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이 닿는 곳에 화교(華僑)가 있다.’

화교들의 적응력을 빗댄 말이다. 국내에선 중국과 가깝고 개항 역사가 긴 인천 화교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인천과 더불어 대표적인 개항지였던 부산은 어떨까?

조세현 부경대 교수(사학)가 최근 펴낸 ‘부산화교의 역사’(산지니)는 인천 화교에 가려진 부산 화교와 화교촌의 어제와 오늘을 연구한 책이다. 특히 그간 잘 조명되지 못했던 한중 수교(1992년) 이전 부산 화교의 역사가 담겼다.

부산 화교촌은 부산 동구 초량동 일대로 오늘날 ‘상해거리’로 불리는 지역이다. 지금도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 음식점과 한의원이 들어서 있고, 중국풍의 주민센터가 있는 부산의 차이나타운이다.

부산 화교의 기원은 임오군란(1882년) 후 조선과 청나라가 무역협정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4년 지금의 초량동에 청국 영사관인 ‘청관(淸館)’이 들어서고 청국인 거주를 위한 조계지(租界地)가 인천의 3배 규모로 들어서면서 화교가 본격 유입됐다. 조 교수는 “개항 초기 부산 화교는 인천 화교의 주류인 산둥계가 아닌 남방의 광둥계였다”며 “나가사키, 고베 등 일본 개항지에 진출했던 광둥계 중국 상인이 부산으로 건너온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1893년 조사 당시 인천 화교의 인구가 711명일 때 부산 화교 인구는 142명이었다.

부산 화교는 당시 조선의 화교가 그랬듯 주로 포목점이나 중식당을 운영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고 1913년 청국 조계지를 없앤 뒤로는 면제품 수입을 겸하던 포목점에서 중식당으로 업종을 바꾸는 이들이 늘었다. 이 시기는 값싼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 ‘화공(華工)’과 ‘화농(華農)’이 유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부산 화교촌의 명칭도 시대별로 부침을 겪었다. 개항 초기 ‘청국 조계지’였던 것이 일제강점기에는 ‘시나마치(支那町)’로, 광복 이후에는 ‘청관거리’로 불렸다. 6·25전쟁 이후 주한 미군을 상대하는 유흥가가 들어서면서 ‘텍사스촌’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곳은 한중 수교 이후 부산시가 중국 상하이 시와 자매결연을 하면서 오늘날의 ‘상해거리’가 됐다.

부산 화교 사회의 확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6·25전쟁 때였다. 전쟁으로 화교 피란민이 몰려들면서 1942년 230명이던 부산 화교는 전쟁 기간 5000명을 웃돌았다. 전국 화교 5명 중 1명꼴로 부산에 살던 시절이다. 청관거리 인근에 ‘충효촌’이라는 화교 피란촌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1960, 70년대 한국 정부의 화교 차별로 화교 상당수가 대만으로 떠나가면서 활기를 잃었던 부산 화교촌은 한중 수교 이후 중국 국적의 ‘신화교’가 대거 유입되고 있다. 조 교수는 “양안 관계 때문에 대만 국적의 구화교와 신화교의 관계가 정치적으로는 껄끄러운 측면이 있지만, 신화교가 음식점을 열며 대거 진출한 초량동 일대에서는 구화교와 신화교가 잘 어울려 지내는 편”이라고 말했다. 2002년 현재 한국의 화교 인구는 2만1782명으로 서울 34%, 인천 15%, 부산 14% 순으로 조사됐다.

 

 

 

2014. 02. 13 동아일보 우정렬 기자

 

출처: http://news.donga.com/3/all/20140213/60806520/1

책소개: 청국조계지에서 상해거리까지─『부산화교의 역사』(책소개)

 

부산화교의 역사 - 10점
조세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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