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저널'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9.10.29 루카치를 아시나요?_편집자 기획노트
  2. 2019.04.29 작가의 숨결로 재탄생한 1500년 전 신라 여성들_<출판저널>
  3. 2019.04.17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의 귀향_<출판저널> (3)
  4. 2018.11.13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 (2)
  5. 2017.12.27 행복한 인생 후반전에 대하여 :: 『당당한 안녕: 죽음을 배우다』
  6. 2017.07.18 사할린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 이규정 장편소설 『사할린』
  7. 2017.06.09 언젠가 나도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이고 싶다 :: 김춘자 산문집『그 사람의 풍경』
  8. 2017.03.09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에 대한 진지한 토론 :: 에릭 올린 라이트 『계급 이해하기』
  9. 2017.02.17 사랑 이면에 자리한 욕망의 본질 :: 박정선 장편소설『가을의 유머』
  10. 2016.09.09 우리 시대의 민낯을 마주하다 :: 오영이 소설 『독일산 삼중바닥 프라이팬』 (2)
  11. 2016.08.09 미지의 섬, 그곳에서 마주친 또 다른 나 :: 정광모 소설 『토스쿠』 (4)
  12. 2016.05.12 복잡해져가는 사회와 혼탁한 세상을 무탈하게 살아가게 하는 길잡이-『한비자』, 『한비자,제국을말하다』 (2)
  13. 2014.10.15 [출판저널] 설마 그 정인? 『만남의 방식』
  14. 2014.05.09 『유토피아라는 물음』편집자 후기
  15. 2013.10.22 요즘 만난 최학림 선생님─ 도요 맛있는 책읽기, <출판저널> 편집자 출간기 (2)

루카치를 아시나요?

삶으로서의 사유』, 게오르크 루카치 지음, 김경식·오길영 옮김, 산지니


[사진은 팀장님:]

 루카치를 아시나요?” 아마 이 질문에 라고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930년대부터 루카치가 우리나라에 수용됐고, 문학이 진보적 담론을 주도하던 1980년대 전반까지 루카치만큼 문학 담론에 강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없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가면서 루카치는 서서히 잊히기 시작했고 오늘날 루카치는 낡고 오래된 사상가가 되었다. 그러나 2008년 자본주의의 위기 이후 이를 극복하기 위한 좌파의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 사상을 연구한 루카치가 다시 재조명을 받고 있다. 그래서 시리즈 이름을 루카치 다시 읽기로 짓게 되었다.

시리즈 1권은 김경식 저자가 쓴 루카치의 길문제적 개인에서 공산주의자로로 루카치의 삶을 다룬 책을 출간했다. 시리즈 2권은 삶으로서의 사유로 게오르크 루카치 전공자 김경식 박사가 영문학자 오길영 교수와 함께 루카치의 자전적인 글을 옮긴 글로 게오르크 루카치맑스로 가는 길의 개정증보판이다. 마지막 시리즈 3루카치가 읽은 솔제니친은 김경식 박사가 번역한 글로 루카치가 문학비평가로서 남긴 마지막 실제비평이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세 권을 발간하면서, 한동안은 루카치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루카치가 늘 곁에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루카치가 나를 조금 괴롭히는 느낌이었다. 왜냐면 루카치의 글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루카치의 삶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루카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그 길에서 오랜 망명 생활과 몇 차례 숙청의 위험을 견뎌야 했지만 공산주의자로서 그의 사유는 자기갱신의 노력을 멈춘 적이 없었다. 루카치는 죽기 직전까지도 사유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 책은 루카치가 죽기 직전 병상에 누워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대담집이다. 보통의 자서전과는 달리 대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루카치가 자서전 집필에 착수했을 때 이미 폐암에 걸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루카치는 주제어와 미완성 문장으로 구성된 자서전 초안만 남긴 뒤 병상에 눕게 되었고, 그 상태에서 루카치의 제자들이 나서서 미완의 자서전을 완성할 수 있게 도왔다.

무엇보다 이 책 작업하면서 루카치 연구에 매진해온 김경식 연구자의 열정에 감탄했다. 꼼꼼하고 성실한 집필과 번역은 책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 작업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책을 읽으면 알 수 있으리라. 투쟁하고 사유한 루카치의 삶도 지금 우리 시대에 영감을 줄 수 있지만, 연구자로서 한 철학가의 삶을 완성도 높게 끈질기게 연구한 연구자의 열정도 감동적이다

반평생 마르크스를 연구한 루카치, 반평생 루카치를 연구한 김경식 연구자, 두 사람이 삶과 함께한 사유와 투쟁을 이 책에서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산지니 윤은미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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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숨결로 재탄생한 1500년 전 신라 여성들

 

 

: 김문주 장편소설

김문주 지음│342쪽산지니

아름다운 두 여자를 원화로 뽑아서 무리를 맡게 했다.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했는데,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해 억지로 술을 권해 취하게 되자 끌고 가서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

- <삼국사기>

 

삼국사기 기록에 짧게 나온 원화에 대한 기록이다. 누구나 한 번쯤 화랑에 대해 배웠던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국사 시간이나, 하다못해 어설픈 그림체로 그려진 역사 만화책을 읽으면서 화랑이 얼마나 멋있고 대단했던 청년들이었는지 배웠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서 항상 원화는 그저 시기와 질투로 점철된, 그래서 살인까지 저지르는 주변 인물이라는 지점이 강조된다.

그러나 김문주 작가는 장편 소설 『랑』에서 그 이야기를 비튼다. 사실 시기와 질투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던 원화는 화랑의 뿌리였으며, 화랑을 다스렸던 능력 있고 존경받던 인물이라고. 그리하여 준정과 남모는 소설 속에서 김문주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탄생되어 신라의 부흥을 이끌었던 인물로 부활한다.

물론 소설 속 내용이 모두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소설이 사실만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작가가 이에 대해 지난 2저자와의 만남에서 한 이야기를 빌려온다.

소설가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집중하지는 않지만, 역사소설을 쓰기 위해서 사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왜 이걸 뒤집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자기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말처럼 역사소설의 집필은 끊임없는 공부와 성찰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게 탄생한 소설은 독자들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 질문을 할 수 있는 촉진제가 된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드는 시대,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엔 너무 바쁜 시대이다. 그러나 몰입감과 긴장감을 선사하는 흥미로운 매체인 소설로 전하는 역사 이야기는 관심을 모으는 데 분명한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랑』  속 주체적이고 당당했던 여성 준정과 남모를 통해 신라인들의 삶에 좀 더 가까이 호흡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은주 산지니 편집부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통권510호_4+5월호)_편집자 기획노트 에 실린 글입니다.

 

 

- 10점
김문주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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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의 귀향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정상천 지음 

 | 316| 16000

 

처음 이 원고의 제목은 잊혀진 독립운동가 서영해였다. 여전히 많은 독립운동가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영해는 더더욱 잊힌 인물이었다. “미국에는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고 할 정도로 당시 임시정부의 양대 외교 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역사에 묻혀 있었다. 서영해는 당시 국제정세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고려통신사를 설립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부당함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고 한국인 최초로 불어소설을 집필해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말살하려고 했던 한국의 역사와 민담을 외국에 소개했다. 오랜 세월에 묻힌 서영해를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저자가 우연히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실에서 발견한 문서에서 시작됐다. 그곳에서 어느 날 한국인 이름처럼 느껴지는 명함이 첨부된 문서를 발견한다. 저자는 신기하다고 생각했고 그 문서를 포함해 많지는 않지만 서영해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 이후 자신의 저서 나폴레옹도 모르는 한·프랑스 이야기에 독립활동에 대해 간략하게 담았다.


또 하나는 출판사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를 찾고 있었다. 마침 서영해가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였고 서영해 삶을 다룬 책을 기획했다. 서영해의 책 출간에 논의했지만 저자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서영해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자료를 모으고 주 무대가 프랑스였기 때문에 불어에 능통해야 했다. 출판사가 저자를 찾고 있던 중 서영해의 친척 사위 분이 저자가 쓴 서영해 글을 읽고 서영해의 삶을 다룬 책 출간을 제안하게 된다.


편집자로 원고를 다루다 보면 많은 인연을 경험하게 된다. 이 책은 어느 때보다 겹겹의 시간과 인연이 쌓여 있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서영해의 외로웠던 투쟁을 보듬으려고 노력했다.

서영해는 오랜 기간 해외에서 활동했고 국내에 머문 기간도 짧다. 해방 이후 조국으로부터 환대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김구를 추종했다는 이유로 국내에 설자리를 잃었다. 아쉽게도 말년의 행적도 불확실하다. 상해에서가 마지막 기록이고 어떻게 어디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서영해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조선 독립을 위해 글을 썼다. 책에는 저자가 서영해가 불어로 쓴 글을 직접 번역해 실었다. 책을 읽으면 저자가 서영해의 흩어진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번역하는 열정과 정성을 고스란히 느껴진다. 책이 나온 후 사람들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서영해의 삶을 안타까워했고 서영해의 독립활동에 박수를 보내줬다. 이제 서영해에게 잊혀진타이틀은 필요 없는 듯하다.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의 귀향을 환영한다.

 

글 산지니 윤은미 편집자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통권510호_4+5월호)_편집자 기획노트 에 실린 글입니다.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 10점
정상천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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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디자이너 2019.04.17 1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 뭉클하네요.

  2. 날개 2019.04.17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 오랫동안 기억할 일이 남은 것 같네요.

  3. BlogIcon 동글동글봄 2019.04.17 1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외로운 투쟁이었지요. 더 많이 알려지면 좋겠네요.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편집자 기획노트

 

 

저자의 진심이 전해진다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 편집자에게도 열 원고 중 마음에 담지 않는 원고는 없지만, 유독 더 보듬고 싶은 원고는 있다. 나에겐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가 그러하다.

 

   면접을 보고 산지니에 온 첫날, 사무실 한쪽에 빽빽이 꽂혀 있던 책들 중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익숙하지 않은 생경한 그곳, 그곳의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연구는 어떤 사명감을 갖고 하게 되는 일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얼마 뒤 운명처럼 그 책의 저자가 쓴 원고를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 원고를 받고 저자 프로필을 보았다. “노용석 교수는 2006년부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주관한 13개 유해발굴을 주도했고, 2011년부터는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에 참여해 한국전쟁기 국가폭력의 진상 파악을 위해 노력했다.” 역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한 분야에서 노력해온 저자였다. 원고 속에는 저자가 직접 조사하고 얻은 풍부한 사례와 사진이 있는데, 원고를 편집하면서 하나하나 착잡한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가슴 아픈 실제피학살자들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와 처음 미팅을 할 때 억울한 국가폭력 속 희생된 피학살자들을 대하는 진실된 마음을 느끼면서, 더욱 원고에 빠져서 진행을 했다. 저자는 인간적으로도 배려가 넘쳤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원고나 그러하지만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편집 일정이 촉박했다. 그런 와중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어 며칠을 쉬게 되었다. 미처 다 보지 못한 교정이지만 기한이 촉박해 저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교정지를 들고 직접 학교로 찾아갔다. 무더웠던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나를 보고 저자는 원고 걱정은 하지 말고 얼른 장례식장에 가라고 말하며 역까지 차로 바래다줬다. 그때 그 따뜻한 마음에 눈물이 왈칵 나려는 걸 참느라고 애썼다. 장례식 내내 원고에 있는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했다. 할아버지를 보내드리고 화장을 하는 날, 할아버지의 유해를 보고 원고에 있는 유해 사진이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했다. 이 원고를 이 시점에 맡게 된 게 정말 필연이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출간이 되고 실물 책을 볼 때 기쁘지 않은 책은 없지만, 이 책은 내용 하나하나 허투루 모인 것이 아님을 알기에 더욱 벅찼다. 묘하게도 좋은 의도로 만든 책에 담긴 진실된 마음은 어떻게든 전달이 되는 것 같다. 책이 출간되고 한겨레, 한국일보, 연합뉴스와 같은 각종 매체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보도자료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발로 뛴 지식인의 기록. 그 말처럼 저자는 지금도 먼 남아메리카 쿠바에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위해 가 있다. 저자의 열정과, 억울하게 희생된 피학살자들과 그 가족의 눈물이 담긴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저자의 진실된 마음으로 담은 기록들이 분명 전달될 거라고 믿는다. 나에게도 유골, 할아버지, 더웠던 그날, 따뜻했던 저자. 장면 하나 하나가 마치 사진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고마운 책이다.

 

 

| 이은주 산지니 편집부

*출판저널 507호 2018년 10월+11월에 실린 글입니다.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 - 10점
노용석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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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글동글봄 2018.11.13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글을 읽는데 저자의 따뜻한 마음에 울컥울컥. 억울하게 죽은 분들이 가족과 고향에 편안히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2. 권디자이너 2018.11.20 16: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 일이 있었군요.^^

EDITOR'S NOTE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편집자 기획노트]


“행복한 인생 후반전에 대하여”
『당당한 안녕: 죽음을 배우다』(이기숙 지음)

 

산지니 편집부 정선재


일요일 아침, 거울 앞이 분주하다. 나와 엄마가 서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단장에 여념이 없다. 청첩장을 받아 든 나는 분홍빛 원피스를 입었고, 문자로 날아온 부고 소식에 엄마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었다. 같은 날, 같은 공간 나와 엄마는 함께 거울을 보고 있지만 우리의 옷 색깔만큼이나 너무나도 다른 삶의 얼굴을 만날 준비를 한다.


아직은 탄생, 시작, 출발이라는 단어가 가까운 나이라 그런지 처음 이 원고를 받아 들고는 매우 낯설었다. 그러곤 지금까지 내 삶에서 마주했던 죽음들을 반추해보았다. 할머니의 죽음, 선생님의 죽음, 유명 연예인의 죽음 그 밖에 신문 사회면에서 접하게 되는 무수히 많은 사건과 사고들로 인한 사회적 죽음까지. 생각만으로도 불편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괜히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싫었고, 못 본 척 피하고만 싶었다. 그러다 문득 이 원고의 한 구절을 만나게 됐다.


“죽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행운이다” (p.34)


죽음에 관한 이기숙의 에세이 『당당한 안녕: 죽음을 배우다』는 ‘잘 죽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죽음에 대한 경험과 준비, 노년의 삶과 최소의 치료, 보내는 이들의 사례와 애도 작업 등을 다루고 있다. 저자 이기숙은 한국다잉매터스 대표를 맡으며 죽음 관련 강의와 연구 그리고 엔딩노트 사업,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보급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실제 현장에서 마주한 삶과 죽음을 토대로 좋은 죽음이 무엇이고,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친근한 어조로 설명한다. 또한 저자가 실제로 겪었던 가족의 죽음을 바탕으로, 가는 자(노년기 부모)와 보내는 자(성인 자녀)의 입장에서 떠오른 단상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늙어가는 것과 죽는다는 것. 이는 어느 날 불시에 찾아오는 슬픔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늙어가는 모습도, 죽어가는 모습도 다르다. 즉, 죽음은 나의 생애를 보여주는 마지막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동안 우리는 잘 사는(well-being) 방법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현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여러 요소들이 죽음의 과정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한다면 잘사는 것은 곧 잘 죽는(well-dying) 것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예식장에 도착한 나는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장례식장에 도착한 엄마는 몇십 년 만에 만난 친구의 아픔을 위로하며 국화 한 송이를 고인 앞에 놓는다. 결혼식이 끝난 나는 시끄러운 뷔페 자리 한편에 앉아 친구들과 그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조문을 마친 엄마는 친구들이 있는 식당으로 가 시락국 한 대접을 놓고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다른 듯 비슷한 나와 엄마의 일요일, 주말의 해가 넘어가는 지금, ‘삶과 죽음도 이와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삶의 시작점과 끝자락, 결국 우리가 모두 건너야 하는 과정들을 생각해보며, 깊어가는 가을 『당당한 안녕: 죽음을 배우다』를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약간의 오지랖을 부려본다면 죽음이란 단어에서 가지를 뻗어 보다 행복하고 풍요로운 오늘을 만나길 바란다.

 

『출판저널』 2017년 12월 - 2018년 01월 호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 기획노트」에 게재되었습니다.

 

당당한 안녕 - 10점
이기숙 지음/산지니

 

*큰글씨책도 있어요! 

당당한 안녕 (큰글씨책) - 10점
이기숙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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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편집자 기획노트]

 

 

1930년대, 사할린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이규정 장편소설 『사할린』

 

정선재 (산지니 편집자)

 

 

 

 

어느 날 갑자기 혜성같이 나타난 작가가 어디서도 보지 못한 작품을 턱하니 던져주면 얼마나 좋을까? 참 꿈같은 일이다. 그래, 이것은 꿈이다. 그렇기에 현실에서는 기획이란 과정을 서성이며 우리 주변에 흩어진 이야깃거리들을 찾아 나선다. 소설 『사할린』과의 첫 만남은 그런 현실적인 기획에서 시작해 꿈같은 기획으로 이어졌다.

 

<국제신문>(2016년 6월 10일자)에 보도된 소설 『먼 땅 가까운 하늘』을 만났다. 아주 오랫동안 준비하였지만 1여 년 밖에 선보이지 못한 작품, 20년의 시간을 잠자고 있어야만 했던 작품. 우여곡절을 겪고 있는 소설의 이야기를 읽으며, 궁금증이 생겼다. 어떤 작품이기에 언론사는 이 잠들어 있는 이 소설에 주목하는 것일까?

 

70년대부터 러시아 사할린 동포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규정 작가는 1991년 직접 사할린으로 날아가 현지 취재를 감행했다. 그는 현장을 돌아보고,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아픈 역사가 남긴 상처들을 발견한다. 이후, 6여 년에 걸친 탈고 작업을 거쳐 세 권의 장편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운명은 비극에 가까웠다. 1996년에 출간됐지만 당시 출판사의 사정으로 1년 만에 절판되고 만 것이다. 서점에서도 도서관에서도 만날 수 없는 소설, 독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이 작품은 미완의 상태로 20여 년을 잠들어 있어야 했다.

 

이 소설은 1930년대 사할린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사할린 현지를 방문하는 1990년대 초반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경남 함안, 북한, 일본, 러시아 등을 오가며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진 여정을 웅장하게 담고 있다. 해방 전후, 사할린과 경남지역에 아로새겨진 역사의 상처들을 마주한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무국적자로 처리되어 사할린에 남아야 했던 사람들에서부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피워보기도 전에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까지. 마음이 고되다. 희망과 좌절을 오가는 사할린 동포들을 바라보며 고통스럽고 힘이 든다.

 

신문을 통해 이 소설의 사연을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규정 작가에게 원고를 건네받았다. 어느 날 갑자기 어마어마한 원고가 턱하니 던져진, 꿈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1,0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소설을 검토하며, 계속해서 침을 삼켰다. 이 소설은 진짜구나. 그동안 묵혀두었던 시간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출간 작업은 빠르게 진행됐다. 독자들에게 작품의 배경과 메시지를 또렷하게 전하기 위해 제목을 ‘사할린’으로 바꾸고, 등장인물과 배경을 정리해 책의 앞부분에 실었다. 3권짜리 소설을 촘촘히 메우는 인물들과 낯선 지명의 장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큰글씨책(전5권)으로도 제작해 노약자와 약시자들에게도 쉽게 읽힐 수 있도록 준비했다. 최대한 많은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채비를 한 셈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말했다. 일제 식민지하 민족은 갈갈이 흩어졌고, 평범한 사람들은 이유 없는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도둑같이 찾아든 해방의 기쁨도 잠시, 외세에 의한 분단은 고향 땅을 밟고자 했던 민초의 삶을 짓눌렀다. 머나먼 타지에서 무국적자로 남아야했던 삶, 돌아오려 해도 돌아갈 수 없었던 동포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그들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지점에 소설 『사할린』이 자리한다.

 

 

 

 

 

『출판저널』 2017년 7월호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 기획노트」에 게재되었습니다.

 

 

 

* 노약자, 약시자들을 위한 큰글씨책도 있습니다. *

 

 

사할린 1 - 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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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편집자 기획노트]

 

 

바람, 시간, 별, 추억…
“언젠가 나도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이고 싶다”

 

산지니 정선재 편집자

 

가끔 덩그러니 놓인 흰 종이가 무섭다. 그럴싸한 무언가로 이 여백들을 채워야 한다는 사실이 내 손을 옴짝달싹 못하게 짓누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이든 그림이든 하나의 완성된 작품들을 볼 때면 마음이 벅차다. 아름다운 작품 하나를 위해 작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서성였을까.

 

그런 작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작품 뒤에 가려진 작가의 일상과 생각들이 듣고 싶었다. 그러던 중 지역신문에 연재된 글을 통해 김춘자 작가를 만났다. 그녀는 1980년대부터 부산 화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해온 작가로 <자라는 땅>, <生>, <Breathe> 등 생명과 자연을 주제로 작품들을 발표했다.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생生의 의미 만들어내는 김춘자 작가. 그녀의 글 역시 그러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꽤 길고 긴 시간을 돌아왔다. 고민과 논의, 논의와 수정, 수정과 편집. 이 끝없는 터널을 지나며 47편의 글들이 제 모습을 찾아갔다. 처음 이 원고를 받아들었을 때, 글들이 어떤 방향으로 뻗어나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한 문장 한 문장 섬세하게, 때론 치열하게 적어내려 간 듯한 글들은 미래가 무궁무진한 어린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목차, 구성, 제목 등을 구상하며 독자들에게 이 책이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생각했다. 막연한 바람이지만, 누군가의 하루에 가장 편안한 풍경을 선사하는 책이 되었으면 했다. 그래서 작가가 가장 마지막에 제안한 ‘그 사람의 풍경’이란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작업을 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작가의 글쓰기 방식이었다. 김춘자 작가가 들고 다니는 핸드폰은 종이이자 펜이었고, 세상의 모든 곳이 그녀의 서재였다. 지하철, 카페, 산책길 등등 일상의 여러 풍경들 속에서 작가는 떠오르는 단상들을 핸드폰에 옮겼다. 일상의 찰나를 고스란히 옮긴 셈이다. 그렇게 47편의 글들이 완성됐고, 산문집 『그 사람의 풍경』은 제 모습을 갖춰나갔다.

 

작가는 이번 산문집을 통해 살아가는 것들의 풍경을 전한다. 어린 싹, 바람, 새, 꽃, 별 등 자연이 주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이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사랑을 표현한다. 동시에 문명에 젖어 생의 민낯에서 멀어져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을 반성하기도 한다. 또한 예술가로서의 삶과 작품에 대한 생각,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 자신의 길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개인전을 끝내고 불쑥 찾아온 심한 상실감, 성공과 예술 사이에서의 갈등 등 작품 뒤에 가려진 작가의 고뇌를 솔직하게 담고 있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생명의 아름다움, 일상의 기억, 예술의 길 등을 만날 수 있는 김춘자 산문집 『그 사람의 풍경』. 아름답게 그려진 글들을 따라 생각의 걸음의 옮겨보자. 머릿속엔 새하얀 도화지가 펼쳐지고 그 위에 나지막한 삶의 풍경이 그려질 것이다.

 

 

 

『출판저널』 2017년 5월호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 기획노트」에 게재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풍경 - 10점
김춘자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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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편집자 기획노트]

 

"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에 대한 진지한 토론"

 

에릭 올린 라이트  『계급 이해하기

 

산지니 정선재 편집자

 

 

 21세기, ‘계급’이란 개념은 아직 유효한가? 오늘날 계급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우리 사회의 여러 곳에서 마주할 수 있다. 한때 인터넷상에서는 부모의 자산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계급을 금, 은, 동, 흙으로 나눈 수저론이 화제를 모았다. 우스갯소리에서 시작한 이 수저론은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 간의 이동이 힘든 우리나라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 뼈 있는 농담이자 자본주의 현실을 겨낭한 웃픈(웃기고, 슬픈) 유머였다. 계급, 한편에서는 이 개념은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현재 자본주의에서 계급은 여전히 유효하고, 논쟁적인 개념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의 저서들은 영미권을 중심으로 많은 작품들이 소개됐다. 하지만 국내에 완역 출간된 작품은 『계급론』(Classes, 2005)과 『리얼 유토피아』(Real Utopia, 2012) 뿐인데, 이번에 출간한 『계급 이해하기』는 이 두 저작에 담긴 이론작업을 총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이 책은 라이트가 1995년부터 2015년 사이에 집필한 논문들을 모은 것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을 분석하는 일반적 분석 틀과 이에 입각한 사회변혁 전략을 제시한다. 그리고 계급투쟁과 계급타협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고찰하여 자본가와 노동계급 사이에 상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타협의 조건과 실현 방법을 모색한다.

 

『계급 이해하기』에서 눈여겨 볼 만한 점은 비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의 계급이론을 긍정적으로 개괄하며 그 의미와 한계를 정리했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 찰스 틸리, 오게 쇠렌센, 마이클 만은 분석을 위한 개념의 측면에서, 데이비드 그루스티, 킴 위덴, 토마 피케티, 잔 파쿨스키, 말콤 워터스, 가이 스탠딩은 21세기 계급을 분석하는 방법의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검토된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특정한 국가나 시기에 국한된 구체적 계급의 구분보다는 계급의 개념화 및 분석 방법과 관련된 계급의 방법론적 측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동기에 대해 문혜림 번역자는 “계급의 죽음까지 논해지는 현 상황에서 계급론을, 그것도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을 다룬 저작이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될 수 있다는 점”과 “계급분석에 대한 옹호가 아닌 문제제기와 비판이라도 계급에 대한 토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에 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책 『계급 이해하기』.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계급 논쟁에서 불거진 쟁점들에 대한 고민과 판단을 접할 수 있었으면 한다. 더불어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면, 계급이론과 계급분석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면서 발생한 사회학 내의 소통불능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 사회학자의 노력까지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출판저널』 2017년 3월호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 기획노트」에 게재되었습니다.

 

 

 

계급 이해하기 - 10점
에릭 올린 라이트 지음, 문혜림.곽태진 옮김/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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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편집자 기획노트]

 

" 사랑 이면에 자리한 욕망의 본질 "

 

박정선 장편소설  『가을의 유머

 

산지니 정선재 편집자

 

 

참 길었다. 지난여름은 선풍기 몇 대를 틀어도 지나갈 줄 몰랐고, 연일 성난 온도가 아스팔트를 데웠다. ‘이 여름에도 끝이 있을까?’ 하던 찰나, 지난한 여름 위로 찬바람이 불었다. 한 계절이 다른 계절로 바뀌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가을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슬며시 찾아왔다. 마치 소녀가 여인이 되고, 여인이 부인이 되는 것처럼.

 

『가을의 유머』의 주인공 승연은 하루하루 삶에 치여 살아오다 ‘40대’를 맞이하게 된 ‘기혼’여성이다. (그녀도 한때 꿈 많은 소녀였고, 수줍은 여인이었겠지) 나이와 결혼의 여부는 우리 사회에서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쩌면 자신의 이름보다 더. 승연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가 달아준 그녀의 여러 이름표들 중 ‘40대’와 ‘기혼’이라는 이름은 진짜 그녀의 모습을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그녀가 변하기 시작한다. 머리로 내리는 결정보다 가슴이 떨리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40대 기혼여성 승연에게 설렘의 바람이 불고, 사랑의 싹이 움튼다.

 

사실 처음 이 원고와 마주했을 때는 겁이 났다. 단 한 번도 삶에서 마주하게 될 가을을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뜨거웠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가라앉은 일상 속에 놓이게 될 그때, 우리는 얼마나 변해 있을까?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나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만 변해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계속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원고 밖으로 많은 물음들이 오갔다.

 

“떨림은 정말 그런 것이었다. 떨림은 지금까지 고장 나고 비뚤어진 나의 뼈를 다시 맞추게 만들었다.” (p.72)

 

사회적 금지 영역에 속해 있는 기혼 남녀의 사랑을 통해 한 여인의 솔직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품 『가을의 유머』. 이 소설은 남녀 간의 관계와 사랑 이면에 자리한 욕망의 본질에 집중한다. 보통의 중년 여성에게 찾아온 사랑은 자신의 모습을 찾게 했다. 그리고 그동안 감춰뒀던 욕망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는 『가을의 유머』가 불륜을 다룬 여느 드라마, 영화와 차별되는 지점이다. 저자는 “모든 게 욕망이다”라고 전하며 “지구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욕망이 낳은 이상과 동경을 찾아 헤맬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규범 속에서 감추며 살아야 하지만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욕망. 그 아이러니 속에 소설 『가을의 유머』가 자리하고 있다.

 

소설 『가을의 유머』를 편집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내가 서 있는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그리고 겨울로 건너갔고,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소설 속 승연에게서 나의 시간을 비춰보고 있었다. 특히 승연이 다시금 거울을 보게 되는 부분에서는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아내로,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며 그녀는 자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잊고 지낸 것일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을까….

 

가을은 풍요로운 계절이지만 한편으론 쓸쓸한 계절이다. 그 찬란했던 녹음들이 사라지고, 길거리를 뒹구는 낙엽만이 발끝에 머문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삶의 가을 역시도 그런 모습이 아닐까? 눈부셨던 청춘의 시간을 뒤로하고 현실을 버티며 차곡차곡 쌓아온 의무와 책임들이 명치끝에 머무는. 답답하지만 소리치기엔 남의 시선이 더 신경 쓰이는. 이 책을 읽는 동안만은 내 속에 숨어 있는 진짜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가을도 여름만큼 눈부신 계절이니까.

 

 

 

『출판저널』 2017년 2월호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 기획노트」에 게재되었습니다.

 

 

 

가을의 유머 - 10점
박정선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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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편집자 기획노트]

 

우리 시대의 민낯을 마주하다
오영이 소설집 『독일산 삼중바닥 프라이팬』

 

산지니 정선재 편집자

 

영화나 드라마는 편집이라는 과정이 있다. 극 중 주인공이 고난과 역경을 마주한 시간들은 편집을 통해 ‘몇 년 뒤’라는 자막과 함께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이내 성공과 기쁨의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네 삶에도 이러한 편집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삶은 두 시간짜리 영화가 될 수 없다. 기쁨의 시간을 걸어가는 만큼 슬픔의 시간도 오롯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몫이다.

 

오영이 소설집 『독일산 삼중바닥 프라이팬』의 소설들은 영화로 치자면 편집되거나 빠르게 지나갈 법한 고단한 삶의 이야기들로 이뤄졌다. 마치 ‘이게 진짜 우리 시대의 민낯이야’라고 이야기하듯 말이다. 이번 소설집은 총 네 편의 작품이 수록된바 청소년, 청년, 중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와 계층의 현실을 보여주며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독일에서 만들어져 한국으로 오게 된 고급 프라이팬이 그것을 구입한(혹은 주운)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을 목격하게 되는 「독일산 삼중바닥 프라이팬」은 세 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돼 한국 사회의 그늘을 응시한다. 「황혼의 엘레지」는 공원의 노인들에게 박카스를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안동댁의 이야기로, 한때 우리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노인의 삶과 복지의 취약성을 고발하는 가운데 노인의 성(性)이라는 또 다른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단편「마왕」과 중편 「핑크로드」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상처가 한 인간의 삶을 서서히 얼룩지게 만들거나, 오랫동안 이어져온 사랑이 윤리적 금기를 넘어서 헤아릴 수 없는 심연 속에 놓이게 한다.

 

빛이 사그라지지 않는 도심의 밤, 그 화려한 불빛 속 현실의 그늘과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어둡고 우울한 이 이야기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위로와 따뜻함을 얻는 건 왜일까? 나는 그것을 작가 오영이만의 독특한 관찰력과 문체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 원고를 봤을 때도 이 점이 가장 눈에 들어왔다.) 우리 사회의 음지를 바라보는 따뜻한 관찰력과 이를 풀어내는 재기발랄한 문체는 다소 무거운 주제들도 쉬이 읽히도록 하며 무겁지만 가벼운, 혹은 가볍지만 무거운 오늘날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결국 인생이란 주방의 사소한 요리 하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_ 「독일산 삼중바닥 프라이팬」 중에서 (p.12)

 

오늘도 손에 쥔 핸드폰 속으로 세상의 온갖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엄지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몇 번 내리다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 꺄르르 웃으며 쉼 없이 재잘거리는 여학생들, 부채로 휘휘 파리를 쫒는 과일가게 아저씨가 보인다. 크고 화려한 세상의 이야기 속에서 작고 소박한 사람들의 일상을 바라보는 것, 어쩌면 이것이 『독일산 삼중바닥 프라이팬』이 전하는 사소하지만 진짜 삶의 이야기가 아닐까?

 

 

 

『출판저널』 2016년 9월호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 기획노트」에 게재되었습니다.

 

 

독일산 삼중바닥 프라이팬 - 10점
오영이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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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온수 2016.09.09 0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 만든다고 수고했어요 짝짝^^!

  2. BlogIcon 별과우물 2016.09.12 09: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고 많으셨어요~ ^^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편집자 기획노트]

 

 

미지의 섬, 그곳에서 마주친 또 다른 나

정광모 장편소설『토스쿠

 

 정선재 | 산지니 편집자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라디오에서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가 흘러나온다. 이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디제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음악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쯤 『토스쿠』의 한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내가 내 마음의 작은 일부만을 알고 있다면 나머지는 도대체 뭐란 말일까?”(p.253)

 

 

  우리는 미처 나를 다 알지도 못한 채, 불쑥 밀고 들어오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노래를 계속 틀까? 디제이의 마이크 볼륨을 높일까? 하는 것처럼. 그렇게 현재의 내가 서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삶의 씨앗이었던 삶의 방식과 나는 어딘가에 꼭꼭 숨어버린다.

 

  토스쿠. 처음 원고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제목이자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토스쿠’라는 단어였다. 이는 정광모 작가가 직접 만든 말로, 또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을 뜻하기도 하고, 그런 또 다른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미지의 문이 열린다는 의미로도 풀 수 있다. 처음 이 단어를 들었을 땐 드라마에서 나오는 식상한 대사인 “나다운 게 뭔데?”의 변주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나다운 것’ 속에 들어 있는 꽤 진중하고 깊은 물음들을 꺼내 볼 수 있었다. 내 속에 광활하게 펼쳐지는 삶의 우주에는 내가 선택하여 현재가 된 ‘나다운 것’과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나답지 않은 것’들이 떠다닌다. 소설 『토스쿠』는 이 거대한 우주를 만나는 여정을 통해 인간 내면과 자아,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해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토스쿠』에는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우연히 모인 곳은 한 로봇공학자의 목공심리치료소. 명쾌한 이성적 사고로 삶을 대하는 ‘장 박사’와 함께 나무를 매만지며 이들은 조금씩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루는 방법을 배운다. 그런데 어느 날, 장 박사는 필리핀으로 여행을 떠나고, 긴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장 박사를 찾아 떠난 3인은 미지의 섬으로 향한다. 각각 뚜렷한 개성과 고통스러운 과거를 가진 4인방의 이야기는 장 박사를 찾아가는 거시적 서사 내에 현대인의 고립과 누적되는 상처에 대한 선명한 장면들을 녹여낸다. 이야기 속에 보다 작은 이야기들을 배치하며 작가는 노련하게 소설의 긴장감을 지속시키고 있다.

 

  읽고 있으나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소설, 나에겐 『토스쿠』가 그랬다. 선명하고 뚜렷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부터 유독폐기물을 싣고 표류하는 유령선, 플라스틱으로 뒤덮인 바다까지 소설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들이 이미지화되어 다가왔다. 장 박사와 토스쿠를 만날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시작한 여정, 미신처럼 느껴질 수 있는 이 신비로운 여정에서 현대문명의 민낯과 현실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또렷하게 그려지는 소재의 이미지들 덕분이 아닐까? 때론 가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법이다. 소설 『토스쿠』를 통해 허구의 이야기가 현실에 던지는 삶의 메시지들을 만나보기 바란다. 그리고 세상에 뿌리내린 무수히 많은 삶들을 응원하는 시발점이 되길.

 

 

 

 

『출판저널』 2016년 8월호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 기획노트」에 게재되었습니다.

 

 

 

토스쿠 - 10점
정광모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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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동글동글봄 2016.08.09 12: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이달의 책 기획노트에 <토스쿠>가 선정되었군요. 소설은 허구지만 삶을 가장 잘 반영하는 예술 같아요. 잘 읽었어요^^

  2. BlogIcon 별과우물 2016.08.09 14: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다운 것'은 알다가도 모르겠는 부분인 것 같아요.
    소설 속에서는 좀더 극적으로 표현되긴했지만, 그만큼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 거겠죠? ㅎㅎ

  3. 권디자이너 2016.08.11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출판저널' 데뷔 축하해요.

  4. 츄리닝 2016.08.18 1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편집자 기획노트]

 

 

복잡해져가는 사회와 혼탁한 세상을

무탈하게 살아가게 하는 길잡이

『한비자』, 『한비자,제국을말하다』

 

 정선재 | 산지니 편집자

 

 

 

 

 『맹자, 시대를 찌르다』가 나온 지 근 1년여 만에 산지니의 새로운 고전오디세이 시리즈가 출간됐다. 그것도 두 권이 동시에. 그동안 고전오디세이는 ‘논어’, ‘중용’, ‘삼국유사’, ‘맹자’ 등 현대 사회에 걸맞은 고전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자 했다. 이번에 출간된 고전오디세이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책은 통치학의 영원한 성전으로 불리는 ‘한비자’로 채워졌다. ‘한비자’는 치열한 경쟁과 암투, 부정과 모순 따위가 빚어내는 인간의 갖가지 행태들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점점 복잡해져가는 사회와 혼탁한 세상을 무탈하게 살아가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고전이다. 무엇보다 유교적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더없이 필요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고전 번역서인 『한비자』와 한비자로 한국 사회를 이야기한 『한비자, 제국을 말하다』. 처음 이 두 원고를 받았을 때는 걱정이 앞섰다. 고전과 관련된 원고를 맡아본 적 없었던 나에게 500페이지가 넘는 『한비자』는 오르기 힘든 높은 산처럼 느껴졌고, 『한비자, 제국을 말하다』는 시의성을 가진 원고라 책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업이 진행될수록 이 두 권의 책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좋은 책에 대한 이유 없는 믿음과 역자이자 저자이신 정천구 선생에 대한 신뢰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비자’는 원문에 담긴 함의가 넓고 깊어서 그 의미를 단박에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에 정천구 선생은 명료한 번역으로 원문과 주석 없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여 독자 누구나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한비자, 제국을 말하다는 한비자의 해석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사회를 흔들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며 비판과 통찰력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한비자’를 맹목적으로 답습하지 않고, 현재를 보는 꼬투리로 삼으며 재해석한 부분은 현 시대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더없이 복잡해지고 어지러워졌으며 인간관계의 모순과 경쟁은 더욱 심화됐다. 이러한 시대에 ‘한비자’ 읽기를 권한다. 엄정한 기본과 원칙을 기반으로 부국강병을 논하는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를 통해 인간사의 실상과 이치를 깨닫고, 『한비자, 제국을 말하다』를 통해 오늘을 진단하여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드는 초석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많은 독자들이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난세의 시대를 유유자적 돌파할 수 있는 밑천을 마련하길 바란다.

 

 

『출판저널』 2016년 5월호

「<출판저널>이 선정한 이달의 책 기획노트」에 게재되었습니다.

 

 

한비자 - 10점
한비 지음, 정천구 옮김/산지니

 

 

 

 

 

 

 

 

 

한비자, 제국을 말하다 - 10점
정천구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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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별과우물 2016.05.13 0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출판 저널에 실리게 되었군요. 축하드려요! ^^

  2. BlogIcon 잠홍 2016.05.19 08: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처음 원고를 받았을 때는 걱정이 앞섰다' ㅎㅎ 공감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의 목소리를 통해 만나니 두 책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정인 소설집 『만남의 방식』

 

                       설마설마하니 진짜 그 정인(情人)이다. 저자가 소설가로서 지은 자신의 이름 정인 말이다. 저자는 소설집 『만남의 방식』을 출간한 다음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애인을 “늘 그립고, 위안과 고통을 함께 주는 존재”라고 했다. 독자로서의 나는 그립다는 말이 주는 서정이 좋았으나, 편집자로서의 나는 누군가의 타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인이라는 존재가 고독하고 연약해 보였다. 그 사랑이 진행 중이든 이미 단절되었든 상관없이 연인은 결국 누군가의 연인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만인의 연인이라 할지라도) 물론 이것은 금방 부정되어 머릿속에서 사라진 감상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고통과 고백, 치유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설집 『만남의 방식』 중 가장 어두운 편인 작품 「밤길」에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등장하는데, 예를 들면 이렇다. “마지막엔 변기에 오줌을 눠놓고 화영의 얼굴을 몇 번씩이나 처박았다. 마침내 화영이가 오줌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로 울음을 터뜨리자 깔깔거리며 말했다. 다음엔 똥이야!” 나는 괴로워하며 초교를 보고 이후 교정할 때마다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한번은 나의 고통을 호소하며 이런 장면을 쓸 때 힘들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는데, 작가는 쓸 때는 힘들지 않은데 쓰고 나서 힘들다는 요지의 답을 했다. 지금도 나는 쓰고 나서야 비로소 찾아오는 힘듦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잘 모르며, 다만 그 말을 곱씹을 때마다 어떤 강인함을 느낄 뿐이다. 대적자를 순식간에 압도하는 종류와는 다른, 이를테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냄으로써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린다는 말을 기어코 참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묵묵한 끈질김. 그것 때문에 나는 『만남의 방식』에 실린 작품 여덟 편이 앞다투어 모국어를 잊어야만 했던 남자, 딸이 자살한 여자, 성폭행을 당하고 그 기억을 잊어야만 하는 소녀, 혼자 요트를 몰고 악명 높은 파도를 뚫는 남자 들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려주어도 지나치게 괴로워하지는 않게 되었다. 독자 여러분도 그러시기를 바란다. 물론 괴롭지 않다는 말은 외면이 아니라 용기와 가까워야 할 것이다.


2014년 5월 상하이대학교와 함께하는 동아시아 문학교류를 위해 부산의 여러 소설가, 시인, 평론가와 함께 상하이에 다녀왔다. 정인 소설가도 일행이었다. 문학포럼을 경청하고 문학의 밤 행사에서 우아하게 작품을 낭독하던 작가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남다르게 기억하는 것은 작고 개인적인 일화이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와이파이가 일행 중 유독 저자에게만 불통이었다. S.O.S.를 받고 옆방으로 건너간 내가 휴대전화를 들고 이것저것 건드려보아도 해결하지 못해 다시 여기저기에 물었으나 끝내 저자는 상하이에서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했다. 저자는 답답했을지언정 이제 와 다시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구석도 있다. 그 넓은 대륙을 쥐락펴락하는 전파도 저자에게는 감히 범접하지 못한 게 아닌가. 억지가 좀 심했나? 그래도 정인은 강인하다. (출판저널 2014년 10월호 편집자 출간기에 게재된 글입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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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라는 물음』

   <해석과판단> 비평공동체 지음






* 이 글은 <출판저널> 5월 호에 실린 편집자 출간기입니다.



아직 회사 책상에 앉아보기도 전에 그러니까 내가 가장 먼저 출근한 곳은 회사가 아닌 비평공동체 <해석과 판단>의 포럼이 열리는 자리였다. 입사를 코앞에 둔 나는 긴장도 됐지만 아 포럼이라니, 이거야말로 출판사 편집자다운 일이구나 하며 은근히 좋아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마음이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날 포럼은 <해석과 판단> 멤버들이 정해진 주제에 따라 각자 공부한 내용을 발제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자리였다. 공부 주제는 하나였지만, 각자 발표한 내용은 모두 달랐다. 그들은 모두 젊었고 그때는 여름이었고, 그래서일까, 나는 조금 뜨거워진 듯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나는 줄곧 <해석과 판단>을 담당해 왔다. 비평공동체라는 수식을 붙이듯, <해석과 판단>은 학교도 전공도 서로 다른 젊은 비평가들이 해마다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정기적으로 만나 공부하며 교류하는 모임이다. 그리고 한 해 동안 각자 공부한 결과물을 책으로 묶어 낸다.

<해석과 판단>이 2006년에 결성된 이후 우리 출판사와는 지금 소개할『유토피아라는 물음』까지 총 일곱 권의 비평집을 발간했다. 그중 나는 지난해 발간한 『공존과 충돌』까지 두 권의 책을 그들과 함께했다. 담당 편집자라는 말에는 사실 많은 의미가 들어 있는 것 같다. 늘 그렇듯, 편집자는 책을 만드는 동안 작가의 원고 사정뿐만 아니라, 작가의 사정도 고려해야 하니까 말이다. 이번 비평집도 그렇듯, 서로 다른 멤버들의 원고를 잘 묶는 일도 큰일이었지만, 무엇보다 큰일은 각자의 사정이었다. 멤버들은 대부분 대학에서 시간 강사를 하는 젊은 비평가들이다. 대학에 인문학과가 통폐합되면서 그나마 시간 강사의 자리도 불안한 시대가 되었다. 마감 날짜에 맞춰 조금씩 업그레이드되는 각자의 사정을 듣고 있으면 지역에서 젊은 비평가로 살아가는 게 쉽지 않음을 느낀다. 그러나 각자 다른 사정 속에서 함께 공부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그들은 알 것이다. 소설조차도 잘 팔리지 않는 시대, 비평은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할까, 그들은 그 질문을 놓지 않고 있다.

이번 비평집에서 그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다양한 개념을 논의하고 유토피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활발하게 표출해야 된다고 말한다. 멤버들은 책 표지에 문이 닫힌 지금의 사진을 실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책 뒤표지 역시 문 사진을 실어 달라고 했다.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다시 나오자는 의미로.

이번 책에는 멤버들의 수만큼, 소설, 영화,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비평이 담겨 있다. 그들이 펼쳐내는 비평의 다양성이 우리가 조금 더 다양한 삶의 주제로 살아갈 수 있는 표출이 되기를, 나는 독자들에게도 이 책에 담긴 그들의 표출이 미약하게라도 전해졌으면 한다. 




Posted by 동글동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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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전복라면 편집자입니다.

19일 토요일에는 김해 도요마을 도요나루 도서관에서 10월의 <맛있는 책읽기> 행사가 열렸습니다. 행사 2부를 『문학을 탐하다』 최학림 기자님이 장식해 주셨습니다.

 

행사 시작 전 사인을 하고 계시는 최학림 선생님. 뒤쪽에 산지니 크리티카& 시리즈를 빛내주신 『한국시의 이론』 신진 선생님과 『김춘수 시를 읽는 방법』 김성리 선생님의 모습도 보입니다.

 

 

도요나루 도서관의 풍경이 근사하죠?

 

 

질문에 답하고 계신 선생님.

 

 

『문학을 탐하다』에 소개된 시인 엄국현 선생님과 신진 선생님, 우리들의 사장님.

 

 

행사가 끝나고 즐거운 막걸리 파티!

 

도요 창작 스튜디오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풍경이 멋집니다.

  

 

저자에게 직접 듣는 책 소개와 독자들의 낭독, 묻고답하기 시간으로 이루어진 이번 행사는 좋은 날씨와 아름다운 자연, 문인들의 정다운 분위기가 함께한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운전 때문에 엄청나게 맛있는 막걸리 앞에서 강제 금주하신 산지니 디자인 팀장님만 빼면 모두 즐거웠겠죠? 

아래는 <출판저널> 10월호에 실린 『문학을 탐하다』 편집자 출간기입니다.

 

 

 

문학기자 최학림이 만난 작가들 『문학을 탐하다』

 

『문학을 탐하다』는 기자 경력 20년의 최학림 부산일보 기자(현재 논설위원)가 부산 경남 작가들 18명과 그들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산문집이다. 비슷한 콘셉트의 책이 그렇듯 이 책 역시 청탁에서 비롯되었거나 연재 모음집은 아니다. “지역의 가치를 지역 문학을 통해 더 널리 드러내고 싶고, 이 글이 문학을 징검돌 삼은 지역 문화의 섬세한 자기 기록이 되었으면 한다.”라는 머리말에서 엿보이듯 혼자만의 우직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지역 기자로서 지역 작가를 알리겠다는 책임감에서 오는 경직과, 거기서 염려되는 진부함이 없어 한결 가뿐하게 읽힌다.

“지역을 묵묵히 지키며 글을 쓰는 뛰어난 문인들이 많다는 것은 문학 기자만이 내통하여 알 수 있는 놀랍고 지극한 사실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지역 문화와 지역 문학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또한 나의 복락이기도 하다.” 『문학을 탐하다』의 글쓰기는 분명 복락이나, 그만의 복은 아닐 것이다.

보는 이가 존재를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별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름을 붙이면 별자리가 생긴다. 그러니 『문학을 탐하다』는 지역의 밤하늘 아래 서서 무수하게 빛나는 작가들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이름붙인 작업의 결과물이라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소설가 이복구, 시인 김언희, 시인 최영철, 시인 유홍준, 소설가 김곰치, 시인 엄국현, 소설가 조갑상, 시인 신진, 시인 성선경, 소설가 정영선, 시인 박태일, 소설가 강동수, 소설가 정태규, 시인 조말선, 시인 박권숙, 소설가 이상섭, 시인 정영태, 시인 최원준이 이루는 천체도가, 저자가 붙인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은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은가.

『문학을 탐하다』에 등장하는 작가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문학을 향한 독자의 시야를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세계문학이 장바구니를 흔드는 요즘, ‘우리 동네 문학’을 돌아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독서이리라 믿는다.

짤막하지만 오래 따뜻했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최학림 기자와 산지니 식구들이 함께 중국집에 밥을 먹으러 간 적이 있다. 각자 주문한 요리는 한꺼번에 나오지 않았다. 마파두부밥을 기다리며 맨숭맨숭 앉아 있는 내 앞으로 저자가 잡채밥 그릇을 선뜻 끌어놓더니 “이것 같이 먹으며 기다립시다.” 하는 게 아닌가. 황송한 마음에 얼른 손을 내젓자 “젓가락 섞는 걸 싫어하나 보네.” 하며 다소, 하지만 진심으로 멋쩍어하였는데, 그때 저자의 조심스러운 말이며 머쓱한 표정이 송구스러우면서도 마음이 훈훈하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책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작가들에게 미안해하던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니 후에 문인들 사이에서 최학림 기자가 ‘학림 거사’로 통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우리의 ‘학림 거사’께서 언젠가 병에 걸린다면 그 이유는 분명 술 아니면 다정(多情)함 때문이리라 넌지시 짐작해보는 것이다. 다정도 병인 양하다는 시구는 있거니와 술은 왜일까 궁금한 독자에게 대답 대신 책을 권한다. 힌트를 드리자면, 저자는 문학 수업을 책상이 아닌 술상에서 받았다고 한다.

 


 

문학기자 최학림이 만난 작가들─『문학을 탐하다』(책소개)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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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 디자이너 2013.10.22 1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은 참을 수 없어 막걸리 한사발 마셨어요.
    그리고 운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