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보도연맹, 아마 많은 이들이 낯설게 느낄 이 연맹은 사회주의 이념과 관련이 있다. 해방 후 단독정부가 들어서며 과거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이기 때문이다. 소설 『밤의 눈』은 이 국민보도연맹의 형성부터 보도연맹을 둘러싸고 일어난 비극을 상세히 기록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군과 경은 대한민국 국민 중 숨어있는 내부의 적, 공산주의자를 가려낸다는 명목으로, 연맹원들을 구금하고 이어 무차별적으로 학살한다. 하지만 그들이 내세운 명분과 달리 연맹원 중에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평범한 민간인이 훨씬 많았다. 생필품을 준다는 이유로, 구장이나 읍장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강요로, 사람들은 보도연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입했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총구는 그들의 사정 따위 헤아리지 않는다. 결국 보도연맹원 학살은 민간인 학살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보호와 지도’의 대상자였던 사람들이 전쟁이 난 순간부터 ‘감시와 구금’의 대상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63쪽
보도연맹원 한용범과 연맹원 학살로 아버지를 잃은 옥구열은 억울한 죽음들 사이에서 겨우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들에겐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주의 용공으로 분류되어 끝없는 사찰을 받아야 했다. 4·19 혁명이 불러일으킨 희망의 바람에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회를 결성했으나 61년의 군사 쿠데타로 해산당한다. 그리고 유족회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또 빨갱이 낙인이 찍힌다. 유족회가 합동 장례식을 치르고 묻은 피해자들의 유해는 다시 파내져 버려졌다. 그들은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보련 가족들은 입을 봉하고 엎드려 살아야 했다. 그들은 빨갱이 가족이었다. 세상이 바뀌지 않고서는 피붙이들의 죽음은 땅 밖으로 나올 수 없었고, 가족들의 비통함과 억울함도 호소할 데가 없었다.” 255쪽
“10년 전 피붙이들이 전쟁의 희생양이었다면 이제는 그 가족들이 쿠데타 성공을 위한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308쪽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절망 속에서도 결국 희망은 찾아든다. 유신독재 철폐를 외치는 민주화 운동을 보며, 옥구열은 눈물을 흘리며 함께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읊조린다.
“무한한 건 인간에 대한 신뢰, 자신이 사는 이 세상과 내일에 대한 믿음이었다.” 379쪽
인간에 의해 벌어진 참상을 다루면서도, 『밤의 눈』은 인간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한용범과 옥구열은 그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또 한 번 인간을 믿어본다. 몸이 상하고, 마음이 지쳐 삶조차 버거워하던 그들이 내일을, 인간을 또 한 번 믿어 보는 순간 그들의 강함에 압도된다. 『밤의 눈』은 살고자 했던 이들이, 살고 나서는 죽은 자들과 자신을 위해 계속해서 살려고 투쟁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이 소설이 그려낸 참혹함은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도연맹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2019년 12월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에 대한 인지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40%만이 보도연맹 사건을 안다고 대답했다. 5·18 민주화운동이나 제주 4·3 사건의 인식도가 99%와 83%에 달한 것에 비하면 현저히 낮은 수치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희생자 수만 1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 비극은 지니고 있는 아픔에 비해 너무나도 알려지지 않았다. 사건 발생 후 70년이 지나서야 피해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긴 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22년 2월 경북지역 보도연맹 사건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신청 건수만 해도 3,200여 건에 달한다. 모든 죽음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깊은 어둠 속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심과 유대가 필요하다. 국가에 의해 자행된 폭력과 그 결과 빚어진 참혹한 진상을 우리는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수십 년간 고통받은 피해자와 유족들의 곁에 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밤의 눈』을 읽어야 한다. 아니 읽어야만 한다. 우리의 역사를 마주 보고 싶은 당신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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