미세한 모습으로 절묘한 몸짓의 희망이 꼬물대는 모습은 만날 수 있다. 절망을 만날지 희망을 찾을지는 독자 몫이다.

경남 양산에 살면서 부산에서도 꾸준히 활동하는 김비 작가는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하면서 등단해 소설과 에세이를 펴냈고,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제작 과정에 참여했다. 그는 트랜스젠더 작가로 잘 알려졌다.


조봉권 | 국제신문 | 2015-11-16

원문읽기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족, 비상계단에 갇히다

“희망이라고 다 옳은 게 아냐. 어떤 희망은 후련한 절망만도 못해.” (98쪽)

노력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이 간절한 시대지만, 어느새 희망은 ‘고문’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어두운 현실을 견디는 데 이야기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스러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편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의 방식은 정면 돌파다. 이 소설은 우리를 둘러싼 암흑으로 몸을 던져, 희망이 아닌 다른 언어로 삶을 비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인 김비 작가는 장편소설 『빠스정류장』,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 등을 통해 꾸준히 위태로운 삶 속에서 반짝이는 힘에 주목해 왔다. 신작『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가난의 쳇바퀴를 도는 데 지쳐 동반자살을 택하지만, 자살이라는 출구조차 막혔음을 깨닫는 한 가족의 ‘후련한 절망’에서 시작한다.



삶을 향해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

우리의 현실을 빼닮은 비상계단과 등장인물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주인공 남수는 달동네에서 자랐고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가장이다. 택배기사로 매일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비관으로 가득 찬 그는 무기력에 빠진 아내 지애, 그리고 뇌 손상을 가지고 태어난 여섯 살 아들 환이와 동반자살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마지막 만찬을 위해 들른 160층 초호화 백화점 건물의 비상계단에 갇혀버리고 만다.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고,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자살시도마저 실패로 끝나나 싶지만, 남수는 오히려 꼭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느낀다. 생에 대한 그의 의지는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 아니라, 절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커멓게 끈적거리기만 했던 생각의 늪 속에서, 남수는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남루하기만 했던 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떠올랐다. (…) 기필코 여기에서 탈출하는 것. 그리하여 나를 억압했던 생을 농락하며, 망설임 없이 내 손으로 내 삶의 마지막을 선택하는 것. (18쪽)

남수 가족 외에도 계단에 갇힌 이들은 여럿이다. 비정규직으로 취직하면서 기초수급대상에서 탈락한 20대 여성 가장 정화, 명예퇴직 압박에 시달리는 명식, ‘일류대학 교수님 사모’이지만 남모를 아픔을 가진 해숙 등,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우리와 비슷하거나 우리가 일상에서 스쳐지나갔을 법한 사람들이다.

남수와 이들 일행은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좌절하지만, 더 위쪽에 있는 공중통로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계단을 오른다. 그러다 아래에서 구조가 진행되고 있으니 내려오라는 구조대의 방송 소리를 듣게 된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오히려 지진처럼 사방을 뒤흔드는 진동과 불길이다.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여러 재난들의 메아리이다.



“비상등이었다. 그런데, 붉은 색이었다”

한 편의 영화처럼, 강렬한 이미지와 빠른 전개를 갖춘 소설

비상계단이라는 한정된 장소 내에서 장편을 풀어가는 것은 난관이 될 수 있으나, 작가는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과 남수 가족 이외의 인물들을 적절히 등장시켜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한다. 문이 열릴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남수 일행이 버렸을 때 공중통로의 가능성이 제시되고, 새로운 인물들이 제시하는 비상계단에 대한 정보는 서스펜스를 끌어올린다.

색과 이미지가 중요한 상징으로 쓰이기 때문에 소설은 한편의 영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붉은 빛으로 계단 안 모든 것을 물들이는 비상등이 파란 바다색으로 바뀌면서 이야기의 반전이 시작된다. 또한, 소설 속 인물들이 각자 어떻게 이 계단에 갇히게 되었는지 털어놓으면서 모두가 붉은 띠로 가로막힌 문을 통해 이곳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정확히 몇 층에서 비상계단으로 들어왔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의 기본 설정에 대한 의문들과 이에 대한 힌트가 곳곳에 배치되어 재미를 더한다.




트랜스젠더 여성 작가가 쓴 소수자 문학

몸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 돋보여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저자 김비 작가는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 데에도 참여한 바가 있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약자, 여성 등 마이너리티의 삶에 꾸준히 주목하면서 김비 작가는 작품 속에 소수자로 살아오며 쌓은 통찰을 담아왔다. 이 소설에서는 희망에 대한 관점뿐만 아니라, ‘몸’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특별히 눈에 띈다.

공중통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주요인물 ‘수현’은 성전환 수술비용을 마련하려는 스무 살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성별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남수는 그를 괴물 취급한다. “인생 망치는 수술이나 하려고” 한다며 남수가 그를 비난하자, 수현은 ‘아저씨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만 나는 나를 믿는다’며 이렇게 말한다.

난 아저씨가 부럽지 않아요. 그렇게 간단하게 살 수 있는 삶이라도… 태어나보니 그 어떤 혼란도 없이, 그저 돈 벌면 행복하고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그런 삶이라도 (…) 아저씨한테는 그게 전부인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거든요. (85쪽)

한편, 남수의 아들 ‘환’이는 기형적인 팔다리를 가진 아이다. 남수는 한때 환이의 탄생에서 희망을 보았지만, 환이는 남수가 동반자살을 결심하게 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지애 또한 환이가 “족쇄” 같은 몸에 갇혀 살고 있다며 마음 아파한다. 하지만 환이는 오히려 “나… 안 이상한데? (…) 나, 지금처럼 예쁜… 내가 좋은데?”라고 말하며 웃는다.

‘비정상’의 몸을 가지고 있는 수현과 환은, ‘비정상’의 몸이란 본질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상’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기 위해 부여한 의미 때문에 만들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삶과 죽음을 가로질러

암흑 속으로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디딘다

절망의 바닥에 가닿은 상황에서, 남수를 일으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불신’이다. 남수는 열리지 않는 문이 끝을 의미한다는 것을 의심하고, 그가 딛고 선 현실을 비관하며 삶을 꿈꾼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의 아내 지애는 “당신이 나를 믿지 않든 (…) 지금 우린 당신이 필요해”라고 말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서로가 필요하다는 고백, 그곳에 이 이야기의 핵심이 있다.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부끄러운 것일까.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내게 미래로 나아갈 자격은 없는 걸까.” 김비 작가는 이런 질문에서부터 이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찬란한 희망이 아니라, 어두움과 위험이 깃든 희망을 이야기하는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지금 암흑 속으로 발걸음을 디디려는, 디뎌야만 하는 독자라면, ‘우리는 같은 곳에 있다’ 말하며 내민 이 손을 기꺼이 잡아도 좋을 것이다. 


지은이: 김비

1971년 남과 북의 경계 위, 삶과 죽음의 경계 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서른 살의 나이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세계문학웹진 『국경없는문학』www.wordswithoutborders.org의 세계 퀴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 단편소설 「입술나무」의 영어판을 게재하였고,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를 출간했다. 부끄러운 기억 같은 책 몇 권을 썼으며,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 데 함께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지음 | 문학 | 국판 268쪽 | 13,000원 

| 2015년 10월 20일 | 978-89-6545-319-2 03810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족, 비상계단에 갇히다. 
희망이 '고문'이 된 시대, 이 장편소설은 우리를 둘러싼 암흑으로 몸을 던져 희망이 아닌 '후련한 절망'에서 첫발을 내딛는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인 김비 작가의 네 번째 장편소설.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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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표지 일러스트와 캘리그라피,

그리고 본문 내 각 장의 제목에 쓰인 캘리그라피는 모두 김비 작가의 작품입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