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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유마도』가 가진 남다른 의미는?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7. 11. 6.

안녕하세요, 병아리 편집자입니다.

『유마도』와 조선통신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네요.

국제신문에서 나온 『유마도』 관련 칼럼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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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유마도’에 담긴 조선통신사 교훈 /정상도

강남주 전 총장이 그린 화가 변박의 사행 여정, 유네스코 등재와 겹경사

평화·선린외교의 참뜻, 한일 새 시대 활로 삼길

모두 열두 차례 이뤄진 조선통신사 사행 중 11차는 1763년 8월 3일부터 1764년 7월 8일까지 300여 일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영조가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바쿠후(幕府) 10대 장군 취임을 축하하려 보냈다. 에도(도쿄)까지 다녀온 마지막 조선통신사다. 12차 사행이 대마도에서 그침에 따라 조선통신사의 사실상 대미로 평가된다. 특히 귀국길에서 겪은 통신사 일원 최천종 피살사건은 외교사절이 공무 수행 중 변을 당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줬다.

 

(중략)

 

또 하나는 동래부의 관리로 있던 변박(卞璞)의 발탁이다. 그 인연은 조엄이 동래부사로 있을 때 변박의 그림 솜씨를 인정하면서 시작됐다. 임진왜란 이후 동래는 국방 요충지였다. 동래부에는 행정 업무를 맡는 작청(作廳)과 군사 및 치안을 담당하는 무청(武廳)을 뒀다. 변박은 중인 신분으로 무청 소속이면서도 글씨나 그림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동래부 동헌 대문 이름인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 현판 글씨,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과 동래성 항전을 묘사한 ‘부산진 순절도’(보물 제391호) ‘동래부 순절도’(보물 제392호) 등이 그의 작품이다.

조엄은 그를 통신사 일행에 넣었다. 궁중 도화원 신분이 아니었으므로 사행선의 기선장 역할을 맡겼다. 그렇게 사행길에 오른 변박은 ‘묵매도’(墨梅圖) ‘송하호도’(松下虎圖) ‘유마도’(柳馬圖) 등을 남겼다.

 

(중략)

 

더 반가운 건 때맞춰 변박의 사행 여정을 그린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이다. 그것도 유네스코 한일 공동 등재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노학자의 노력에 힘입어.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한일 학술위원회 한국 학술위원장인 강남주 전 부경대 총장의 첫 장편소설 ‘유마도-조선통신사 변박, 버드나무 아래 말을 그리다’(산지니)가 그 주인공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그가 일본 시코쿠섬의 사찰 호넨지(法然寺)에 보관된 ‘유마도’를 눈으로 보고 4년가량 공을 들여 만든 작품이다.

 

(중략)

 

조선통신사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두 나라 정부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부산문화재단, 일본의 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 등 민간단체가 주도하며 평화와 선린외교의 상징임을 강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로 얼어붙은 한일 관계를 생각하면 갈 길이 멀다. 일본이 분담금을 무기로 유네스코에 압력을 행사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자료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무산된 것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려는 일본의 이면이다.

그것은 소설 ‘유마도’에도 실린 최천종 피살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양국 외교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이 사건을 절도에서 비화한 우발적인 일로 뭉개려 했음은 기록이 증명한다. 또 그 배후엔 역관무역의 이권 다툼, 일본인 특히 대마도인의 간교함 등이 똬리를 틀고 있었음을 빼놓을 수 없다. 강 전 총장은 ‘평화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선통신사 200년 역사가 오늘에 전하는 교훈이다.

 

[국제칼럼] 국제신문 정상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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