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1989년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권 붕괴 이후 세계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도 미국 월가의 몰락으로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시장이 만능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포장한 채 경제적 패권을 휘두르던 미국의 지위가 한순간에 추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외교의 산실, 백악관
『추락하는 제국』 (원제: America's Failing Empire)은 냉전이 끝난후 15년간의 미국 외교정책을 그 이전 40년과 연관시켜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냉전이 끝나던 무렵 정권을 잡은 조지 H. W. 부시(시니어 부시) 정부에서부터 클린턴을 거쳐 현재의 조지 W. 부시(주니어 부시) 정부 1기에 이르기까지의 미국 외교정책이 그 내용입니다.
1989년, 미국은 냉전에서 이긴 승자였습니다. 하지만 승리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미국내 전문가들의 시각은 엇갈렸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군사력보다는 경제력을 갖춘 국가들에 의해 미국의 위상이 점점 빛을 잃어가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 반면, 다른 전문가들은 최강의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보였습다.
이후 약 10년간 이런 우려는 잠잠해졌지만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졌지요.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에 가해진 공격으로 미국 외교의 취약성이 드러났고, 이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대응은 세계 여러나라로부터 불신을 샀습니다.
냉전이 끝난 후 미국은 그야말로 제국의 자리를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아무런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고 제국다운 역할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오랜 이념 전쟁이 마무리된 이후 세계가 미국에게 기대한 것은 아마도 인류 보편적 가치의 확산이었고 그로 인한 세계의 안정과 평화였을 것입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종, 종교, 계층, 이념 간의 갈등 해소 및 화해가 전제되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경제적 패권을 추구하고 일방적인 힘의 행사에 주력한 나머지 세계 주도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실패국가로 치닫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서문은 이차대전 이후부터 냉전 종식 시점인 1989년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다룹니다. 종전 이후 새로운 국제질서가 수립되는 과정과 냉전 시대를 떠받쳤던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를 엿볼 수 있습니다.
1장에서는 갑자기 닥친 냉전 종식의 상황과 그로 인해 크게 변화된 정치, 군사, 외교적 지형 속에서 외교 전문가인 부시와 그의 보좌진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천안문 사태를 일으킨 중국과의 문제, 1차 걸프전과 같은 굵직한 사건에서부터 유고 연방들 간의 분쟁, 파나마 사태, 아이티와 소말리아 문제에 이르기까지 각종 국제문제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봉쇄’는 냉전 시대의 외교 원칙이었습니다. 이제 그 원칙이 가치를 상실함에 따라 이를 대체할 새로운 이론이 필요했고 더불어 국제적 지형 변화에 따른 미국의 새로운 역할론에 대해서도 논의해볼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2장에는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3장부터 5장까지는 클린턴 행정부 시대의 외교정책을 다루었습니다. 클린턴 정부 시절에는 경제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여긴 나머지 외교가 크게 위축되었고 그로 인해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써 당연히 수행해야 할 최소한의 역할마저 포기한 시기로 규정됩니다. 특히 인도주의적 개입 문제에 소극적 반응을 보인 정부의 처신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아울러 외교를 경제와 국내 정치 문제에 종속시킴으로써 냉전 이후 신국제질서 확립을 위한 외교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6장부터 8장까지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시기의 키워드는 역시 테러와 전쟁입니다. 9·11 테러를 비롯하여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그리고 미국이 악의 축으로 규정한 국가들과의 끊임없는 긴장관계가 이어진 시기입니다. 정책 결정권을 가진 몇몇 인사들의 편협한 민족주의 의식이 빚어낸 상황들이었습니다. 때마침 등장한 네오콘이라는 새로운 이념 집단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 이 민족주의자들의 힘을 빌렸고 민족주의자들 역시 네오콘으로부터 이론적 논거를 제공받음으로써 일방주의적 정책이 더욱 빈번하게 저질러졌습니다. 그 과정과 내막을 상세하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현재 임기말이 다가오고 있는 주니어 부시에 대한 평가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부시 집권 1기 동안은 냉전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 국민들이 불안에 떨었고 20세기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의 국가 위상과 국민의 위상이 추락한 시기로 봅니다.
부시가 임기를 시작하면서 구성한 외교팀은 케네디 정부의 외교팀에 버금가는 ‘최상의 진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채택한 정책은 미국을 재난 직전의 상태까지 가게 했다고 말합니다.
부시의 외교팀은 알카에다와 빈 라덴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고 소위 불량국가의 위협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던 9·11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고 그로 인해 파멸을 불러오고야 말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9·11 이후에도 모든 국력과 국가의 에너지를 사담 후세인 제거에 집중시킴으로써 이라크 전쟁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수많은 우방을 잃었고 악당으로 인식되면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막대한 반감만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결국 부시 외교팀은 전후 이라크 상황을 오판함으로써 미군을 자신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뜨리고 말았다고 평가합니다. 미국에 대한 적대감은 중동에만 한정된 게 아니라 미국이 세계 평화의 최대 위협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징후가 전 세계 여론조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추락하는 제국』워런 코헨 지음, 김기근 옮김
『추락하는 제국』은 다소 무겁고 전문적인 분야일 수 있는 외교정책이 주제이긴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한 깊은 식견을 갖추지 않고서도 능히 읽을 수 있을 만큼 매우 쉽게 쓰인 책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국제적 사건 위주로 설명되어 있는 데다 그 내용을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 미국 외교정책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또한 외교정책에 관여하고 있는 정치가들의 성격이나 업무 스타일에 대한 파악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 편의 이야기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클린턴 행정부 외교팀의 면모는 외교계를 대표하고도 남았지만 활기도 없었고 또 활기를 띨 가능성도 없었다. 카터 정부에서 국무부 차관을 지낸 바 있는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는 다자주의와 국제협력 정책이 대통령과 국가에 대한 기여라고 믿고 있었다. 만약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그는 인권 보호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을 것이다. 크리스토퍼는 아주 지적이고 점잖은 인물이었지만 부시 행정부에서 베이커가 그랬던 것처럼 클린턴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고 클린턴으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클린턴 정부의 초대 국방장관 레스 애스핀은 식견 있는 정객이었으나 행정가로서는 무능해서 군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다.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로써 합참의장 자리에 오른 콜린 파월은 군 내 동성애 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정책을 반대하며 공개적으로 대통령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안보 보좌관에 오른 토니 레이크는 한때 닉슨 정부에서 헨리 키신저를 잠깐 보좌한 경력을 갖고 있었지만 키신저의 외교적 능란함이나 수완을 배우지는 못했다. 그는 카터 정부 시절 국무부 정책기획팀을 이끌면서 신중하고도 정확한 판단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로 여겼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전 세계에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문, 1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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