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산 자처럼 싸우지 않는다오” 망자의 음성 듣고, 가족이 되는 이들
ㆍ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ㆍ권헌익 지음, 박충환·이창호·홍석준 옮김 | 산지니 | 358쪽 | 2만5000원
책을 읽기에 앞서 이런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베트남 사람들은 혁명지도자였던 호찌민의 사당에서 기도한다. 자식을 낳게 해달라거나, 가족들이 건강하게 해달라고 ‘호 아저씨’에게 부탁한다. 그렇게 대화하는 대상은 꼭 영웅이 아니어도 좋다. 가령 그들은 전쟁 중에 세상을 떠난 이름 모를 병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 새로운 가족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함께 산다. 말하자면 베트남 사람들은 유령(Ghost)의 존재를 실감한다. 그것이 베트남인들의 정신세계이고 문화이며 삶이다.
저자는 인류학자 권헌익(54)이다. 산 사람들의 주변을 여전히 맴도는 전쟁 유령들을 베트남인들이 어떻게 애도하는지를 탐구하는 이 책에 대해 저자는 “기괴한 연구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책의 머리에서 저자가 꺼내놓은 인용들, 베트남인들이 유령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서술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예컨대 즈엉 투 흐엉의 <무명의 소설>에서 젊은 의용군 꾸안은 홀로 귀향하던 중에 전사한 군인의 해골과 조우한다. 그는 망자의 영혼이 자신을 그곳까지 이끌었다고 생각하고는 망자의 일기를 고향 어머니에게 가져다 주겠다고 약속한다. “불행하게도 이미 돌아가셨다면 무덤을 찾아가 읽어드리겠다”고 다짐한다. 또 반 레의 소설 <만약 당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면>에서는 한 혁명군의 영혼이 저승과 이승의 경계 앞에서 서성인다. 그는 강을 건널 노잣돈이 없어 다시 마을로 돌아가 ‘떠도는 유령’이 된다. 이렇듯 베트남인의 삶에서 유령이라는 존재는 익숙하다. 저자는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유령’ ‘스탈린의 망령’ 같은 역사적 은유가 아니라 사회적 사실”이라며 “역사적 정체성을 가진 실체로서, 비록 과거에 속하지만 현재에도 지속되는 존재”라고 강조한다.
때때로 인류학자로서의 학술적 언급이 등장하지만 책은 대부분 ‘발품의 기록’이다. 저자가 만난 베트남인들은 개별 무덤과 집단 묘지를 만들어 유령들을 돌본다. 가족의 연은 물론 연고도 없는 민간인, 외국 군인 모두를 위해 향을 피운다. 구천을 헤매던 유령들은 윤리적 책임감에 따른 산 자들의 행동을 통해 강력한 상징적 변환을 거쳐 고향이 아닌 마을의 터주신이 되고 새로운 가족에게 입양된다.
전쟁 유령들과 산 사람들의 동거를 더듬는 저자의 속내는 명징하다. 음력 7월 어느 날, 저자는 어두운 묘역에서 영매를 통해 그 지역의 신위를 만난다. 저자는 ‘명사수’라고 불리는 유령에게 묻는다. “당신들도 명분 때문에 논쟁하고 싸우나요?” 명사수가 답한다. “아니오. 친애하는 친구! 망자들은 싸우지 않는다오. 전쟁은 산 자들의 일이라오. 내 세계의 사람들은 전쟁의 동기와 목적을 기억하지 않는다오.” 결국 저자는 자신이 베트남에서 목격한 것이 “역사의 상처를 넘어 인류의 연대라는 윤리적 지평을 창조하는 실천”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그것은 “아직도 냉전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 사회에 의미심장한 교훈을 남긴다”고 덧붙인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ㅣ 경향신문 ㅣ 201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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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 권헌익 지음, 홍석준 외 옮김/산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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