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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일기

부산 거제동 법조타운

by 산지니북 2009. 10. 29.

오전 11시.
회의를 끝내고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하려는데 아침부터 노래 소리가 시끄럽습니다. 근처에서 또 식당 개업이라도 하나 봅니다. 요즘 잘나가는 아이돌 스타들과 걸그룹들의 유행가, 개업 도우미들의 기계음 같은 안내 멘트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네요. 근데 요즘 유행하는 음악들은 비트가 아주 강하고 단순한 한두 소절의 멜로디가 노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반복되는군요. 계속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세뇌당하는 것 같습니다. 원고를 읽어야 하는데 머릿속엔 노래가사뿐이 안들어 오고… 헉, 어느새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네요.
 

출판사가 자리한 곳은 부산시 거제동입니다. 부산고등법원과 검찰청이 있는 소위 법조타운이라 부르는 곳입니다. 고층빌딩, 오피스텔들이 늘어서 있고 그 속엔 변호사, 법무사 사무실 등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원래 군부대가 있던 자린데 재개발되어 새로 조성된 지 10년이 채 안됐습니다. 근처엔 동해남부선 철길이 지나는 남문구역이 있고 철길과 가까워 쪽방이나 판자촌 등 오래된 집들이 많았는데 법원, 검찰청 청사 이전지로 개발구역이 되면서 원주민들은 몇푼 안되는 보상비를 받고 다들 떠났고 개발구역을 가까스로 비켜난 집들이 법조타운 빌딩숲 둘레로 옥닥옥닥 모여 있습니다.

평일 1시 법원 앞 도로. 번잡스럽다.

거제동 법조타운.

법조타운 옆 동해남부선 남문구역과 개발을 피해 남아있는 집들.


 
법조타운이 밖에서 보기엔 그럴듯해 보이는지 식당 개업들을 많이 하는데, 1년을 못버티고 문을 닫는 곳이 많습니다. 냉면집이 칼국수집으로 바뀌어 있고, 삼겹살집은 또 냉면집으로 바뀌고 5일 장사만으로는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비싼 법조타운의 임대료와 관리비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지요. 평일 낯시간에는 거리에 사람이 북적대지만 주5일 근무의 영향으로 주말엔 그야말로 썰렁합니다. 토요일 오후부터는 법원앞 6차선 대로의 신호등도 꺼집니다.

 

법원 앞 6차선 대로. 주말엔 신호등이 노란 점등 신호로 바뀐다.

법원 앞 보도. 참 넓다. 일반 보도의 3~4배쯤 돼 보인다.


유명한 패스트푸드점 oo날드도 버티다 결국은 문을 닫았고 그 후로 oo리아가 들어왔는데 아직은 버티고 있습니다. 근데 주말엔 햄버거를 안 팝니다. 문을 열면 최소 매장직원 2명은 필요한데 주말장사로는 2명의 인건비도 안나온단 말이겠죠. 근처에서 친구가 분식집을 하는데, 장사가 제법 되는데도 월세 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고 합니다. 뼈빠지게 일해서 빌딩주인만 좋은 일 시킨다고. 마치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처럼. 벌어서 갖다 바치고
가게를 내놨는데 나가지도 않고

 

저희 출판사도 임대료 부담때문에 딴 동네로 이사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쌓여 있는 책들 때문에 엄두를 못냅니다. 빌딩주인은 얼마 전에 벽보를 붙였더군요. 운영비가 올라 임대료를 올려야 하지만 세든 사람들을 생각해서 올리지는 않겠다. 그대신 그동안 제공하던 화장실의 두루말이 화장지와 손 닦는 수건을 이제 끊겠다구요.

 

오후 5 50.

하루종일 귀를 때리던 노랫소리가 드디어 멈췄습니다. 어디서 개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나가다 보면 간판이 바뀌어 있는 식당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됐든 요즘처럼 힘들고 다들 몸 사리는 때에 개업이라면 모든 걸 걸고 시작하는 것일텐데 아무쪼록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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