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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취재후기]<왜성, 재발견>후일담

4화-왜장 가토, 우물 없는 ‘철옹성’에 갇히다-울산왜성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5. 20.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4화 :: 왜장 가토, 우물 없는 ‘철옹성’에 갇히다

-울산왜성

 


 

 

 

■ ‘독 안의 쥐’를 놓치다

 

  “여러 적 중에 청정(淸正·가토 기요마사)이 가장 강하니 청정을 격파한다면 나머지 적은 셀 것도 못 되오이다.”

 

  임진왜란 6년째 정유재란이 터지던 해인 1597년 음력 섣달 그믐날, 조선 국왕 선조는 조선에 파견된 명군 최고지휘관인 군문 형개(邢玠)를 만나 조·명 연합군의 울산전투 승전 상황을 축하하면서 “곧 가토를 사로잡게 됐다”는 형개의 말에 고무돼 이렇게 답했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설 쇠고 9일째 되는 날 선조는 이미 닷새 전 조·명 연합군이 왜군에 대한 포위를 풀고 경주로 후퇴했다는 ‘허무한’ 보고를 받아야 했다.

 

  이 울산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왜란 끝무렵인 1598년 9월 육군 3로군에 수군까지 합해 ‘사로병진’ 작전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울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순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사천 등 3곳의 왜군 본거지에 총공세를 펴기 9달 전 먼저 울산을 전략적인 공격목표로 삼아 집중공격함으로써 벌어졌다.

 

  1597년 12월23일 새벽부터 이듬해 1월4일까지 12일 동안 명군 4만여명과 조선군 1만여명 등 5만여명의 연합군과 울산왜성 일대 왜군 1만여명 사이에 치열하게 펼쳐졌다. 뒤에 출동한 6만여 왜군 구원병력까지 치면 조·명·일 3국의 12만 대군이 12일에 걸쳐 벌인 왜란 기간 최대 규모 전투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는 도원수 권율이, 명군 및 연합군 총지휘는 명군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麻貴)가 맡았다. 왜군은 정유재란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했다.1597년 9월 직산전투와 명량해전에서 정유재란 이후 왜군의 승기를 꺾은 명과 조선은 다시 동남해안으로 쫓겨 수세에 몰린 왜군에 대한 막바지 총공세를 준비하면서 울산을 전략적인 우선 공격목표로 잡은 것이다. 왜군의 핵심 배후거점인 경상도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조·명 연합군은 먼저 12월22일 언양과 태화강 하류 등 울산 외곽의 수륙 양쪽 길목부터 봉쇄한 뒤 23일 새벽부터 울산왜성을 포위하고 가토를 비롯한 성 안의 왜군 1만여명을 고립시킨 상태에서 이듬해 1월4일까지 대대적인 총공세를 퍼부었다. 가토는 애초 울산왜성에서 남쪽으로 35㎞ 가량 떨어진 자신의 본거지 서생포 왜성에 있다가 조·명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했다는 보고를 받고 23일 밤 뱃길로 태화강 하류에서 조·명군을 피해 울산왜성으로 들어갔다. 수적 열세에 물과 식량까지 바닥난 왜군은 갈증과 허기에다 한겨울 추위마저 겹쳐 극한 상황 속에 궤멸 직전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끝내 울산왜성 내성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렇게 장기전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부산, 김해, 양산 등에서 왜군 구원병력들이 속속 울산으로 출동해 그 수가 6만여명에 이르자 역포위를 우려한 조·명 연합군은 울산왜성의 포위를 풀고 경주로 물러나고 말았다.

 

  명군이 후퇴하면서 부린 행패 때문에 인근 백성들 피해 또한 컸다. <선조실록>은 당시 명군 장수를 수행했던 접반사의 보고를 통해 “회군하는 군사는 다시 대오를 편성하지 못하고 그 행동을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 촌락에 들어가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고 부녀자들을 강범하며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 적이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기록했다. 이에 어떤 마을의 노파는 울부짖으며 “굶주림을 참고 쌀을 찧어서 군량을 댄 것은 왜적을 평정하는 날을 기대해서인데 이제 도리어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다시 살아갈 길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1598년 9월 사천·순천 왜성과 함께 울산왜성에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9월21일 명군 제독 마귀는 2만4000여 군사를 이끌고, 별장 김응서의 5500여 조선군과 함께 먼저 동래를 공격해 부산 쪽 왜군과의 연결을 차단한 뒤, 가토의 1만5000여 왜군이 지키는 울산왜성 공성에 나섰으나 또다시 실패했다. 마귀는 25일 경주로 말머리를 돌렸다가 10월6일 사천에서 명군이 왜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영천으로 다시 후퇴했다. 11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에 따른 본국의 귀환명령을 받고 가토와 휘하의 왜군들이 성에 불을 지르고 물러난 뒤에야 마귀는 이 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 천수각과 우물이 없던 왜성

 

  울산왜성은 지금의 울산 중구 학성동 학성공원에 있다. 울산 도심을 가로질러 울산만과 연결되는 태화강과 동천 하류를 끼고 있는 곳이다. 이 성은 왜란 초부터 울산 울주군 서생포에 왜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아온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정유재란 때 조·명 연합군의 남하공세에 대응해 동쪽 최전선에 전초 방어요새로 쌓은 것이다.

 

  가토가 설계하고 부장 오다 가쓰요시(太田一吉)가 감독을 맡았으며 1만6000여명을 동원해 1597년 12월 울산왜성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40여일 만에 공사를 끝낸 것으로 기록됐다. 축성에 필요한 돌은 가까이 있던 경상좌도병영성과 울산읍성 성벽을 헐어 그 돌을 가져다 썼다.

 

  울산 중구 동·서·남외동 일대에 걸쳐 있는 경상좌도병영성(사적 제320호)은 1417년(태종 17년)부터 1894년(고종 31년)까지 존속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2품) 영성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울산왜성 축성 때문에 파괴됐다가 왜란 뒤 몇차례 보수 및 복원공사가 이뤄졌으며, 현재 북문 터를 중심으로 동·서문 터까지 양쪽으로 성벽이 복원돼 남아 있다. 울산 중구 북정·교동 일대에 있던 울산읍성은 조선 성종 8년(1477년)에 쌓은 울산군수(종4품) 치소가 있던 읍성으로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된 뒤로 현재 성곽이 남아있지 않다.

  울산왜성은 공사를 급히 한데다 축성이 끝나자마자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본곽 안에 여느 왜성에 다 있는 지휘소 건물인 천수각이 없었다. 건물이라면 각 성벽 모서리마다 세운 12개의 전투용 누각과 거주용 막사 정도였다.

  정유재란 때 왜군 장수를 따라 조선에 파견된 뒤 이 왜성의 축성을 지켜봤던 왜군 종군승려 게이넨(慶念)은 일기에 당시 급박했던 축성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른쪽도 왼쪽도 성을 쌓느라 쇠망치소리 도끼질 소리로 잠을 이룰수 없다. 총을 쥔 사람, 깃발 든 사람, 뱃사람 할 것 없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오고 어슬렁거리는 자는 매를 맞고 때로는 적에게 목이 잘리우고…”

 

 

  울산왜성은 독립된 구릉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으로 성을 포위해 고립시키기는 쉬운 반면, 어느 방향에서도 공격로를 찾기 힘든 구조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명군은 전투 초반, 쉽사리 성을 에워싸고 돌격전을 감행했지만 끝내 성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당시 명군 경리 양호를 수행했던 접반사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은 보고를 통해 “석축이 깎아지른 듯하고 토굴이 마치 벌집과 같은데 중국군이 위로 쳐다보며 공격해야하기 때문에 형세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 성은 이처럼 외부 공격으로부터는 철옹성 같은 요새였지만 성 안에 우물이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 조·명 연합군과의 전투 때 성 안에 고립됐던 왜군들이 갈증을 못 견디고 어둠을 틈타 성 밖으로 나가 물을 찾다가 매복해 있던 별장 김응서의 조선군에게 붙잡히거나 목숨을 잃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 때문에 가토는 본국에 돌아가 자신의 영지 구마모토에 성을 쌓을 때 포위된 상태에서도 군량과 식수 확보에 문제가 없도록 성 안에 우물 120여개를 파고 실내 다다미를 식용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만드는 등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이 성은 왜란 이후 한동안 조선 수군의 주둔지로 이용됐고 1624년부터 30년간 전함을 건조하는 전선창을 두기도 했다. ‘울산학성’이란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때엔 조선 고적 제22호(1935년 5월)로, 해방 뒤엔 국가 사적 제9호(1963년 1월)로 지정됐다가, 1997년 10월 일제지정 문화재 재평가에 따라 ‘울산왜성’으로 이름이 바뀌고 울산시문화재자료 제7호로 격하됐다.

 

  한삼건 울산대 교수(디자인·건축융합대학장)는 “원래 학성은 나말·여초 때 우리 옛성인 계변성 또는 신학성을 일컫는 것으로, 울산왜성 북쪽 맞은편 학성산에 있었다. 이곳엔 고려 말·조선 초의 옛 읍성도 있었고, 울산왜성 전투 때 조·명 연합군 지휘부가 주둔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조·명군 지휘부가 있던 학성산엔 2000년 7월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 희생된 울산지역 의병 239명과 그밖의 다수 무명의 위패를 봉안한 충의사가 세워졌다. 울산왜성은 왜란 당시 섬처럼 보이는 산에 있다고 해서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렸고, 조선 후기에는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성’(甑城)으로도 불렸다.

현재 공원으로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공간 구실을 하고 있으나 주변의 급속한 도시개발로 인해 본곽 동쪽 주출입구 주변의 성벽 등을 빼곤 아래쪽 제2곽과 제3곽 석축은 대부분 훼손돼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한삼건 교수는 “제3곽부터 성 아랫부분 석축은 일찌감치 조선시대부터 이미 뽑혀나갔을 것이다. 왜란이 끝난 뒤 경상좌병영성을 보수 또는 복원할 때 왜성 돌을 가져다 썼을 것으로 보인다. 병영성 돌이 왜성으로 갔다가 다시 병영성으로 돌아가기도 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 5화에서 계속

 

*본 게시물의 순서와 책의 목차는 상이합니다.

*게시물의 내용은 책 본문의 내용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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