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출판, 서울이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 ‘별’
“따르릉~ 따르르릉.”
“안녕하십니까. 산지니출판사입니다.”
“네? 무슨 출판사요?”
“산.지.니. 출판사요!”
“뭐라고요? 산진미요?”
“백두산의 ‘산’, 지구할 때 ‘지’, 어머니의 ‘니’입니다.”
“아하. 그런데 산지니가 뭔 말이래요?”
“매 종류예요. 왜 민요에도 나오잖아요. 산지니 수지니 해동청 보라매~.”
“아! 예….”
출판사 이름이 그리도 낯설었나. 전화를 받을 때면 항상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가 있었다. 몇 마디 설명 끝에 ‘수지니는 사람 손에 길든 매고, 산지니는 산에서 자라 오랜 해를 묵은 매를 말합니다’ 하고 덧붙이는 것까진 좀 어려웠지만.
높이 날고 오래 버티는 ‘산지니’라는 이름. 처음엔 낯설어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 이름 덕에 출판사가 이만큼이나 버텨올 수 있었다고 이해해 주는 것 같다.(저만의 생각은 아니겠죠?^^)
산에서 자라
오랜 해를 묵은 매
사실 ‘산지니’란 이름은 대학 시절, 학교 앞 사회과학 서점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 당시 서점에 죽치고 앉아 책 보는 게 일이었고, 그렇게 ‘산지니’ 책방 덕분에 젊은 혈기로 뜨겁기만(?) 했던 세계관을 차곡차곡 다듬어 갈 수 있었다.
90년 이후 사회과학 서점이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산지니 서점마저 어느 순간 문을 닫았다. 가슴 뻐근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그 이름을 되살리고 싶었다. (허구한 날 서점 귀퉁이에서 책만 파고들던 나를 말없이 지켜봐 주셨던 사장님,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기찻길 옆 출판사. 산지니가 처음 둥지를 튼 부산 거제동 풍경
2003년 12월. 10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영혼 없이 일하는 것보다 오매불망 하고 싶었던 일, 출판사를 해 보겠노라고. 그 뒤로 창원에서 매주 기차를 타고 서울을 오르내렸다. 도서관, 서점을 탐방하고, 출판 관련 행사와 강연도 부지런히 챙겨 듣고, 출판계 관계자들을 만나 속 깊은 이야기들을 경청했다. 그렇게 1년여 시간을 준비하다가 2005년 2월, 드디어 ‘산지니출판사’의 문을 열었다. 태어난 곳이자 내 삶의 터전인 부산에서!
“그나마 문학 하시는 분들이 출판사를 열면 2~3년은 버티지요. 왜냐면 지인들이 책도 사주고 도와주거든요. 그런데 아무 경험도 없고 연고도 없는 분이 출판사를 열었다가는 2년을 버티기 힘들걸요.” 안타까운 시선의 충고. 출판사 운영이 녹록치 않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덩그러니 사무실만 열었을 뿐 받아 놓은 원고 하나가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 또 걱정. ‘이러다 책을 언제 내나, 낼 수는 있을까….’ 여러 사람을 만나러 다녔지만 당장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번역출판을 해야겠다 싶었다. 에이전시를 통해 일본번역서를 소개받고 마음에 드는 책이 있어 판권을 신청했다.
내가 이 꼴 보려고
출판사 했나?
일본 출판사로부터 받은 답신은 허망했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는 출판사가 어떻게 이 책을 번역 출판할 수 있겠냐.” 상대 출판사는 일본에서 매출 1위의 출판사였다. 결국 첫 번역 출판 건은 무산되었다. 시쳇말로 존심이 상했다. 이 일은 내게 ‘로컬 퍼스트(Local First)’를 깊이 고민하게 만들었다.(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누구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그해 10월 <반송사람들>,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 두 권을 출간했다. 출판사 문 연 지 8개월 만에 책을 냈지만 홍보가 문제였다. 두 권의 책을 들고 서점을 찾았다. 서점관계자는 표지디자인이 촌스럽다고 혀를 끌끌 찼다. “요즘은 책 내용도 중요하지만 겉표지는 더 중요합니데이. 그래야 독자들에게 선택받지예.” 애정 어린 충고를 하면서도, 같은 지역이라고 괜찮은 조건으로 유통계약을 해주었다.
▲ 출판사를 차리고 8개월 만에 나온 책 <반송사람들>과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
한 달에 한 권 정도 꾸준히 책을 내다 보니 출판 담당 기자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웬 지역출판사에서 이렇게 꾸준히 책을 내나? 쉽지 않을 텐데.” 사실 곧 망할 거라는 속뜻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예상처럼 위기도 많았다. 2006년의 대구 제일서적 부도는 그나마 당시 출간종수도 적었고, 서점 측의 협조로 위탁 도서 대부분을 회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부산 청하서림과 면학도서 부도는 달랐다. 직거래 서점이었는데도 도매상에서 책을 모두 싹쓸이해 간 나머지 손해는 고스란히 출판사 몫이었다.
못다 핀
꽃 한 송이 피우리라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 첫 책 <반송사람들>이 나온 뒤 주민자치센터에서 출간기념회 겸 마을잔치를 벌였다. 반송 주민들은 자신들이 함께 만든 10년의 역사를 보며 뿌듯해했다. 이 책은 그 뒤로 산지니 출판사의 방향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단지 지방이라는 이유로 묻혀버리고 마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움직임들을 가장 먼저 포착하는 게 우리의 할 일이라는 암묵적 약속이 이뤄진 것이다.
반송 마을 전경. 장산을 중심으로 윗 반송과 아랫 반송으로 나뉜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를 걷다>, <금정산을 보냈다>, <바다를 바라보다> 같은 지역문학 관련 책 수십 종이 나왔다. <부산을 맛보다>, <왜성 재발견>처럼 부산의 문화예술을 다룬 책들도 여러 권 이어 나올 수 있었다. 특히 부산의 특성을 살린 지역문화 콘텐츠 <부산을 맛보다>는 산지니의 저작권 수출도서가 1호가 되었다. 2011년 서일본신문사 출판부에서 일본어판 출간을 하게 된 것. 불과 6년 전 일본 번역서 출판 무산의 아픔을 깨끗이 씻어준 쾌거였다.
첫 저작권
수출도서가 나오다
부산지역의 특성을 잘 살린 특화된 문화 콘텐츠를 찾아 알리는 일이 소중하다.
서일본신문사에서 출간된 일본판 <부산을 맛보다> 표지와 내용 일부
산지니는 설립 초기부터 대한출판문화협회 등의 출판단체에 가입해 저작권 수출에 대한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왔다. 언제까지 우리 출판계가 비싼 로열티를 물면서 해외 번역서 출판에만 매달릴 수 없기에. 그래서 도쿄국제도서전, 베이징국제도서전, 서울국제도서전 등등에 협회, 단체를 통한 위탁도서 출품 노력을 계속했다. 독자 부스를 만들어 참여할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서전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처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책을 펴내면 독자들에게 그 책을 알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 길이 막혀 있다. 온오프 서점의 진열대는 베스트셀러, 대형출판사 책 위주다. 지역출판사 책은 그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소위 ‘발견성’이 떨어진다. 아니 없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터이다. 공들여 만든 좋은 책이 빛도 보지 못한다. ‘지역에서 행복하게 출판하기’를 꿈꾸는 많은 지역출판인들. 문화 다양성의 보물창고 지킴이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는 점점 위축된다.(저만 그런 거 아니겠지요.ㅜㅜ)
국내외 도서전이 활발하지만 지역출판사에게 그 문턱은 높다. 그래서 질렀다. 우리가 하자고.
서울이란 블랙홀에
빨려들지 않겠다
꽃피는 봄이 오면 국내외 안팎으로 도서전이 많이 열린다. 독서문화 진흥을 위한 여러 캠페인과 행사도 더러 열리지만 일회성이거나 생색내기용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자금과 여력이 부족한 지역출판사로서는 모두가 그림의 떡이거니와, 어쩌다 떨어지는 떡고물 얻어먹는 것도 솔직히 말해 지친다.
그래서 질렀다. 우리가 하자고. 전국의 지역출판사들이 모여 오는 5월 제주에서 ‘2017제주한국지역도서전’을 연다. 정부나 지자체의 자금지원을 받지 못해, 이렇게 행사비용 마련을 위한 ‘스토리 펀딩’이란 것도 해 본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도서전이 성공리에 개최되고, 자리 잡기 위하여!
남들이 돈 안 된다는 출판업. 그것도 지역에서 출판 일을 하며 다가오는 이중 삼중의 부담. 거기에서 지는 빚은 결국 ‘빛’을 향해 가는 징검돌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서울은 모든 걸 블랙홀처럼 빨아들이지만, 지역출판을 하는 우리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 드넓은 우주의 빛나는 별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오늘도 책을 내고, 내일도 책을 낼 것이다. 바로 이곳, 부산에서.
강수걸 산지니출판사 대표
후원을 해주신 분들께 소정의 선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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