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저자 조세현 교수, 김필남 평론가.

산지니 6월 저자와의 만남
『부산화교의 역사』, 조세현

 

6월 11일 수요일 서면 러닝스퀘어에서 산지니와 『오늘의문예비평』이 함께하는 저자와의 만남이 열렸습니다. 이번으로 벌써 60회를 맞는 6월 저자와의 만남 주인공은 『부산화교의 역사』를 쓴 조세현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입니다. 계간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인 김필남 평론가가 즐거운 대담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로컬문화총서 04
『부산화교의 역사』
조세현 지음
역사 | 국판 양장 | 208쪽 | 16,000원
2013년 12월 30일 출간 | ISBN : 978-89-6545-236-2 94300

인천화교가 중심이었던 기존 한국화교 연구의 폭을 확장한 저서로서, 부산화교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시대에 따라 청국조계지, 시나마치(支那町), 청관(淸館)거리, 상해(上海)거리로 불리던 부산화교의 역사와 함께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까지 되짚을 수 있다.

 

 

가장 먼저, 한국에서는 인천화교가 가장 유명한데 부산화교를 대상으로 책을 쓴 계기를 묻자 “사투리는 쓰지 않지만 초중고 모두 부산에서 나온 부산 사람”이라며 시민 인증(?)부터 한 저자는 전공인 중국 근현대사상과, 성장했고 또 몸담고 있는 도시인 부산을 연결할 수 있는 주제를 찾다 부산화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저자는 “앞으로의 연구에 돌 하나 얹는 마음”으로 쓴 책이라며 대담 내내 겸허한 모습이었지만 부산화교에 대해서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분명한 입장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크고 중요한 것들만 연구할 가치가 있는 건 아니겠죠?

이야기는 한국, 그중에서도 부산 화교의 특징으로 이어졌습니다. 전 세계 화교는 대다수가 중국 복건성이나 광동성 출신의 남방화교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화교들은 특이하게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산동 화교가 많습니다. 인천에 들어온 화교들이 주로 노동자임에 반해 부산의 화교는 소수이긴 하지만 일본 차이나타운의 지원을 받은 복건성 출신의 화교 상인들이 들어옵니다.

 

경청하는 독자 여러분.



초창기 부산화교는 청나라 조정의 지원을 받은 지배자로서 등장합니다. 저자는 여기서 ‘상해네트워크’(19세기 후반 상해를 중심으로 영국제 면직물을 수입하여, 다시 상해에서 화북지역, 조선, 일본 등으로 재수출하는 유통구조-『부산화교의 역사』에서 인용)를 언급하셨는데요.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받는 것이 초기 한국화교, 인천화교와는 다른 점이라고 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부산에도 산동화교들이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초반에는 화교가 청조의 지원을 받은 지배자로 등장하지만 청일전쟁을 겪으며 바뀝니다. 특히 한국전쟁 시기 ‘중공군 때문에 통일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화교를 백안시하고, 한국 화교들의 국적도 대만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1992년 한중수교가 성사되자 한국과 대만의 관계는 끊어지고 화교의 정체정에도 혼란이 옵니다. 이외에도 박정희 정권의 화교억압정책 등 한국의 화교들은 역사적 사건에 따라 다사다난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부산을 배경으로 한 주제이니만큼 참가하신 분들도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여주셨는데요. 현재 부산에 거주하는 화교의 수와, 부산화교의 상징적 건물 봉래각, 차이나타운 축제와 발전, 화교억압정책, 짜장면(!) 등 다양한 제제의 문답이 오갔습니다.

 

 

원래 이번 행사는 초량 차이나타운 축제 때 한중우호관에서 개최하려고 했는데, 세월호 참사로 축제가 무기한 연기되자 불가피하게 장소를 서면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유익한 시간이라 모두가 즐거웠지만 단 한 명, 대관을 담당한 편집자 Y의 마음은 빠듯한 시간 때문에 원래 콩만 했던 것이 아예 좁쌀이 되었다나 어쨌다나.

재미난 이야기 들려주신 선생님과 대담자 김필남 선생님, 와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다음 저자와의 만남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청국조계지에서 상해거리까지─『부산화교의 역사』(책소개)

 

 

부산화교의 역사 - 10점
조세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大家好!
여러분
안녕하세요, 산지니입니다.

계간 『오늘의 문예비평』과 함께하는 제 60회 산지니 저자와의 만남 주인공은 『부산화교의 역사』 저자 조세현 교수님입니다.

혹시 부산 초량 차이나타운과 금강산의 공통점이 뭔지 아시나요? 바로 다른 이름을 넷이나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금강산은 계절마다 이름이 달라지지만, 차이나타운은 시대에 따라 이름을 달리했지요. 청국조계지, 시나마치(支那町), 청관(淸館)거리, 상해(上海)거리로 말입니다. 각각의 이름에 따른 차이나타운의 역사, 그리고 부산의 역사를 함께 짚어보게 될 이번 저자와의 만남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행사는 1시간가량 진행하며 참가비는 없습니다. 행사 중 토스트와 음료를 무료로 드실 수 있고 추첨을 통해 산지니 책을 선물합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일시: 2014년 6월 11일 수요일 저녁 7시
장소: 러닝스퀘어 서면점 (동보플라자 맞은편 모닝글로리 3층)
대담: 김필남(『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
주최: 산지니, 오늘의문예비평

 

청국조계지에서 상해거리까지─『부산화교의 역사』(책소개)

 

 

Posted by 비회원

안녕하세요, 전복라면 편집자입니다.

점심을 먹고, 오늘 저녁 이주홍 문학상 시상식에 갈 편집자 Y를 따라 이규정 소설가께 선물할 꽃을 사러 갔습니다. 오는 길에 꽃을 들고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Y가 졸업사진 같다고 놀렸어요. 이상도 하지, 꽃과 제가 한데 있으면 구분이 잘 안 될 텐데 어떻게 찾아냈을까요...Y는 역시 눈 밝은 편집자. 하하하^^;

 

북디자이너를 기다립니다>> http://sanzinibook.tistory.com/notice/1088

 

 

Posted by 비회원

 

 

 

 

‘바닷물이 닿는 곳에 화교(華僑)가 있다.’

화교들의 적응력을 빗댄 말이다. 국내에선 중국과 가깝고 개항 역사가 긴 인천 화교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인천과 더불어 대표적인 개항지였던 부산은 어떨까?

조세현 부경대 교수(사학)가 최근 펴낸 ‘부산화교의 역사’(산지니)는 인천 화교에 가려진 부산 화교와 화교촌의 어제와 오늘을 연구한 책이다. 특히 그간 잘 조명되지 못했던 한중 수교(1992년) 이전 부산 화교의 역사가 담겼다.

부산 화교촌은 부산 동구 초량동 일대로 오늘날 ‘상해거리’로 불리는 지역이다. 지금도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 음식점과 한의원이 들어서 있고, 중국풍의 주민센터가 있는 부산의 차이나타운이다.

부산 화교의 기원은 임오군란(1882년) 후 조선과 청나라가 무역협정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4년 지금의 초량동에 청국 영사관인 ‘청관(淸館)’이 들어서고 청국인 거주를 위한 조계지(租界地)가 인천의 3배 규모로 들어서면서 화교가 본격 유입됐다. 조 교수는 “개항 초기 부산 화교는 인천 화교의 주류인 산둥계가 아닌 남방의 광둥계였다”며 “나가사키, 고베 등 일본 개항지에 진출했던 광둥계 중국 상인이 부산으로 건너온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1893년 조사 당시 인천 화교의 인구가 711명일 때 부산 화교 인구는 142명이었다.

부산 화교는 당시 조선의 화교가 그랬듯 주로 포목점이나 중식당을 운영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고 1913년 청국 조계지를 없앤 뒤로는 면제품 수입을 겸하던 포목점에서 중식당으로 업종을 바꾸는 이들이 늘었다. 이 시기는 값싼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 ‘화공(華工)’과 ‘화농(華農)’이 유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부산 화교촌의 명칭도 시대별로 부침을 겪었다. 개항 초기 ‘청국 조계지’였던 것이 일제강점기에는 ‘시나마치(支那町)’로, 광복 이후에는 ‘청관거리’로 불렸다. 6·25전쟁 이후 주한 미군을 상대하는 유흥가가 들어서면서 ‘텍사스촌’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곳은 한중 수교 이후 부산시가 중국 상하이 시와 자매결연을 하면서 오늘날의 ‘상해거리’가 됐다.

부산 화교 사회의 확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6·25전쟁 때였다. 전쟁으로 화교 피란민이 몰려들면서 1942년 230명이던 부산 화교는 전쟁 기간 5000명을 웃돌았다. 전국 화교 5명 중 1명꼴로 부산에 살던 시절이다. 청관거리 인근에 ‘충효촌’이라는 화교 피란촌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1960, 70년대 한국 정부의 화교 차별로 화교 상당수가 대만으로 떠나가면서 활기를 잃었던 부산 화교촌은 한중 수교 이후 중국 국적의 ‘신화교’가 대거 유입되고 있다. 조 교수는 “양안 관계 때문에 대만 국적의 구화교와 신화교의 관계가 정치적으로는 껄끄러운 측면이 있지만, 신화교가 음식점을 열며 대거 진출한 초량동 일대에서는 구화교와 신화교가 잘 어울려 지내는 편”이라고 말했다. 2002년 현재 한국의 화교 인구는 2만1782명으로 서울 34%, 인천 15%, 부산 14% 순으로 조사됐다.

 

 

 

2014. 02. 13 동아일보 우정렬 기자

 

출처: http://news.donga.com/3/all/20140213/60806520/1

책소개: 청국조계지에서 상해거리까지─『부산화교의 역사』(책소개)

 

부산화교의 역사 - 10점
조세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청국조계지에서
상해거리까지,

부산화교의 역사

 

 

“바닷물이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 이 말 들어보셨죠? 세계 각국에 널리 정착한 화교의 특성을 비유하는 말이지만, 한국의 대표적 차이나타운인 인천이 항구도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재미있기만 한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제일의 항구도시 부산은 어떨까요? 여러분들은 한국의 화교 하면 어디가 제일 먼저 떠오르시는지요? 한국의 화교 연구는 대체로 인천화교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타 지역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수준입니다. 일반인들의 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시 동구 초량에 위치한 부산 차이나타운 특구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관심의 대상은 매년 열리는 축제며 중식당 등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산지니 로컬문화총서의 네 번째 책인 『부산화교의 역사』는 한국화교 연구의 폭을 확장한 저서로서, 부산화교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차이나타운에 거주한 화교들의 출신이 시대에 따라 바뀌면서 그곳의 이름 또한 조금씩 달라졌는데, 이 책은 그 네 가지 이름인 청국조계지, 시나마치(支那町), 청관(淸館)거리, 상해(上海)거리로 구분·전개되며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화교의 역사에서 부산의 역사를 읽는다

부산에 화교가 이주하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후반으로, 임오군란 후 조선과 청국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부터입니다. 1880년대 초반부터 일본의 개항도시에서 거주하고 있던 일부 화교가 일본인들을 따라 부산에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에서 무역을 하던 광동 출신 화상이 종업원을 보내 부산에서 덕흥호(德興號)라는 지점을 개업하려 했지만 이미 부산에 들어와 있던 일본 상인들과 마찰이 생기며 청일 간의 외교 분쟁으로까지 번진 ‘덕흥호사건’부산화교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부산에 청국영사관 설치도 잠정 결정되고 청국조계 후보지도 확정되었습니다. 덕흥호사건은 인천 등 개항지 청상(淸商)들이 중국에 본점을, 조선에 지점을 두는 방식과는 다른 사례로서, 부산화교의 기원이 일본에 거주하던 화교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비롯해 조선을 사이에 둔 청과 일본의 힘겨루기가 팽팽했던 근현대사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한편,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였던 시절에 일본인들은 차이나타운을 중국인(지나인, 支那人)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시나마치(支那町)로 불렀습니다. 이 시기 화교들은 적성국 국민이 되어 정치적 탄압을 받았으며, 특히 지리적으로 일본과 긴밀했던 부산에서 화교의 활동은 더 많이 위축되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만보산사건과 중일전쟁 등으로 화교 다수가 본국으로 귀환했습니다.


해방 후 한국화교는 남북분단과 국공내전을 시작으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는데, 내전을 피해온 중국인들로 인해 부산의 화교인구도 다른 도시처럼 제법 증가하였습니다. 화교에게 또 다른 변화를 안겨준 계기는 한국전쟁입니다. 한국전쟁에 따른 냉전은 화교들에게 대륙과 대만 중 하나를 조국으로 선택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국가 개념을 생성하게 하였으며, 몰려드는 피란민으로 인해 부산의 영주동, 황령산 일대, 서면 주변 등 세 곳에 전시 화교촌이 건설되었습니다. 전쟁 직후 몇 년은 부산화교의 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으며, 전쟁이 끝난 후 부산에 머무른 화교도 적지 않았습니다. 국공내전과 특히 한국전쟁을 계기로 부산에 정착한 화교들이 일제강점기부터 거주하던 소수의 원주민을 대체하였습니다. 특히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던 반공포로가 부산화교의 일부를 구성한 사실은 이채롭습니다.

 

소수자의 역사, 더 나은 지역공동체를 위한 거울

이런 초량 차이나타운은 지리적 위치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지만, 청관거리의 주인인 화교들의 출신은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게다가 해방 후 미군의 텍사스거리, 러시아인의 외국인 쇼핑거리, 최근의 상해거리까지 변신을 거듭하며 다문화공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사례이다.
그러나 초량 차이나타운의 역동적인 변화는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그리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중국인으로, 대만에서는 한국인으로, 심지어 대륙에서는 외국(대만)인으로 대접받으며, 한마디로 찬밥 신세였던 화교들의 신세는 기구하였다. 우리가 소수자인 화교들의 슬픈 역사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은 어쩌면 좀 더 나은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자기반성의 한 과정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

 

 

휴전 후 폐쇄적인 공간이던 청관거리는 화재 전 부산역에 있던 텍사스촌이 옮겨오면서 또 한 차례 변모하였고 호황도 누렸지만, 1960년대부터 한국정부가 화교의 경제활동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실시하면서 화교의 수가 감소하였습니다. 이후 1992년에 한중수교가 수립되자 부산시는 중국 상해와 자매결연을 맺고 1999년 8월에 청관거리를 ‘상해거리’로 명명하였습니다. 현재 부산의 차이나타운은 본래 화교들의 거주지에서 출발했으나 일본인, 미국인, 러시아인, 동남아인까지 거류하면서 다국적 공간의 관광명소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부산화교의 역사는 부산과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공유하며, 나아가 그 이면과 그늘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소수자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더 나은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길일 것입니다.

 

 

 

조세현
서강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마치고 북경사범대학에서 중국 근현대 사상사와 문화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책세상, 2001), 『淸末民初無政府派的文化思想』(중국 사회과학문헌출판사, 2003),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교류와 연대』(창비, 2010) 등이 있다.

 

 

 

 

로컬문화총서 04
『부산화교의 역사』
조세현 지음
역사 | 국판 양장 | 208쪽 | 16,000원
2013년 12월 30일 출간 | ISBN : 978-89-6545-236-2 94300

인천화교가 중심이었던 기존 한국화교 연구의 폭을 확장한 저서로서, 부산화교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시대에 따라 청국조계지, 시나마치(支那町), 청관(淸館)거리, 상해(上海)거리로 불리던 부산화교의 역사와 함께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까지 되짚을 수 있다.

 

 

 

차례

 

부산화교의 역사 - 10점
조세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