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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우10

고종은 왜 명성황후 복수에 집착했나? 1895년 8월 20일 경복궁에 잠입한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시해하고 암매장한다. 을미사변이다. 황후의 국장은 2년이 훌쩍 지난 1897년 11월 21일에야 치러진다. 아관파천과 환궁, 대한제국 선포 과정에서 고종은 황후의 복수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칙령에서 을미사변을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협박해 법령을 혼란시킨 만고에 없던 일'로 규정하고 을미의병들이 국모 복수를 위해 충절로 궐기했다고 평했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편전에 해당하는 경소전을 황후의 혼백과 유해를 안치한 빈전으로 삼음으로써, 통치의 우선 과제에 황후의 복수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황제 즉위 절차적 정당성 획득 노려 근대화 압력 맞선 군주제 변신 추적 고종은 왜 국장을 미루고 황후의 복수를 이토록 강조했을까? '근대 서.. 2014. 11. 10.
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 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 - 박원용 외 지음/산지니 19세기 서세동점의 시기에 동아시아 각국의 군주와 지배 엘리트들이 군주제 유지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각국의 특수성은 어떠했는지를 비교해 살핀다. 조선은 황제를 중심으로 전제군주제를 도모했으며, 청나라에선 만주족과 한족, 군주입헌제와 민족주의가 대결했다. 또 일본에선 막부와 장군을 중심으로 한 에도시대 군주제가 조정과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군주제로 변모했으며, 러시아의 군주정은 우익 정치세력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허약한 모습을 보였다. 티베트에선 독특한 정교합일의 전통이 달라이 라마에 투영됐다. 이들의 비교 연구는 어떤 함의를 줄 수 있을까. 저자들은 전통을 지키려는 다양한 군주론 또한 당시 근대화론이나 혁명론 못지않게 중요하다.. 2014. 11. 10.
폐쇄적 동아시아 전제군주, 외세 물결 어떻게 대응했나 19세기 극심해지는 외세의 침투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막부는 조정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이전까지 막부가 유일한 국가의사 결정기구로 작동했던 것과는 달라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외 위기와 내부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강력하게 통합된 의사결정기구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조정이 쇼군을 정점으로 한 막부를 타도하고 새로운 군주제를 창출하는 과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막부 중심의 체제가 수백년간 지속되면서도 천황의 종교적, 학술적 권위를 존속시킨 것은 새로운 정치체제 형성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유신의 관료들은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천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전국을 순행(巡幸)하게 하고 천황의 사진, 초상과 같은 시각적인 장치들을 활용했다. 또 하나.. 2014. 11. 10.
왕좌는 흔들리기 시작했다─『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책소개) 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 동아시아 5개국의 대응사례를 중심으로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동쪽의 왕좌를 흔들다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인 19세기 이전의 동아시아 각국은 폐쇄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적 세계질서를 축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외교는 동아시아라는 큰 틀에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명치유신을 통해 강력한 입헌군주제인 ‘근대일본과 천황제’ 모델을 비교적 빠른 시기에 성립하자 유학파, 친일파, 외교관 등 다양한 통로로 조선과 청에 일본의 모델이 소개되고 논의되었습니다. 조선의 갑오개혁과 대한제국 성립 그리고 청 왕조의 무술정변과 20세기 초의 개혁노력은 일본의 모델을 수용하고자 하는 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2014.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