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3화 :: 왜구를 막았던 '신라의성'에 왜성이 들어서다

 -부산 구포·양산·호포 왜성

 


 

 

  시인 김용호(1912~1973)는 그의 대표 장시 <낙동강>에서 “칠백리 굽이굽이 흐르는 네 품속에서/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고 했다. 유구한 세월을 도도히 흘러 남하하면서 반변천·내성천·영강·위천·감천·금호강·황강·남강·밀양강·양산천 등 여러 지천을 품어안고 멀리는 가야와 신라 천년의 영욕에서부터 가까이는 6·25전쟁의 참상과 4대강 사업에 따른 몸살까지 겪으면서 영남인들에게 삶의 젖줄이 돼왔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 때도 낙동강 수로는 왜군에게 진격, 후퇴, 방어의 중요한 통로가 됐다. 특히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닷길을 통한 서쪽 진격로가 봉쇄되자 왜군은 낙동강 하류 수로를 통해 서·북쪽 내륙으로 연결되는 길목인 김해, 구포, 양산 등지에 왜성을 쌓고 교두보를 마련하려 했다.

  대표적인 예로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 때 왜군은 부산 동래에 집결한 대규모 병력을 이 수로를 이용해 진주로 실어날랐다.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도 1592년 7월 한산도·안골포 해전에서 왜 수군을 대파한 뒤 달아나는 패잔병들을 쫓아 이 수로를 따라 김해, 양산, 구포 일대를 수색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 신라 장군 의기 서린 ‘의성’(義城)에 들어선 왜성

 

  부산 북구 덕천2동 산93 일대에 있는 구포왜성은 왜군 제6군 수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휘하 장수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이 임진왜란 발발 1년여 뒤인 1593년 7월 낙동강 수로 확보와 인근 김해·양산지역 왜성과의 연락 및 지원을 위해 쌓은 왜성이다. 금정산 상계봉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지맥이 끝나는 곳의 해발 75.7m와 36.5m 높이 두 구릉에 각각 본성과 외성을 쌓아 연결했으나 1970년대 낙동강교 건설로 단절됐다. 외성은 2005년 북구 문화빙상센터가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본성부 2만9548㎡만 보존돼 부산시기념물 제6호로 지정돼 있다.

 

  구포왜성은 상계봉 쪽 능선을 끊어 북동쪽으로 방어망을 치고 서쪽과 북쪽으론 낙동강 수로를 통해 김해와 양산 방향으로 나가고, 동쪽으론 만덕고개를 넘어 동래 방향과 연결되는 전략상 요충지에 자리잡았다. 본성은 낙동강과 주변을 잘 관망할 수 있는 정상부에 본곽을 쌓고, 이를 중심으로 한두 단계 아랫쪽 주위까지 모두 5개의 성곽을 두르고, 그 아랫쪽에 다시 4개의 성곽을 배치한 형태다.

 

  본곽 주위 성곽은 60~70도로 비스듬히 쌓은 석축이 8~10m 높이로 비교적 잘 남아 있고 본곽 안에 성의 심장부요 지휘소 격인 천수각 터도 있다. 현재 본곽은 빈 터로 남아 있지만 주위 다른 성곽 터는 대부분 경작지 또는 사찰 터로 편입돼 관리 부실의 우려를 안고 있다.

 

 

 

■ 수륙교통 요지에 남긴 왜성

 

  양산은 조선 전기 경상좌도 남부의 중요 교통 요지로서 11개 속역을 거느린 황산역과 7개 원을 두고 있었다. 황산역은 조선시대 동래에서 한양까지 연결된 간선도로 구실을 했던 영남대로의 중요 거점으로서, 동래를 거쳐 올라온 관리들이 밀양이나 김해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이 됐다.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산1 일대의 양산왜성은 바로 이 황산역의 교통로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왜군이 쌓은 성이다. 양산시 동면 가산리 산 56-1 일대에 있던 호포왜성은 양산의 7개 원 가운데 호포원이 섰던 교통의 요지를 이용해 왜군이 거점을 마련했던 곳이다.

 

  양산왜성은 명과 일본의 강화교섭이 깨지면서 왜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해 일으킨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2월 왜장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남진하는 조·명연합군으로부터 부산의 본진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양산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삼각주의 해발 133m 야산 두 봉우리 가운데 동북쪽의 높은 곳에 본곽을 쌓고 동북쪽으로 길게 부곽을 2개 붙였으며, 서남쪽으로도 능선을 따라 부곽을 5개 정도 길게 연결한 뒤 봉우리 쪽에 별도 중심곽을 배치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본곽 성벽은 4~6m 높이로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부곽 쪽은 허물어진 곳이 많다. 성벽 둘레는 1.5㎞ 가량 된다.

 

  본곽 동남쪽 아래 산기슭에도 별도 성곽이 남아 있는데 터가 모두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밭 곳곳에서 삼국시대 토기와 조선시대 옹기 파편 등이 발견됐다. 양산왜성은 ‘물금 증산리왜성’이라는 이름으로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276호로 지정돼 있다.

 

  이 왜성은 뒤에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고쳐 쌓고, 구로다 죠수이(黑田如水)·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부자가 주둔했다. 양산왜성이 있는 산은 부산의 증산왜성처럼 꼭대기를 깎은 모양이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산으로 불린다.

 

  지역 행토사학계에선 이 왜성도 구포왜성처럼 <삼국사기>에 ‘사도성’(沙道城)으로 기록된 삼국시대 성터에 축성한 왜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산왜성과 양산천 및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호포왜성은 현재 철저하게 훼손돼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태다. 서쪽 전반부는 35번 국도와 촌락 및 농경지 개설로, 동쪽 후반부는 부산교통공단의 지하철 기지창 건설로 인해 파괴됐다. 호포는 금정산 서쪽 끝자락에 양산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에 있던 교통 요지의 나루로서, 조선 전기까지 호포원이 있다 폐원됐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그 자리에 왜성을 쌓아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포왜성은 축성 시기도 명확하지 않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호포원은 당시 양산군에 있던 7개 원의 하나였는데, 이미 북정원과 함께 폐원된 상태였다. 원으로서의 가치가 약화됐거나 잦은 홍수로 인한 범람 때문에 폐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성은 물론 이에 앞서 호포원과 관련한 유구도 충분히 나올 만한 가능성이 큰 곳인데도 사전에 문화재 발굴조사도 없이 국도나 지하철 기지창 건설 공사가 강행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호포원과 호포왜성은 그 이름과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개발 만능주의와 무지로 인해 소중한 역사문화자산을 잃게 된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될 만하다.

 

>> 4화에서 계속

 

*본 게시물의 순서와 책의 목차는 상이합니다.

*게시물의 내용은 책 본문의 내용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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