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김경연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라는 이 책은 두 철학자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책에 대해 소개하면 서두가 길어질텐데요. 우선 번역자에게 이 책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책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그리고 마틴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에 관한 소박한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은덕 소설가·번역가.
황은덕 처음에 산지니 출판사에서 전화가 와서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라는 책에 대한 번역의뢰와 함께, 번역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지 검토의뢰 요청이 왔습니다. 우선, 책부터 읽어봤습니다. 읽어보니, 저는 굉장히 재밌었어요. 한나 아렌트의 경우는 아렌트 폭력론에 대해서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거든요. 저한테는 굉장히 강건하고 의지가 충만한 여성철학자로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는 순간 저의 기존의 아렌트의 이미지와 다른 이 책 원서를 통해 굉장히 놀랐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논리적으로 사유, 자유, 의지에 대해 인간의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힘을 행위라고 분석한 아렌트가 책에서는 너무나 섬세하고 사랑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여성으로 그려져 있거든요. 하이데거 같은 경우도 굉장히 충격이었습니다. 독특한 언어관을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자인 하이데거를, 저는 그동안 존재의 철학자로서 추상적으로 이해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살펴보니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온갖 술수를 다 부리면서 거짓말과 기만을 보여주는 하이데거의 모습에 우선 놀랐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 하이데거의 나치즘 연루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이 책은 최대한 팩트에 의존해서 편지와 다양한 자료들로 크로스로 조합해나가면서 서술되었습니다. 하이데거의 사유와 의지와 그의 그런 면모를 강조했던 아렌트의 숨겨진 뒷모습을 알 수 있어서 저로서는 쾌감을 느낄 수 있었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이 책에 대해 갖고 있는 첫 번째 반응은 불쾌함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전공자들을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의 출간에 대해서 이야기드렸더니 모두 불쾌해하시더라고요. 철학에 집중하지 않고 왜 이런 것에 집중하느냐고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글쎄요.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94년에 출간한 책인데 이 책은 지금도 굉장히 논쟁적인 책입니다. 이유는 두 철학자들의 불륜에 너무 초점을 맞추지 않았나, 그리고 엘즈비에타 에팅거의 태도가 굉장히 아렌트를 위주로 편애하면서 기술되었다는 점이겠지요. 제가 읽을 때도 아렌트와 하이데거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하는구나 할 정도로 굉장히 편향적인 태도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아마 저자도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나치즘을 피해서 망명생활을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자인 엘즈비에타 에팅거도 소설을 2권 발표했습니다. 아렌트의 전기 집필 중에 사망하였는데, 이런 점들을 총합해 봤을 때 자연히 아렌트를 편애하는 쪽으로 글을 쓰지 않았나 생각되네요. 이 책이 그 전에 둘의 관계를 다뤘던 소설이나 이야기들보다 굉장히 드라마틱하게 다가왔던 것은 피상적으로나마 기존의 하이데거나 아렌트의 고정관념에 대해 깨뜨린 책이었고, 그럼으로써 어쩌면 이 두 사람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점이었습니다. 불쾌해하시던 전공자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금방 이해하시면서 제 번역 작업에 대해 이해하시더군요. 그런 계기로 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경연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주간.
김경연 저는 하이데거를 학부과정에서 시론을 통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텍스트를 가지고, 한용운의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시를 ‘존재’와 ‘존재자’로 해석하는 것을 보고 어렴풋이 하이데거라는 철학자에 대한 생각이 고정관념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앞에서 설명을 하셨지만, 하이데거의 철학이 너무도 어렵고 철학계 내에서도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개념이 어려운 개념으로 통상 여기고 있는데요.
저에게 있어서도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이렇게 어려운 사람이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책을 통해 그들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여서 흥미로웠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책 끝에 달린 역자후기를 읽었습니다. 의미심장하게 쓰고 계신 부분이 있는데 저는 선생님의 후기를 읽으면서 그러한 두 철학가의 이야기에 대한 불편함과 낯섦을 극복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 책 표지에는 ‘행간에 놓인 사랑과 철학, 위대한 대화들’이라고 쓰여있지만, 제 솔직한 생각으로는 두 철학가의 거의 모든 작업을 삭제하고 두 사람간의 관계를 굉장히 선정적으로 풀어놓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불편했던 점이 있었습니다. 번역자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가치에 대해 얘기해 주실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황은덕 번역하면서 아렌트 전공자와 먼저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책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많은 학계에 계신 분들이 이 책을 선정적인 방식으로 보고 있다는 것에 저는 조금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한나 아렌트에 대한 모든 책이 다 번역되었고 하이데거에 대한 거의 모든 책이 번역이 다 나와있는데 유독 이 책만 번역이 되지 않았는지 그 의문에 대해서 말입니다. 심지어 둘의 대화록에 관한 번역조차 나와 있는데, 미국에서 주목받았던 이 책은 한국 학계에서는 마치 금기사항으로 취급당하고 있었죠. 사람들이 철학에 대한 아우라를 마주하기를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사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철저히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아무도 안하려고 하기 때문에 제가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소설가인 제가 학계에서 다루지 않는 둘의 사랑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에서 이 책의 존재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오히려 아렌트와 하이데거를 좋아할수록 둘의 이런 면모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제 역자 후기는 모두 이러한 변명들을 죽 나열한 것에 불과합니다.
엘프리데 하이데거와 마틴 하이데거.
이율배반과 자기모순, 지적 영감의 교류자로서의
다양한 사랑의 측면을 보다
김경연 이 책을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하이데거의 아내인 엘프리데와 하이데거의 관계가 부수적으로 나오고, 아렌트의 남편 블뤼허의 관계 또한 굵직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어느 블로그에 한 독자의 서평을 보니 ‘마치 순진한 한나 아렌트가 못된 하이데거의 꼬임에 빠진 것처럼 스토리를 만들어나간다’는 글을 써놓았던데요. 저도 이 책에서의 저자의 편향된 시각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자가 ‘하이데거는 아렌트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환상을 만들어낸다. 한데 그를 타락하게 만든 것은 그의 아내 엘프리데다.’ 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저자가 아렌트를 옹호하려는 식으로 그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역자로서 엘프리데와 하이데거의 부부관계와 블뤼허와 아렌트의 부부관계, 그리고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만남을 계속 용인하는 블뤼허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황은덕 아렌트의 사랑은 굉장히 자기기만적인 영역이었습니다. 처음 시작은, 열여덟 살에 아렌트가 서른다섯의 철학교수인 하이데거를 만난 거죠. 당시 독일에서는 교수와 학생관계는 엄격한 도제관계이자 절대복종의 관계였습니다. 1924년도 가을에 마부르크 대학에 입학한 아렌트에 있어 하이데거 교수는 가장 인기 있는 교수였고요. 대학에서 만난 둘은, 5년 동안 연인으로 지내다가 다시 또 만나면서 재회를 반복하고요. 재회 당시, 하이데거는 많이 나이도 들었고 나치즘 오명을 벗기 위한 굉장한 노력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필요했고 아렌트 입장에서 볼 때는 과거의 연인이자 스승이자 철학과 동격인 신적인 존재인데 두 사람의 관계가 늘 그랬어요. 하이데거에 있어서도 아렌트가 사랑의 대상이었고요.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 자신을 숭배하고 영감을 주고, 나만이 그의 유일한 여성이다. 나만의 그를 정신적으로 구원해줄 수 있다고 아렌트는 그렇게 믿은 거죠. 그런데 그런 점이야말로 환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도 아렌트와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저술하고 있지만, 사실 하이데거에 가장 어울리는 짝은 엘프리데였거든요. 오히려 아렌트는 처음에 하이데거의 나치즘 부역을 비난하고 장문의 편지를 쓰기도 했는데, 엘프리데는 끊임없이 하이데거를 지원하고 하이데거의 현실적인 지원을 돕습니다. 어쩌면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통해 어떤 철학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엘프리데 같은 경우는 하이데거가 마부르크 부교수 임용이 되고 첫 해에 시간강사였던 하이데거가 계속 내조를 하고, 부교수 임용이 되자 투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 산장에서 그가 집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육아와 집안 살림을 떠맡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엘프리데도 정치철학을 전공했던 상당한 인텔리였어요. 아렌트와 다른 방식의 사랑이었던 거죠.
한나 아렌트와 하인리히 블뤼허
아렌트의 남편, 블뤼허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독일 노동당을 창당했던 스파르타쿠스당, 바로 이 하인리히 블뤼허가 이곳의 당원이었습니다. 굉장히 선동적인 노동자 혁명당원이었던 그와 아렌트는 사상적으로 연결이 되었고요. 블뤼허는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강남좌파라고나 할까요? 굉장히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었고, 아렌트는 플로레타리아 계급에 그와 사상적인 동지였고 서로를 많이 지지하는 관계였습니다. 어떻게보면 블뤼허가 많이 단순했던 거죠. 아렌트가 계속 인정을 갈구하고 하는 불안요소나, 아렌트가 갖고 있는 하이데거에 대한 사랑을 남편이 이해를 못했습니다. 자기와의 휴가를 그만두고서라도 하이데거를 격려해주고 위로해주라고 아렌트에게 충고할 만큼, 블뤼허 또한 하이데거 철학의 팬이었죠. 아렌트는 결국 예전에 하이데거와 연인관계였다고 블뤼허에게 고백했는데도 아렌트에게 계속 철학사를 위해 하이데거를 도우라는 조언을 했습니다. 편지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블뤼허는 아렌트를 굉장히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사랑의 오묘한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그런 사람이었죠.
김경연 블뤼허의 사랑의 방식이나, 아렌트의 이율배반 또한 듣고 보니 이해가 됩니다. 하이데거가 아렌트를 두고 삶의 활력소라고 이야기 했듯이, 서로가 이 두 사람과의 관계에 지적영감을 자극해주고 지적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질문을 저만 할 수 없으니까 다른 분들께서도 질문을 해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저자는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서 없으니 번역자에게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마음껏 해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독자1 두 사람 간의 관계를 책을 통해 잘 읽었고, 또 그 관계의 소상에 대해 잘 들어보았습니다. 번역자 선생님께서는 하이데거처럼 존경의 관계를 이루는 이런 분을 만나신 적이 있으신지요?
황은덕 그럼요. 있죠. 철학적인 관계라기보다도 저는 예전부터 문학에 많은 가치를 두었으니 문학이라고 하는 게 옳을까요. 비록 많은 소설을 쓰지 않았지만, 문학계 내에서 존경하고 흠모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의 이면을 보게 되면서 실망하게 되더라고요. 오히려 나중에는 편안해지더군요. 환상이 깨지는 건데, 그것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그 선생님을 지금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독자2 아까 이야기가 나온 부분들은 계속 선정적인 부분만 편집해서 출판한 게 아닌가 하는게 주된 내용인 것 같은데, 저는 다른 생각이 듭니다. 로뎅이나 까미유 끌로델이라던가, 다른 세기의 사랑들에 비해 이 둘의 관계는 외려 가장 차분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랄까, 사실에 근거해서 쓰다보니까 그렇게 된 걸까요? 개인적으로 오히려 이 두 사람이 왕래한 편지를 그대로 놔두고 저자의 감정이 덜 개입되었더라면 책의 내용을 두고 비난을 받던 이 둘의 더 사랑이 더 깊게 다가왔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석도 독자의 몫일테고요. 하이데거에 있어서 인간성에 대해서 실망도 많이 했고요. 편향된 시각으로 저술한 저자의 관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편지를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했으면 어땠을지, 번역자의 관점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황은덕 이미 번역서는 안 나와있지만 서신 전편이 모두 미국에서는 책으로도 나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정말 조금씩 발췌한 거고요. 그래서 해석이 분분한 책이죠. 그렇긴 하지만 이런 시도도 예전에는 없었던 시도고, 그야말로 첫 시도였습니다. 그 이후에 서신이 그대로 공개된 책이 재출간되기도 합니다. 아마 서신은 독일어로 주고 받았을텐데, 책은 영문판으로 나와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삶을 다룬 영화,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hannah arendt」가 영화로도 나와 있다.
독자3 질문이라기보다는 이건 제 사견입니다만, 저자가 이 글을 쓸 때 아렌트의 입장에서 썼다고 얘기하셨는데 동의합니다. 하이데거의 치졸함이 곳곳에서 느껴졌거든요. 요즘 세상의 시각에서 보면 정말 완벽한 나쁜 남자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하이데거에 못지않게 아렌트 또한 전혀 매력적인 여자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렇게 똑똑한 여자가 한 남자에 의해 이렇게 자존심 없고 수동적이고 주체성도 없는데다, 스스로 숨겨지려고 하는 둥 전혀 매력적이지 않아 보였고요. 정말 작가가 아렌트에게 애정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마저 들더군요. 그래서 저자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이렇게 파헤칠 필요가 있었을까요?
황은덕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아렌트의 저서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다보면 정말 그렇게 똑똑하고 지적인 여성과 이 책에 등장하는 수동적이고 주체성 없는 이 여자가 같은 여자란 말인가 하는 생각에 쇼킹 그 자체일 겁니다. 하지만, 오히려 저는 그래서 더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아렌트의 사상과 정 반대되는 지점에 하이데거가 놓여 있거든요. 이를테면, 반유대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귀결되는 이 하이데거라는 인물을 아렌트가 돕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미국에서 유명해지게 된 계기가 미국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같은 저서들이 번역되었기 때문인데, 영역(英譯)을 할 만한 출판사와 번역자를 아렌트가 알아보았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게 굉장한 의문점입니다. 나의 사상과 정반대되는 상대를 끝까지 보호하고 자신을 속이고 기만하면서 사랑할 수 있었을까? 저는 그럴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고요. 아렌트에 있어서 하이데거는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다는 거죠. 열여덟 살의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통해서 모든 것을 흡수한 거죠. 그의 존재는 단순한 불륜 대상이 아니라 철학, 문학, 시, 그 자체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글쎄요. 아렌트의 그 수동성은 저도 참 깜짝 놀랐습니다. 하이데거가 모두 모놀로그처럼 독백하고 아렌트는 그저 듣기만 하는 관계 말이죠. 그것도 독일 대학사회의 도제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50년대 초 미국에서는 오히려 아렌트가 더 유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계가 유지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저는 번역자의 운명인지 몰라도, 아렌트의 수동성 때문에 그녀의 매력이 반감되지는 않았어요.
독자4 저도, 질문이라기보다는... 책에 관해 간단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저는 하이데거나 아렌트의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을 추천받고 이 책의 철학적인 내용에 관한 지식 자체를 몰랐던 그저 상과대학 학생일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책을 추천받고 읽으면서 혹자는 가벼운 이야기라고 치부할지 모르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무거운 서양철학이라는 학문의 빛을 보여주는 책이었습니다. 방금 말씀하셨던, 절대적으로 동경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 평생토록 연락을 취하면서 실망할 때도 있고 흠모할 때도 있고, 당황해하면서도 항상 서로를 염모하는 모습을 보며 굉장히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네요.
황은덕 이 친구는, 무역학과 학생이었고 영시수업 시간에 시를 즐겨 쓴다고 자기소개를 해서, 독특한 인상을 받아 좋은 책이라고 읽어보라고 추천했습니다. 재밌게 읽었다고 하니 저도 기쁩니다.
김경연 번역자로서 이 책에 대한 이 책에 대해 방어도 하시고, 하이데거와 아렌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총체적으로 많이 나누었습니다. 소설가들이 최근 번역을 많이 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데 소설가로서 선생님께서 앞으로 쓰실 소설에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사랑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를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황은덕 이 책을 번역하면서, 사실 제 작품 창작에도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번역하면서 남자주인공은 교수님, 여주인공은 학생 작품의 무대는 자연과학대학이 어떨까 실험실이 좋겠다 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상상력을 통해 굉장히 자극을 많이 받았고요. 제가 아마 소설을 쓰기 때문에 번역작업이 훨씬 더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제가 만약 순수 연구자였더라면 이런저런 염려와 조심스러움 때문에 번역할 생각을 못했을 것 같네요. 아무래도 제가 소설가이다보니, 인물에 대한 해석이 좀 더 감성에 기초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학술서, 인문과학서에 관한 학자들의 번역작업도 필요하지만 소설이나 이런 류의 책은 문인이 번역하는 것도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경연 번역자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번역을 하고 있는 게 소설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 책에 대한 번역자로 이번 저자와의 만남을 시작했지만, 다음번에는 소설가의 자리로 또 한번 만나뵙길 바라면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저자와의 만남은 이규정 소설가의 치우입니다.
11월 14일 저녁 7시 부산 지하철 서면역 '러닝스퀘어'에서 있을 예정이니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anzinibook.tistory.com/996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 엘즈비에타 에팅거 지음, 황은덕 옮김/산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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