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행정안전부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제34회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고 나병식 선생께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과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민중항쟁의 진실을 기록하고 출판하는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여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나병식 평전』은 이러한 나병식 선생의 삶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의 구술과 자료들로 나병식 선생이 걸어온 길을 되살린다. 민주화운동가, 출판인 등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책에서는 그보다 더 다양한 나병식 선생의 정체성을 만날 수 있었다.
1. 운동가 나병식
나병식의 동생 나병순에 따르면 대학 입학을 준비하던 나병식은 법대에 가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국민들을 괴롭히던 판검사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배움과 삶에 대한 나병식의 태도는 이렇듯 대학 입학 전의 에피소드에서부터 알 수 있다.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한 나병식은 대학생활과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회)’ 서클 활동을 하며 운동가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나병식이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역사의식과 민중지향적인 태도 또한 성장하기 시작한다. 많은 이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활동은 ‘10.2 시위’일 것이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다. 4학년이던 나병식은 이에 책임감을 느꼈다고 한다.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데모’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나병식은 학생회를 부활시키고 후사회 기존 회원들을 모았다. 학교 내에서도 시위에 대해 찬반 의견이 나뉘었지만 그는 “이젠 밀어붙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1973년 10월 2일, 문리대 시위가 일어난다. 10.2 시위는 유신 반대를 주장한 첫 시위였다. 저자는 그에 더해 ‘유신체제 초기 저항운동의 대전환을 이끌어낸 일대 사건’이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이어 법대와 상대에서도 유신 반대 시위가 시작된다. 주도자들의 구속과 수배, 강제 입영이 진행되지만 학생운동은 전국 규모로 확대된다. 10.2 시위는 학생운동을 넘어 종교계와 지식인, 언론인 등 전 국민의 분노와 참여를 촉발시킨다. 학생으로서 시위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 어찌 두려움이 없었을까. 그러나 무언가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과 결심, 그리고 그 두려움과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가 민주화 투쟁의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중요한 하나의 기록을 만들었다.
나병식은 ‘굴종’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새로운 분발’에 대해 고민했다. 굴종이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 상황에 대한 객관적 진단을 넘어 그것이 초래한 역사 주체들의 상태를 보는 것, 그것이 사태를 변화시키고자 할 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답으로 안내했다. 그 혼자만의 진단은 아니었겠지만, 현 사태의 핵심을 ‘굴종’으로 본다면 ‘새로운 분발’은 당연히 떨쳐 일어나는 것이다. 비참하게 자신의 생각과 뜻을 굽히는 굴종에서 용기를 내어 싸우러 나가는 일이다. 나병식이 사태를 굴종으로 인식하는 한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_116쪽
2. 출판인 나병식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나병식은 감옥에서 나온 후 식구들을 건사해야 했다. 동생과 튀김 장사를 하고 소공동 지하상가에 와이셔츠 가게를 열기도 했다. 장사는 잘되었지만 나병식은 출판사를 차리기로 결심한다. 저자는 나병식이 출판을 시작하면서 “운동과 삶을 일치시켰고, 변혁과 일을 일치시켰으며, 시대의 요청과 자기실현을 일치시켰다”라고” 말한다. 나병식은 왜 출판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살다 보면 소시민의 삶의 굴레 속으로 빠져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생 시절 자신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한 책들이 생각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1979년, 그렇게 풀빛 출판사가 설립된다. 풀빛 출판사는 현재까지 다종다양한 도서를 출간하고 있는 종합출판사이지만 그 시작은 노동, 여성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사회과학 도서들이었다. 나병식은 돈과 상업성은 뒤로하고 운동, 사람, 책을 우선순위에 두었다고 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번역으로 먹고살던 ‘운동하는 후배들’ 먹여 살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그들의 책을 출판해 주고, 그들이 인세를 받아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에피소드였다. 출판인 나병식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출판은 물론 그의 삶에 대한 신념과 원칙을 알 수 있다.
1985년 풀빛 출판사에서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최초의 책이다. 당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책이었지만 당시 이러한 책을 출판하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병식은 두려움 없이 “출판사가 망가지더라도 출판을 내가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제본소 사장의 신고로 2만 부나 되는 인쇄물을 정부에 모두 빼앗기기도 했고, 이 일로 나병식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출판을 포기하지 않은 출판사의 의지와 독자의 요구로 이 책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퍼져나갔다.
두 권의 『한국 민중사』 또한 풀빛 출판사의 대표 서적이다. 영어로 된 한국사 책 출간에서 시작되었으나 이 책은 ‘민중사’라는 제목을 달면서 그간 학계가 다루지 않았던 숨겨진 역사적 사실들을 다루게 된다. 이 책에 들어 있는 ‘민중’의 개념과 북한 역사에 대한 내용으로 인해 나병식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다. 그는 6월항쟁 이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지만 법원에 항소를 제기하여 민중사의 승리의 기록을 역사에 남긴다.
역사는 흔히 도도히 흐르는 대하에 비유되듯이 쉬임없이 흐르는 것이고, 법은 인간사회가 특정한 시공 속에서 가장 마지막에 구축하는 완고한 구조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역사를 법정에 세우는 일은 마치 흐르는 물을 손아귀에 담으려는 헛된 시도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역사는 법정에 붙잡혀 있다._항소이유서 중에서
이와 같이 나병식은 그의 삶의 태도를 출판을 통해서도 지켜나갔다. 학생운동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민주화를 책을 냄으로써 달성하고자 했고, 관련 이론을 책으로 출판해 다양한 사상이 자유롭게 논의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나병식은 책을 만들고 세상에 나누는 출판이라는 지적이며 정적이고 고달프고 미묘하고 여린 일을 가장 역동적인 것으로 만들었다.”(339쪽)
운동가와 출판인 이외에도 책에는 남편, 아빠로서의 나병식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 87년 6월항쟁 이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통해 정치인으로서 나병식이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했는지 그려진다. 호남의 불균형적인 발전과 지역 차별 문제 해결을 위해 나병식은 사람들을 모으고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균형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정치에도 나섰으나 정치적 변방에 서 있던 나병식에게 그 도전은 쉽지 않았다. 2000년과 2004년, 총선에 도전하였으나 현실 정치라는 무대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그의 정치적 도전은 이렇게 막을 내리지만 저자는 그의 정치에 대한 꿈을 이렇게 평가한다. “호남 개혁 정치의 대표가 되어 호남 차별과 소외의 문제를 제기하며 균형사회에 대한 비전을 실현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그가 정치 입문에 성공하길 바라면서 돕고 밀었던 이유는 가장 단순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좀 건달 같은 정치, 쫌생이 정치 말고 좀 큰 정치.”(417쪽)
책을 읽다 보면 나병식 선생의 정체성들이 모두 동떨어진 개별적인 것들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그의 삶과 행보에 ‘풀빛’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나병식은 자신의 호인 ‘만파’보다 ‘풀빛’으로 스스로를 더 자주 불렀다고 한다. 풀과 같이 푸르고 강한 생명력, 그 생명력이 내뿜는 빛깔. 나병식의 삶을 따라 읽으니 왜 나병식이 자신을 ‘풀빛’이라고 불렀는지 알 것도 같다. 그의 길 하나하나에 어려 있는 목표의식과 이상적인 사회를 향한 열망이 바로 ‘풀빛’ 아닐까.
그래서 풀빛은 무엇인가? 혁명이고 공동체이고 생명력이고 살아 있음이고 강함이고 공통의 언어이고 생각이고 책이고 희망이고 삶이라 하면 설명되는 것인가? 나병식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에게. ‘선명한 추사이자 시들지 않는 구체의 묘한 기운’이란 설며을 간직하려 한다. 풀빛은 가장 근원적 생명력과 닿아 있고 생명이 나아갈 이상과 목표에도 닿아 있다. 그러하니 풀빛은 생명이 가진 실천의 힘과 끈기의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 풀빛을 일단 우리가 나병식이 선취한 것으로 양해한다면 풀빛은 그의 삶에 담겨 있을 빛일 것이다. 나병식이란 삶이 머금은 수많은 이야기는 생명력 넘치는 풀빛으로 모이고 뻗어갈 것이다._346쪽
나병식 선생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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