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70>

정우련 작가 소설집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소설인가 싶다가도 … 읽다보면 어느덧 내 이야기

 

 

- 16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소설집
- 예술가 부부의 지친 사랑, 고교 동창의 과거와 현재 등
  소설마다 달라지는 화자의 시선
- 등장인물에 독자들을 투영시켜

- “타인의 고통을 지나치지 못해 본인 희생해 글을 쓰는 소설가”
- 세상·사람에 대한 사랑 없이는 나오지 못했을 이야기 7편 담아


 

우리는 지금 삶의 어느 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일까. 인생을 사계절이나 24시간에 비유해서 가을이다, 또는 오후 3시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가을이 오기 전에 봄과 여름을 겪었고, 새벽과 아침을 지나서 오후로 가는 사람들. 지나온 시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온몸으로 헤쳐나가는 현재의 시간대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문득 지나간 시간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가만히 파문을 일으킬 때가 있다. ‘그 시절 그 사람들’이 여전히 마음속에 살고 있었다, 지금 관통 중인 시간대와 사람들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구나 새삼 느낀다. 빛나고 찬란했던 순간, 아프고 쓸쓸했던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는 것이 삶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소설 같은 사연을 마음에 품고 있다. 정우련 소설가의 소설집 ‘팔팔 끓고 나서 4분간’을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작가가 누군가의 인생 실마리 하나를 잡아 조심스럽게 풀어내는 것 같다는,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삶의 주인공이 술술 풀어내는 것이 보인다. 정우련 소설가를 광안리 바닷가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정우련 소설가가 단골이자 작업실인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의 한 카페에서 소설집 ‘팔팔 끓고 나서 4분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 그리움과 외로움이 가득했던 소녀

정우련 소설가는 199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자수정 목걸이’로 2000년 부산소설문학상, 첫 소설집 ‘빈집’으로 2004년 부산작가상을 수상했다. 2017년에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를 펴냈다. 2019년 올해 가을에 낸 ‘팔팔 끓고 나서 4분간’은 16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소설집이다.

정우련 소설가를 만나기로 한 카페에 들어서서 두리번거리는데, 그가 뒤에서 다가와 손을 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손길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맞다. 그는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 카페에 자주 와서 글을 씁니다. 바다로 난 큰 창가도 좋지만, 제가 좋아하는 자리는 저 안쪽입니다.” 안쪽 좌석은 탁자 앞에 칸막이가 있고 두 사람이 나란히 앉는 좌석 형태이다. 탁자 위의 노트북이 켜져 있었다. “이 건물에 호텔이 있어서 카페가 종일 영업을 하거든요. 글이 막 쏟아지려 하면 새벽이라도 여기 와서 커피 마시면서 글을 쓰곤 해요.” 작가 옆에 앉아 있으니, 그 분위기를 알 것 같다. 거슬리지 않는 적당한 소리, 커피 향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정우련 소설가는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너덧 살 무렵에 경북 성주의 외갓집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부산으로 돌아왔다. 외가는 대농이었다. 지붕 높은 대갓집에, 넓은 마당에서는 가을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타작할 정도였다. 풍성하고 넉넉했던 외가에서 살다가 부산 영도 대평동의 집으로 왔을 때 그는 낯선 환경 때문에 힘들었다. 몸과 영혼이 쉬는 ‘집’과, 그저 머물러 있는 ‘거처’가 다름을 깨달았고 외갓집을 그리워했다. 집에 대한 그의 마음은 첫 소설집 ‘빈집’을 비롯해 그의 소설마다 스며들어있다.

그리움과 쓸쓸함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걸 느꼈던 어린 소녀는 외롭고 조숙했다. 그 감성은 글쓰기로 이어졌다. 학교에선 글 잘 쓰는 아이로 통했다. 초등학교 학교신문에 시가 실렸던 날, 친구가 “련아, 네 시가 학교신문에 실렸다”고 외치며 달려왔을 때 그는 부끄러워서 창문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글공부는 학창 시절 내내 이어졌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들이 좋았습니다. 1학년 때 학교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는데, 국어교사인 문영나 선생님이 ‘너는 사물을 너무 아름답게만 본다. 하지만 사물은 아름다움과 추함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것을 볼 수 있어야 좋은 글을 쓴다’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국어 선생님들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대학 문창과 시절 ‘소설창작 실기론’ 합평회 때, 그의 작품을 놓고 동기들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합평회는 살벌했죠. 다들 글 쓰겠다고 모인 친구들이었으니까요. 격렬한 시간이 끝나면 막걸리를 마시면서 질투와 부러운 마음을 풀곤 했죠.”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통증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정우련·산지니·2019

 

‘팔팔 끓고 나서 4분간’은 ‘빈집’ 이후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들 중에서 7편을 골라 다시 퇴고하고 수록했다. 16년 만에 나온 소설집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단숨에 읽었다. 소설마다 달라지는 화자의 시선은 그동안 더 깊어지고 단단해진 소설가의 문체로 빛났다.

‘통증’은 예술가 부부의 지친 사랑과 소모적 언쟁을 보여준다. 중년여성이 느끼는 삶의 통증이 담담한 진술이라서 더 아프게 다가왔다. ‘말례 언니’는 어린아이가 지켜본 동네 식모 언니의 애달픈 삶이다. 대평동에서 자란 작가의 유년 시절 풍경이 작품의 바탕이 됐다.

‘우리들’에서는 고등학교 동창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 모두 가난했지만 풋풋한 감성을 가지고 있던 친구들이 각기 세상의 풍파를 거치고 저마다의 삶을 꾸려가는 과정이다. 이 작품에서 고등학생 정우련을 찾으려 하다가, 필자의 고교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정우련의 소설은 이렇게 독자를 자신의 시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역시, 소설은 소설이다. 작가를 떠올리려 해도 곧 이야기로 빠져들게 되고, 등장인물에 자신을 투영시켜보게 한다. 긴 인생길 어디쯤 걸어왔는지 여기가 어딘지 잠시 생각하는 것, 정우련 소설이 던지는 질문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소설가란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통증을 좀 더 예민하게 느끼는 ‘선천성 통증과대 감각증’(이런 병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환자들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의 고통마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제 삶과 건강을 통째로 갈아서 글을 쓰는 작자들 말이다. 그것은 사랑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과 세상을 사랑으로 바라볼수록 소설가는 몹시 아프겠다. 그것이 그의 운명일 터. 새벽에 노트북을 껴안고 바닷가 카페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소설로 가는 길이다.

 

책 칼럼니스트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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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팔 끓고 나서 4분간 - 10점
정우련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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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 중년 여성, 청소년, 아동 등 다양한 화자가 등장해 한때 '팔팔' 끓었거나 끓기 전이거나 막 끓어오르는 사랑과 삶을 말한다.

표제작을 포함해 단편 7편이 실렸다.

마지막 작품 '만선'은 1982년 인도양에서 만선을 하고 돌아오던 참치잡이 배가 100명 가까운 사람이 탄 베트남 난민선을 구조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정우련이 '빈집' 이후 16년 만에 선보이는 두 번째 소설집이다.

산지니. 240쪽. 1만5천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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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팔 끓고 나서 4분간(정우련 지음) = 정우련 소설가가 16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집이다. 표제작을 비롯해 ‘처음이라는 매혹’, ‘말례 언니’ 등 소설 7편이 담겼다. 작품 속에서 화자의 시선은 다양하다. 표제작은 대학 강사와 수강생 ‘나’의 만남을 통해 뜨겁지만 4분이 지나면 그 뿐인 사랑의 덧없음을 그렸다. 산지니. 240쪽. 1만5천원.

무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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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팔 끓고 나서 4분간 - 10점
정우련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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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199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정우련이 16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집이다. 표제작을 비롯해 '처음이라는 매혹' '말례 언니' 등 소설 7편이 담겼다. 작품 속에서 화자의 시선은 다양하다.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일 때도 있으며, 때론 남편과의 끊임없는 언쟁에 소모감을 느끼는 중년의 여성이기도, 친구 앞에서의 모습이 전부인 청소년이기도 하다. 이는 모두 팔팔 끓거나, 끓었거나, 끓기 전 우리들의 모습이다. 표제작은 대학 강사와 수강생 '나'의 만남을 통해, 뜨겁지만 4분이 지나면 그뿐인 사랑의 덧없음을 그렸다. 산지니, 240쪽, 1만5000원

 

 

 

◇ 폐허의 푸른빛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구모룡 문학평론집이다. 21세기 한국문학과 지역문학을 이해하는 시각을 제시한다. 저자는 "문학도 비평도 이미 자본의 제단에 바쳐진 희생물에 불과하고, 한갓 유희로 빠지지 않고 여린 진정성에 기대면서 폐허의 시간을 버텨내는 일이 시가 된 지 오래"라고 한다. 구모룡 평론가는 오랫동안 부산이라는 지방에서 비평을 하는 비평가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왔다. 산지니, 472쪽, 2만5000원

 

뉴시스 신효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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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팔 끓고 나서 4분간 - 10점
정우련 지음/산지니

 

폐허의 푸른빛 - 10점
구모룡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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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련 소설집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팔팔 끓고 나서 4분이 지나면 다 사라질 거야.

삶도, 사랑도.”

다 자라지 못한 마음을 끌어안고

끓는점을 서성이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작가 정우련의 두 번째 소설집. 『빈집』 이후 16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집으로 오랫동안 공들여 집필한 단편들이 모였다. 전작 『빈집』에서 유년시절 가족과 집을 소재로 가족 균열의 모습을 담담히 드러냈던 정우련은 이제 시선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각 소설에 단단한 깊이를 더한다.

정우련의 소설 속에서 화자의 시선은 다양하다. 화자는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일 때도 있으며, 때론 남편과의 끊임없는 언쟁에 소모감을 느끼는 중년의 여성이기도, 친구 앞에서의 모습이 전부인 청소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모두 팔팔 끓거나, 끓었거나, 끓기 전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삶과 사랑에서의 4분의 의미와 무용함을 되새긴다.

 

 

가장 뜨거웠던 시간 후에

뭉근한 삶의 궤적을 돌아보다

표제작 「팔팔 끓고 나서 4분간」은 대학 강사와 수강생 ‘나’의 만남을 통해, 뜨겁지만 4분이 지나면 그뿐인 사랑의 덧없음을 그린다. ‘나’와 ‘그’는 폭력에 대한 아픔을 공유하며 깊은 사이가 되지만, 사랑은 점점 식어간다. 소설은 점차 바래가는 나의 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요양병원에서 연명하는 아버지의 삶을 교차한다. 아버지의 삶은 ‘4분 후’로 비유되며, 빛나는 시간이 지나버린 삶에 대한 쓸쓸함을 되뇌게 한다.

이런 정우련의 삶에 대한 무거운 시선은 「처음이라는 매혹」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서 살아가는 88세 독거노인의 어느 하루를 그린다. 노인은 권태에 찌든 채 이제 본인에게 남은 매혹적인 순간은 죽음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나’는 노인의 권태를 들여다보며 나의 삶을 관조한다. 「통증」은 전쟁의 상흔을 몸속에 품고 있는 조각가 남편을 바라보는 소설가 아내 ‘나’의 이야기이다. 둘은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나오던 사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결국 서로를 연민하는 동시에 증오하게 된다. 이렇게 정우련은 뜨거웠던 순간이 지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네며, 독자에게 각자의 삶의 궤적에 대해 반추하게 한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아픔을 긍정하며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태도

정우련은 전작에 이어 유년기의 ‘성장’에 주목한다. 「말례 언니」는 이웃집 가사도우미 말례 언니의 연애편지를 대필해주는 초등학생인 ‘나’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말례 언니의 불안한 삶을 관찰하는 ‘나’는 그 과정에 얽혀 비극을 겪지만 결국 성장한다. 「까마귀 길들이기」에서 역시 사춘기 소녀들의 아픈 통과의례와, 그 후의 성장 과정을 이야기한다.

한편 유년기의 성장을 반추하며 ‘지금’의 시선에서 나의 성장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우리들」에서는 B여상 동창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여상 시절을 회상한다. ‘우리들’은 어느덧 다 성장하여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외롭고 거칠었던 성장기도 긍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처럼 정우련 작품 속의 인물은 성장과정과 성장 이후의 시기에도 어두운 현재를 지나지만, 늘 빛에 대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정우련은 이를 통해 아프지만 가능성 있는 성장의 힘을 이야기한다.

 

 

흑색과 백색의 무미건조한 삶 속에서

와락 얼굴을 묻고 싶은 촉촉한 작품들

마지막 작품 「만선」은 실화를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이다. 소설은 1982년 인도양에서 참치잡이 만선을 하고 돌아오던 중 96명이 탄 베트남 난민선을 만나 그들을 구조한 선장의 이야기를 전한다. 베트남 난민을 외면하라는 정부와 회사의 지시를 거부한 선장의 내면적 갈등을 공유하고, 96명의 생명을 구한 일을 ‘만선’이라고 본 선장에 대한 외경심을 이야기한다. 정우련의 소설에서는 이처럼 건조한 삶을 버텨내는 촉촉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는 작가가 삶에서 ‘4분’의 쓸쓸함을 말하지만 결국 삶을 긍정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또한 단편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풍부한 주변 인물의 설정에서,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돋보인다. 작가는 결국 4분 뒤에 남는 것은 사람이며, 그들은 때로는 어깨를 내어주고, 울고, 웃음 지으며 ‘함께’ 삶을 살아간다고 말한다. 작가가 건네는 일곱 편의 이야기를 통해 나와, 친구와, 가족의 4분을 들여다본다.

 

첫 문장

그들은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출발할 때는 그녀가, 휴게소를 두어 번 지나서는 그가 운전대를 잡았다.

 

책속으로 /밑줄긋기

P.14 어느 날 문득, 그녀는 어디서부턴가 자신이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을 어떻게 되짚어가야 할지 막막했다. 갱년기와 함께 느닷없이 찾아온 그 느낌은 흰옷에 남은 묵은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도무지 문장이 되지 않는 지옥 같은 날들. 숨길 수 없는 것이 어디 감기와 사랑뿐일까. 소설가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도 금방 탄로 나고 마는 일 중 하나였다. 그녀는 초조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하지만 잠들지 못하는 밤에 책상에 앉는다고 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도 호소할 길 없는 피로감이 쌓여갔다.

P.16 나무에 결이 있듯이 돌에도 결이 있다구. 어떤 물질이든 결을 거스르지 않고 깨나가야 스스로 제 몸의 긴장을 풀지. 몸을 열고 긴장이 풀린 돌을 깨는 거야 두부 자르기보다 쉬운 일이야. 남들은 그 큰 돌을 어떻게 깨냐고 놀라지만 알고 보면 다 요령이 있는 거라구.

P.176 물이 끓기 시작해서 4분 후면 계란이 알맞게 익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끓고 나서 4분 후면 끝이라는 거. 그다음은 잡지의 부록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란 생각이 들더라. 그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또 내일과 같은 그런 반복이거나 연명에 지나지 않는 삶이잖아.

P.181 엄마는 해 질 녘이면, 누군가 내다 버린 의자를 기운 누더기 같은 다 쓰러져가는 집 앞에 갖다 놓고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곤 했다. 어딘가 이승 저 너머에 가 있는 것 같던 그 공허하고 외로운 눈빛. 살짝 취해서 비칠대며 골목을 걸어 들어오던 노인의 입가에 걸려있던 어딘지 민망해하는 듯 권태가 묻어나던 희미한 웃음. 이상하게도 그런 모습들이 떠오르면 울컥 울음이 치밀었다. 가난과 죽음이 잠복해있는 도시의 뒷골목으로 흘러들어 온 노인에게서 문득문득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P.184~185 그러고 보면 요즈음 들어 엄마는 말끝마다 ‘생전 처음’이란 말이 입에 붙었다. 독감이 나아서 퇴원한 뒤부터는 유독 더 그랬다. 늘 먹던 음식인데도 생전 처음 먹어본다고 감탄하거나, 약 먹을 시간을 놓쳐서 통증이 느껴지면, 세상에 이렇게 아프기는 생전 처음이라고 쩔쩔맸다. 이리 땐땐하고 맛있는 감은 생전 처음 먹어본다거나, 봄도 아닌데 딸기를 먹어보기도 생전 처음이라든가, 자주 꾸는 연탄불 피우는 꿈을 꾸고 나면 그리 불이 안 붙기도 생전 처음이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자 소개

 

정우련

199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문단에 나온 이후 「자수정 목걸이」로 2000년 제5회 부산소설문학상을, 소설집 『빈집』으로 2004년 제4회 부산작가상을 수상했다. 2017년 끝에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를 발간한 뒤 비로소 소설 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목차

 

통증

까마귀 길들이기

우리들

말례 언니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처음이라는 매혹

만선

 

작가의 말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정우련│240쪽│국판 변형(135*205)
978-89-6545-628-5 03810
15,000원│2019년 9월 30일

『빈집』 이후 16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집으로 오랫동안 공들여 집필한 단편들이 모였다. 전작 『빈집』에서 유년시절 가족과 집을 소재로 가족 균열의 모습을 담담히 드러냈던 정우련은 이제 시선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각 소설에 단단한 깊이를 더한다.

정우련의 소설 속에서 화자의 시선은 다양하다. 화자는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일 때도 있으며, 때론 남편과의 끊임없는 언쟁에 소모감을 느끼는 중년의 여성이기도, 친구 앞에서의 모습이 전부인 청소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모두 팔팔 끓거나, 끓었거나, 끓기 전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삶과 사랑에서의 4분의 의미와 무용함을 되새긴다.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 10점
정우련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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