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형 소설집
『씽푸춘, 새벽 4시』
등단 후 10여 년만에 출간되는 조미형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씽푸춘, 새벽 4시』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다시 바다에 서다」와 신작 소설 「나비를 보다」와 「연지연 꽃이 피면」을 포함해 총 7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지금부터 진한 삶의 농도를 가진 조미형 작가의 소설들을 만나보자.
비인간적인 사회의 논리 속에 갇힌 사람들
이번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소설들은 인물들의 희망이나 의지를 부질없는 것으로 나타낸다. 이는 자본주의적 풍경의 한 모습으로, 개인의 삶을 짓밟는 비정한 시장의 논리이자 힘의 지배다.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씽푸춘, 새벽 4시」는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나’는 사업 실패 후 중국 통링에서 생가죽 무두일을 하며 사채업자 장두목에게 시달리는 빚의 노예가 된다. 사랑하는 아내는 사채업자에게 끌려가 고초를 당해 죽음을 맞지만 ‘나’는 이를 현실로 인정하지 못한다. 아내의 약값과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은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몰고 간다.
장 두목이 쓰러진 내 얼굴을 발로 짓이겼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덜커덩거리는 창문 소리만 났다. 다행히도 두 개의 눈알은 제자리에 있었다. 왼쪽 무릎에 뭉개진 양파가 들러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 나는 은근히 장 두목의 쌍칼을 기다리고 있었다. 통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토함산 자락, 아름드리 소나무로 둘러싸인 고향 집에 가고 싶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가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터였다. 꿈길에서 본 고향 집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65쪽)
「씽푸춘, 새벽 4시」가 냉혹한 세계 속에서 폭력, 착취로 얼룩진 개인의 고통을 보여준다면 「나비를 보다」는 도시를 구성하는 비인간적 시스템에 개인의 희생을 강요당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도시철도 기관사인 주인공 ‘나’는 도시의 정확한 시간을 지키기 위해 매일 초 단위로 시간에 신경을 쓰며 하루의 대부분을 지하에서 보낸다. 이러한 주인공의 일상은 살아 있는 도시를 만드는 하나의 부속품으로 작용하지만 정작 개인의 삶은 무기력 속으로 빠지게 된다.
직속 관리자인 팀장은 바뀐 운행스케줄에 대해서 언급조차 없이 안전운행만을 강조했다. (…)“도시 철도는 사람의 혈관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실수로 흐름에 문제가 생기면 도시 전체가 마비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괜히 졸다가 나비를 봤네, 어쨌네 하지 말고, 신속 정확하게 도착과 출발에 신경 쓰도록!”
팀장은 턱을 내밀고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144쪽)
기관사의 기계적인 삶은 동료인 예비신랑 윤이 없어진 시점부터 점차 균열이 일어난다. 돌발승객으로 인해 열차가 지연되고, 안구건조와 피로 누적으로 전동차는 정차 위치를 벗어났으며, 출발하려는 순간 날아오른 신문지를 사람으로 오인해 ‘나’는 비상 브레이크를 당긴다. 1초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던 주인공의 삶에 이러한 균열은 공공성의 힘에 눌려 있었던 개인의 상처를 발견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자유를 일으켜 세운다.
사랑이라는 미망과 착각에 빠지다
「씽푸춘, 새벽 4시」와 「나비를 보다」에서 보인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일까? 이에 대해「다시 바다에 서다」와 「잉커송」 두 작품은 사랑의 실체와 마주하면서 암울한 사회에서 사랑은 도구로 쓰일 뿐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의 시선이 커다랗게 일그러지며 내 얼굴에 꽂힌다. 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산소마스크를 끼고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어야 할 그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출렁이는 바다 위에 서 있는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36~37쪽)
「다시 바다에 서다」는 외화 번역자인 정미아와 신인 영화배우이자 전직 카레이서 배우 신제민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정미아에게 타인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사회생활은 몹시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 “선택한 공간은 가상의 공간”으로 회화 번역을 하며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없는 영화 속 가상의 인물들만 만난다. 그런 정미아에게 제민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능력을 알아봐준 사람이다. “관계를 규정지을 만한 단어가 없”는 사이라는 사실이 당혹스럽지만, 미아는 제민이 자신의 현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라 생각한다. 이후 제민이 영화 촬영 중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고, 미아는 지독한 불면증을 앓기 시작한다. 제민의 사고 장면이 담긴 영화가 개봉을 하고 이를 본 미아는 제민에 대한 그리움을 참을 수 없어 우여곡절 끝에 그의 병실에 들어서게 되고, 그녀는 자신의 사랑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연수야!”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기수가 눈 위를 구르더니 곧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때 무언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두 팔을 벌린 것처럼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 잉커송이었다. 그 나무가 나를 향하여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241쪽)
「잉커송」에서는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주인공에게 하룻밤을 즐겼던 클럽 매니저 박기수와의 인연이 엉뚱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버지가 위독하단 소식을 듣고 귀국한 그녀 앞에 기수가 여동생 연수의 약혼자로 등장한 것이다. 연수는 기수와 함께 상하이에서 사업을 하겠다며 떠나고, 아버지는 곧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연수를 찾아 중국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동생 연수가 맞닥뜨린 잔인한 현실들을 알게 된다. 연수가 갔다던 황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비로소 동생의 진짜 행방을 알게 되면서 소설은 대미를 보인다. 동생 연수에게 행복한 세계를 열어줄 것 같았던 사랑은 전혀 다른 현실을 보여주고, 그런 동생의 삶을 마주해야 하는 주인공 앞에도 결국 황폐한 세계만이 남아 있다. 언니인 주인공의 시선으로 “사랑은 애당초 없는 것”임을 깨달은 연수의 삶을 따라가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이기적인 세계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하다.
냉혹한 세계를 견디는 버팀목, 가족
조미형의 소설에서 개인적인 영역은 공적 영역에 억압되어 매우 불안한 상태로 묘사된다. 「스노우 트리」의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방치하고, 「우리끼리 안녕」에서 부모는 가끔 전화해 돈을 부쳐달라고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작가는 불안한 상태의 사적 영역으로 가족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를 극복하고 비정한 사회를 견뎌낼 유일한 방법으로도 ‘가족’을 지목한다는 것이다.
무휘는 연의 손을 잡았다. 작고 여린 손이 그의 손안에 들어왔다. 지난 세월 그토록 다짐했던 각오가 부질없음을 알았다. 전쟁을 끝내고 버드네에서 연을 안해로 맞아 부부로 살아가리라 소원했다. (200~201쪽)
「연지연 꽃이 피면」에서 가야 최고의 칼잡이 무휘는 철을 다루는 기술을 빼앗으려는 왜의 공격이 빗발치는 난국 속에서 단 하나의 소원으로 연을 “안해로 맞아 부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끼리 안녕」에서는 교실을 박차고 나온 아이들이 용감하게 세상과 대면하는 장면을 통해 가족의 가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소설은 억압된 가족 질서에 비판적이지만 친구 일오의 “그럼 우리 셋이 가족이 되는 거지. 멋진 가족이 될 거야.”라는 말처럼 공감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가족을 모색한다. 또한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가족이라는 집단은 냉혹한 세계를 견디는 버팀목이 된다.
“류지, 형 보러 갈 거야?”
“가야지. 언젠가는…….”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형은 내 옆에 있다. 나는 세이초에 말했다.
“형이 사진을 하려나 봐.”
세이초는 말없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씨익 웃었다. 횡단보도 앞에 섰다. 편의점이 보인다. 뽀얀 김이 서린 유리창 너머 형광등 불빛에 편의점 안이 따뜻하게 보인다. 빨간 신호등이 졸립다는 듯 깜박인다. 나는 형의 휴대전화를 꺼내 눈에 푹 파묻힌 거리에 초점을 맞춘다. (106쪽)
「스노우 트리」에서 스노우 트리에 집착했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슬픔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식에 대한 의무감보다 스노우 트리가 먼저였던 아버지,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삶을 이어갈 수 없었던 남자. 주인공 류지현에게 그런 아버지의 존재는 비겁한 겁쟁이이자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 우연히 건네받은 형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따뜻한 편의점 안을 들여다보는 나를 통해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씽푸춘, 새벽 4시
조미형 지음 | 소설 | 국판 272쪽 | 13,000원
2015년 12월 21일 출간 | 978-89-98079-11-6 03810
소설집 『씽푸춘, 새벽 4시』는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다시 바다에 서다」를 비롯해 7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조미형 작가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삶의 심연을 드러내고 그 수렁을 건너는 것이 무엇으로 가능한지 탐문한다. 잔인한 시장논리가 사회를 떠받들고, 비인간적인 시스템이 도시를 지탱하는 냉혹한 세계를 불면증, 가려움, 편두통 등 인물들이 겪는 고통의 증상과 삶의 다기한 모습으로 그려낸다. 더불어 이번 작품집에는 신작 소설 「나비를 보다」와 「연지연 꽃이 피면」을 포함해 등단 이후 10여 년 동안 구축해온 조미형 작가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씽푸춘, 새벽 4시 - 조미형 지음/해피북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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