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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또는 어쩔 수 없이 바다를 건너야 했던 사람들_『바다를 건넌 사람들 2 』 일일특강🌫️

by _Sun__ 2022. 11. 11.

안녕하세요, SUN편집자입니다.

오늘은 부경인문학 일일특강 14차 후기를 남기기 위해 여러분을 찾아왔습니다.

 

펄럭

 

지난 11월 3일에는 부경대학교 HK교수이신 서광덕 선생님과 최민경 선생님과 함께 바다를 건넌 사람들 Ⅰ』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부경대학교 HK교수이신 공미희 선생님과 이상원 선생님께서 바다를 건넌 사람들』 특강을 진행해 주셨습니다!

 

공미희 선생님은 '부산항에 입항한 베트남 보트피플'을 주제로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보트피플'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보트피플'의 어원은 원래 강이나 바다에서 배를 띄워 그 배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베트남전쟁 이후부터는 공산화되어 가는 베트남을 떠나 주로 배를 타고 해로를 통해 국외로 탈출하는 난민을 지칭하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보트피플은 1973년부터 속출하여 1975년~1978년 사이에 정점을 찍었습니다. 1차 보트피플은 정치인, 관료와 같은 상류층이 주를 이루었고 2차 보트피플은 1979년 중월전쟁의 여파로 화교, 상인, 중상층 난민들이 대다수였습니다. 

부유층은 운 좋게 홍콩에 정착하여 프랑스, 독일, 미국, 캐나다 등으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중산층의 경우는 바다 위를 떠돌면서 보트 위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식량과 식수가 부족하였고 심지어 배는 매우 더웠다고 합니다. 

 

 

바다 위에서 우연히 이들과 마주한 광명 87호 선장 전제용 씨는 출항 전 "보트피플을 무시하라"라는 지시를 받았음에도 도의적인 책임으로 그들을 구조하였습니다. 보트피플과 함께 부산항에 입항한 전제용 씨는 해직당했습니다. 지시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전제용 씨를 다시 찾은 것은 피터 누엔 씨였습니다. 보트피플의 리더를 맡았던 피터 누엔 씨는 미국에 자리를 잡고 보트피플 타운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애타게 전제용 씨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의 노력 끝에 전제용 씨와 연락이 닿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감동적인 사연도 있었지만 배 위에서 사고,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은 보트피플도 많았습니다. 공미희 선생님은 난민에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을 막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고향을 떠나 배 위에 오를 일도 없을 테니까요.

세계정세가 위태로운 지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보트피플의 이야기였습니다.

보트피플은 부산항에 내려 임시수용소인 구 부산여고로 향했습니다. 임시수용소에서의 그들의 일상이 궁금했다면 아래의 영상을 시청해 주세요! 덧붙여 책에는 위와 같이 보트피플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많이 있으니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상원 선생님은 '대항해시대 바다를 건넌 일본인 노예'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일본인과 노예라니 낯선 조합입니다. 일본인 노예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일본인 노예는 예수회가 일본에 들어오면서 시작됩니다.

1586년 3월 16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예수회 선교사이자 일본 총책임자 격인 코엘료를 접견하고 같은 해 5월 예수회에 포교 허가증을 발급해 주었습니다. 규슈정복에 이어 일본 전국통일과 대륙정복이라는 자신의 야망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옐로가 스페인 함선을 과시하며 히데요시에게 경솔하게 굴고 그들과 함께 온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인으로 노예 거래하자 히데요시는 바테렌(신부) 추방령을 공표합니다. 

 

 

이처럼 일본인 노예시장은 그 규모가 컸습니다. 가난한 집을 위해 스스로 노예로 팔리기도 하고 가난한 부모가 자녀를 팔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정당한 이유로 노예가 된 것처럼 수속을 밟았지만 실제로 합법적을 노예가 된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당시 포르투갈 총포를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일본의 한 군주는 총포 2자루를 구매하여 대장장이에게 복제를 지시합니다. 하지만 총포 사용에 필수인 화약까지는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화약 상자와 일본인 노예를 거래하였습니다. (총포가 일본어로 대뽀, 그래서 무대뽀란 총포 없이 전쟁에 나가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 생긴 말이라고 하네요!)

서양으로 넘어간 일본인 노예는 종신계약과 유기계약이 있었습니다. 종신계약은 영구적 노예이나 몸값을 지불하면 자유의 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유기계약은 일정 기간 동안 노예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례로 일본인 청년이 법정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은 역사적 사료가 없다며 일본인 노예를 부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법정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한 일본인처럼 여러 증거가 남아 있답니다. 더 많은 증거가 궁금하다면 아래의 영상을 시청해 주세요.

 

 

그럼 다음 시리즈인 바다를 건넌 물건들』도 기대해 주시길 바라며

이상 SUN 편집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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