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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서평] 명성황후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_『물의 시간』 (정영선 장편소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4. 4. 3.

명성황후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물의 시간』

-정영선 장편소설

 

온갖 문물이 혼재된 개항기 조선에서 밤의 시작과 끝을 알리던 물시계가 멈췄다.

왕후가 죽은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정영선 작가의 장편소설 물의 시간, 조선의 마지막 국모이자 일제의 손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시간이라는 하나의 키워드이자 사건을 중심으로, 물과 같이 흘러가 버린 옛 역사를 새롭게 그려 낸다.

물의 시간이라는 제목처럼, 흐르기에 유연할 수 있었고 흐르기에 때로는 정해진 수로를 통해 갈 수밖에 없었던 유약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시간속에서 여리지만 단단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여자라는 이유로 말을 할 수 없었기에 남길 수 있는 것이라곤 누각의 소금뿐이었던 한 여인(명성황후)과 밤의 시작과 끝인 파루를 알림으로써 왕후의 하루가 조금이나마 유유하기를 바랐던 한 사내(전루군 봉출),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 같은 조선을 바라보는 이방인(영국 지리학자 비숍 여사)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역사의 물줄기 속을 유영하는 한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다.

‘인생은 마치 물’과 같다는 옛 선조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담아내던 물시계가 멈추고, 커다란 소리를 내며 하루를 24개로 일정하게 나눠 버린 서양의 시계가 등장했다. 서양 시계의 등장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연스레 경험하고 몸으로 익히던 우리의 시간이 인위적으로 쪼개지고 고정되어 버린 혼란한 시대. 물의 시간은 이렇듯 중세와 근대의 시간이 교차하는 1895, 수십 년간 물시계에 물을 채우고 밤의 시작과 끝을 알리던 전루군 봉출이 어김없이 북을 쳐 알린 파루(罷漏)의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죄명으로 의금사에 체포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물의 시간

수십 년간 해온 일이었고, 어제 같이 밥을 먹던 사람이 오늘 죽었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는 전루군이지만 이 순간만은 늘 외롭고 가슴이 떨렸다. 그 자신만이 홀로 어둠과 빛, 죽음과 삶, 세상의 비밀을 지켜보고 있다는 고독감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빠르게 차올랐다.  -『물의 시간』 12쪽

물시계가 누각에 자리하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조선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순간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시간을 살았다. 마치 물과 같은 인생이기에 유유히 흐르는 물결을 따라 몸으로 배운 시간을 유영하는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 어디에 있는 누구인지도 모를 이들이 인위적으로 나눈 시간이 가져온 혼란을 현대의 우리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나한테 중요한 것은 니가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내가 기억으로 본 것이다. 니가 눈으로 본 것을 생각하면 나는 아마 한 발짝도 걷지 못할 것이다.”
기억으로 본 것이라면 지나간 것이 아닌가. 그것으로 어떻게 지금 이 순간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거늘, 봉출은 아버지가 눈이 먼 것이 새삼스러워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뭘 보고 있냐, 이눔아.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한 세상의 변화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물의 시간』 105쪽

스스로 익히고 배웠던 시간이 모두 틀린 것이 되어 버리고, 마치 시간에 갇혀 버린 듯 모두와 똑같은 시간을 공유하게 된 개항기 조선인들. 그들의 숱한 고민과 충격은 우리의 삶에서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 즉 몸으로 느끼는 진정한 나만의 시간을 잊지 않게 하는, 가끔 가슴을 꺼끌하고 짜게 만들어 인위적인 시간에 몸을 맡긴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왕후의 시간

“왕후는 김 상궁 옆에 있던 거울을 당겨 얼굴을 비춰 보았다. 광대뼈 옆에 조그맣게 있던 기미가 코 쪽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누군가 써놓은 자디잔 언문 글씨 같지 않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말이 어느 순간 입이 아니라 얼굴에 거뭇거뭇한 글씨로 나타난 것 같아, 두려운 느낌마저 들었다.”
-『물의 시간』 78쪽

물의 시간은 개항기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명성황후를 한 사람이자 한 여인으로 조명한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명성황후라는 인물의 역사적 평가가 어떻든, 작품에 등장하는 명성황후40대 중반 폐경이 시작된 한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끝을 향해 달려가던 위태로운 한 나라의 국모이기 이전에, 그저 가시를 겹겹이 두른 채로 떨던 한 소녀가 흐르는 시간 속에서 폐경을 맞이하여 엉성해진 가시를 처연하게 붙든 모습을 비추는 것이다.

처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한문은 남성들의 세계였고 그걸 배우는 것은 여자들이 할 일이 아니었다.
“조금 아는 것도 곧 잊어야 할 게요. 궁궐 내명부의 글자는 언문이오. 언문으로 글을 쓰면 대소 관료들이 한문으로 옮겨 적는다오. 내명부는 기록을 남겨서는 안 되오. 혜경궁 한씨의 한중록 이후 그것은 더욱 엄격히 금지되어 있소 우리가 남길 수 있는 흔적은 누각의 소금뿐이외다.” -『물의 시간』 128쪽

누각의 물시계에서 흐른 물은 햇볕에 말리는 것이 관례라 한다. 물이기에 깨끗이 증발하는 게 당연한 사실 같지만, 한 번씩 물기가 마르면 종이 위에 소금이 남는다. 한 나라의 국모라는 높은 지위에 있는 여성들이 유일하게 남길 수 있는 기록이었던 누각의 소금’. 단지 여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을 할 수도, 기록을 남길 수도 없었던 명성황후의 삶을 통해 우리는 흐르는 시간 속에서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 수많은 사람(시대, 사회의 약자)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누각의 소금

“그런데 그 나라에선 그 물을 햇볕에 말린다네. 깨끗이 증발되는 적도 있지만 한 번씩 결정이 생길 때도 있다더군. 그걸 그 나라의 왕후에게 준다는 거야.”
“결정이 생긴다는 건 뭔가 되돌아보아야 할 일이 생긴다는 걸 의미하고 그건 왕후들의 몫이라고…….”
“그 결정을 역사와 똑같이 보는 건 아닐까. 역사는 전부 중국의 문자인 한문으로 되어 있고 여자들은 그 글을 배우지 않으니.” -『물의 시간』 22쪽
상선이 주상의 말을 전하면 관상감에서는 소금을 올렸다. 이유를 물은 적이 없었다. 놀란 적도 없었다. 진짜 누각에서 소금이 난 것처럼 올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미리 소금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 맞아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왕후마마와 관련된 일은 주로 맞았다.
(중략)
그러나 아직도 영감은 주상께서 소금을 요구하는 것이 왕후마마를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찌되었건 내전에서 누각의 소금을 꺼내간 것은 하늘의 이치에 의심을 품는 일이었다. 하늘의 이치는 주상의 마음이었다. -『물의 시간』 223~224쪽

흐르는 물에서 나왔다고 하는 누각의 소금, 왕이자 한 사람으로서 왕후에게 경고의 의미를 담아 전한 인위적인 소금이었다. 그러나 소금이라는 작은 결정을 통해 작품을 관통하는 시간의 깊은 양면의 의미를 전하고자 한 작가의 섬세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놓친, 때로는 잊지 않아야 할 한순간의 흔적일 수도 있는 소금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잊지 않았어야 할 삶의 순간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절대로 남기거나 볼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을 눈에 보이는 결정의 형태로 마주했을 때 그리고 마주해야만 했을 때의 감정과 생각을 고민해 보고 곱씹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왕후와 전루군

“시간이란 게 원래 몸에 새겨지는 게 아니겠소이까. 내 수십 년간 그 소리를 듣고 아침저녁을 맞았습니다. 이제 내 몸이 그 북소리에 익숙해져 있을 터인데 오늘 새벽의 파루는 내 몸과 한 치의 빈틈이 없었소이다. 내 자세히는 모르나 그 전루군은 아주 오랫동안 누각에 있었던 것 같은데…….” -『물의 시간』 61~62쪽
“빌고 빌어 제 속으로 난 세자까지도 가끔 희미할 때가 있는데 어린 시절 만난 박봉출만 어찌 이리 생생한지……. 왕후는 일순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사직을 위해서, 왕후를 위해서 누각의 종을 울린다는 영상의 말이 귀에 생생했다.” -『물의 시간』 271쪽

 파루를 알리는 전루군과 조선의 국모인 왕후의 사랑 이야기라니, 너무도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전루군왕후가 아닌, 서로가 누구인지 중요치 않던 과거의 두 사람이 공유한 기억에서 피어난 사랑이었기에 더욱이 애틋하고도 처연하게 느껴진다. 욕망과 열정이 그득한 세속적인 사랑이었다면 우리는 봉출과 왕후의 사랑에 스며들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한 사람한 사람으로서 서로를 기억하고 또 기억해 내는, 흘러간 과거를 굳이 거스르려 하지 않고 단지 흐르는 마음을 받아들이는 과 같은 사랑이었기에 더욱 가슴에 남는 듯하다.

 

 이방인의 시간

“여사께서는 여행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들을 만나겠지만 나는 오로지 이야기책을 통해서만 여행을 합니다. 이야기책을 읽으면 세상을 조금 알 것 같기도 하고요.”
왕후는 어려운 고백이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까지 살짝 붉히며 이야기했다. 지리학자는 처음으로 이야기도 여행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혹 기회가 있으면 토끼굴로 들어간 앨리스와 거울 속으로 들어간 앨리스라는 이야기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정말 고맙지요.”
왕후가 소리 내어 잠깐 웃었다. 김 상궁과 밖에 서 있던 대신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왕후의 웃음소리를 처음 들었다는 듯이. -『물의 시간』 239쪽

개항기 조선의 여인들에게는 가히 충격이었을, 60대의 나이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라는 인물은 서양과 조선의 차이, 여성과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를 잘 드러낸다. 같은 여성이지만 전혀 다른 삶과 태도를 가진 채 살아온 두 여성의 소통 과정은, 언어가 아닌 내면의 형태로 그려진다. 한 사람이 살아온 그만의 시간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품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작은 유대가 작가가 전하고자 한 시간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시계가 멈춘 날

덩 덩 덩,
왜놈들이 자정에 치는 종소리다. 이제 시간은 하늘의 순리와 관계가 없다. 묘시에 해가 뜰 때도 있고 진시에 해가 뜰 때도 있다. 놀랍게도 사람이 시간을 만든 것이다. 시간에 맞춰 살다 보면 시간이 사람을 만들지도 모른다.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예전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는데 이젠 물어도 알 수 없을 것 같다.
-『물의 시간』 276~277쪽

시간은 물과 같기에, 지나온 삶이 몸에 물결을 내고 그 물결을 따라 시간을 배운다. 서양의 시계가 인위적으로 시간을 나누고 물시계를 멈추게 할지라도, 우리의 시간은 유유히 흐르고 있을 뿐이다. 지금의 나는 시간을 유영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면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살고 있을까.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게 시간이라면, 가끔은 내 몸에 새겨진 시간에 몸을 맡겨 보는 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물의 시간은 역사의 파편 속 명성황후가 아닌,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의 한 여자이자 한 사람을 그린다. 왕후의 시간을 위해 북을 친 전루군과 왕후와 내면의 소통을 이루는 비숍 여사 그리고 누각의 소금, 이 모든 삶이 모여 물의 시간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 우리는 물의 시간이 전하는 사랑, 소통, 차이, 좌절, 변화를 통해 역사의 이면에 존재한 개인과 현재를 살아가는 시간을 마주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침묵했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우리는 앞으로 어떤 시간의 물결을 따라 흐르게 될까? 내가 남기게 될 흔적은 어떤 모습일까? 이 물음의 실마리를 물의 시간에서 마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물의 시간』 책 소개

 『물의 시간』 

정영선(지은이) / 산지니 / 2010-05-03 / 298쪽 / 12,000원

 1997년 중편 『평행의 아름다움』으로 등단한 정영선의 장편소설이다.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을 ‘시간’ 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새롭게 해석한 작품이다. 소설은 중세와 근대의 시간이 교차하는 1895년 조선을 배경으로 조선에 사는 사람과 조선에 온 사람의 시간의식이 다르다는 것, 서양 시간과 조선 시간을 둘러싼 권력, 그 와중에 벌어진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을 중심 줄거리로 전개된다.

 당신은 말하고 싶을 거다. 아직도 명성황후냐고.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재재작년에도 영화, 드라마, 뮤지컬, 장편소설이 줄줄이 나온 걸 모르냐고. 한심함을 감추느라고 짐짓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난들 왜 그 사실들을 모르겠는가. 진짜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지만 아래의 두 문장 때문에 끝내 포기하지 못했다.(작가의 말 중에서)

 

한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연서
이 소설은 한 인간의 죽음을 전하는 비통한 부고이자, 한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연서이다. 비극적인 죽음으로 봉합된 왕후의 삶은 물기가 마른 뒤 종이 위에 남은 작은 소금 알갱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것은 검은 잉크로 쓴 글씨를 지우지 않는 작은 알갱이에 불과할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여인의 역사’라고 불렀다. 죽음은 역사라는 의미맥락 안에 포섭되기보다는 역사를 향한 질문으로 끝없이 되돌아온다. 그것은 우리가 “외롭지도 서럽지도 않아도” 떠오르는 질문이다. 작가는 한 편의 연애편지를 손에 들고 우리에게 천천히 읽어주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한 여인의 죽음(비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한 여인의 삶(이야기)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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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시간

정영선의 장편소설.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을 시간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새롭게 해석한 작품이다. 소설은 중세와 근대의 시간이 교차하는 1895년 조선을 배경으로 조선에 사는 사람과 조선에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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