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여행은 위험하다. 떠남과 만남, 그 구체적 사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상념과 관념으로 존재하던 여행은, 바로 그 떠남의 순간부터 무수한 만남들의 지평을 연다. 그러므로 여행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경험 속으로 자기를 내던지는 기투이며, 이 때문에 모든 여행은 그 알 수 없음의 암흑 가운데서 두려운 마음으로 떠도는 방황인 것이다. 그러니 예정된 ‘일정’이란 언제나 배반될 수밖에 없으며, 우발적인 사건들의 터무니없는 전개로 여행의 시간이란 극히 혼돈스러운 것이다.

6월의 끝자락은 무더웠고, 학기말의 일정들로 마음은 몹시 빠듯했다. 작은 여행 가방에 억지로 쑤셔 넣은 물건들처럼, 분주한 일상을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내 마음은 영 거북하기만 했다. 그것은 공항에서 만난 K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출판사의 여러 형편들이 떠나는 그의 마음을 부담스럽게 붙들어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어차피 이렇게 떠나게 되었으니 잘 다녀오자고 서로를 위안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그만큼 우리들의 여행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륙과 함께, 기체 밖의 작아진 영토만큼이나 마음의 거북함은 점점 멀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약간의 설렘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들의 여행은 난삽한 관념으로부터 구체성의 경험으로 서서히 이륙하고 있었다.

상하이의 푸동공항에는 이틀 전에 이미 도착해 있던 이종민 교수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물론 그 마중은 K의 간곡한 요구를 따른 것이니 환대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먼 이국땅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불안한 처지의 우리들로서는, 그 마중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요금이 좀 비싼편이었지만,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 우리는 자기부상 열차를 탔다. 그것도 상하이에서 해 볼 수 있는 여러 경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열차 안에서 이종민 교수는 이틀 동안의 음주기담을 펼쳤고, 그것은 곧 앞으로 우리가 보내게 될 상하이의 밤들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숙소에 도착, 호텔은 의외로 훌륭했다. 짐을 풀고 간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일행과 함께 와이탄 거리로 향했다. 신혼여행의 첫 여행지가 바로 이곳이었던 나에게 와이탄 거리와의 재회는 남다른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20세기 초 유럽풍의 건축물들이 풍기는 고풍스런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 무렵, 어느새 화평반점 앞에 도착한 우리는 길을 건너 황푸공원으로 갔다. 몇 컷의 어색한 사진을 찍고, 이종민 교수의 또 다른 지인들을 기다렸다가 합류한 후, 우리들은 번화한 난징로를 걷고 또 걸었다. 거리를 가득 매운 정말로 많은 인파, 그리고 당연한 소란스러움과 이방인에게는 익숙지 않은 독특한 냄새들. 난징로를 걷는다는 것은, 그 모든 낯선 감각들과의 갑작스런 조우였다.

여행은 무엇보다 낯선 풍경들과 만남이라고 할 만큼 시각적인 것의 우위로 점철되는 사건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번 여행은 풍경보다는 사람을 만나는 일, 그것이 여행의 묘미라는 것을 일깨운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4박 5일의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또 그들과 어울렸다. 물론 길거리에서 만난 그 익명의 사람들과의 종적 없는 부딪힘이란 또 얼마나 귀한 것이었던가.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구성철 형과의 만남은 특별하게 기억해 두고 싶다. 특히 형과 함께 했던 비오는 밤, 푸단대 유학생 거리의 노천에서 먹고 마셨던 양꼬치 구이와 칭다오 맥주의 맛은 미각이 아니라 온몸에 아로새겨질 추억의 한 조각임에 틀림없다. 처음엔 역했던 그 양고기의 맛처럼, 현지의 음식들은 대단히 괴로운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적응이 되어갔다. 이렇게 되풀이되는 경험 속에서 단련되고 익숙해지는 것, 적응이란 수동적으로 길들여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반복되는 경험의 교류 속에서 대상을 치열하게 이해하게 되는 능동적인 받아들임의 과정이 아닐까.

  

대전 지역의 한 국립대에서 이종민 교수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는 구성철 형은, 푸단대에서 국제관계학으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나이에 특히 민감했지만, 고달픈 유학생활을 잘 견뎌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견뎌낸다니, 하지만 어쨌든 저 기약 없는 유학생활이란 나에게 분명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마음은 아마도, 장춘에서 이제 막 유학을 끝내고 돌아오는 아내에 대한 감상 탓이리라. 끝이란 것이 있을 수 없는 공부의 시간이란, 그렇게 우리들을 한 없이 기다리게 만드는, 가혹하게 지루한 바로 그런 것이니까.

상하이에서의 첫날 저녁, 그 낯선 시공간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활달한 청년들이었다. 이종민 교수의 학부 제자들은 그들의 외모만큼이나 밝고 환한 선남선녀들이었고, 구성철 형의 친구들(그 중에 한 사람은 한국에 유학했던 중국인이었다.)은 유머와 위트로 시종 즐거웠다. 그런 분위기 탓이었을까, 나는 과음했고 안 해도 좋을 가벼운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다음 날은 역시 고통스런 숙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대가 없는 즐거움이란 없는 것일까? 주흥이 다하자 고통이 찾아왔다. 아침 날이 밝았는지도 모르게 누워있는데, K는 벌써 일어나 씻고는 TV를 켜 놓고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겐 이른 시간이었지만, 늘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한 K에겐 늦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가벼운 차림으로 호텔을 빠져나와 골목길을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상하이 사람들의 생활을 엿보고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떠돌다보니, 눈앞에 지하철 입구가 나타났다. 매표기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여학생의 도움을 받아 표를 끊고 지하철을 탔다. 상하이의 지하철 풍경은 부산의 지하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전날 거닐었던 난징로에 이르러 아침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았다. 과음으로 속이 거북했던 나는 한국식 해장국이 너무나 그리웠지만, 도저히 중국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햄버거나 콜라가 보편적인 음식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나니 다를까 그 맛은 한국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현지화된 것이었다. 맥도널드 따위의 패스트푸드를 보편적인 맛으로 여기고 있는 나의 입맛이란 정말 한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서구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감각하는 내 천박한 감수성이란 어디 음식뿐이겠는가. 맥도널드와 함께 시내 곳곳에는 KFC가 자주 눈에 띠었는데, 그곳의 메뉴에는 한국에 없는 죽들이 아침 식사로 팔리고 있었다. 그 역시 중국 인민의 생활에 맞게 변용된 것이리라. 숙취로 고달픈 중에도 문화의 유통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처지라니.

30위안이면 하루 종일 탈 수 있는 이층짜리 시티 투어 버스는, 이번 상하이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그것을 타고 무려 두 바퀴 반을 돌았는데, 처음엔 노선을 따라 상하이 시내를 유람하였고, 두 번째는 내리고 타기를 반복하면서 예원과 상하이 박물관, 미술관 등 몇몇 장소를 관람했다. 체력이 바닥나 박물관에서 무척 지쳐보였던 K는, 미술관에서는 활력을 되찾은 듯 그림들 앞에서 휴대폰 카메라의 셔트를 마구 눌러댔다. 역시 너무 먼 과거의 유물들보다는 화폭에 그려진 동시대의 삶이 우리에겐 더 매혹적이었던 것 같다.

상하이의 도심은 큰 길 주변으로, 격조가 있어 제법 그럴듯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그런 건물들로 외곽을 이루고 있는 도심 내부의 생활공간은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세월의 때가 그대로 느껴지는 낡은 가옥들, 꾀죄죄한 느낌이 들 정도의 독특한 냄새들, 그 집의 살림살이를 짐작하게 만드는 늘어놓은 빨래들, 후텁지근한 날씨에 웃통을 벗고 있는 남자들, 한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늙은이들, 재잘거리며 뛰노는 아이들... 이방인의 눈에 그것들은 그저 지저분하고 남루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의 가난한 삶이란 원래 그렇게 난삽하게 펼쳐진 가재도구들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상하이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인화의 소설 <<하비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 모든 풍경에 대한 인상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과 사물 모두가 퀴퀴하고 구질구질하고 편안해 보였다.”

미술관 관람을 끝으로 상하이 투어를 끝낸 우리는, 미술관 주변 거리를 거닐다 지하철을 타고 호텔 근처로 되돌아 왔다. 이종민 교수와 구성철 형이 호텔 로비로 찾아왔다. 중국음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위해 그날 저녁은 한국 음식점으로 데려가 주었다. 소주에 고기를 구워먹으며 김치찌개에 밥을 먹으니 참 좋았다. 나의 이문화적 감수성이란 이렇게도 많이 편파적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자리는 이차로 이어졌고, 구성철 형의 기숙사 로비에 하얀 물보라가 뿜어져 나오는 성능 나쁜 에어컨 앞에서, 우리는 배달시킨 양꼬치에 칭다오 맥주를 마셨다. 물론 나는 양꼬치의 역한 냄새 때문에 전혀 먹지를 못했고, 구성철 형이 공들여 끓여준 계란까지 곁들인 라면에 얼큰하게 소주를 마셨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K는 역시 3일 째 날에도 일찍 일어나 있었다. 창문 밖으로는 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었다. 편의점에 들러, 나는 컵라면을 K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대충 아침을 때웠다. 버스를 타고 우리는 루쉰 공원으로 갔다. 여행 첫날 프랑스인들이 조성했다는 어느 공원에 들렀을 때, 이종민 교수는 중국의 공원은 모두 노인공원이라 농담을 했었다. 역시 루쉰 공원엔 노인들로 가득했고, 음악에 맞추어 집단으로 춤을 추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넓은 공원을 거닐며 담소를 하다 보니 어느새 루쉰 묘지에 이르렀다. 소박했지만 역사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묘소 참배 후 드디어 루쉰 기념관으로 갔다. 한국에도 많은 작가들의 기념관이 있지만, 작가의 삶과 문학적 일대기를 이렇게 잘 정리해 놓은 곳을 보기란 참으로 드물다. 나중에 이종민 교수에게 들으니, 기념관의 배치를 새롭게 해 루쉰의 혁명적 성격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했다. 그 전의 모습을 알 수 없으니 뭐라 할 수 없지만, 듣고 보니 일대기 위주의 전시물 배치가 조금은 단조롭게 여겨졌다.

기념관을 나오니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한 잔씩 마시면서 휴식을 취했다. K는 책을 읽고 나는 잠시 눈을 붙였다. 달콤한 휴식 뒤에 우리는 비오는 거리를 걸어 일본 조계지를 찾아갔다. 한국의 인사동에 비견할 수 있는 그곳에는 일본식 적산가옥과 고풍스런 건물들이 즐비했다. 몇 컷의 사진을 찍고 다시 서둘러 길을 나섰다. 택시를 타기 전 서점에 들러 오후에 만날 작가 왕안이의 소설 <<장한가>>를 한 권 샀다.

 

호텔로 가서 젓은 옷을 갈아입고 푸단대로 향했다. 왕안이는 상하이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로 장아이링의 뒤를 잇는 것으로 평가받곤 한다. 곡절 많은 인생을 살았던 장아이링과는 달리 지금 왕안이는 푸단대 문예창작과의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이번 만남은 상하이 대학에 방문 교수로 와 있는 목포대학교 임춘성 교수와의 대담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종민 교수와 임춘성 교수, 그리고 대담의 정리와 한국어 번역을 맡은 유학생이 동석했다. 이번 대담은 내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잡지에 실릴 것이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고, 잡지에 실을 사진을 몇 컷 찍고는 자리를 떠났다. 대담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라운지에서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었다. 대담이 끝나고 다시 임춘성 교수와 합류한 우리는 학교 근처의 음식점에서 이번 대담을 연결해준 상하이 대학교의 왕광동 교수를 접대해 저녁 만찬을 가졌다. 향이 센 시앙차이도 먹어보고 냄새가 지독한 취두부도 먹었다. 편견을 버리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니 모든 음식들이 다 먹을 만했다. 결국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세상을 편협하게 받아들이는 자기 안의 옹졸함이 아닐까. 이차는 유학생촌 앞의 노천에서 양꼬치에 맥주를 마셨다. 이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양꼬치 맛의 매력에 눈떴다. 양꼬치의 매콤함과 구운 마늘줄기의 담백함은 천상의 조합이었다. 깊은 밤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데, 좋은 사람들과 시끄럽게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생활의 여러 시름들은 잠깐 잊고 오직 즐거움으로 충만했다.

벌서 4일 째 날. 상하이 대학 현대문화연구소에서 이종민 교수의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상하이 대학에 도착한 우리는, 전날 만났던 왕광동 교수의 환대로 맛있는 점심식사를 대접받았다. 이제는 음식에 어느 정도 적응이 돼 황소개구리 요리 마저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날 자리에는 <<문화/과학>>의 편집인인 중앙대학교 영문과의 강내희 교수가 함께 했다. 그곳에 체류한 지 4개월째라고 한다. 그날 하루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서 좌파 지식인의 결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구소에 젊은 연구원들이 속속 모여들자 이종민 교수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발제문은  <<오늘의 문예비평>> 지난 여름호에 실렸던 「왕후이의 중국 개혁개방 서사에 대한 질의」였다. 이 글은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 왕후이의 사상적 변화의 의미를 되짚어 보면서, 그 변화의 바른 방향에 대한 조언을 담고 있다. 왕후이가 중국 굴기의 성공 요인으로 꼽은 두 가지, 즉 개혁개방 이전의 사회주의 시기의 경험과 국가의 적극적 역할에 대한 언급은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이종민 교수는 그것이 왕후이의 사상적 전회가 아니라 일관된 논리라고 이해한다. 바로 그 지속되는 부분(개혁개방 서사)에 대한 근본적 사유를 통해, 이종민 교수는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하면서 최종적으로 왕후이가 구상하고 있는 인민민주주의 정치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대안이란 ‘사회적 통합을 정치적 수단으로 재창조’하는 셰리 버먼 식의 사회민주주의의 길이다. 쉽게 말해 이종민 교수는 북유럽 식의 사회민주주적 복지국가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종민 교수의 발제에 대해 토론을 맡은 연구원은 발표시간보다 긴 토론으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는데, 그 무례한 열정은 중국어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나에게도 아주 뜨겁게 전해졌다. 칭화대에서 왕후이의 지도로 석사학위를 받았다는 그 토론자는 이종민 교수가 왕후이의 논지를 오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강내희 교수는 토론자에게 사회주와 공산주의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고, 토론자는 역시 교과서적인 답변을 했다.

그 날 행사에 참석했던 젊은 연구원들과의 뒤풀이는 대단히 유쾌했다. 특히 낮에 왕광동 교수가 선물한 수정방을 꺼냈을 때의 열기는 뜨겁다 못해 활활 불타올랐다. 강내희 교수는 탁월한 술꾼이었고 이종민 교수는 엄청난 술꾼이었다. 지레 겁먹은 나는, 자작을 자제하며 젊은 연구원들의 건배 제의에 답례하는 술잔만 기울였다. 그날의 술자리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흥겹고 신명이 나는 자리였다. 열정적인 토론을 보여주었던 친구와는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차후를 기약할 만큼 정다운 교감을 나누었다.

자리를 옮겨 우리는 이차로 상하이대학 개천가의 노천 술집에서 양꼬치에 술을 마셨다. 강내희 교수는 흥에 겨워 가곡을 불렀고 모두들 즐거워했다. 분위기가 차분해지자 진지한 이야기들도 오갔는데, 강내희 교수는 이종민 교수의 발표에서 사민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 부분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했다. 선생은 격앙된 어조로 “사민주의는 가능한 것이 아니야!”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발제에서 이종민 교수는 왕후이에게 중국 사회주의에 대한 원리주의적 접근을 지양할 것을 제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종민 교수의 입장에서 보자면 강내희 교수의 비판은 사민주의를 수정주의로 보는 지극히 원리주의적 입장에 다름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토론은 한국의 좌파 지식인 내부의 논쟁과 갈등을 재연하고 있는 것 같아 무척 인상 깊었다.

흥이 깊었는지 그날은 이차에 만족하지 못하고 술자리는 삼차로 이어졌다. 드디어 나는 지쳤고, 자리를 피해 혼자 바람을 쐐며 개천 거리를 거닐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땐 강내희 교수가 민요를 부르고 있었는데, 특유의 소리 꺾임이 구성지게 들렸다. 모두들 웬만하게 지쳐 술자리가 파하고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양꼬치에 맥주를 외치는 이종민 교수를 뒤로 하고 우리는 호텔로 갔다. 상하이에서의 마지막 밤, K는 “마지막인데 맥주 한 잔 해야지요?”라고 했고,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사들고 숙소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

여행 내내 K는 출판사에 대한 생각들로 쉴 틈이 없었다.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했던 마지막 날 밤은 지난 시절을 더듬어 젊은 날의 자기를 추억하는 듯 했다. 늘 같은 패턴으로 되풀이되던 지겨운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풍물과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짧은 여행의 시간들, 그것은 말 그대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처럼 만의 해방감 속에서 유유자적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이 여행이 끝나더라도 K의 고뇌는 계속될 것이고, 나도 역시 세속의 어떤 어려움들로 자주 외로울 것이다. 대사동 백탑 주변에 모여 살았던 이덕무와 박제가, 아홉 살의 나이 차이에도 그들은 깊은 우정을 나눈 벗이었으며, 함께 연경을 다녀오기도 했던 그들은 이따금 운종가의 시끌벅적한 시정을 유람할 만큼 세속의 인정에 관심이 많았다. 나보다 열 살이 많은 K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고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우리는 책을 좋아하고, 그렇게 공통의 밑변 위에서 만나다보니, 어느새 이처럼 나이 따위는 무관한 벗이 되었다. 우리의 짧은 여행을 고난이라고 말할만한 그들의 여정에 빗대는 것이 무리인 줄 알지만, 이덕무와 박제가의 연경행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들의 삶은 그 고단한 여정 이후 어떻게 달라졌을까? K와 나에게 이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귀국과 함께 다시 돌아온 일상은, 이런 질문들을 무색하게 할 만큼 변한 것이 하나 없었다. 하지만 이 가혹한 시간들 속에서 이따금 상하이의 밤을 떠올릴 때, 나는 기꺼이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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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