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이 굳었다, 눈으로 썼다
2015-01-14 [22:31:29] | 수정시간: 2015-01-14 [22:58:06] | 1면
▲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정태규 소설가가 모니터 아래 부착된 안구 인식 마우스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
'한때는 소설쓰기가 상처받고 슬프고 불안으로 흔들리는 영혼에 위안을 제공하는 거라 여겼다. 진실되고 진지한 영혼이 저 거짓과 경박의 현실에 지쳐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는 하나의 힘. 그리하여 소설은 그런 영혼을 응원하며 조용히 펄럭이는 깃발이라 생각했다.'
정태규(56) 소설가의 답변은 달팽이의 배밀이처럼 느리고 힘들게 도착했다. 루게릭병과 2년 넘게 사투를 벌이고 있는 그는 이제 말하는 능력마저 잃었다. 안구 마우스에 의존해 카톡으로 짧은 문장을 주고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의 힘겨운 답변이 이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무모하고 거창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요즘엔 소설쓰기란 제법 진지한 혼자 놀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는 '소설을 쓴다는 건 궁극적으로 자기의 존재 증명이며 존재 표현'이라고 했다. '타인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며 이 무한한 시공간의 한 귀퉁이를 잠깐 살다가는 인간의 흔적 남기기'라는 것이다.
루게릭병 투병 정태규 소설가
아내·안구 마우스 도움받아
새 소설집 '편지' 출간 화제
"아프니 비로소 글 쓸 여유
새로운 단계 글쓰기 도전"
중견 소설가는 그래서 스스로를 위안한 소설집 '편지'(산지니·사진)를 내놨다. '지금까지 써 온 글의 한 단계를 마무리'한 것이다. 단편소설 8편과 콩트와 스토리텔링 6편을 묶어냈다. 단편 한두 편을 더 추가하려 했지만 이미 구술조차 할 수 없게 그의 병은 깊어졌다. 모자라는 분량을 콩트와 스토리텔링이 채웠지만 그는 '소설집 모양새가 다소 볼품없다 해도 솔직함이 더 마음 편한 노릇'이라 했다. 이 '작가의 말'도 안구 마우스로 더듬거리며 썼다.
그는 스스로를 위안한다고 했지만 책은 고단한 우리를 참 아프게 위안한다. 표제작 '편지'는 400년 전 임진왜란 당시의 애틋했던 부부와 현대를 살아가는 애틋할 수밖에 없는 부부의 편지를 함께 엮은 작품이다. 죽음이 갈라놓은 두 부부의 사연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무서워 말아요. 스스로 동정하지도 말고…. 앞으로 남은 우리 삶이 조금 달라질 뿐이죠. 삶의 형태가 조금 불편해지겠죠. 그것뿐이에요.'('비원' 중)
단편 '비원'은 그가 앓고 있는 루게릭병을 소재로 한다. 이 소설을 쓸 때 이미 몸은 쓸 수 없는 상태가 돼 그가 구술한 내용을 아내가 받아 써 완성했다. 루게릭 진단을 받은 남자는 병원에서 우연히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여자를 만나 충동적으로 창덕궁에 간다. '왜 하필 우리일까' '10만 명당 한두 명에 뽑힐 만큼 나쁘게 살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이런 원망과 회한이 마침내 죽음의 공포를 버텨낼 만한 강한 위안과 결심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그렸다.
술 권하는 친구 하나 없는 요즘. 작가는 '이제 여유롭게 글을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무진장 널려 있는 시간에 여유롭고 온전한 새로운 단계의 글쓰기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이 글쓰기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주로 등장할 것이다.
199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정 작가는 2012년 겨울 루게릭병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다.
강승아ㅣ부산일보ㅣ2015-01-14
편지 - 정태규 지음/산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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