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마지막은 언제나 바다였다. 바다는 움직임 없이 굳어 있어 마치 잔디에 불이 붙듯 붉은 보랏빛으로 띠를 두르며 타들어갔다. 그 불길 속에서 나는 얼굴도 모르는 키 작은 여자와 싸우기도 했는데 그곳은 바다가 아니라 쓰레기 날리는 바닷가 가까운 매축지일 때도 있었다."(314쪽)
"무색무취의 소시민.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니더라도, 세상살이 전반에 걸쳐 자신의 색채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또는 비겁한 건지 아닌지는 뒤로 하더라도, 다소 애매하게 다수의 편에 서거나 중도에 서는 게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그렇게 손해 본 적이 없었던 것도 사실인 듯 했다."(247쪽)
중견 소설가 조갑상이 첫 소설집 '다시 시작하는 끝'을 25년 만에 재출간했다. 조갑상의 데뷔작 '혼자웃기'와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사라진 하늘'을 비롯해 총 17편의 중단편이 담겨 있다.
그의 처녀작들은 '소설은 시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여실히 증명해냈다. 우리 사회에 있을법한 인물들이 등장해 묘한 현실감으로 공감하게 된다.
소설 '사육'에서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50대 남자와 아무 일 않고 소설만 읽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20대 여자의 동거 생활을 담았다.
몇 년 전부터 회자되고 있는 '취집'(여성들이 취직 대신 결혼을 택한다는 뜻의 신조어)을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로, 인간의 심연을 깊이 파고든다. 남자는 철저한 교환가치로 여자를 대하며, 앞으로도 결코 소설을 읽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 날 밤은 내게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했다. 왜 사람은 끝이 없는 것일까. 연이는 나와 정식 결혼이라도 원하는 걸까. 그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고상하게 살 수 있는 여건. 그 이상이 뭐 그렇게 필요하단 말인가. 사람은 어쩌면 원래부터 제 입장과 분수를 모르고 태어나는 존재일지도 몰랐다."(64쪽)
'바다로 가는 시간'에서는 퇴직 후 안주할 곳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삶을 보여준다. 냉혹한 현실과 함께 가족들의 반응이 씁쓸함을 자아낸다.
"그는 눈을 떴다. 눈이 당기고 무겁다. 아내는 여전히 어둠을 부풀리고 있다. 어쩌면 아내는 자신의 퇴직 후 더 잘 잠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엉뚱한 생각이 방 안의 썰렁한 공기와는 다르게 맹렬하게 그의 가슴에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106쪽)
조갑상은 작가의 말에서 "다시 읽으면서 몇 십 년 전의 이야기 내용과 형식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궁금하면서도 긴장되었다"며 "서툴기는 해도 들뜬 열정의 흔적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다. 또한 지나온 세상을 다시 바꿀 수는 없지만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도 해 본다"고 말했다.
신효령| 뉴시스ㅣ2015-07-11
다시 시작하는 끝 - 조갑상 지음/산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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